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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13,12-16
맏아들과 맏배의 봉헌 세칙
그 땅을 너희에게 주시면, 이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탈출13,12
너희는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것을 모두 주님께 바쳐야 한다.
너희 가축이 처음 낳은 것으로 수컷(הזכרים)은 모두 주님의 것이다.
여기서 모세는 백성에게 야훼가 그에게 명령한 그 명령을 전합니다. 단지 조금 딴지를 걸자면 본래 모세는 야훼가 그에게 명령한 명령을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그게 올바른 예언자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그대로 전하지를 않습니다...그리고 중요한 것은 야훼께 "주님께 바쳐야 한다"
바치다(아바르, עבר)라는 동사가 쓰여있습니다.
아바르의
원래 의미는 지나간다.는 뜻이고 한번쯤 들어보셨을
감 제 야 아보르 - 이 또한 지나가리라.
(gam) (zeh) (ya) (avor)
히브리 사람들도 자주 쓰는 표현이고, 히브리 전통안에서는 이 이야기를 솔로몬이 자신이 왕이 된것에 대한 반지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며, 자신이 슬플 때 위로해 줄 수가 있고 자신이 기쁠때 교만하지 않게 만드는 내용을 반지 안에 적어라...해서 가져오게 했더니 그 누간가가 가져왔다는....
히브리 전통안에서는 솔로몬이 반지의 주인공으로 나올때도 있고 어떤 사람이 솔로몬에게 와서 청했더니 솔로몬이 이렇게 조언을 해 주었다..라는 두가지 이야기 혹은 다양한 폼으로 전해집니다.
그런데 고대 근동의 민간 이야기들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이것은 유다 전통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페르시아 전통의 수피들의 시에서 이 구절이 등장하고 그것들이 나중에 유다 전통으로 연결되면서, 유다 전통에서 이것도 솔로몬의 지혜다, 라고 전해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솔로몬과 연관 지어서 생각을 하는데 사실은 페르시아 전통의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그 '지나간다' 라는 표현이 이 '아바르' 동사를 씁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것에 대한 사역형의 의미로 넘겨준다..라는 의미로 사용이 됩니다. 넘겨주는 것은 소유권을 넘겨 주는 것입니다.
'넘겨준다(소유권)'는 의미로
'봉헌(奉獻)한다, 성별(聖別) 한다' 로 해석 가능 합니다.
12절 후반부에서 우리 성경은?
처음 낳은 것이라고 했는데,
본래의 히브리말 세게르(שגר) 의미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너희 가축이 처음 낳은 것'을 갓 부화한 새끼, 동물의 태에서 처음 나온것 이라는 뜻으로 혹은 동물들의 자궁이라는 의미로 알아 들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앞서서는 그 대목이 없었는데(단지 맏배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분명하게도 수컷이라는 지정된 따라서 동물이 처음 나왔더라도 그것이 암컷인 경우에는 봉헌하지 않습니다.
동물을 낳았는데 첫번째 수컷일 경우에 그것은 야훼의 것이다..라고 앞에 있는 내용을 조금더 명백하게 의심에 여지가 없게 설명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탈출 13,13
그러나 나귀의 첫 새끼는 양으로 대속해야 한다. 대속하지 않으려면 그 목을 꺾어야 한다. 너희 자식들 가운데 맏아들은 모두 대속해야 한다.
참 이상하죠? 하고 많은 동물 중에서 왜 나귀일까?? 강아지나 고양이나 이런 얘기가 나오지 않고....
우리가 나중에 읽는 것들을 보면, 레위기 쪽에 가면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분을 하는데 ..
정결한 짐승은- 되새김질을 한다.(인간은 되새김질을 안하는데?), 발굽이 갈라져야 한다.
그런데 나귀는 되새김질도 안하고 발굽도 안갈라져 있습니다. 그게 문제가 되는 것 같고 반면에 나귀는 인간에 의해서 길들여 집니다.
그리고 유용합니다. 따라서 부정한 짐승인데 길들여 집니다.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귀의 경우에는 조금 애매해지는 그와 같은 상황입니다.
따라서 나귀가 태어났을 때, 나귀는 죽이지 마라..살려둬라 대신에 대속해라.
