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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1) :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남효온(南孝溫)}
丁未九月二十七日癸亥發晉州餘沙等村赴斷俗寺洞口有廣濟巖門四大字銘在石面不知何人所書入巖門里許有斷俗寺隷人之家杮林竹樹成一村落中有大伽藍扁其門曰智異山斷俗寺門前有皎(坦)(1)然禪師碑銘平章事李之茂撰大金大定十二年壬辰正月日立寺西有神行禪師碑銘皇唐衛尉卿金獻貞撰元和八年九月日立寺北有鑑玄禪師通照之碑爲人所拔僧云俗徒所爲也翰林學士金殷周撰開寶八年甲戌七月日立寺內東北隅有一室崔文昌讀書之房寺庭有梅花二株前朝政堂文學姜通亭手種梅樹去四五年前枯死其曾孫用休先生繼種者余讀皎然碑銘入與住持聖空語空乃一庵門人待余厚又出見西北二碑入見用休所種梅坐於樓上仰讀用休種梅記空饋余飯又飯奴從訖辭主人下來至糟淵裸身入浴水石淸漑淵北有泉逬出石面淸泠異常余掬手飮之還出廣濟巖門越佛嶺過白雲洞洞水與德川水合爲苔淵淵之下流卽晉州南江過苔淵從德川遷上行十餘里下瞰長川曠爽快心行盡洞口入一村曰壤堂家家戶戶鉅竹成林杮栗掩靄柴門鷄犬依然如武陵朱陳然其右有矢川洞矢川者晉州屬縣也其縣吏希智異山釋敎仕至戶長記官則髡髮着緇遞任則復爲人遂成古風官長不能改其俗日暮投德山寺寺在二水交流之墳竹木周布其左有水瀦而復進白龍淵其右有瀑落而爲匯曰婦淵其深無底寺主道崇者曾謁匪懈堂有名禪林匪懈堂敗遁跡林泉見余談論甚喜饋余及奴從飯甚備語及夜半其徒泂裕義文誼化主等皆靑眼待余是日行四十里甲子與道崇泂裕等歷見左右淵淵傍竹樹可玩誼化主饋余飯飯後道崇使義文從余嚮導從婦淵而上行紅樹中左歷金藏解會二庵右歷石上百王兜率內院四庵東轉一嶺而入叢竹中艱難穿過登檜房嶺而南下入管葦田歷盡葦田而入杻林路甚艱澁山行四十里入普庵杮竹繞屋主僧道淳摘杮子饋余淳者曾於無字破義不精自謂我外無人掇誦經念佛坐臥嘗露陰莖多方設計欲聚僧徒爲禪林宗者與余始談小合更與語妄說參差固執回輪之科夜半祝我起寢語言油油乙丑發普庵望見東上院過文殊麻田行樹底川邊亂石無路往往聚石爲塔以表山路余尋石塔行忽失法界庵路又逢山雨將宿石窟下雨霽復行得抵香積庵庵有一僧名曰一冏頗聰明解禪指曾於無字纔破大義一示余六祖檀經頗淸靜可愛是日行四十里丙寅與義文及冏師自香積登上峯雲埋風磨木無完枝艸無靑葉霜嚴地凍天寒倍於山下雲梯石竇僅出一人余等穿土及登上峯見所謂天王者僧曰此釋伽母摩倻夫人爲此山神禍福當世將來代生彌勒佛者其言一何遼遠而無文據余坐堂隅石角微雲四卷山海可數全羅慶尙二道在我脚底堂內有禦侮將軍鄭義門懸板記友人金大猷等名字書在板上夕還下香積往返二十里十月丁卯朔留米一斗別一冏發香積登少年臺穿綿竹度鷄足山行三十里抵貧鉢庵庵下有靈神庵庵後有伽葉殿世俗所謂有靈驗者余詳視之一石頑然余從伽葉殿後攀枝仰上一山名曰坐高臺有上中下三層余止上中層心神驚悸不得加上臺後有一危石高於坐高臺余登其石俯視臺上亦奇玩也義文坐臺下恐懼不得上是日之西面淸明倍於曩日西海及鷄龍諸山歷歷可辨須臾還下貧鉢夕飯時落日在庵人寰夜黑戊辰發貧鉢穿靈神行西山頂樹木中三十里抵義神庵庵之西面盡爲脩竹杮木雜生竹間紅實透日舂廬溷室亦在竹間近日所見佳境無此比殿內有金佛一軀西側室有僧像一軀余問此何人僧曰此義神祖師也到此修道道旣半此山天王勸祖師移住他所自爲鷦鷯鳥引路師隨之及一大岾化爲鵰至今名其岾曰鷦鷯鵰云鵰又引路至下無住基師曰此地幾日成道鵰曰三七日師遲之師又至中無住基師曰此地幾日成道鵰曰一七日師又遲之鵰又至上無住基不能入曰此地可一日成道非女人所得入師自入擇地結幕精盡改名曰無住祖師其言甚厖余於庵前攤飯穿竹林中涉三大川登內堂岾北視鷦鷯鵰岾