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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지 목사
사람들은 누구나 이익을 많이 보기 원합니다. 사업을 하거나 투자를 할 때 수익이 보장되는 사업을 고르기 위해 애씁니다. 대학의 전공 가운데에서도 장래가 보장되는 학과에 수험생이 많이 몰립니다. 어느 은행이 이율이 조금이라도 높은 새로운 저축상품을 개발했다고 하면 순식간에 그리로 많은 예금이 몰립니다. 주식투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엉뚱하게도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지라"고 가르칩니다. 떡을 물 위에 던지는 것은 버리라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입니다.
전도서는 지혜문학에 속하는 성경인데 지혜문학은 사람을 지혜롭게 만드는 것을 돕는 성경들입니다. 전
도서는 전통적으로는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지혜로웠다는 솔로몬이 기록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오늘 본문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무엇인가 깊은 지혜가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오묘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예전에 한 양반이 집 앞의 냇물을 건너다가 엽전 한 닢을 물에 빠뜨렸습니다.
이 양반은 하인들을 불러모아 그 엽전을 찾아 건져오는 사람에게는 엽전 두 닢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한 하인이 그 엽전을 건져다 바쳤고 양반은 약속대로 엽전 두 닢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원 세상에 저렇게 어리석은 양반이 있나?'고 수군거렸습니다. 부인이 그것을 듣고 양반에게 전했습니다. 양반은 조용히 '그 엽전을 건지지 않았으면 그 엽전은 영영 사라지는 것인데 이제 건졌으니 물에 빠졌던 엽전도 세상에서 쓰이고 내가 상금으로 준 두 닢도 세상에 돌아다니면서 쓰일 것이니 나는 손해이지만 이 세상을 위해서는 잘 된 일이 아니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 양반과 같은 폭이 넓은 지혜, 이타적인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이 말은 먼저 관대한 마음으로 살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좀 여유 있는 마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너무 계산을 하고, 하나라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하는 것, 그렇게 좋게 보여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런 마음으로 살았다면 갈대아 우르를 떠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그런 마음으로 살았다면 애굽 왕실을 떠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니엘이 그런 마음으로 살았다면 '나는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먹지 않고 채식과 물을 마시리라'고 뜻을 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그런 마음으로 살았다면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버리고 전도하는 일에 나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며 그 이름이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나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한 기독교 출판사에서 '사랑의 편지'라는 이름으로 좋은 내용이 적힌 편지를 만들어서 여러 사람에게 우편으로 보내주고 있습니다. 또 그것을 크게 인쇄해서 여러 교회에 보내주고 지하철역들에도 붙이고 있습니다.
한 주일에 한 번 이 사랑의 편지를 받는데 열어보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내용이 서너 장씩 들어 있습니다.
최근에 받은 사랑의 편지 가운데 두 통의 내용을 소개해 드립니다.
아라비아의 한 왕에게 왕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물가에서 놀다가 실종되었습니다. 왕은 시체라도 찾으려고 많은 사람을 동원했는데 헛일이었습니다.
여러 날 뒤에 이 아들이 강 가운데 있는 바위에서 발견되었는데 건강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왕은 크게 기뻐하면서 물 가운데에서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왕자는 '매일같이 빵이 든 봉지가 떠내려와서 그것을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빵 봉지에는 '모하메드 벤 핫산'이라는 이름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왕은 전국에 명령을 내려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을 찾았는데 평범한 평민이었습니다. 왕은 왜 그런 일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라는 말씀을 보고서 그대로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중동 지방에는 "선행을 하라 그리고 네 빵을 물 위에 던지라 그러면 그대에게 어느 날 반드시 보상되리라"라는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왕은 이 사람에게 많은 상금을 주었습니다.
또 하나의 예화입니다.
영국 웨일즈 지방 어느 산골마을에 로이드라는 소년이 엄마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비가 쏟아지는 날 로이드가 병에 걸려 몸이 펄펄 끓고 너무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어머니는 보다못해 빗속을 헤치고 24Km를 달려서 병원을 찾아가 의사 선생님을 붙들고 사정을 했습니다. 의사는 망설여졌지만 어머니의 간곡한 청을 이기지 못하고 비를 맞으며 산골 마을로 달려가 로이드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수십 년 뒤, 나이가 많아진 이 의사는 영국 재무장관의 취임축하 파티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왜 초청을 받았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초청장에는 재무장관의 친필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생님은 꼭 오셔야 합니다' 하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파티에 참석하자 재무장관은 이 의사를 상석에 모시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여러분, 수십 년 전 제가 산골마을의 이름 없는 소년이었을 때 이 분이 비속을 뚫고 수십 리 길을 달려 저에게 와서 열병에 시달리고 있던 저의 생명을 건져주었습니다. 이 분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저는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 의사는 '아, 오래 전에 마지못해 한 좋은 일이 이렇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구나!'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라는 말씀이 진리임을 가르쳐 주는 이야기들입니다.