대속한다는 것은 대신 갚아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귀의 경우에는,
나귀
º 민수 18,15 : 사람이나 짐승이나 육체를 지닌 온갖 것들 가운데에서, 모태를 처음으로 열고 나와 주님에게 바쳐지는 것도 모두 너의 것이 된다. 그러나 사람의 맏아들은 대속해야 한다. 부정한 짐승의 맏배도 대속해야 한다.
º 레위 27,27 : 그러나 부정한 짐승이면 그 값에 오분의 일을 더 보태어 그것을 대속할 수 있다. 그것을 되사지 않으면 그 값으로 다른 이에게 팔려 나간다.
( 예: 시장 가격이 5000원이면 대속값은 6000원)
º 탈출 34,20 : 그러나 나귀의 첫 새끼는 양으로 대속해야 한다. 대속 하지 않으려면 그 목을 꺾어야 한다. 너희 자식들 가운데에서 맏아들은 모두 대속해야 한다. 아무도 빈손으로 내 앞에 나와서는 안 된다.
목을 꺾는 다는 것은 그 짐승이 부정한 짐승이기 때문에 죽일 때 피를 흘려서 죽이면 안 된다는 의미합니다.
사람에 관해서 얘기하면,
산모의 정결례
º 레위 12,8 : 그러나 양 한 마리를 바칠 힘이 없으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한 마리는 번제물로, 한 마리는 속죄 제물로 올려도 된다.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서 피를 흘리는 것을 부정한 상태로 보았다. 즉 몸에서 피가 나오는 것을 부정하게 보았고,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반여성적이다..라는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성인권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피' 에대해서 피는 하느님께 속한 것이다..라는 것으로 보는데 출산시 부정한 상태가 다시 정결해 지기 위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법규정이 일정하지는 않습니다.
그 법규정이, 즉 모세오경의 법 규정이 쓰여진 장소와 시대에 따라서 법과 법에 대한 해석이 다르게 일어 났었다. 그리고 구약성경은 그렇게 다양한 폼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속값에 대해서도.....
대속값
º 민수 3,45-48 :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맏아들 대신에 레위인들을,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가축 대신에 레위인들의 가축을 골라내어라. 레위인들은 나의 것이된다. 나는 주님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맏아들 가운데에서 레위인들의 수를 넘는 이백칠십삼 명의 대속값으로는, 한 사람에 다섯 세켈씩 받아라. 스무 게라가 한 세켈이 되는 성소 세켈로 받아라. 이렇게 수를 넘는 이들을 위한 대속 값으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 돈을 주어라
조금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부분을 보게되면 굳이 맏아들과 맏배의 대속을 굳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부터은 레위인들이 야훼의 것이고, 레위인들의 가축이 야훼의 것이니까..다른 것들은 대속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이런 맏아들과 맏배를 바치는 규칙, 규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민수 3장에는 등장하는 겁니다.
레위인들의 숫자가 이스라엘인들의 숫자에 넘어가기 때문에 나머지는 돈으로 받아라..어떻게 보면 구체적인 지시사항을 우리가 만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속에 관해서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서 단일하지 않은 그와 같은 규정과 해석들이 있었다..라는 것을 우리들이 알게 됩니다.
이런 축제와 제사의 규정들에 대한 목적은 하느님의 역사를 기억하고 현재화! 하는 일입니다.
탈출 13,14
뒷날 너희 아들이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여라.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이집트에서, 곧 종살이하던 집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셨다.
지금 계속되어 반복되는 문장입니다.
"하느님께서 강한 손으로 이집트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셨다." 는 내용이 반복
그 다음이 재미있습니다.
탈출 13,15ㄱ
그때 파라오가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주님께서 사람의 맏아들부터 짐승의 맏배까지 이집트 땅에서 처음 난 것을 모조리 죽이셨다.
파라오가 고집을 부렸으므로, 에서 꺄샤(קשה) 라는 동사가 사용이 됩니다.
무겁게 또는 단단하게 했다..라는 것인데 ,
우리가 알고 있는 재앙의 이야기에서는 후반부로 갈수록 야훼가 파라오의 심장을 무겁게 하였다. 단단하게 하였다. 라는 표현이 쓰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야훼가 단단하게 한 것으로 보는게 아니라 파라오가 고집을 부린 것으로 나옵니다.