南下草莽中行三十里抵七佛寺寺本名雲上院新羅眞平王朝有沙飧金恭永之子名玉寶高者荷琴入智異山雲上院以琴修心五十餘年作曲三十調日日彈之景德王於街亭翫月賞花忽聞琴聲王問樂師安長一名曰聞福請長一名曰見福者曰此何聲二人曰此非人間所聞乃玉寶仙人彈琴聲也王齋戒七日玉寶至王前奏曲三十調王大喜使安長請長習之傳於樂府更於所居寺設大伽藍三十七國皆宗此寺爲願堂有泂首坐者稍解禪法爲山中衲子師者爲余云云己巳寺有溫法主者示余玉寶事跡與泂首坐所言同臨別泂首坐求余詩余留一絶西上金輪庵有田禪師者延入饋果又過靑窟泝一川流而上迷失路者二其初行迷已遠而復其終不遠復越一大岾到伐艸幕伐艸幕之上有新幕一間有衲子一人曰雪根來饋余菹菜鹽醬是日余足生繭艱難得步行三十里庚午與雪根義文登般若峯俯見峯北有昏黑月落之洞有草幕一間雪根所居又其北中鳳山卽貧鉢峯之北構也於岡斷處有寂照無住等庵又其北金鳳山有金臺庵峯西有方丈山山頭有萬福臺臺東有妙峯庵臺北有普門庵一名黃嶺庵峯南有姑母堂堂南有牛翻臺牛翻禪師道場也峯東有仙人臺臺東卽雙溪洞也貧鉢峯當峯之東面天王峯又當其東北面矣余西下般若峯之中峯顧瞻訖下視牛銅水水枯而白蟲滿井非佳玩是日黃雲回塞山下所望只南原而已日向西義文催還艸幕往返二十里辛未留米五升別雪根食後發伐艸幕過淵嶺登姑母堂挾右牛翻臺而南下過寶月堂窟極倫等庵僧云宋仁宗皇帝愛妃薨逝夢告於仁宗曰妾入高麗國智異山南花嚴寺洞地獄願爲妾作冥福帝愴然作極倫寺其言無文據未足信也是日行三十里抵奉天寺寺在竹林中樓前長川行竹底而鳴佳刹也是日聞皇帝陟方之奇住老六空辛丑年遊山時見於開城甘露寺者接余樓上館余禪堂壬申滯雨留奉天坐樓上覓近體一首帖在樓囱癸酉有首坐道敏者自稱善山金氏見我絶糧饋米五升聞崔忠成弼卿金鍵子虛等在知及庵使人寒暄飯後下觀黃芚寺寺古名花嚴名僧緣起所創寺兩傍皆竹林寺後有金堂堂後有塔殿殿最明漑茶花鉅竹石榴杮木環繞其傍俯視大野長川橫跨其下爲熊淵中庭有石塔塔四隅有四柱戴塔又有婦人中立頂戴狀僧曰此緣起毋爲尼者也其前有小塔塔四隅亦有四柱戴塔亦有男子中立頂戴仰向於戴塔婦人狀此緣起也緣起者故新羅人從其母入此山創寺率弟子千人精盡話道禪林號爲祖師夕弼卿子虛訪余焉有法主雪凝引宿其房饋梨杮夜半明燈弼卿等講論小學近思錄凝雖佛者曾向兪提學鎭受中庸章句者聞余輩語弗拂於耳達曙談話甲戌黃芚非勿禪師饋余飯弼卿子虛備酒饌要余留奉天空師更請余輩余與弼卿輩還入奉天夜觀近思錄時有知及悟首坐者聞余輩性情之論大喜曰持心省察之功儒釋無異乙亥雪凝使其弟子齎紙來奉天請詩余留五字長篇爲別又別弼卿子虛二生弼卿以白鑿四斗爲別余從黃芚前大路過求禮鼎頂村從江邊行過熊淵遷千山錦綉水聒聒穿山鳴步行三十餘里神氣快暢至晉州花開洞棄熊遷泝雙溪水西邊上左右人家明如畫屛自晉州求禮地境小堠又步行二十餘里自西涉東有兩地石如門有刻雙溪石門四大字崔文昌侯手題者也石門內一二里許有雙溪寺余問僧曰誰是靑鶴洞義文曰未及石門三四里有東邊大洞洞內有靑鶴庵疑是古之靑鶴洞也余惟李仁老詩杖策欲尋靑鶴洞隔林惟聽白猿啼樓臺縹緲三山遠苔蘚依稀四字題則石門內雙溪寺前無乃是耶雙溪寺上佛日庵下亦有靑鶴淵此爲靑鶴洞無疑矣寺前有光啓三年七月日所建眞鑑禪師碑銘乃文昌侯奉敎撰竝書及篆額也師名慧昭入唐遊學還國創此寺祝上念佛終其身文昌譽其道泰甚師無乃文字禪耶不然文昌何推之如此耶余讀碑畢渡木根橋山僧傳云文昌手戾木根引渡溪流其根漸大因爲橋後六百年爲野火所燒然猶存黑榦寺前白菊數叢四季一樹余坐歇花間不忍去寺廚接筒引流筒端水鳴寺後有金堂友人餘慶澄源讀書此房房前有八詠樓故基卽文昌侯所居室今則但有鉅竹數十挺矣夜宿禪堂有客僧學乳曾從餘慶遊般若峯者余與談禪強要余詩余贈一絶丙子泝流上將十里許左度一峴到佛日庵庵乃慧昭鍊道之所庵前有靑鶴淵孤雲嘗遊其上余要庵僧祖成往尋路僻不得尋又上普珠庵乃普珠禪師舊居庵因茲得名有老釋饋余梨杮還投佛日寓宿祖成作詩一首贈余詩韻圓熟淸曠且密曾於詩家