이 출판사에서 저희 교회에 사랑의 편지 크게 인쇄된 것을 보내주면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여러분이 보시는 것처럼 교회 이곳 저곳에 게시하고 있습니다.
제가 받는 편지 크기의 것들은 주제별로 분류해서 설교 자료 파일들에 넣어두고 적절하게 사용합니다.
이 출판사에서는 그저 물 위에 떡을 던지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희가 이렇게 잘 활용하고 있는 것을 아마도 모를 것입니다.
여러분, 관대한 마음으로, 여유 있는 마음으로, 손해도 좀 보는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마지못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에서 '던져라'의 원어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해라' 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는 것은 격려하기 위해서 들어가 있는 말이지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을 것이니 그것을 바라고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이렇게 조건이나 동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또 남을 도울 때, 구제를 할 때, 선행을 할 때 대가가 있거나 찾을 것을 포기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수재의연금 같은 것을 낼 때 신문에 이름과 얼굴이 크게 나기를 바라면서 내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또 '믿음으로 주는 삶을 살아라'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낭비가 아니고 무익한 것이 아니고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일 설교에서 승동교회 이재형(李載馨) 목사님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왕손이면서도 자기에게 전도한 마부에게 '형님!'이라고 불렀다는 목사님입니다. 이재형 목사님은 평생 보수를 받지 않고 목회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돕는데 힘썼는데 특히 학생들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이 목사님의 좌우명이 한문으로"쾌막쾌어여인 민막민어걸인"(快莫快於輿人 憫幕憫於乞人)이었습니다. "남에게 주는 것처럼 통쾌한 일이 어디 있으며 남에게 받으며 사는 것처럼 불쌍한 일이 어디 있으랴" 하는 뜻입니다.
지난 주일에 역시 김재준(金在俊) 목사님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입례송으로 부른 찬송가 261장은 김재준 목사님이 광복절과 같은 국가절기에 교회에서 부르도록 하기 위해 작사한 찬송입니다.
일제 시절 김재준 목사님이 명문신학교육기관인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 유학 갈 때 이재형 목사님이 재정보증을 서고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김재준 목사님이 훌륭한 일꾼이 되어서 한국교회를 위해 특색 있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이 말은 또 '소중한 것을 던져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생을, 삶을 하나의 떡으로 삼아 역사라는 강물 위에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2절의 '일곱이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는 많은 사람에게 나눠줄수록 좋다는 뜻도 있고 사람은 최소한 일곱이나 여덟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영향을 미치는데 좋은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위대한 사람일수록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칩니다.
이 여름에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를 하느라고 교육부에서 수고를 많이 하고 있고, 교직에서 수고하는 성도들이 많은데 이 관점에서 보면 교사는 참 좋은 일입니다.
가르치는 것은 정말 떡을 물 위에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사제관계가 메말라지고 교육현장에 어려움이 많을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몇 해 전에 오늘의 본문을 교육적인 관점에서 살피면서 설교한 일이 있습니다. 그래도 여러 날 후에 도로 찾게될 것입니다.
4절의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너무 살피고 따지지 말아라' 하는 뜻이 있습니다. 돌다리도 두들기며 건너가는 것도 좋지만 두드리기만 하다가는 건너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환경에 너무 매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보람있는 일이라면 손익계산서를 무시하고 투자할 줄도 아셔야합니다.
한 교회가 건축을 하는데 공사가 빨리 진척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연초에 교단본부에 가서 '올해 가을, 우리 교단의 총회는 우리 교회에서 하도록 해주십시오.'라고 신청을 했습니다. 준공되려면 아직 많이 남았고 여건도 좋지 않았는데 그렇게 했습니다. 총회를 그 교회에서 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총회 날짜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당을 완공해야 하지요. 이 목사님은 총회가 열리는 날 새벽 세 시까지 망치를 들고 교회 천장 안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때로는 저지른 다음에 수습하는 것이 성공에 도움이 되는 수도 있습니다.
자, 이제 말씀의 방향을 돌립니다.
서울에서 동해안으로 가려면 우선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수원 부근까지 와서 영동고속도로에 들어서는데 이제 영동고속도로에 들어섭니다.
이번 주간의 목요일은 광복절입니다. 광복절이 들어 있는 주일을 광복감사주일로 지키는 교회들도 있고, 평화통일 남북공동기도주일로 지키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감리교회는 이 주일을 북한선교주일이라고 범위를 좁히고 분명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북한선교를 할 때, 북한을 도울 때 떡을 물 위에 던지는 마음으로 해야합니다.