따라서 책임은 야훼가 아니라 파라오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앞선 이야기에서 야훼가 파라오의 심장을 단단하게 하여서 재앙에도 불구하고 파라오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라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이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앞서서 신부님이 신정론에 관해서 말씀해 주셨고, ㅡ 그렇지만 그와 같은 표현은 결국 역사에 주인으로서 야훼를 얘기하고 그 모든 것에 권능을 갖고 있고 가장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의 고백적인 표현으로서 그것을 생각을 해야합니다.
반대로 그러니까 모든게 하느님 책임이다..라고 얘기하려는 신학적인 그런 방향은 이런 텍스트를 잘못 읽는 태도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식으로 누군가가 신학적으로 해석한다면...
일제의 식민지 치하 안에서 우리가 있었던, 우리가 당했던 그와 같은 일은 하느님의 뜻이었다...아닙니다!! 그건 인간의 죄입니다.
식민주의가 하느님의 뜻입니까? 인간의 탐욕입니까? 인간의 탐욕입니다.
그런 식민주의에 대한 반성은 궁극적으로 나중에 대한민국이 힘이 세서 강해지게 되더라도 다른 나라에 그런 자유와 다른 나라에 그런 평화를 훼손하거나 훼치거나 억압해서는 안된다. 그건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라는 것이 식민주의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역사적인 반성이라고 하셨습니다.
6.25 전쟁이 하느님이 뜻입니까?? 아닙니다!
세상에 어떤 전쟁이 하느님의 뜻이겠습니까? 그와 같은 것들은 인간의 죄입니다.
인간의 죄와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은총과 권능에 관해서 우리가 얘기할 수있고, 무엇이 인간의 죄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권능 안에서 세상안에서 사람들이 올바른 그런 역사의 길을 되찾아 가는지에 대해서 우리들이 분명하게 알아듣는 것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의 맏아들부터 짐승의 맏배까지 이집트 땅에서 처음 난 것을 모조리 죽이셨다."
이 안에는 신학적이 변호가 들어 있습니다.(파라오의 탐욕 때문에 이렇게 벌하셨다는 신학적이 변호를 담아, 파라오가 일찍 야훼의 뜻을 알았더라면 이런 일이 벌여지지 않았을 텐데..라는 신학적인 인과 관계를 우리가 이 대목에서 알아듣습니다.)
탈출 13,15ㄴ
그래서 나는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수컷을 모두 주님께 바친다. 그러나 아들들 가운데에서 맏아들은 모두 대속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와 같이 맏배를 죽이셨다는 사건을 우리가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대속하지 않으려면,
창세기때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칠 때의 "야훼 이레"
이 야훼 이레의 중요한 신학적인 고백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인간을 제물로 원치 않으시는 분! 그것은 주위의 고대 근동의 다른 민족들은 인간을 제물로 바쳤던 것 같다. 따라서 우리 하느님은 그런 신들과는 다르다. 라는 대목이고 여기서는 맏아들을 마치는 그와 같은 전체적인 전통 가운데서 이것은 단지 히브리 전통이 아니라 고대 근동 전체의 전통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 하느님 야훼는 맏아들의 경우에는 모두 대속한다. 대개 숫양이나 숫 염소로 바치게 되는데, 어느 누군가가 너무 가난하면 집비둘기 두 마리나 산비둘기 두 마리롤 대속한다.
그 의미는 하나는 속죄 제물로 하나는 번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그리고 16절은 우리가 아는 구절입니다.
탈출 13,16
이것을 네 손에 감은 표징과 네 이마에 붙인 표지로 여겨라.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기 때문이다.
테필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마무리에서 다시 한번 반복됩니다.
"하느님께서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이집트로부터 이끌어 내셨다." 가 4번이나 반복되었다. 우리를 이집트로부터 나오게 하셨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라는 그와 같은 대목입니다.
탈출 22,29을 보면
º 너희 소와 양도 그렇게 해야한다. 이레 동안은 어미와 함께 두었다가, 여드렛날에는 나에게 바쳐야 한다.
