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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4: 15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고후 4: 15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
바울은 다시 1: 6의 주제로 되돌아간다.
1]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모든 고난뿐만 아니라 그의 믿음과 전도, 이 모든 것들이 오직 고린도 교인들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2]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궁극적으로 더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게 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임을 역설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더 나은 본향, 하늘의 본향을 생각하면서 땅에서는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았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칭함을 버렸다. 애굽의 모든 금은보화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기를 택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다.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거하였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
이런 모습이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모습이다. 신약의 사람뿐 아니라 구약의 사람들이다. 흔히 구약은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복을 말한다고 하지만 아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믿음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소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바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믿음의 사람들이 이렇게 된다고 하면 누가 믿으려고 나오겠는가? 그러나 교회가 믿음으로 말한다면 이런 것을 말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믿음을 말하지만 그 믿음의 내용이 눈에 보이는 것과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엉터리 믿음이다. 마귀가 사람들의 마음과 눈을 혼미하게 하여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기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시편 116편 10절을 인용하여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시편 116편 15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도다” 심히 곤란을 당하다가 구원받은 경험이 있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하게 보신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하지 아니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로버트 라이트의 ‘윤리적인 동물’에서 이렇게 말한다. “수많은 유기체들이 각기 어떤 하나의 진리에 최면이 걸린 채로 뛰어다니고, 그 모든 진리들이 동일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논리적으로 모순된다고 생각해보자. 그 진리란 [내 유전 물질이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하다. 이것의 생존은 당신의 좌절, 고통, 심지어 죽음까지 정당화시킨다] 이다. 그리고 여러분도 이 유기체 중 하나이므로 논리적 불합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어려운 말로 표현하지만 한마디로 내가 살아남는 것이 진리다. 내가 살아남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다. 이 진리를 위하여 상대에게 고통을 주고 심지어 죽이는 것까지도 정당하다. 이것을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진리라고 여기고 산다. 적자생존, 밀림의 법칙이라고 한다.
그러나 밀림의 짐승들은 배부르면 더 해치지 않는다. 인간은 배부르면 다른 범죄를 행한다. 그래서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지옥이다.
믿음으로 말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더 평화롭게 만들어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이 단절되고 새로운 세계가 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세상은 인간이 상상하거나 노력하여 만들어낼 수가 없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 세상의 서로 해치는 현실에서 다시는 해함과 상함이 없는 세계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말한다.
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분명한 자의식이다. 여기에는 바울이 자신의 이익을 생각할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를 믿으면 나처럼 성공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연약함과 주림과 사형 선고를 받은 자처럼, 세상의 찌꺼기 같은 대접을 받았다. 그러함에도 상관이 없는 것은 믿음의 세계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기에 그렇게 말한다. 그 주님 앞에 설 영광의 날. 부활의 세계가 없다면 믿음으로 사는 자가 가장 불쌍할 것이라고 이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증거 하였다.
그러므로 세상의 자랑거리를 가지고 오는 거짓 선생들에게 속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 안에 들어있는 성도는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그 나라를 사모하며 기다리게 되는 것이기에 결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썩어지고 사라지고 없어질 영광이 아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하는 내용,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예하여 그 영광의 날을 소망하는 것이 은혜이며 이런 은혜가 많은 사람에게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이 세상에서 죽어도 상관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죽음을 환영한다. 요한계시록 14: 13 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쉰다고 한다. 이는 저희 행한 일이 따른다고 한다. 그 행한 것이 무엇입니까? 18절이다. 보이는 것을 위하여 살았는가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위하여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늘 보이는 것을 목표로 살아간다. 과연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말하고 생각하고 삶의 목표로 삼는 것이 장차 불살라 없어질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이 얼마나 됩니까? 예수님이 친히 다스리시는 그 해함과 상함이 없는 그 나라를 얼마나 바라보고 사모하고 있습니까? 그런 믿음이 우리에게 없기에 무엇을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4] 보배를 가진 질그릇 : 박조준 목사