下功者要余次韻余和曰孤雲歸不駐靑鶴返何遲人物無今古淸寒賈島詩余觀成才能異常而有儒家氣象故云是日雨雪丁丑祖成和余奉天律詩韻爲余別余辭成過普珠庵登佛智嶺下默溪洞水石最淸奇過鼯鼠淵廣巖淵龍廻淵度碑文嶺抵獅子庵庵有僧海閒戒澄迎我閒乃余少日空門友不見十餘年見余靑眼是時明月中天鉅竹圍庵其梢可準人長三四十矣展談舊懷夜深乃寢戊寅海閒要余強留余留焉食後與海閒戒澄等下觀五臺寺寺前有前朝國子司業權迪水精社記刻在碑石時大宋紹興八年也水精一名如意珠戊子年盲僧學悅建白奪取藏其名洛山寺塔中讀碑訖入坐樓上有僧饋余杮子移時還上獅子庵己卯別海閒戒澄自丁丑至今朝余及奴從五人海閒皆辦給糧餉過五臺又過河府尹叔孚宅宅背山臨流場圃築前竹林周布仲長統所稱樂志篇無異也步行四十餘里還至餘沙等村
1487년(성종 18) 9월 27일 계해
진주 여사등촌을 출발하여 단속사로 향했다.
동네 입구에 광제암문이라는 네 글자가 바위 표면에 크게 새겨져 있으나 누가 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바위 문을 들어가서 1리쯤 되는 지점에 단속사가 있었다.
하인의 집이 감나무 숲과 대나무에 어우러져 한 촌락을 이루었고 그 가운데 큰 가람이 있었다.
그 문에 지리산 단속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문 앞에 탄연선사비명이 있으니 평장사 이지무가 짓고 1172년(고려 명종 2) 1월에 세운 것이다.
절 서쪽에 신행선사비명이 있으니, 당나라 위위경 김헌정이 짓고 813년(헌덕왕 5) 9월에 세운 것이다.
절 북쪽에 감현선사 통조의 비석이 사람들에 의해 뽑힌 채로 있었다.
승려가 이르기를 속세의 무리들이 한 짓입니다. 라고 하였다.
한림학사 김은주가 짓고 974년(고려 광종 25) 7월에 세운 것이다.
절 안 동북쪽 모퉁이에 방 한 칸이 있으니 문창후 최치원이 독서하던 방이다.
절 뜰에 매화 두 그루가 있으니 고려 정당문학 강회백 선생이 손수 심은 것인데 매화나무가 지난 4~5년 전에 말라죽어서 그 증손 강구손 선생이 다시 심었다고 한다.
나는 탄연선사비명을 읽은 뒤에 들어가서 주지 성공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공은 일암의 문인이라면서 나를 후하게 대접하였다.
다시 나와서 서쪽과 북쪽에 있는 두 비석을 보고 들어가서 강구손이 심은 매화나무를 보았다.
누각 위에 앉아서 고개를 들어 강구손이 지은 <종매기>를 읽었다.
성공이 나에게 밥을 대접하고 또 내가 데리고 온 노복들에게도 밥을 내주었다.
식사가 끝난 뒤에 주인과 작별하고 아래로 내려왔다.
조연(2)에 이르러 알몸으로 들어가서 목욕하니 물과 바위가 맑고 산뜻하였다.
조연 북쪽에 샘이 있는데 바위 표면에서 솟구쳐 나와서 유달리 맑고 시원하였다.
나는 손으로 움켜서 물을 마셨다.
광제암문을 도로 나와서 불령을 넘어 백운동을 지나갔다.
백운동 물이 덕천 물과 합쳐져서 태연이 된다.
태연의 하류는 곧 진주 남강이다. 태연을 지나 덕천 벼랑 위를 따라 10여 리를 갔다.
긴 냇물을 내려다보니 확 트이고 시원하여 마음이 상쾌하였다.
동구를 다 지나서 양당이라는 한 마을에 들어갔다.
집집마다 큰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감나무와 밤나무가 뒤덮고 있었다.