동물의 맏배를 바치는 경우 자세히 규정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여드렛날이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일주일은 있다가 ..이와 같은 적어도 엄마에게 자기 새끼와 잠시 있을 시간은 주어야 한다. 그리고 생태학적 해석도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요즘에도 동물보호쪽에 생태 보호를 하는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분야가 우리가 동물을 얻기 위해서(고기를 얻기 위해서) 뭔가를 죽입니다.
그랬을 때 잔인하게 죽이지 말고 되도록이면 고통없이 죽이는게 어떠냐? 그래서 신부님이 신학생 때 독일에서 공부하실때, 30년 정도 전쯤...독일에서는 새우를 죽일 때 그때까지는 뜨거운 물에 익혀서 죽였는데, 그것이 새우에게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전기충격을 드리는 것을 입법화 하자..라는 운동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니?? 여러분들이 웃으시지만..새우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저 지금 진지합니다.." 새우 입장에서 고통없이? 죽게하는 것 그것이 더 좋은 일이 아니냐? " 라는 그와 같은 토론들이 이미 30년도 전에 있었던 것...이런 것도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여기서도 새끼가 태어나면 적어도 8일 동안에는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이 8일에 규정이 나중에 유대 전통안에서 인간의 전통안에도 들어 오게 됩니다.
따라서 어떻게 결합이 되냐면?
엄마가 얘기를 낳으면은 8일 동안은 아기를 보호하다가 8일째는 시나고가나 성전에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할례를 받는 그와 같은 전통으로 변화가 됩니다.(8일의 규정이 유럽교회의 전통에 적용- 태어난 지 8일 째 세례를 받는 전통)
요즘은 그렇게까지, 이런것 까지 엄격하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아이의 경우에는 밖에 나올 때까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탈출 4,24
º 내가 너에게 내 아들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라고 말하였건만, 너는 거부하며 그를 내보내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내가 너의 맏아들을 죽이겠다.
레위기 11장, 신명기 14장은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분합니다.
소, 양, 염소 등은 정결한 짐승으로,
낙타, 토끼, 오소리, 돼지 등은 부정한 짐승으로 언급되는 반면 거기에서도 이상하게도 나귀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아마 율법 규정서에 나귀가 언급되지 않으니까? 이런곳에서 나귀에 대한 언급이 더 특별하게 나오는 것 같습니다.
재밌는 것은 2열왕6,25을 보면 극단적인 상황에서 나귀와 비둘기 똥까지 먹는 경우를 정합니다.
2열왕 6,25
사마리아는 큰 굶주림에 시달려 나귀 머리 하나가 은 여든 세켈에 팔리고,
비둘기 똥 사분의 일 캅이 은 다섯 세켈에 팔릴 지경이었다.
따라서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나귀를 먹으니까 평범한 상황에서는 나귀를 먹지 않았던 겁니다.
부정한 짐승들은 하느님께 제물로 바칠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 제물로 바칠수 있는 것은 적어도 "인간이 먹는 것들." 입니다.
인간이 먹는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하느님께 바친다. 그래서 부정하기 때문에 인간도 안먹는 것을 어떻게 하느님께 바쳐야 하느냐?
하지만 "맏배' 가 태어나면 그때는 제물을 바쳐야 하니까 어떻게 바치느냐? 맏배가 태어나면?
그렇게 제물로서 바치지는 못하고(제물로서 바친다는 것은 불에 태우는 것입니다)
목을 꺾어어서 죽여 버리거나( 하느님께 바친다는 의미로,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한다.)
아니면은 대속한다...라는 그런 어떤 정신을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민수기 3장, 8장에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맏아들 대신에 레위인들을 자신의 것으로 하겠다고 선언하셔서
그리고 민수 3,41.45
이스라엘인 가축의 모든 맏배 대신 레위인들의 가축을 자신의 것으로 선언 합니다.
탈출 22,29
º 너희 소와 양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이레 동안 어미와 함께 두었다가, 여드렛날에는 나에게 바쳐아 한다.
따라서 그 해석이 다양한 것입니다.
탈출기13장에서 맞이에 관한 봉헌에서 다양한 동사들이 사용됩니다. 먼저 2절에서는
탈출 13,2 - "모두 나에게 봉헌하여라." 라고 얘기하는데 신부님이 번역하신 것은?