고린도후서 4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그 당시 거짓 교사들의 비난에 대해서 자기가 믿게 된 것과 복음의 사역자로서 어떻게 일하고 있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조금도 자만하지 않고 다만 그에게 맡겨진 복음 전파 사업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우리들 자신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고 다만 게으르지 않고 의무를 다하기에 전력하였다”고 말합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세요. “이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 사역에 대한 사도 바울의 인내와 끈기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감당키 힘든 어려움 가운데서도 수고와 사역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이 끈기가 어디서부터 왔습니까?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사도 바울의 충성의 동기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충성되게 인정해 주셔서 직분을 맡기신 데 대한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직분이 그처럼 위대한 직분이라는 것을 인식하였습니다. 자기가 맡은 일이 놀라운 일이라는 자각이 있을 때 놀라운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위대한 음악가 헨델이 불후의 명작이요 대곡인 오라토리오 메시야를 작곡할 때 먹는 것, 잠자는 것까지 잊어버릴 정도였고 하늘에서 들리는 음악 소리를 그저 종이에 옮기다시피 할 정도로 영감으로 꽉 차 있어서 전곡을 22일 동안에 작곡했다고 합니다. 위대한 일을 할 때, 그것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힘이 동시에 주어진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더구나 바울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하심을 입은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을 위해 자기의 전생애와 모든 노력을 다해 무엇인가를 해 보고자 한 것이 바울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을 중상 모략하는 거짓 교사들이 있어서 바울이 하는 일마다 방해를 하고 역선전을 하였습니다. 바울이 음흉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자기 마음대로 하기 위하여 교활한 수단을 동원한다고 했고, 복음의 메시지를 변경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분토같이 여기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는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하던 사도 바울도 이런 오해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그의 행동이 곡해되고, 그의 말이 왜곡되었습니다. 바울처럼 훌륭한 사도에게도 그러한 일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생긴 조그마한 어려움에 대한 위로를 받게 됩니다.
더구나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2절 이하에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게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했습니다.
“숨은 일을 버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아니하고 정정당당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부끄러운 일을 할 때는 수치를 당합니다. 바울은 이런 일을 용납치 아니하고 분노로 써버렸습니다.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않으며.” 다시 말하면 변장하거나 교활하게 행하지 않고 순수하고 자유롭게 행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훌륭하나 내부적으로는 천하고 악한 일을 품고 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게 명료한 말로써 했습니다. 진리 대신 거짓으로 사람들을 속이지 아니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교활한 마술사처럼 속이며 좋은 상품과 나쁜 상품을 혼합하여 파는 사람이라고 헐뜯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한다”고 하면서 양심적으로 진리인 것만 전하고, 듣는 사람들이 양심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만 전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행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때로는 오해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하게 의롭게 살면 오해는 풀리게 되고 그 명성이 지켜집니다.
그런데 반대자들은 말합니다. “만일에 그렇다면 그것을 듣는 자들에게 복음이 가려지고 효과가 없는 것은 무슨 이유냐?”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답변합니다. 이것은 복음의 결함도 아니요 전도의 잘못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복음이 감추어지고 효과가 없는 것은 오늘 주신 말씀 3절에 있는 대로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입니다.
더구나 4절에 보면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신이 자기의 노예와 혹은 신하의 마음을 지배해서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숭배하고 그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이 신은 어둠의 주관자요, 이 세상의 어두움의 지배자이기 때문에 그의 아래 있는 사람을 어둡게 하고 그들의 궤휼을 증가시키고 무지와 잘못과 편견으로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의한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계획은 사람들을 무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귀는 복음의 빛을 세상에서 몰아내지 못하면 적어도 사람의 마음에서 몰아내려고 합니다. 이처럼 세상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과 마귀의 어두움과의 대결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충성을 다했습니다. 5절 말씀에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내용도 목적도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 대신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이나 감정이나 편견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세속적인 이익이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내세우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볼 때 바울은 참된 사도였습니다. 누가 뭐라고 비난하고 중상 모략하고 악선전을 해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왜 자기 자신을 전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은 흙으로 만든 가치 없는 그릇과 같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사기 7장에 보면 기드온의 군대가 아람 군대와 싸울 때 들고 나간 항아리가 있는데, 그 항아리를 생각하면서 이 말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복음의 빛과 은혜의 보물이 흙으로 만든 그릇 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복음의 사역자들도 연약하며 깨어지기 쉬운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다른 사람과 같이 약하고 정욕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교역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이 질그릇이 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릇이 약할수록 하나님의 능력은 더욱 강하며 보물 자체가 더욱 빛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밝히고 양심에 확신을 주며 영혼을 중생시키고 마음을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우리 인간은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광은 하나님만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고난과 비난, 그리고 핍박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은 비결을 이렇게 말합니다. 8~10절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내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환난을 당하는 중에서도 놀라운 도움과 위안과 평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여러 모양으로 괴로움을 당하여도, 모든 고통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우리가 담으로 포위를 당하여도 감금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얻고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갈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답답한 일을 당하여 어떻게 될지 모르며 걱정스러운 일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낙심하지 않으며 가장 혼란한 지경에 처하여도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수 있음을 알고 그에게 소망을 두고 믿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 의해서 핍박을 당해도, 여러 곳에서 미움과 폭력을 당해도 하나님에 의해서 버린바 되지 아니합니다. 