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제 1183편
*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祖師))
오도송(悟道頌) 및
선시(禪詩)
오도송(悟道頌)이란 무엇인가 ?
불교(佛敎)를
공부(功夫)하는
수행자(修行者)가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가운데(中) 하나를
오도송(悟道頌)
이라고 한다.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게송(偈頌)의 하나로써
구체적으로
비교해서 설명하면
고승(高僧)이
자신만의 깨달음(覺)을
노래(歌, 句)한 것이
바로
오도송(悟道頌)이며
고승(高僧)이
자신의 임종(臨終) 전에
남겨놓고 가는 노래(歌, 句)를
열반송(涅槃訟)이라고
한다.
게송(偈頌)이란
불교의 가르침(敎義)을
함축(含縮 집약)하여
표현(表現)하는
운문체(韻文體)의
짧은 시구(詩句 문자)를
말하는데
곧 선시(禪詩) 내지
또는 선어(禪語 문장)를
이르는 말이다.
본래(本來)
게(偈)와 송(頌)은
같은 의미로
《게(偈)》
라는 글자(字)는
산스크리트어(梵語)
《가타(gatha)》의
음을 빌려와(音借) 따서
만든 말이고
《송(頌)》
이라는 글자(字)는
《가타(gatha)》를
한문(漢文)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깨달음(正等覺)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게송(偈頌)
즉,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오랫동안
수련과정(修練過程)을
통해 함축된 의미로
세속(사바세계)의
사람(大衆)들에게
무엇인가를 전(傳)하고
말(說法 이야기)하고저
하는 것이며
후세(후학)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역사적(歷史的)
문헌 기록상(文獻記錄上)
오도송(悟道頌)을
가장 먼저 남긴 이(僧侶)는
조동종을 일으킨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禪師)
이다.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구분이 부질없는 일임에야
사람들은
태어남을 기뻐하고
헤어짐은 슬퍼한다.
오랜 세월
훌륭한 선승(禪僧)이나
선사(禪師) 스님들의
깨달음의 길(佛道行)이
매우 힘들고 어려우며
지난(至難)하듯이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남겨진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깨달음의 노래는
다시 한번
자신(수행자)의 삶(人生)을
돌이켜보게 하고
느슨해졌던 마음을
추스리게 한다.
여기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을
올려놓으니
그 깊은 뜻이야
어찌 우리가 모두 다 헤아려
알 수 있겠는가마는
행간(行間)의
곳곳(處處)에 숨겨져 있는
깊고 깊은 심오(深奧)한 뜻을
함께 발견(發見)하고
공부(功夫)하며
오늘을 사는
지혜(반야 보리 광명 智慧)를
찾아보시기 바램해 본다.
본론(本論)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 祖師)
선시(禪詩)와
임종게(臨終偈) 및
오도송(悟道頌) 설해(說解)
"
푸른 숲 짙은 그늘
(綠水陰濃夏日長)
고봉 원묘(高峯原妙) 선사
녹수음롱하일장
綠水陰濃夏日長
누대도영입지당
樓臺倒影入池塘
수정렴동미풍기
水晶簾動微風起
만가장미일원향
滿架薔薇一院香
푸른 숲 짙은 그늘
여름날은 길고 긴데
정자 누대의 그림자(影)는
연못 속에 거꾸로 잠겼구나
가녀린 미풍이 일어나니
수정발이 흔들리고 있는데
시렁에 줄기 뻗어 가득 핀 장미
온 절(寺院 승가람)이 향기롭네.
"
역대(歷代)
중국 불교(中國佛敎)
선종사(禪宗史)에서
위앙종(潙仰宗)을
열고 개창(開創)하신
위산 영우(潙山靈祐,
771~853) 선사(大禪師)가
있었다.
백장 회해(百丈懷海,
720~8140) 선사(大禪師)
스님(僧, 大沙門)의 가르침과
법(正統法脈)을 이어
선풍(禪風,
선 수행 종풍)을 두루 널리
세상(世上)에 크게 드날렸던
스님(僧, 大沙門)이다.
이 스님이
《수고우(水牯牛)》라는
유명한 화두(話頭, 공안)를
남겼는데
하루는 위산 스님이
"
내가(위산 영우)
삼년(3年) 후에 죽어
산 밑의 신도(信徒) 집에
태어나면
왼쪽 옆구리에
위산의 스님 아무개라고
쓰였을 것이다.
그 때
만약 위산의 스님
이라 하려면
곧 수고우(水牯牛)이고
만약
수고우(水牯牛)라 부르려면
곧 위산의 스님 아무개일 것이니
자 !
