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 셋째 아들 김희영 회고
아버님이 늘 말씀하시던 것을 아래에 적어본다.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나 24세에 아버지 규진을 여의고 과부 어머니 강옥산의 슬하에서 자랐다. 경험이 없는 살림을 맡아 보게 되어 가산은 점차 빈곤에 들었다. 시국에 대하여 항상 비분하던 중 동학난과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그래도 무식한 아버지 규진의 배려로 어려서 형 진수와 같이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하시었다. 집은 가난하고 어떻게 하면 집안을 중흥시킬 수 있을까 하고 밤낮 심려하던 중 아랫가쟁이 족숙 김규덕(재명)씨가 서울 출입이 잦은지라 의병난리와 동학란을 피할 겸 27세때 그를 따라 상경하시었다는 것이다.
서울 올라와서 의지할 곳이 없어서 방황하다가 서빙고 건너편 새뜰(신평)이라는 곳 이경재씨 가에 유숙하게 되었다. 그 곳에서 동리아이들에게 한문글을 가르치셨다. (김재명은 김원성의 아들로서 그 전부터 서울 출입이 빈번하였으며 서울에 올라와서는 명문자제들에게 한문공부를 가르치셨다고 한다) 아랫가쟁이 명가에서 집안 아이들을 모아놓고 한문공부를 가르셨는데 아버님께서는 그 곳에서 한문문리를 터득하시었다고 한다.
그 뒤 조부 재성 씨 서거로 가쟁이 집에 내려갔다가 다시 서울 올라와서 우연히 고향 친구 김유(상주 화녕거주 한학자. 김세영의 부친. 산림 송연제의 수제자. 후에 김봉수라 이름 고침)를 만나 그의 소개로 함께 이용태 이판서 집에 문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송연제는 유림 척화론의 마지막을 빛낸 사람으로 을미오조약때 김유의 권고로 유림의 고절을 지켜 자결 순국함. 이용태 이판서는 송연제의 질녀사위란다. 이판서 댁에서 기거하면서 그곳 동정을 살펴보니 그곳에 모여드는 자들이 모두 협작배들로서 그 집에 오래 있어 보았자. 큰 희망이 없음을 알았다.
을사늑약(1905년 11월 7일)이 한일간 체결되자 민영환 충정공이 자결순국(1905년 11월 30)하니 장안의 백성들은 인심이 물끓듯하고 통곡하니 모두 마음이 가라않지 않고 비분강개의 정을 금치 못하였다. 하루는 이통에 인사동 승동예배당에 찾아갔다.(아버님 친구이고 동향인이며 5살을 더 먹은 오준영이 찾아와서 기독교 예배당에 좀 가보자해서 함께 승동교회에 갔다.) 믿기로 작정하고 몇 주일 지나서 수요일 저녁예배 보고 나서 사무실에 들어가 서 장로(경신학교교장 서원출의 부. 보성중학교장)를 만나보고 이번 민영환 자결 건을 교회에서는 어떻게 보느냐고 물으니 대뜸 서 장로의 대답이 사람의 목숨은 하나님의 주관하시는데 어찌 자기의 목숨을 자신이 끊느냐. 그것은 옳지 못하고 역적이라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 말씀을 듣고서는 분개하셨다는 것이다. 예수교란 이런 것인가. 퍽 의아하셨다는 것이다.
예수교를 의아하고 다니지 않다가 얼마 전에 상동청년회에서 입회하여 시사토론회에 참석하다가 상동예배당으로 가서 청년회장 전덕기 목사를 찾아보고 역시 민영환 건에 대하여 재차 물어보니 전덕기 목사님의 대답이 서 장로가 말씀한 것도 옳기는 옳으나 그 해석여하에 따라서는 이번일 만큼은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시리라고 믿는다고 충신이 아닌가. 아버님께서는 전목사가 비범한 인물이고 또 그의 말에 크게 감동되어 앞으로 상동예배당에 다니겠다고 하니 전목사께서 크게 환영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당에 나가기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이용태 판서 댁에 있을 때 하루는 이판서가 소개편지를 써주면서 세무사 채용시험에나 한번 응시하여 보라고 하여 시험을 보았더니 다행이 합격되었더란다. 그래서 곳 경북 의성군청 세무주사로 채용되어 세무행정을 보았다고 하신다. 그러나 도대체 아버님 생리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과장으로 있는 일본놈의 불응에 의견이 서로 충돌되어 그곳에 오래 있지 못하고 가장리 집으로 돌아와 계셨다는 것이다.