사립문이나 닭과 개들의 모습이 영락없는 무릉도원이나 주진촌에 온 듯하였다.
그 오른쪽에 시천동이 있다.
시천은 진주의 속현이다.
시천의 아전들은 지리산에서 불교신자가 되기 위하여 벼슬이 호장이나 기관에 이르면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다가 체임되면 다시 속인으로 돌아오니 드디어 오랜 풍습이 되어서 관장도 그 풍속을 고칠 수 없다고 한다.
날이 저물어 덕산사에 이르렀다.
이 절은 두 냇물이 합류하는 언덕에 있고 대나무가 두루 펼쳐져 있다.
그 왼쪽에 있는 냇물은 고였다가 다시 흐르는데 용연이라고 하고 오른쪽에 있는 폭포는 떨어졌다가 소용돌이를 이루는데 부연이라고 한다.
그 깊이는 한량이 없다.
주지 도숭은 일찍이 안평대군을 만난 뒤에 선불교계에서 유명하였는데 안평대군이 죽자 임천에 자취를 감추었다.
나를 만나 담론하며 매우 기뻐하였고 나와 노복들에게 밥을 대접함이 매우 융숭하였다.
이야기가 한밤중까지 이어졌다.
그의 무리인 형유, 의문, 의화주(3) 등이 모두 반가운 눈빛으로 나를 대하였다.
이날 40리를 갔다.
28일
도숭, 형유 등과 함께 용연과 부연을 둘러보았는데 연못 곁의 대나무가 감상할 만하였다.
의화주가 나에게 밥을 대접하였다.
식사 뒤에 도숭이 의문으로 하여금 나를 데리고 길을 안내하게 하였다.
부연에서 위로 올라가 붉게 물든 나무숲 속을 걸어갔다.
왼쪽으로 금장암, 해회암을 지나고 오른쪽으로 석상암, 백왕암, 도솔암, 내원암을 지난 뒤에 동쪽으로 고개 하나를 돌아 대숲 속으로 들어가서 어렵게 뚫고 지나왔다.
회방령에 올랐다가 남쪽으로 내려와서 갈대밭으로 들어갔고 갈대밭을 다 지나서 싸리나무 숲으로 들어가니 길이 몹시 험난했다.
산길로 40리를 가서 보암에 들어가니 감나무와 대나무가 집을 둘러싸고 있었다.
주지승 도순이 감을 따서 대접하였다.
도순은 무자 화두(4)에 대해 뜻을 간파함이 정밀하지 못하여 스스로 나밖에 아무도 없다. 라는 뜻으로 오해하고는 불경을 외거나 염불하는 것을 그만두고 앉거나 누울 때 언제나 음경을 드러내 놓았고 다방면으로 계책을 내어 승도를 모아 절의 종주가 되려했다.
나와 처음 담론할 때는 조금 합치했지만 재차 얘기할수록 망령된 주장이 들쭉날쭉하고 윤회의 법칙만 고집하였다.
한밤중에 나에게 기침이나 잘 하라고 하였는데 말씨가 부드럽고 공손하였다.
29일.
보암을 출발하였다.
동상원사를 바라보면서 문수암의 삼밭을 지나 나무 밑 냇가를 걸어갔다.
어지러운 돌밭에는 길이 없고 가끔 돌을 모아 탑을 만들어 산길을 표시한 것이 있었다.
나는 돌탑을 찾아가다가 갑자기 법계암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또 비를 만나 석굴 아래서 묵으려고 하였으나 비가 개어 다시 길을 가서 향적암에 이르렀다.
암자에 승려 한 명이 있었다.
이름이 일경으로 자못 총명하여 선지를 깨달았고 일찍이 무자 화두의 대략적인 뜻을 간파하였다.
일경이 나에게 『육조단경』을 보여 주었는데 자못 청정하여 즐겨 읽을 만하였다.
이날 40리를 갔다.
30일.
의문, 일경 선사와 함께 향적암에서 상봉으로 올라갔다.
구름에 묻히고 바람에 깎이어 나무는 온전한 가지가 없고 풀은 푸른 잎이 없었다.
서리가 매섭고 땅이 얼어 추위가 산 아래보다 갑절이나 더하였다.
구름사다리와 석굴은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였는데 우리들이 뚫고서 올라갔다.
상봉에 올랐을 때에 이른바 천왕이라는 것을 보았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는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께서 이 산의 신령이 되신 것으로 당세의 화복을 주관하시다가 장래에 미륵불을 대신하여 태어나실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말이 어찌 이리 황당하며 근거가 없단 말인가?
나는 사당 모퉁이의 바위 부리에 앉았다.
엷은 구름이 사방으로 걷히어 산과 바다를 헤아릴 수 있었고 전라도와 경상도가 내 발 밑에 있었다.
사당 안에는 어모장군 정의문의 현판 기문이 있고 내 친구 김굉필 등의 이름이 현판 위에 적혀 있었다.
