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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이신칭의 복음의 적용: 성령 안에서의 삶(로마서 12:1-15:13)
로마서의 본론 부분은 크게 두 부분으로, 즉 1:18-11:36절과 12:1-15:13절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이신칭의 복음의 의미로서 인종과 신분과 성을 초월하여,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크리스천의 신분의 문제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반면에 후자는 이신칭의 복음의 적용 곧 크리스천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관한 삶의 문제에 관하여 말한다. 전자는 주로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직설법(과거형)을 말하고 있고, 후자는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아직도 계속 이루어져 가야할 명령법(현재와 미래형)을 말하고 있다. 전자는 삼위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다면, 후자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적절한 삶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1:18-11장까지 크리스천의 삶에 관한 교훈이 전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울은 이미 1:5절에서 “믿음으로 부터 오는 순종”에 대해 언급했고 2:7절에서도 참고 선을 행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6장에서는 새 생명가운데서 행할 것과(6:4) 의의 종으로 살 것(6:18)을 제시하고 8장에서는 성령을 따라 살 것(8:5-6)을 각각 주문하고 있다.
하지만 12장부터 바울은 본격적으로 명령법을 사용하여 크리스천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다. 로마서 전반부와 후반부에 나타나고 있는 직설법과 명령법, 신분과 삶에 관한 이와 같은 전환은 로마서만의 특유한 것은 아니다.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등에서도 나타난다. 흔히 주석가들 중에 전자는 하나님의 사역을 말하는 신학적 영역으로, 후자는 인간의 사역을 말하는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영역으로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존재와 행위, 신학과 윤리를 나누는 이와 같은 이분법적인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다. 전자가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인간의 책임적인 응답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반드시 요구하고 있다면, 후자 역시 인간으로 하여금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을 필수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없이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 없이 우리의 의로운 삶은 불가능하다. 이 처럼 전자와 후자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성령이 각각 그 중심에 서 있기 때문에 양자의 분리는 불합리하다.327)바울의 구성과 서술에 있어서 전자와 후자가 구분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전자와 후자를 분리시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자유와 책임을 배제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합당한 삶이 성령의 역사를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서 1:5절에서 자신의 사역을 가리켜 “믿음으로부터 오는 순종”을 가져오기 위한 것으로 말하고 있는 사실이 이점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로마서 후반부에 속하는 12:1-15:13절은 12:1-8절, 12:9-21, 13:1-14절, 14:1-15:12절 등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신자의 영적 은사에 관하여(12:1-8), 둘째, 신자와 그를 핍박하는 자와의 관계에 관하여(12:9-21) 셋째, 신자의 정부와 사회에 관한 태도에 관하여(13:1-14), 넷째, 로마교회 안의 직접적인 현안의 문제인 이방인신자(강한 자)와 유대인신자(약한 자)와의 갈등의 문제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14:1-15:12).
1. 크리스천의 삶의 원리와 적용(12:1-8)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3)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4)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5)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6)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7)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8).
본문개관
로마서 12장의 첫 문단에 해당하는 12:1-8절은 1-2절과 3-8절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부분에 해당하는 1-2절은 12장의 윤리적인 권면은 물론, 12-16장에 나오는 전 권면 부분의 서론에 해당하는 대원칙을 말한다. 반면에 둘째 부분에 해당하는 3-8절은 바울의 실제적인 권면의 첫 부분에 해당하며 합당한 교회생활의 실제적인 원리를 말하고 있다.