선한 사람도 때로는 친구에 의하여 배신당하고, 원수에 의해서 핍박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더구나 우리는 때때로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원수들이 크게 지배하고 우리의 기백이 소침되어도 그리고 내부에는 공포가 있고, 외부에는 투쟁이 있어도 우리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어떠한 환경에 있어도 아무리 어떻게 하여도 “그러나”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위로할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절망이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절망적인 상황을 주님의 약속을 향한 전진의 기회로 변화시키는 생활을 합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 놓였을 때 체념하고, 포기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선다’는 말은 계속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때로는 우리 앞에 원치 않는 장벽도 막히게 마련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에게 그 어려운 길을 가지 않게 하겠다”고 말씀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은 많습니다. 그는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이 위험한 길을 걷게 하실 때도 있지만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해 다른 좋은 길을 예비해 두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힘으로 감당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절망하지 말고, 주저앉지 말고 이 절망적인 상황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전진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빅톨 유고가 49세 때였습니다. 그는 불행하게도 게르세이 섬에 추방되어 20년 동안을 외로운 섬에서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빅톨 유고는 이런 상황에서 절망하지 아니하고, 포기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절망을 소망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거기서 그는 세계적인 불후의 명작 「레미제라블」을 저술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게르세이 섬의 귀양살이가 없었다면 그와 같은 명작을 남길 수 있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섭리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때로 우리는 계획하고 바라던 일을 완전히 포기하고 다른 길을 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편지할 때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했습니다. 바울의 계획과 꿈은 서바나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행은 정말 감격적이며 인상적이었고 획기적인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서바나로 가기는커녕 로마에 가게 되었고 그것도 춥고 지저분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먼 곳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기회는 얻지 못하고 오히려 감옥에 갇혀서 핍박을 당하고 죽음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희망했던 것은 하나도 안 되고 오히려 실패와 고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의 감옥 생활이 꼭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의 생활은 너무 비참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처한 환경이 하나님의 뜻이든 아니든 간에 절망적인 상황을 하나님의 뜻을 향한 전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는 그의 운명을 저주하고 간수들을 욕하고 비난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향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12절에 보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감옥에서 만난 간수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은 그가 원하고 계획했던 기회를 얻지 못했을 때 그에게 주어진 어려운 환경을 최선의 기회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위대성입니다.
많은 사람은 절망적인 환경을 선용하지 못하고 곧잘 좌절해 버립니다. 물론 모든 감옥 생활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모두 아침의 밝은 빛을 비추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주님은 구세주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일로 인해서 내 마음이 감옥에 갇힌 것과도 같이 낙심되고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분이 있으십니까? 이 절망적인 상황이 유익한 방향으로 바뀌어 가도록 최선을 다 하십시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도와주실 줄 분명히 믿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실패했다면 절대로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실패가 정말 수치스러운 것은 실패를 부둥켜안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일에 실패하여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수치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지와 용기를 잃고 목표마저 잃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다시 일어날 의욕을 잃고 단념해 버립니다. 믿음은 모든 두려움을 정복하고, 사랑은 미움을 정복합니다.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행동은 과거의 실패를 극복해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과거의 실패를 마음에 부둥켜안고 거기에 휩쓸려서는 안 됩니다.
어느 날 저녁 부활하신 예수님은 실패감에 사로잡혀 수치와 공포, 그리고 절망 상태에 빠져 있는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는 먼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두려움에서 벗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절망에 빠진 우리에게 사명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가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는 과거의 실패에 절망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성공할 것이라는 소망과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겐 절망이란 없습니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은 하나님께는 가능합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절망하지 말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우리를 승리의 길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 무한하신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가득 차므로 절망과 공포가 물러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이 떠날 때 두려워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가득 채우세요 절대로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 37:24).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며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어려울 때 주님을 의지하세요. 주님께 매달리세요. 그 팔에 안기세요. 믿음 없는 사람은 어려운 일 당할 때 두려워하고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찾음으로, 능력의 팔에 안김으로 평화를 누리는 축복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겐 절망은 없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과 조건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질그릇 같으나 보배이신 예수님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축복을 다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