저녁이 되어 향적암으로 도로 내려오니 왕복 20리 길이었다.
10월 1일.
쌀 한 말을 남겨 두고 일경과 작별하였다.
향적암을 출발하여 소년대에 올랐다.
면죽 사이를 뚫고 올라가 계족봉을 지나 산길로 30리를 가서 빈발암에 닿았다.
암자 아래에 영신암이 있고 암자 뒤에 가섭전이 있으니 세속에서 이른바 영험이 있다고 말하는 곳이다.
내가 상세히 살펴보았지만 무딘 석상만 하나 놓여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가섭전 뒤쪽에서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위를 쳐다보며 산 하나를 올라갔는데 이름이 좌고대이다.
상, 중, 하 3층으로 되어 있는데 나는 중층까지 올라가서 멈추었으니 심신이 놀라 두근거려 더는 올라갈 수 없었다.
좌고대 뒤에는 좌고대보다 더 높은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바위에 올라 좌고대 위를 내려다보니 또한 기이한 구경거리였다.
의문이 좌고대 아래에 앉아서는 두려움 때문에 올라오지 못하였다.
이날 서쪽 방면이 전날보다 갑절이나 청명하여 서해와 계룡 등 여러 산을 뚜렷이 구분할 수 있었다.
잠깐 있다가 빈발암으로 도로 내려와서 저녁밥을 먹었다.
그 무렵에 지는 해가 암자에 걸렸는데 아래의 인간 세상은 밤처럼 어둡게 보였다.
2일.
빈발암을 출발하여 영신암을 통과하고 서쪽 산 정상의 수목 속으로 30리를 가서 의신암에 이르렀다.
암자 서쪽은 모두 긴 대나무이고 감나무가 대나무 사이에 뒤섞여 나 있었다.
붉은 감이 햇빛에 투명하였다.
방앗간과 화장실도 대나무 사이에 있었다.
근일에 구경한 아름다운 경치로는 이에 비할 것이 없었다.
불전 안에는 금칠한 불상 하나가 있었다.
서쪽 방에 승상이 하나가 있어서 내가 누구냐고 물었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분은 의신 조사입니다.
이곳에 이르러 도를 닦다가 도가 반쯤 이루어졌을 때에 이 산의 천왕이 조사에게 다른 곳으로 옮겨 가기를 권하고 스스로 굴뚝새가 되어 길을 인도하므로 조사가 그 새를 따라갔습니다.
큰 고개에 이르러 굴뚝새가 수리로 변하였으니 지금도 그 고개 이름을 초료조재라고 합니다.
수리가 또 길을 인도하여 하무주 터에 이르렀습니다.
조사가 묻기를
‘이곳은 며칠이면 도를 이루겠습니까?’
하니 수리가 말하기를
‘삼칠일입니다.’
하였습니다.
조사가 더디다고 여기자 수리가 또 중무주 터에 이르렀습니다.
조사가 묻기를
‘이곳은 며칠이면 도를 이루겠습니까?’
하니 수리가 말하기를
‘칠일입니다.’
하였습니다.
조사가 또 더디다고 여기자 수리는 또 상무주 터에 이르러 들어가지 못하고 말하기를
‘이곳은 하루면 도를 이룰 수 있지만 여인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였습니다.
조사가 스스로 들어가서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정진하며 이름을 바꾸어 무주 조사라 하였습니다.
라고 하니 그 말이 매우 황당하였다.
암자 앞에서 도시락을 먹은 뒤에 대숲 속을 통과하여 세 개의 큰 내를 건너 내당재에 올랐다.
북쪽으로 초료조재를 보며 남쪽으로 풀숲 속으로 내려가 30리를 가서 칠불사에 이르렀다.
절의 본래 이름은 운상원이다.
신라 진평왕 때에 사찬 김공영의 아들로 이름이 옥보고라는 사람이 있었다.
거문고를 메고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서 50여 년 동안 거문고로 마음을 닦으며 30곡을 작곡하여 매일 연주하였다.
경덕왕이 거리의 정자에서 달을 구경하고 꽃을 감상하다가 홀연히 거문고 소리를 들었다.
왕이 일명이 문복인 악사 안장과 일명이 견복인 악사 청장에게 묻기를
이것은 무슨 소리인가?
하니 두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인간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니 바로 옥보선인이 거문고를 타는 소리입니다.
하였다.
왕이 7일 동안 재계하자 옥보고가 왕 앞에 이르러 30곡을 연주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고 안장과 청장으로 하여금 익혀서 악부(5)에 전하게 하였다.
또 그가 거처하던 절에 큰 가람을 세우니 37국이 모두 이 절을 으뜸으로 여겨 원당으로 삼았다.
형 수좌는 선법을 조금 알아 산중 승려들의 스승이 된 사람인데 이 이야기는 그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3일.
이 절의 온 법주가 나에게 옥보고의 사적을 보여 주었는데 형 수좌가 말한 것과 같았다.