북한을 돕는 것,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북한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정서는 그리 우호적인 것이 못 되고, 배고픈 동포들 먹으라고 보낸 식량이 군량미가 된다는 말도 있고, 받으면서 심술은 부릴 대로 부리고, 심술만 부리는 것이 아니라 총질도 하고,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고, 회담이나 이산가족 상봉을 일방적으로 중단했다가 아시안게임에는 참가한다고 하고…,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이번 집중호우를 '팝콘 형 집중호우'라고 하는데 북한은 팝콘 형 국가입니다.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북한 돕는 일에 마음이 내켜하지 않는 저희들에게 하나님은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말씀하십니다. 도우라는 말씀입니다.
북한선교주일, 학원선교주일, 이렇게 특정한 주제가 있는 주일이 되면 감리교 본부에서 '이것을 참고해서 설교하십시오'라고 일종의 표준 설교문을 모든 교회에 보냅니다. 오늘 북한선교주일 설교문은 제가 썼습니다. 제가 북한선교주일 설교문을 쓰게 되었다고 하니까 목사님 한 분이 '유 목사님, 유 목사님, 그저 들고 읽으면 되게 써주세요' 해서 그렇게 썼습니다. 다른 목사님들, 오늘 설교준비 평소보다 편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 설교는 바울이 오네시모에게 그랬던 것처럼 실천적인 사랑으로 북한을 도와야 한다는 내용인데 이 강단에서 이미 했던 설교를 손질한 것이기 때문에 저는 그것을 쓰기 좀 어렵습니다.
작년도 남자속회 공과 뒷부분을 제가 집필했는데 써놓고 보니까 평소에 교회에서 많이 하던 이야기들을 글로 옮긴 것이 되어서 남자속도들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염려가 있었습니다.
감리교회에서는 오늘을 북한선교주일로 정하고 더 나가서 감리교가 북한선교에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평양신학원 후원이라고, 해야 할 일을 아주 구체적으로 못을 박았습니다.
해방 이후 북한의 기독교의 역사를 말할 때 일반적으로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기까지를 진공기라고 부르고 1970년대 초반기부터를 재출현기라고 부릅니다. 여러 가지 재출현 현상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로 1972년에 평양신학원이 문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이 신학원이 1996년에 문을 닫았습니다. 재정문제 때문인 것 같습니다. 북한에서는 각 기관들이 그 자체에서 책임을 지고 운영하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감리교에서 북한교회의 지도자들을 만나 평양신학원의 운영을 돕기로 해서 2000년 9월에 다시 문을 열어 현재 열세 명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북한을 도우려면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통일부에서도 감리교가 평양신학원을 돕는 일을 남북협력사업의 하나로 승인하였습니다. 종교관계 지원으로는 최초의 승인입니다.
이 평양신학원이 계속 잘 운영되어 북한교회 지도자들을 순조롭게 배출할 수 있도록 돕자는 것입니다.
전에는 서부연회가 이런 일을 담당했었는데 이제는 감독회장님이 직접 앞장서고 있습니다. 이 일을 의논하는 회의가 7월초에 온양에서 있었는데 감독회장님이 주관했고 이 일에 대한 공문도 감독회장과 선교국 총무와 서부연회 총무 공동명의로 왔습니다.
최근에 감리교가 북한관계의 일들에 대해 재검토를 하고 숨고르기를 할 필요가 있어서 평양신학원 돕는 것을 잠깐 멈칫했더니 장로교 가운데 한 교파가 '해방 전에 평양에는 장로교가 많았고 장로교의 신학교도 평양에 있었으니까 우리가 감리교 대신 평양신학원을 돕겠다'고 나섰다가 그것이 선교윤리에 합당한 일이냐는 지적에 철회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 평양신학원, 또 북한에 있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라는 단체와 두 개의 교회와 수백 개에 이른다는 가정교회들은 그 성격이 불분명합니다. 전시용이라는 말도 듣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긍정적인 눈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좀 앞장섰다는 분들은 저 같은 사람들을 '반공신학자'라고 부르며 시대에 좀 뒤떨어진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그런 취급받는 것을 면하려고 긍정적인 눈으로 보려고 애쓰기도 하고, 긍정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편견이 아닌가 염려하면서 '하나님 바르게 보고 바르게 가르치며 강연하게 하옵소서' 기도를 하는데 생각이 변하지 않습니다.
평양신학원에서도 무엇을 가르치는지 확실하게 파악되지 않습니다. 평양에 봉수교회가 있고 봉수교회 뜰 안에 3층으로 된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중앙위원회 건물이 있습니다. 그 건물 3층에 평양신학원이 있는데 외부인사들에게 잘 공개하지 않습니다.