'성별(聖別) 하여라.'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탈출 13,12 - "모두 주님께 바쳐야 한다." - "넘겨 주다"
탈출 13,15 "모두 주님께 바친다" - "바치다" 라는 각각 다른 의미로 사용이 되고 있는데
첫째 성별하다 라는 것을 통해서 이제 그것은 우리에게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신에게(하느님에게) 속한 것임이 선언되고
넘겨 주다 라는 것을 통해서 재산과 소유의 개념 안에서 맏이의 봉헌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바치다 라는 것을 통해서 제사적 과정을 통한 봉헌이 묘사가 됩니다.
바치다 라는 것은 태워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탈출기 3장에서 부터 반복하여 등장하는 이집트 탈출에 대한 야훼의 예고는 탈출기 12,1- 13,16을 통해 완결 됩니다.
이 대목에서 지금까지의 이야기 전개와는 다르게 역사적 사건과 이스라엘에 현재가 연결되고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스라엘에 현재가 역사적 사건 안으로 역투영 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축제와 종교적인 의식이 탈출 12,1-13,16 에서 이집트 탈출의 역사와 결합되고 있고 원인담적 이야기 서술의 방식을 톻해 공동체의 축제와 의식에 종교적 의미와 권위가 부여 되고 있는 것입니다.
길게 얘기했지만 어떤 뜻이냐 하면?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있습니다. 파스카 사건이...
그리고 그들이 하고 있는 제의적인 현재가 있습니다. 즉 축제의 시간이 있습니다.
이 두가지가 무엇을 통해서 연결되느냐?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이 텍스트를 통해서 연결됩니다. 그러면서 이 텍스트는 무엇을 얘기하고 있느냐?
그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그들이 살고 있는 현재의 축제를 재해석 함으로써 그 안에 담겨있는 우리가 이 축제를 하면서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환기시키고 있고 현재화 시키고 있는 겁니다.
우리들의 미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미사를 하면서 우리는 어떤 역사적인 사건을 우리가 갖고 있는 그 미사와 연결시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미사를 통해서 기억하고 현재화 시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라는 메시지를 한편으로는 기억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만은 잊지 말아라..
오늘 이 축제에서, 이 축제의 핵심적인 하나의 메시지는 ?
"하느님께서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 라는 이것만은 잊지 말아라.
미사가 갖고 있는 중심 메시지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가 십자가에 못박히시어 돌아가시고 하지만 부활하셨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이것만은 잊지 말아라.
라는 그 신학적 메시지를 통해서 축제도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텍스트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이집트 탈출 이야기는 크게, 두 대목으로 나누어 집니다.
첫째는 단순히 파라오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이집트를 탈출하는 이야기이고 따라서 이집트라는 영토를 탈출하는 지리적인 개념입니다.
둘째는 파라오 군대를 이겨내고 갈대 바다를 건너내는 이야기 입니다.
이집트 라는 영토에서 나오기는 했으나, 아직 이집트라는 힘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이스라엘이 이제 갈대 바다를 무사히 건넘으로써 더 이상 파라오의 종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면
앞으로 있을 야훼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정체를 얻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이집트 탈출과 갈대 바다에서 구출 그리고 시나이 계약이라는 이야기의 표층적인 전개와 함께 야훼의 존재와 권능에 대한 신학적 인식 역시 점점 선명해 집니다.
여기까지가 신부님이 본 탈출기에 1부. 2부에 커다란 마무리라고 볼수가 있게습니다.
3부에 내용은 이제 이스라엘에 이집트를 떠나는 장면입니다.
시작부분을 조금 읽으면은 다음 시간을 준비할 때 좋으실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지리적인 내용들이 등장하고,
이집트 - 수콧 - 에탐( 탈출 13,17-22) 이 정도의 지명을 머릿속에 넣으시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지도의 빨간 선들은 고대 시대에 이동했던 경로입니다. 바다로 가기도 하고
지도를 통해서 본 도로에서 우리가 특히 기억해야 할 도로는? 비야 마리스 라고 해서 바닷길 이라는 고정된 이름으로 불렸고 ( 위 영상 31분04초에 보실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비야 마리스(Via Maris)라고 부르지 않고 자신의 신의 이름을 따서 "호르스의 길" 이라고 이 길을 불렀습니다.