작별할 때에 형 수좌가 나에게 시를 지어 달라고 청하기에 내가 절구 한 수를 지어 주었다.
서쪽으로 금륜암에 올랐다.
전 선사가 우리를 맞아들여 과일을 대접하였다.
다시 청굴을 지나 시내 하나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헷갈려 길을 잃은 것이 두 번이었다.
처음에는 멀리까지 헤매다가 돌아왔고 끝에는 조금 갔다가 돌아왔다.
큰 고개 하나를 넘어 벌초막(6)에 이르렀다.
벌초막의 위쪽에 새로 지은 초막 한 칸이 있었다.
설근이라는 승려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나에게 김치와 간장을 가져다주었다.
이날 내 발에 못이 박혀 간신히 걸으며 30리를 갔다.
4일.
설근, 의문과 함께 반야봉에 올랐다.
내려다보니 봉우리 북쪽에 혼흑동과 월락동이 있고 초막 한 칸이 있었으니 설근이 사는 곳이다.
또 그 북쪽의 중봉산은 곧 빈발봉의 북쪽 줄기이다.
산등성이 끊어진 곳에 적조암, 무주암 등의 암자가 있다.
또 그 북쪽의 금봉산에는 금대암이 있다.
반야봉 서쪽에 방장산이 있고 방장산 꼭대기에 만복대가 있다.
만복대 동쪽에 묘봉암이 있고 만복대 북쪽에 보문암이 있으니 일명이 황령암이다.
반야봉 남쪽에 고모당이 있고 고모당 남쪽에 우번대가 있으니 우번 선사의 도량이었다.
반야봉 동쪽에 선인대가 있고 선인대 동쪽이 곧 쌍계동이다.
빈발봉은 반야봉의 동쪽에 있고 천왕봉은 또 그 동북쪽에 있다.
나는 서쪽으로 반야봉 중봉을 내려갔다. 주위를 둘러본 뒤에 우동수를 내려다보았다.
물이 마르고 흰 벌레만 우물에 가득하여 좋은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이날 누른 구름이 사방에 자욱하여 산 아래 보이는 곳은 남원뿐이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의문이 초막으로 돌아가기를 재촉하였다.
왕복 20리 길이었다.
5일.
쌀 다섯 되를 남겨 두고 설근과 작별하였다.
식사 뒤에 벌초막을 출발하여 연령을 지나 고모당에 올랐다.
오른쪽으로 우번대를 끼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보월암, 당굴암, 극륜암 등의 암자를 지났다.
승려가 이르기를;
송나라 인종황제가 총애하던 왕비가 죽어 꿈속에 인종황제에게 고하기를
‘첩은 고려국 지리산 남쪽 화엄사 골짜기의 지옥에 들어갔으니 원하건대 첩을 위하여 명복을 비는 절을 지어 주소서.’
하니 황제가 슬퍼하며 극륜사를 지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 말은 문헌상의 근거가 없어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이날 30리를 가서 봉천사에 닿았다.
절은 대숲 속에 있고 누각 앞의 긴 시내가 대나무 밑을 지나가면서 우니 아름다운 사찰이었다.
이날 황제가 붕어했다는 기별을 들었다.
늙은 주지 육공은 1481년(성종 12) 산을 유람할 때 개성에 있는 감로사에서 보았던 사람이다.
나를 누각 위로 영접하고 선당에 묵게 하였다.
6일.
비가 와서 봉천사에서 머물렀다.
누각 위에 앉아 근체시 한 수를 지어 누각 창에 붙였다.
7일.
수좌 도민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선산김씨라고 일컬으며 내가 양식이 떨어진 것을 보고 쌀 다섯 되를 선사했다.
최충성 필경과 김건 자허 등이 지급암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서 안부를 물었다.
밥을 먹은 뒤에 내려와서 황둔사를 구경하였다.
절의 옛 이름은 화엄사로 명승 연기가 창건한 것이다.
절의 양쪽은 모두 대나무 숲이었다.
절 뒤에 금당이 있고 금당 뒤에 탑전이 있는데 탑전이 몹시 밝고 산뜻하였다.
차 꽃과 큰 대나무와 석류나무와 감나무가 그 곁을 에워싸고 있었다.
넓은 들판을 내려다보니 긴 시내가 가로로 걸쳐 있는데 그 아래가 웅연이다.
뜰 가운데에 석탑이 있었다.
탑의 네 모퉁이에 탑을 떠받치는 네 기둥이 있고, 또 부인이 중간에 서서 정수리로 떠받치는 형상이 있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것은 비구니가 된 연기의 어머니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 앞에 또 작은 탑이 있었다.
탑의 네 모퉁이에 또한 탑을 떠받치는 네 기둥이 있고 또한 남자가 중간에 서서 정수리로 떠받치며 탑을 떠받치고 있는 부인을 우러러 향하고 있는 형상이 있으니 이것이 연기이다.
연기는 옛날 신라 사람으로 그 어머니를 따라 이 산에 들어와서 절을 세웠다.
