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 그날, 김육의 대동법에 담긴 의미
그룹 홈스쿨링하는 아이들과 함께 보기에 좋을 듯 하여 '역사저널 그날'을 내려받아 보았다. 지난해 넘기기 직전에 건강검진 기다리다가 '역사저널 그날'을 처음 본 이후다. 아이들에게 역사는 끔찍한 과목이다. 역사는 단순히 사건 외우기인 때문이다. '역사저널 그날' 형식의 역사는 외워야 할 사건 조각이 아니라 시대적 환경 속에서 사건의 인과관계를 다루기 때문에 흥미를 잃지않고 공감할 수 있다.
'<연말특집> 민생을 위하여 - 김육, 대동법을 지키다' 편을 보았다. 김육은 역사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부활시키고 싶은 인물' 8위에 올랐다고 한다. '김육-대동법'만 달달 외웠던 내 입장에서 그리 대단한 인물인가 하고 의아해 할 수 밖에 없다. 나도 역사를 그렇게 배운 까닭이다.
대동법은 김육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한다. 200년 동안 그 제도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개혁 정착 과정에 100여년이 걸렸다고 한다. 김육이 평생 대동법 실시에 매달렸지만 부분적인 시행에 머물렀다고 한다. 죽기 직전에는 이마저도 폐지될까 걱정했다고 한다. 단 대동법 시행에 결정적인 공이 있다고 한다. 대동법이 대관절 무엇이길래....
당시 백성들이 부담해야 하는 세금은 전세(토지세), 부역(군역,요역), 공물(특산물)이었다. 대형 전란을 겪으면서 토지가 황폐해진 가운데 백성들은 죽도록 일하고도 먹고살기 빠듯한 가운데 세금과 노동력과 특산물을 부담해야 했다. 특히 특산물 공출과정의 비리가 제일 심했다고 한다. 대동법은 특산물 대신 쌀로 낼 수 있게 한 제도다. 토지 1결당 12말의 쌀만 내면 되었다고 한다. 그것도 부과 기준이 경작자에서 소유자로 바뀌었다고 한다. 대동법의 실시 효과가 수치로 알 수 있다고 한다. 당시 '공물면제권'이라는 게 유통되었는데 대동법 전에 60말에서 대동법 실시 후 10말로 가격이 하락했다고 한다. 또한 대동법의 실시로 국가적으로 수공업과 유통과정, 화폐가 획기적으로 발달하는 계기가 됐다.
김육은 전 생을 통해 대동법 시행에 힘썼고, 죽기 일주일 전에 상소, 죽기 하루 전에 동료 정승에게 대동법을 부탁했다고 한다. 대동법은 백성을 살리고 나라의 근간을 보전한 조선 최고의 조세개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리도 시행이 더뎠을까? 답은 쉽다. 기득권층 때문이다. 통신과 교통이 변변찮았던 당대에 비하면 세련되기야 했지만 지금이라고 변한 것이 있겠는가? 여기서 쉬운 문제 하나. 1국민을 위한 법, 2기업을 위한 법, 3국회의원을 위한 법, 세 법의 통과 순서는? 참 쉽지요~잉? 이 프로그램을 보고나서야 김육이 왜 부활시키고 싶은 인물인지 이해했다. * 위의 사진은 네이버 이미지 캡처임.
첫댓글 2-3-1??
지금 국민을 위한 법이 잘 만들어지지 않고 있어 그 당시에 국민을 위한 법을 만들려고 한 김육을 부활시키고 싶은것 같네요.자기도 기득권층에 속해 있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백성을 생각했다는 점이 김육에게서 정말 배워야 할 점인것 같아요
저도 김육이 대단한 사람인지 의아했었는데, 민생을 위해 대동법을 만들려고 죽기전까지 힘쓴 사람이였다는 걸
알고나선 이제 대동법을 하면 김육의 이미지가 떠오르게될 것 같아요..현재 정치인들도 김육을 본받았으면 좋겠네요...//
2-3-1
저는 김육을 역사저널을 통해서 알게 됬어요. 대동법을 통해서 김육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고 싶다는 것이 보여요.
/답은 2-3-1인 것 같아요..
교과서에 '김육이라는 사람이 대동법을 주장했다'라고만 나와있고 완자에는 아예 나와있지가 않아서 '그저' 민생을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이라고만 생각을 했었는데 부끄럽네요. 그런 사람이 조선시대 말고도 지금 현재에도 매우 드물어서 법이 아예 국민들이 아니라 기업, 국회의원을 위해서 존재하니... 정말로 국민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2-3-1...?
1-3-2 아닐까요..? 헌법..? 시대가 언제에요..? 김육은 죽을 때까지 백성과 대동법을 걱정하면서 죽은게 대단한 것 같아요. 그래서 백성들이 김육을 존경하고 비석까지 세운..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