이런 형편이지만 우리는 떡을 물 위에 던지는 마음으로 도와야 합니다.
지난 6월에 삼백 명 가까운 인사들이 평양을 방문했는데 그 가운데 감리교 목사님이 열 분 있었습니다. 평양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겪고 떠나기 전 날 저녁, 감리교 목사님들이 평양 고려호텔 커피숍에 모여서 '우리가 평양에 와서 여러 가지를 보았는데 이것을 감리교의 북한선교 활동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북한선교에 관심이 있어서 시간을 내고 비용을 들여 북한을 방문한 목사님들이라 진지하게 의논했습니다.
'자, 우리가 현장에 와 보니 남한에서 생각하던 것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 더 많다. 앞으로 북한을 돕자는 이야기를 할 때, 특히 북한의 교회들을 돕자는 이야기가 나올 때 우리가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하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순간적으로 저의 머리에 얼른 오늘의 말씀이 영감처럼 떠올랐습니다. '전도서 11장의 말씀대로 해야 하지요.' 했습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힘써 도와야 합니다. 여러 날 후에 도로 찾게 될 것입니다.
이제 전도서 11장 5절 이하의 말씀을 북한선교의 관점에서 조명해 봅니다.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지금 통일의 뼈가 역사의 태에서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지런히 자라고 있습니다. 곧 출산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이 통일을 어떻게 성취해 가시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취해 가고 계십니다. 곧 성취될 것입니다.
통일에 대한 키워드는 '의외성' 또는 '초월성'입니다. 믿지 않는 통일전문가들은 '통일은 예기치 못했던 방법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했는데 여러 날 후가 아니고 내일 찾게될 지도 모릅니다.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아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쉬지 말고 계속해서 북한선교를 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7절과 8절은 '살아 있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살아서 베푸는 것은 더욱 즐거운 일이다. 적극적으로 이 일을 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북한선교, 적극적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이재형 목사님의 말씀대로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는 쪽인 것을 감사하면서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몇몇 은행들이 심벌 마크, 고유색, 고유체, 이런 것들을 바꾼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Visual Identity이라고 합니다. '눈으로 보여주는 특성, 또는 고유성'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에 따라 그 은행에 대한 인상이나 느낌, 나가서는 신뢰감이 달라지기도 하고 거리의 분위기도 달라집니다.
저희 교회의 심벌 마크가 여러 과정을 거쳐 정해졌습니다.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려있고 교회 신문과 주보에도 실을 예정인데 성전 모양을 기본으로 하고 그 밑에 물결 모양의 선이 셋 있습니다. 가운데 선은 보라색인데 그것은 '북한선교에 앞장서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교회에서 보라색은 수난과 준비를 상징합니다.목양교회는 사랑이라는 떡, 관심이라는 떡, 물질이라는 떡, 준비라는 떡을 북한이라는 물 위에 던져야 합니다.
많이 던져야합니다.
앞장서서 던져야 합니다.
던지는데 툭툭 던져서는 안 됩니다. 6·25 때 미군들이 어린이들에게 초콜릿도 주고 사탕도 주고 검도 주는데 툭툭 던져주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주면서도 욕먹는 나라라는 말을 듣습니다.
정성스럽게, 정중하게, 그러면서도 의연하게 주어야합니다.
아니 주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 되어야합니다. 선교는 주는 것이 아니고 나누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롱펠로우의 시를 한 편 소개해 드립니다.
나는 푸른 하늘을 향해 활을 쏘았네
그 화살의 날아감이 어찌나 빠른지
내 눈은 그 화살의 가는 곳을 뒤쫓지 못했네
나는 그 화살 잃어 버렸네
나는 창공을 향해 노래를 불렀네
그 노래 퍼짐이 어찌나 빨라
나는 그 노래 가는 곳을 따라가지 못했네
나는 그 노래 잃었었네
그러나 오랜 훗날
나는 그 화살 되찾았네
그 화살 부러지지 않은 채
어느 느티나무 속에 박혀 있는.
그리고 또 훗날
나는 그 노래 되찾았네
그 노래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노래하는 젊은이의 가슴 속에서.
하늘을 향해 쏘는 화살, 창공을 향해 부르는 노래, 다 물 위에 던지는 떡과 같습니다. 여러 날 뒤에 찾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좀 여유 있게, 관대한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구제와 선행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소중한 것을 주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좋은 영향을 많은 사람에게 미치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대적 과제인 북한선교를 하는 일, 북한을 돕는 일, 사랑을 북한에 나누는 일도 떡을 물 위에 던지는 마음으로 앞장서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