제자 천 명을 거느리고서 화두를 정밀히 탐구하니 선불교계에서 조사라고 불렀다.
저녁에 필경과 자허가 나를 찾아왔다.
법주 설응이 인도하여 그의 방에 묵게 하고 배와 감을 대접하였다.
한밤중에 등불을 밝히고 필경 등이 『소학』과 『근사록』을 강론하였다.
설응은 비록 불자이지만 일찍이 제학 유진에게 『중용장구』를 배운 사람이라서 우리들의 말을 듣고도 거북해하지 않았다.
밤을 새우며 얘기하였다.
8일.
황둔사 비물 선사가 나에게 밥을 대접하였다.
필경과 자허가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나에게 봉천사에서 유숙하기를 청하였다.
육공 대사가 다시 우리들을 청하므로 내가 필경 등과 함께 도로 봉천사에 들어갔다.
밤에 『근사록』을 보았다.
그때 지급암의 오 수좌가 우리들의 성정(性情)에 관한 논의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마음을 잡거나 성찰하는 공부는 유교와 불교가 다름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9일.
설응이 그 제자를 시켜 종이를 가지고 봉천사로 와서 시를 한 수 지어 달라고 청하거늘 내가 오언 장편을 지어서 남기고 작별하였다.
또 필경, 자허 두 사람과 작별하니 필경이 흰쌀 네 말을 주며 작별하였다.
나는 황둔사 앞의 큰길을 따라 구례 정정촌을 지나갔고 강변을 따라가다가 웅연 벼랑길을 지나갔다.
온 산은 비단으로 수 놓였고 물은 콸콸거리며 산을 뚫고 울었다.
걸어서 30여 리를 가니 정신이 상쾌하였다.
진주 화개동에 이르렀다.
웅연 벼랑길을 벗어나 쌍계천 서쪽 가를 거슬러 올라갔다.
좌우의 인가가 그림 병풍처럼 환했다.
진주와 구례 경계의 소후에서 또 20여 리를 걸어갔다.
서쪽에서 동쪽을 건너자 문처럼 생긴 양쪽의 바위가 있었다.
쌍계석문이라는 네 개의 큰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문창후 최치원이 손수 적은 것이다.
석문 안 1~2리쯤에 쌍계사가 있었다.
내가 승려에게 묻기를
어디가 청학동이오?
하니 의문이 말하기를
석문을 3~4리쯤 못 미쳐 동쪽으로 큰 골짜기가 있고 그 골짜기 안에 청학암이 있으니 아마 옛날의 청학동인 듯합니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이인로의 시에;
지팡이 짚고서 청학동 찾으려 하니
숲 너머로 들리는 건 원숭이 울음뿐
누대는 아득하고 삼신산은 저 멀리이니
이끼 속에 어렴풋이 네 글자 적혀 있네
하였으니 석문 안 쌍계사 앞이 여기가 아니겠는가.
쌍계사 위 불일암 아래에 청학연이 있으니 여기가 청학동임은 의심할 것이 없다.
절 앞에 887년(진성여왕 1) 7월 모일에 세운 진감선사대공탑비(7)가 있으니 바로 문창후가 교서를 받들어 짓고 글씨와 전액도 아울러 쓴 것이다.
선사의 이름은 혜소이다.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였고 고국에 돌아와서 이 절을 창건하고 임금을 위해 염불하며 일생을 마쳤다.
문창후가 그의 도를 칭찬한 것이 너무 심하니 선사는 문자선을 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문창후가 어찌 추앙함이 이와 같이 대단할 수 있겠는가.
내가 비석을 다 읽고서 나무뿌리로 된 다리를 건넜다.
산승이 전하기를
문창후가 손으로 나무뿌리를 틀어잡고 시냇물을 건너자 그 뿌리가 점점 커져 다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600년 뒤에 들불에 타게 되었으나 아직도 검은 줄기가 남아 있습니다.
하였다.
절 앞에 흰 국화 몇 떨기와 사계화 한 그루가 있었다.
내가 꽃 사이에 앉아 쉬면서 차마 떠나가지 못하였다.
절의 부엌은 대통을 이어서 시냇물을 끌어들이니 대통 끝에 물소리가 울렸다.
절 뒤에 금당이 있으니 친구 여경과 징원이 이 방에서 글을 읽었다. 방 앞에 팔영루 옛터가 있으니 곧 문창후가 거처하던 방이다.
지금은 큰 대나무 수십 줄기만 있을 뿐이다.
밤에 선당에서 묵었다.
객승 학유가 있었다.
일찍이 여경을 따라 반야봉을 유람한 사람으로 내가 그와 함께 선을 얘기하였다.
나에게 시를 지어 달라고 애써 요구하기에 내가 절구 한 수를 지어 주었다.
10일.
시냇물을 10여 리쯤 거슬러 올라서 왼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어 불일암에 이르렀다.
이 암자는 바로 혜소가 도를 닦던 곳이다.