무엇이라 불러야
하겠는가 ?
"
화두(話頭, 공안)을
던져 물었다.
《수고우(水牯牛)》란
물소(水牛)라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화두(話頭, 공안)에 대해
고봉 원묘(高峯原妙,
1238~1295) 선사(禪師)
스님(僧, 大沙門)이
위(上記)의
시(詩, 게송, 禪詩)를 지어
답(答)했다.
절(寺刹) 안의
여름(夏) 정경을 묘사한
뛰어난 시(詩)라 할 수 있는
이 시(게송,禪詩)에
오묘한 선지(禪旨)가 드러나
있다고 평가 받는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날(夏日)의 평화로운
절 안(院內)
거기에
수정발을 흔드는
미풍이 있고
만개한
장미 향기(薔薇香氣)가
절 안(院)에 가득하다.
수정 고봉 선사는
『선요(禪要)』라는
저서(著書)를 남겨서
선수행의 지침을
제시해 주기도 하고
그 밖에 어록을 남겨
선의 요지를 설해 주었다.
위산 영우(潙山靈祐,
771~853) 선사(大禪師)는
황벽 선사와 함께
백장 회해선사의 제자로
선종(禪宗)의
5종(五家宗派) 가운데
《위앙종》을 창시(創始)한
조사(大祖師)이다.
위앙종(潙仰宗)은
남종선의
회양(懷讓, 677~744) 선사
계통에
백장 회해(百丈懷海,
749~814) 선사 스님께서
선원(禪院)에서
집단생활의 규범이 되는
(후대에 백장청규(百丈淸規)
라고 불리우는 규범서))
청규(淸規)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계통에서
임제 의현(臨濟義玄,?~867)
선사(禪師)를
시조(始祖)로 하는
임제종(臨濟宗)과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 선사(禪師)
앙산혜적(仰山慧寂,
815~891) 선사(禪師)
두 선승을 시조로 하는
위앙종(潙仰宗)이 성립했다.
위산(潙山)은
중국 호남성 장사부 영향현에
있는 산 이름이다
15세에
건선사의 법상(法常)에게서
스님이 되고
23세에
백장회해 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원말(元末)에
백장 선사의 명(命)을 받아
장사로 가던 도중
대위산을 지나다가
잠간 머무르니 군민이 다투어
모여 들어
절을 짓고
선과 교를 40여 년 동안
설하다가
대중 7년(853)
정월에 아무런 병도 없이
앉아서 입적(入寂, 열반)하니
세수가 83세였다.
뒤에
제자 혜적 선사는
앙산에서 선을 선양하여
위산영우와
앙산혜적의 파(派)를
위앙종이라 부르게
되었다.
※
고봉 원묘(高峯原妙,
1238~1295) 선사(禪師)는
중국 소주(蘇州) 출생으로
속성은 서(徐)
이름은 원묘(原妙)이다.
스스로
고봉(高峯)이라고
불렀다.
15세에
밀인사에서 출가해서
16세 때
구족계를 받고
18세에
천태 교학(天台敎學)을
공부했다.
20세 때
선을 배우기 위해
항주(杭州) 정자사(淨慈寺)에
들어간 고봉은
단교 화상 밑에서
"
3년 안에
깨닫지 못하면 죽겠다
"
라는 각오로
수행하였다.
3년 기한은 다가왔지만
길을 잃은 사람처럼 헤매던
고봉은
1260년
북간탑에 있던
설암조흠 선사를 찾아가
깨달음을 구했다.
그리고
마침내 1271년
임안 용수사에서
잠자던 도반(道伴)이
떨어뜨린 목침 소리(木枕聲)를
홀연히 듣고
활연(豁然) 대오(大悟)하였다.
1279년
남송이 멸망하면서
고봉은
천목산 서봉 사자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곳에서
고봉은 사관(死關)을 세운 뒤
산문 출입(山門出入)을
삼가하고
오직
정진(修行精進)에만
몰두하였다.
사관에서
15년간 수행하다가
1295년 12월
세수(歲壽) 58세
법랍(法臘) 43세로
입적(入寂, 열반, 해탈)
하시었다.
당시 유행하던
간화선(看話禪)을 중흥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
ㅡㅡㅡㅡㅡㅡㅡㅡ
※
원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지극히 개인적 견해(見解)와
해석(解釋)으로
오역(誤譯)
오판(誤判)한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언제든지
글 내용 가운데
잘못 된 부분은 옳고 바르게
지적(指摘)해 주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램해 본다.
- 마음그릇 心椀 드림 -
ㅡㅡㅡㅡㅡㅡㅡㅡ
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