어머니 강옥산의 환갑을 치르시고 다시 서울에 올라와서 도로 이판서댁에 가 있었다. 그 뒤 전목사의 권유로 거처를 상동예배당 안 사택으로 옮기고 하여서 곧 이거 하셨다. 그 뒤 전목사에게 사숙하고 성경도 배우고 독립협회가 해산되니 새로 사상애국단체 신민회 조직하는데 이에 가담하고 그 근처지가 상동 예배당이 되어 그때 저명인사들과 많이 접촉하였다. 이때에 역시 전목사의 덕분으로 공옥학교(1909), 상동청년학원(1908)에 교편을 잡었다.
역사가 신채호씨의 말이 늘 어찌하여 조선놈은 조상 할애비가 그렇게도 많으냐 기자도 위만도 몽고도 여진도 사대주의자들에 의하여 조상으로 섬기니 나라가 제대로 잘될리 없다. 오직 조선의 할애비는 단군하나 뿐이 아닌가 하더란다. 어학자 주시경도 말하기를 글이 있어야 그 나라가 독립할 수 있지 않은가. 아버님께서는 이 두분의 말씀에 퍽 감동되었다고 하신다. 공옥학교와 상동청년학원에서 역사교원을 하여 다소 봉급을 받게 된 후 시골 가장리 집안 식구를 하나둘씩 모두 서울로 끌어 올렸다. 오직 큰 아들 덕영만은 과부 어머니 강옥산 과부 형수 이화산을 모셔야 하기 때문에 시골에서 농사짓고 집을 지키고 있었다.
전목사 사망(1914) 후에는 좋은 친구 한사람을 잃고 낙심하고 있던 중 배재학당 신흥우 교장의 초청으로 배재학당 성경교원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국사, 조선어, 한문, 습자 등도 가르치시었다. 신 교장은 일인 앞잡이 한설 씨를 배재학당 교원으로 채용하여 총독부 학무국과 사무교섭을 하게하고 또 그때 감리교 해리스감독이 있었는데 이 자도 친일파로 신흥우 교장과 극친한 사이로 신 교장을 해리스 감독이 수양아들이라고 하여 세상에서는 신 교장을 언짢게 여겼다. 그 뒤 아펜셀라 이세가 배재학교 교장에 부임하자 아버님께서는 특히 아펜센라 교장의 총애를 받으시고 신용이 있어 금전거래도 다소 하셨다.
1926년 아현동에 병원을 차리고 있는 원군민이라는 아버님 제자가 있었는데 자기 친족 원정룡(국제공산당원)을 아현동 27의 2 우리집에 좀 두어달라는 요청에 아버님을 허락하시어 동거하였다. 돈도 우리집에 많이 맡겼다. 나는 그때에야 비로소 조선은행권 백원짜리를 보았다. 차차 왜경의 감시가 너무 심하여 아버님 신변까지 위험을 느껴 만부득이 무슨 방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집안 살림을 헤치기로 하고 어머니 김소양은 인천 도화동 아들집 김덕영 가로 가시고 아버님과 나는 경성부 행촌동 85 미곡상 전도사 이관식 씨댁(정동교회)에 하숙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배재학교 계실 때는 근원 강매선생과 친형제처럼 지냈다. 인천내리 예배당에 계실때는 애국부인 회장 김마리아가 우리 집에 와서 있었는데 상해가는 선편에 여사를 밀파했다. 그때 김기창 선생의 공이 크다. 상해임시정부에서 인천지방에 무슨 임무를 맡겨 특파원 윤응진 씨가 나와서 우리와 연락하였다. 아버님은 극히 인자하시고 남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안하신다. 나는 공부할 때까지 어머니와 함께 오래 살았다. 비밀서류는 인천내리교회 지하실에 묻었다. 할머니 강옥산은 누님 말씀에 의하면 보통 어른이 아니라고 며느리 이화산, 김소양 두 며느리가 꿈쩍 못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