본문주해
①통전적인 변화로서의 크리스천의 삶의 기반(1-2절)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산에서 주어진 모세의 율법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 요구되어진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구속을 받은 신약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그들에게 주어진 성령을 따라 살 것이 요구되고 있다. 예수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이, 마태복음 5-7장에 있는 산상설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수많은 윤리적 교훈을 포함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 준다. 12절 초두에 나타나고 있는 “그러므로”는 1:18-11:36절을 통하여 설명된 신자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이 되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직설법의 전 내용을 가리킨다. 신자의 삶에 관한 권면, 곧 명령법은 여기에 근거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함을 받아 새 사람이 되지 않았고, 새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성령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명령법이 주어질 수 없다. 설사 명령법이 주어진다하더라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지키는데 실패하였던 것처럼 신약 시대의 성도들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신약교회 성도들은 구약의 출애굽사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고, 효력이 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구속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시내산의 율법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더 탁월하고 효력이 큰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의 성도들은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다른 위치에 있다. 바울은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란 말로 표현한다. 여기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같은 말로서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그의 신실하심을 대변하고 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1-11장을 통하여 설명하였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하심, 곧 1:18-11:36절을 통해 설명한 직설법에 근거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참 감람나무와 돌 감람나무의 구분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된 로마의 크리스천들에게 실천적 삶에 관한 명령법의 교훈을 준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문제만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크리스천의 삶도 똑같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것이 일반 세상 윤리와 다른 기독교 윤리의 특징이다.
기독교 윤리는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응답에서 나오는 것이다.328)바울의 윤리를 가리켜 ‘은혜의 윤리’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신자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항상 명심하여야 할 세 가지 총체적인 삶의 원리를 밝힌다. 첫째는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둘째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 셋째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는 것이다. 사실상 이 세 가지는 12-15장에 나타나고 있는 모든 윤리적 교훈을 총괄하는 총론에 해당한다. 이 세 가지가 먼저 수행되지 않는다면 실질적으로 그 어떤 개별적인 윤리적 행위도 불가능하다.
첫 번째 권면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바울은 이를 가리켜 ‘영적예배’라고 지칭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만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 전체를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과 영혼 전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존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삶 전체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 여기 ‘영적예배‘를 가리키는 헬라어 ’텐 로기켄 라트레이안‘(τὴν λογικήν λατρείαν)은 그 앞에 나오는 ’너희 몸‘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지성을 포함하여 전인격적으로 드려야 할 통전적 예배를 가리킨다. 구약의 제사에서는 짐승을 죽여 하나님께 제물로 받쳤지만 바울은 신약의 성도들을 향해 우리의 살아있는 몸 그대로 하나님께 드릴 것을 권면한다. 우리의 몸을 드리라는 것은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이다. 우리의 지성, 감성, 건강, 재물, 직업, 사업, 학업 등 우리가 관여하는 모든 삶의 영역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영역 그 어느 하나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거나 그리스도의 주권으로부터 벗어나 있을 수 없다.
종교개혁자들이 크리스천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라고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기서 바울은 헬라사상에서처럼 우리의 삶을 크게 영적인 부분과 세상적(육)인 부분으로 나누지 않는다. 헬라사상에서는 영적인 부분은 높고 귀하고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으로 보는 반면에, 세상적인 것은 천하고 일시적이고 가변적이고 속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전 삶의 영역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 있는 거룩한 것이 되어야 함을 언급 하면서 육체와 정신, 성과 속을 분리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이 모두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영적예배라는 것이다.329)
두 번째 권면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4절에서 이 세대를 가리켜 악한 세대로 부르고 있다. 죄와 어두움과 사탄의 세력들이 여전히 이 세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골로새서 1:13절의 “그가[하나님]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는 말씀처럼 신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하여 악한 세상으로부터 건져졌다. 하지만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현재형의 명령법 동사는 신자가 이 세상 안에 살고 있는 한 여전히 이 세대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신자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계속적으로 악한 세대에 동화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의 세대를 좌우하는 악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1:18절 이하에서 설명하고 있는 모든 불경건과 불의, 곧 창조주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영광을 피조물에게 돌리고 하나님이 정한 창조의 질서를 거역함으로 일어난 모든 도덕적, 사회적 범죄를 가리킬 수 있다. 여기에는 물질과 성과 명예를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여러 형태의 우상숭배도 포함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세대를 본받지 않을 수 있는가?