암자 앞에 청학연이 있으니 문창후가 일찍이 그 위에서 노닐었다.
내가 암자의 승려 조성에게 찾아가 보기를 청하였으나 길이 궁벽하여 찾을 수 없었다.
또 보주암에 올랐다.
바로 보주 선사의 옛 거처이니 암자의 이름이 이로 인하여 붙여진 것이다.
어떤 노승이 나에게 배와 감을 대접하였다.
불일암으로 돌아와서 묵었다.
조성이 시 한 수를 지어서 나에게 주었는데 시운이 원숙하며 청광하고 주밀한 것으로 보아 일찍이 시 짓는 공부에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다.
나에게 차운하기를 요구하여 내가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고운(문창후)은 돌아가서 머물지 않고
청학은 돌아옴이 어찌 이리 더딘가
인물은 고금에 다름이 없으니
맑고 빈한한 가도가 지은 시일세(8)
내가 보기에 조성은 재능이 비상하고 유교의 기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지은 것이다. 이날 눈이 내렸다.
11일.
조성이 내가 봉천사에서 지은 율시에 화운하여 나를 송별하였다.
조성과 작별하고 보주암을 지나 불지령에 올랐다가 묵계동으로 내려가니 물과 바위가 매우 맑고 기이하였다.
오서연, 광암연, 용회연을 지나고 비문령을 넘어 사자암에 이르렀다.
이 암자에 있는 승려 해한과 계징이 나를 맞이하였다.
해한은 바로 내가 젊었을 때 불가의 벗이다.
10여 년을 보지 못했더니 나를 보고 반가워하였다.
이때 밝은 달이 하늘 가운데 떴고 큰 대나무가 암자를 에워싸고 있는데 가지 끝의 높이가 사람 키의 30~40배 정도였다.
말을 주고받으며 오랜 회포를 풀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12일.
해한이 나에게 굳이 머물기를 청하므로 그대로 머물렀다.
식사 뒤에 해한, 계징 등과 함께 내려가서 오대사를 구경하였다.
절 앞에 고려 국자사업 권적(9)의 <수정사기>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1138년(고려 인종 16)에 세워진 것이다.
수정은 일명이 여의주이다.
무자년에 맹승(10) 학열이 나라에 건의한 뒤에 탈취하여 그것을 낙산사 탑 속에 자신의 이름과 함께 안치하였다.
비문을 다 읽고 들어가 누대 위에 앉았다.
어떤 승려가 나에게 감을 대접하였다.
한참 있다가 사자암으로 도로 올라갔다.
13일.
해한, 계징과 작별하였다.
11일부터 오늘 아침까지 나와 노복 다섯 사람에게 해한이 모두 식량을 마련해 주었다.
오대사를 지나 또 부윤 하숙부의 집을 들렀다.
집이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하였으며 채소밭이 앞에 일구어져 있고 대나무 숲이 두루 펼쳐졌으니 중장통이 <낙지론>에서 말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40여 리를 걸어가서 다시 여사등촌에 이르렀다.
* 각주 ----------------------------
(1) 원문은 ‘皎然禪師碑銘’으로 되어 있는데, 본문의 내용을 참조하여 ‘皎’를 ‘坦’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현존하는 이 비명의 사본(寫本)에는 ‘대감국사비명(大鑑國師碑銘)’이라 되어 있으며 현재 비는 전하지 않는다. 대감국사의 휘가 탄연이다.
(2) 糟淵. 바위틈에 있는 조그만 물웅덩이로 추정된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3) 誼化主. 화주승(化主僧)으로 추정된다.
(4) 한 스님이 조주(趙州)에게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무(無)”라고 한 화두(話頭)로 모든 중생은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 했는데 오직 개에게는 무(無)라고 한 것에 대한 의심. 임제종(臨濟宗) 양기파(楊岐派)의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천만 가지 의심도 결국은 하나의 의심에 지나지 않으며 한가지 화두의 의심이 깨뜨려지면 천만 가지 의심이 일시에 사라진다고 하여 화두와 정면으로 대결할 것을 역설했는데 특히 많은 화두 가운데 조주의 무자(無字)를 강력히 제창하였다.
(5) 악부(樂府)는 조선 초기에 발생한 시가 형태의 하나인데, 문맥으로 보아 신라시대 음악을 관장한 부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6) 풀 베는 작업을 하기 위한 움막으로 추정된다.
(7) 진감선사대공탑비에는 전주최씨의 조상이 중국에서 고구려를 거쳐서 금마저에 정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8) 옛날의 가도(賈島)와 같은 인물이 지은 시라는 것이다. 가도는 당나라 시인으로 일찍이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하였다. 평생토록 몸이 수척하고 몹시 곤궁하였다고 한다.
(9) 원문은 權迪으로 되어 있으나『동문선(東文選)』<지리산수정사기(智異山水精社記)>에 權適으로 되어 있다.
(10) 맹승(盲僧)은 눈먼 승려 이지만 문맥으로 보아 어리석은 승려를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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