이 길은 성경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길이고 고대 문헌에서 자주 등장하는 길이기 때문에 이 길의 이름 정도는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탈출 13,17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때, 하느님께서는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을 지나는 길이 가장 가까운데도, 그들을 그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 '그들이 닥쳐올 전쟁을 내다보고는 마음을 바꾸어 이집트로 되돌아가서는 안 되지.' 하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탈출기에 세번째 파트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옛날 옛날 한 옛날에 어떤 왕국에서 ...' 따라서 어떤 두가지 정보를 대충이라도 주는 것입니다.
시간적 정보와 어떤 왕국에서 ..는 공간적인 정보를...여기서는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때"
이 말 안에는 시간적 정보와 공간적 정보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이집트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지만, 따라서 새로운 어떤 이야기인가가 시작되는 겁니다.
조금 우리의 고개를 갸우뚱 하게 하는 것은?
이게 정말? 신학적인 문헌이라면 신부님이 쓰셨다면...
야훼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내보셨을 때에 라고 쓰셨을 것 같은데,
앞에서 그게 제일 중요한 메시지라고 하였으니까요.
하지만 내보내는 주체가 누굽니까? 파라오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굉장히 신학적인 방식이 아니라 역사서술에 방식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을 지나는 길이 가장 가까운데도ㅡㅡ
이 히브리 말을 신부님은 조금 다르게 번역하십니다.
엘로힘은 필리스티아인들에 땅을 통하는 것이(거기에 어떤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필리스티아인들의 땅을 통해서 가는 것이 가장 가까운데도 그들을 그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여기서 인도한다는 동사는 오경 전체를 통해서 자주 사용되지 않습니다.
창세 24,27; 24,28 의 인도하다..인도하다
º 창세 24,27 : (엘리에젤) "나의 주인에게 당신 자애와 신의를 거절하지 않으셨으니,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주님께서는 이 몸을 내 주인의 아우 집에 이르는 길로 이끌어 주셨구나."
º 창세 24,28 : 그분은 저를 이렇게 바로 인도해 주시어 주인님의 조카딸을 주인댁 아드님의 아내감으로 찾아내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민수기 23,7에서도 같은 동사가 쓰이는데 발라암과 발락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언제든지 신이 인간을 인도할 때만 이 인도한다는 말이 쓰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인도할 때에도 '인도한다'는 표현이 쓰입니다.(따라서 하느님께만 쓰이는 특별한 표현은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 길입니다.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 여기일 겁니다.( 위 영상 35분 30초부터 보실수 있습니다)
왜 그런데 가장 먼길로 돌아갔을 것인가?
먼 길로 돌아간 이유- 탈출 13,17 중
'그들이 닥쳐올 전쟁을 내다보고는 마음을 바꾸어 이집트로 되돌아가서는 안 되지.'
따라서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로 되돌아 가는 것을 원합니까? 아니면 곧장 가는걸 원하십니까?
이집트를 완전히 떠나는 것을 원하십니다.
따라서 갈대 바다를 건너는 사건도 우리가 그런 의미로 미리 예상 해볼 수 있습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가는 것... 더이상 회귀할 수 없는 것.
단지 이집트 땅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갈 수 없도록 바다를 건너 가는 것.
그런 의미로도 갈대 바다 사건을 애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일들이 있었습니까? 그런일들이 생깁니다.
나중에 민수기를 보면,
전쟁
º 민수 14,3 : 주님께서는 어쩌자고 우리를 이 땅으로 데려 오셔서, 우리는 칼에 맞아 쓰러지고, 우리 아내와 어린 것들은 노획물이 되게 하시는가?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
정찰하고 온 사람들이 좋은 소식이 아니라 나쁜 소식을 전합니다. 거기 가보니까 체격이 큰 사람들이 살고 있고 우리를 보면 메뚜기 같다고 그럴 겁니다.
걔네들이랑 싸워서 우리가 승산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다른 한 사람(칼렙) 만이 그렇지 않다고, 거기에 가도 우리가 그 땅을 정복하고 살수 있을 것이다. 라고 얘기를 하는 그 대목입니다.
그 정찰대의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의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만약?
곧장 필리스티아인들에 땅을 통해서 가게했다면 이 반응이 바로 나왔을 겁니다.