세 번째 권면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두 번째 권면이 소극적인 권면이라면 세 번째 권면은 적극적인 권면이다. 여기 “변화를 받으라.”는 말이 현재 수동태로 쓰여졌다는 것은 이 변화가 사람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성령만이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그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세상에서 신자의 성공적인 삶은 율법에 의한 삶이 아닌, 오직 성령 안에서 성령에 의한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악한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계속해서 성령에 의한 삶을 살 수 있는가? 그것은 고린도후서 3:18절의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의 말씀처럼, 우리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사역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의 말씀 가운데서 주의 영광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발견할 수 있다.330)그렇게 할 때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 하신다.
②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 크리스천공동체
3-8절은 신자가 성령을 통하여 계속해서 변화를 받아 새롭게 되어 갈 때, 그가 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삶을 살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1-2절이 뿌리에 관한 문제라면 3-8절은 열매에 관한 문제이다. 뿌리가 정상적이면 그 열매도 정상적일 수 있다. 그러나 나무는 그 열매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열매가 정상적이 아니면 그 뿌리도 정상적이 아닐 수 있다. 3-8절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3-5절은 신자가 교회 생활을 할 때 자신과 동료 교인들에 대하여 어떠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으며, 6-8절은 구체적인 봉사의 영역에 관한 교훈을 주고 있다. 3-5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몸과 각 지체에 관한 실례를 들어 교회 안에는 다양한 구성원들이 있지만, 모두 그리스도의 한 몸을 구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모든 신자는 각자 한편으로 자신이 다양한 구성원 중의 하나임을 알고 다른 구성원들에게 겸손할 것과, 또 다른 한편으로 각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알고, 그들을 형제자매로서 소중하게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에 대한 겸손과 상대방 신자에 대한 존중이 다양성과 통일성을 함께 가진 교회생활의 핵심이다. 이것이 무너질 때 교회는 무질서와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에 대한 겸손과 동시에 형제자매들에 대한 존중이 가능할 수 있는가? 그 핵심적인 대답은 지체와 몸의 비유에서처럼 모든 신자는 몸의 각 지체처럼, 어느 하나가 없으면 장애자가 될 수밖에 없을 만큼 모두 다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과 함께, 모든 신자가 함께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바른 이해를 가질 때만이 가능하다. 내가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인 것처럼 상대방도 그러하며, 내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고 있는 것처럼 상대방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고 있고, 내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소중한 은사를 받고 있는 것처럼 똑같이 상대방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소중한 은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진정한 자기겸손과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내 자신은 물론 내 형제자매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평가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갈라디아 3:28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종과 신분과 성의 차별과 장벽이 제거되고 하나가 된다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331)
6-8절은 교회 안에는 실제적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각 은사를 소유한 자들은 어떤 자세로 그 은사를 활용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의 통일성은 은사의 다양성을 배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은사의 다양성을 통하여 교회의 통일성이 세워져 간다는 것이다. 우선 6절 초두에서 바울은 모든 은사는 우리의 노력의 산물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임을 밝힌다. 은사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모든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한 가지 이상의 은사를 받은 자라고 말할 수 있다.332)은사 없이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 사이의 차이점은 누가 은사를 받았고, 누가 은사를 받지 않았다는 점에 있지 않고 모두가 똑같은 은사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333)이처럼 바울은 은사의 출처와 다양성은 신자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모든 은사가 다 같이 소중하고 상하, 빈부, 귀천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그런 다음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예언, 섬기는 일(봉사), 가르치는 일, 위로 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 7곱 가지의 은사를 실례로 든다. 그리고 예언의 은사334)를 받은 자는 믿음의 분수대로, 즉 개인보다 교회를 섬기는 일에, 봉사의 은사를 받는 자는 진정한 봉사정신을 따라,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자는 가르치는 일에 전념함으로, 위로의 은사를 받는 자는 위로하는 일에 전념함으로, 구제의 은사를 받은 자는 자신을 들어내기 위함이 아닌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줌으로, 다스리는 은사를 받은 자는 열정적인 자세로, 그리고 긍휼을 베푸는 자는 항상 기쁨으로 하여야 할 것을 교훈한다. 그렇게 할 때 모든 은사는 그 은사 수여자의 본래 목적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최갑종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