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작은 아버지 댁에서 다녔다. 작은 아버지는 대구 시민운동장과 대구방송국(현 북대구 전신전화국) 사이의 비교적 환경이 좋은 주택가에서 사셨다. 주변은 고만 고만한 한옥들이 길을 사이에 두고 늘어서 있는 아주 조용하고 쾌적한 곳이었다.
60년대 초 우리나라의 전기나 수도 사정은 아주 열악하였다. 전기는 특선이니 일반선이니 하여 전기가 안 들어오는 때도 있었고 도둑 전기를 몰래 훔쳐서 쓰는 경우도 많았다.
괜찮은 주택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수도 사정은 더욱 더 열악하였다.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집에는 샘은 있었으나 수도는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작은아버지 댁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큰길가에 있는 약국집의 수돗물을 받아서 사용하였다. 한 집에는 보통 주인댁과 세 들어 사는 가구가 한두 가구씩은 되었다. 그러다보니 수돗물을 받는 일은 집안에서 매우 중요한 일의 하나가 되었다.
내가 작은 아버지 댁에 들어간 어느 날부터 수돗물을 받는 일은 내가 맡게 되었다. 약국집 수돗물을 받으려면 아침이나 저녁은 항상 줄을 서야만 하였다. 나도 그 대열에 끼어 차례를 기다려 수돗물을 받았다.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줄기의 힘은 너무나도 약했다. 좀 늦게라도 가면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하루에 필요한 수돗물을 절반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수돗물은 두 개의 양동이가 달린 물지게로 져서 날랐다. 시골에서 자랐지만 지게는 져보지 않은 터여서 출렁거리는 물지게를 쏟지 않고 져 나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몇 번을 져 나르니 요령이 생겨서 금방 익숙해졌다.
무엇보다 나를 힘겹게 한 것은 작은 아버지 댁에서 학교까지는 버스로 30여 분 정도, 걸어서는 1 시간 20분이 소요되는 거리였다. 줄을 서서 물을 받으면 학교는 지각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신「최석호」선생님은 1학년 영어를 담당하셨다. 선생님은 매일 1교시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아침자습을 시키셨다. A4 용지 반 장 정도의 크기에 영어 문제를 낸 프린트 물을 풀게 하셨고, 반 아이들이 제다 풀었다고 생각이 되면 풀이도 해 주셨다. 나는 자주 지각을 해서 그 문제 풀이에 참여 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생님은 늦게 등교한 나에게 문제지를 주시며,
“왜 이렇게 늦느냐? 문제는 꼭 풀어 보거라.” 라고만 하셨지 꾸중은 하지 않으셨다. 내가 시골에서 유학 온 아이로 작은 아버지 댁에서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계셔서 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였으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지각을 하지 않는 방법은 아무도 오지 않는 이른 새벽에 물을 받아놓는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었다. 모두가 잠든 꼭두새벽에 살며시 물지게를 지고 나가서 약국집 뒷문을 살짝 밀어 보았다. 문이 잠겨 있었다. 고요히 잠든 새벽녘이라 문을 열어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집으로 다시 돌아가면 다른 사람들에게 차례를 빼앗기게 될게 틀림이 없었다. 그러니 문 앞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었다.
약국집 안에서 수돗가로 나오는 인기척이라도 나면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너무도 반가운 나머지 무례인 줄도 모르고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아주머니, 물 받으러 왔어요. 문 좀 열어 주이소.” 아주머니는 놀라시며
“아니? 학생, 많이 기다렸나?”
“아니라요. 금방 왔어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린다는 사실을 아시고는
“학생, 내일부터는 밤새 이 통에 물을 받아서 통금 해제가 되면 뒷문을 열어 놓을게. 그 물을 퍼가고 꼭 대문은 닫고 다녀라.”
“예, 아주머니, 정말 고맙심더.”
공부하기에도 바뿐 학생이 수돗물을 받으러 오는 모습이 안쓰럽게 생각되셨는지 약국집 아주머니께서 밤사이에 물을 커다란 통에 가득 받아두셨다가 나에게는 그 물을 퍼가게 해 주셨다. 모든 사람들이 잠든 새벽녘에 물을 받으러 가면 어김없이 문을 열어 두셨다. 때때로 내가 오는 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수돗가에 나오셔서 아침 준비를 하시는 경우도 있으셨다.
자기의 피붙이 인들 꼭두새벽에 문을 열어주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여름은 밤이 짧아서 힘들 테고, 겨울은 찬바람 맞으며 물을 받아 두고 뒷문을 열어주기 위하여 일삼아 나오시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임이 분명할 텐데......·
약국집 아주머니는 정말 가슴이 따뜻하신 나의 고마운 ‘이웃’이었다.
작은 아버지 댁에서 나와서 누님 댁에 있을 때에도 그 약국집 앞을 지날 때면, 그 아주머니의 고마운 마음이 떠올라 ‘아주머니 고맙습니다.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라고 마음속으로나마 늘 기원하였다.
그 때의 그 마음이 따뜻하신 아주머니를 가끔씩 떠올리며 남의 이야기처럼 내가 맡은 까만 눈동자들에게 예화로 들려주곤 하였다.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지 모르지만 내 마음 속에는 약국집 아주머니는 ‘가슴이 따뜻한 다정하신 나의 이웃’ 으로 영원히 자리하고 있다.
'아주머니 보고 싶습니다.'(2014. 4. 23)
첫댓글 당시 시대상을 잘 반영한 좋은 글입니다. 우리가 자라나던 시절은 정말 모두가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의 진솔한 글.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옛추억이 생각나는 작품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때의 그 모습이 그림처럼 보이는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따스한 인간의 정을 느끼게 하는 글입니다. 정이란 괴로움도 슾픔도 치료해 주는 약이 되겟지요. 진솔한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