그러니까 광야에도 데리고 갔다가 ㅡ 갈대 바다도 건너게 했다가 ㅡ 그리고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고 그리고 나서야 ㅡ 약속의 땅을 보여주는,
하지만 여기서 이런식의 반응 때문에,
그들은 결국 벌을 받아서 정찰한 기간이 모두 40일 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40일 동안 정찰해서 너희들이 그렇게 했으니 하루에 일년씩 벌을 받는다..라고 하셔서 40년동안 광야에서(하느님이 좀 무서운 분이세요??!) 헤매게 했다...라는 것이 민수기 이 대목에 하나의 해석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금은 생각해 볼 수 있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같은 단어가 굉장히 긍정적으로도 쓰였다가 부정적으로도 쓰이는 경우입니다.
'그들이 닥쳐올 전쟁을 내다보고는 마음을 바꾸어 이집트로 되돌아가서는 안 되지.'
이 부분에서 '마음을 바꾼다.' 라고 얘기했을 때
‘니함(נחם) 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것은 후회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누구 누구를 위로한다' 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 '니함' 이라는 단어가 사실은 노아의 이름과 연관을 갖습니다.
옛날 옛날 옛적에 창세기 6장에서 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때는 주체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든 것을 후회하셨다..하지만 노아를 통해서 세상을 위로하셨다. 이때 같은 동사가 쓰입니다.
'니함, 니함' 그래서 사람의 이름이 노아흐 가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온 것을 후회하고 되돌아 가는 것! 그것은 본래 신학적인 의미로는 좋은 일입니다.
그게 바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말로 숩(שוב) 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데, 지금까지 살던 걸어왔던 길이 하느님의 토라에 길과 너무 멀다는 것을 깨닫고 하느님의 길로 되돌아 오는 것!
그것이 바로 회개의 기본적인 개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회개한다. 마음을 돌이킨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후회한다. 라는 굉장히 긍정적인 표현으로 사용되는 두 동사가 바로,
마음을 바꾼다 '니함(נחם) 그리고
돌아온다 י 숩(שוב)
그런데 여기서는 반대로 쓰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마음을 돌이켜서 후회하고,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은 안 된다..
따라서 그런 신학적인 단어에 민감한 사람들은 이 부분을 보면서 즉시 이 안에는 약간 언어의 유희가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 ㅐ?
우리는 좋은 말인데고 나쁘게 쓰기도 하고, 나쁜 말인데도 좋게 쓰기도 합니다.
젊은이들이 쓰는 말 가운데 '즐'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본래는 좋은 말이었습니다. 여러명이서 게임을 하다가 '나는 먼저 가야돼, 즐겁게 게임하세요.' 라는 약자로 '즐' 하는데
요즘에는 '너 이제 말좀 그만해.' 아니면은 평화방송에서 조절해 주시겠죠?
'너랑 얘기 안해~ 닥쳐' '즐 끝!' 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아니면 영어의 표현에서 '테리픽( Terrific)' 굉장히 좋다는 의미인데, 그 본래의 의미는 '끔직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본래의 말은 나쁘게 시작했지만 좋은 의미로 반어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본래 의미는 좋게 시작했지만 나쁜 의미로 쓰이는 것이 있는 것처럼.....
여기서 나오는 신학적인 단어들은 굉장히 긍정적인데 언어의 유희를 통해서 "어, 이스라엘이 그렇게 나온 것을 후회하고 자기가 살아온 이집트 노예 생활로 돌아가게 해서는 안되지.' 하느님의 염려가 있었다는 내용으로,
언어의 유희에 민감한 사람들은 이 부분을 보면서 조금은 '픽' 하고 웃을 수 있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돌아가야 합니까? 가던 길을 가야 합니까??
자신의 가던 길을. 하느님께 신뢰하는 마음과 함께 가야하는데, 그들이 그 여정을 과연 잘 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과 함께 우리들은 탈출기 13,17부터...탈출기에 세번째 파트를 읽어가게 됩니다.
17절 한절 읽어 주셨는데,
앞으로의 이야기는 더 재미있겠죠?? 갈대 바다를 건널 때 까지는 재밌습니다.
그 다음이 문제가 좀 생깁니다.
감사드립니다. 🙏💓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