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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5장 7-11절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5장은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포도나무로부터 영양분을 공급 받아야 한다는 게 핵심 내용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주의 백성의 열매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1절에서 나는 참 포도나무이지만 내 아버지는 농부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로만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포도나무와 가지 전체를 관리하시면서 돌보시는 분이 누군가? 성부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2절에서는 농부가 하는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지만, 반대로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깨끗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열매의 유무에 따라 어떤 가지는 제거하시지만, 어떤 가지는 그냥 내버려두는 정도가 아니라 더 풍성을 열매를 위하여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인가? 물론 참된 신자라면 열매 맺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누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누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없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모든 인간은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한 자요, 전적으로 부패한 자요, 전적으로 무능한 자로 시작합니다. 로마서 3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는 말씀에 부합한 자로 있습니다. 당연히 자신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으로 있다는 것, 그 사실을 깨닫는 것, 그런 죄인이 하나님을 찾게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고, 선을 행하게 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역사 없이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있는 자가 누군가? 3절에서 말하고 있는 ‘너희’란 것입니다. 열 두 제자를 부르셨지만 계속해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한 사람은 제외된 ‘너희’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누구도 예외 없이 그리스도께서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해진 자들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미 목욕한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10).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가 있어서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 자들이란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것도 열매라 할 수 있는데, 칼빈의 예정론으로 말하자면 선택의 열매로서 효력 있는 부르심이 저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2절에서 열매의 유무에 따라 제거하거나 더욱 가꾸는 것이 있다고 할 때 3절에서 말씀하신 대상은 이런 점에서 열매가 있는 자들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이들에 대하여 더욱 깨끗하게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결코 제거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깨끗하게 하시는 방식, 그리하여 열매를 맺는 방식은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에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 포도나무로부터 오는 영양분을 공급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4절에서는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5절에서는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해야지만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다고 하시면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 없는 열매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시작만이 아니라 구원의 모든 과정 속에서 열매를 맺는 그 일은 그리스도 없이 주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지난 시간 이 말씀에 대한 가톨릭 입장에 대하여 언급했지만 그들은 이 말씀으로 신인협력을 말합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약화시킵니다. 약화시키면서 결국 그 의미를 전복시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만 있으면 스스로 그리스도에게 협력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은 하지만 그 은혜는 전적이지 않습니다. 은혜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가톨릭만의 입장이 아닙니다. 가톨릭 입장이 반펠라기안주의와 다르지 않다고 할 때 그들 역시 신인협력의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가 공동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인간의 적극적으로 응답이 있어야지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미니안주의의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을 하지만 그 은혜에 응답하고 협력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라고 말합니다. 웨슬리안주의도 동일합니다. 그리스도와 지속적인 연합을 강조하지만,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수적이라고 말하지만, 인간의 지속적인 협력과 헌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성화 과정에 있어서 개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까지 강조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3절에서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해 진 자라 할지라도 그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그리스도로부터 공급되는 것을 받아야지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하는데, 그렇게 거하는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2절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처럼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었다면 계속해서 열매를 맺고 더 풍성히 열매 맺는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셔야 합니다. 여기에 신인협력이 있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의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아담을 창조하실 때부터 의지를 주셨고, 이 의지는 아담의 타락 이후로도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의지는 중생 이후라 할지라도 여전히 남아 있는 부패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중생했기 때문에 중생하지 않은 자와 분명 다르지만,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선과 악의 싸움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면 선이 아니라 악이 이길 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신자의 현 주소입니다.
그럼 불신자는 선과 악의 싸움이 없는가? 일반적으로 그들에게도 선과 악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의 선을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선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출처로 하지 않으며, 또한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할 때 불신자의 선은 하나님 앞에서의 선이 아닙니다. 그런 선과 악의 싸움에서 선을 택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 신자는 선과 악의 싸움이 있지만, 그리고 그 선조차 점과 흠이 있다는 측면에서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 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으로 여겨주셔서 받으시는 겁니다. 이때 선은 우리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선이 아닌 악으로 결과 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이런 우리로 하여금 열매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할 때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영양분을 받아야지만 가지에 열매가 있다는 것인데, 그 일을 위하여 농부이신 하나님이 돌보시고 깨끗하게 하시는 전적인 역사가 있어야 한다, 이 역사 없이는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우리가 피조물이라고 할 때 우리의 의지도 피조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의지에 대하여 ‘자유’라는 말을 붙여 사용합니다. 물론 어떤 면에서 자유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면이 있습니다. 오늘 내가 이 일을 할지, 하지 말지를 결정할 때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할지, 말지를 결정합니다. 이때 의지를 ‘자유의지’라고 말한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가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한 의미에서 ‘자유’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가? 이미 존재 자체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사용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피조물의 의지는 그런 순수함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는 타락했다는 전제가 의지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타락한 자에서 구원의 은총을 얻은 사람은 어떠합니까? 죄책은 제거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 부패가 남아 있습니다. 그런 부패의 영향을 받지 않는가? 받습니다. 그래서 선과 악의 싸움이 우리 안에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선을 향하도록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부패함이 남아 있어서 악을 향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의지 자체도 부패했고 여전히 부패함 가운데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타락했다가 구원을 받으면 우리의 의지가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이 여전히 부패하다고 할 때 의지는 중생 이후 아담과 같은 상태의 의지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부패한 의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의지는 그런 부패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지로 어떻게 선을, 선에 합당한 열매를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참된 신자에게는 스스로 내놓을 수 없는 열매가 있게 하시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의지까지 이끌어서 그렇게 하십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지까지 이끌어서 그렇게 하십니다. 이것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 에스겔 36장입니다. 25절부터 읽으면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5-27) 특히 26절과 27절로 열매가 있게 하시는데, 성령 하나님을 우리 마음에 두시고 그 마음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어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본래는 굳은 마음이지만,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준다는 것이고, 율례를 행하게 한다는 것은 결국 그 부드러운 마음에 말씀을 심어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있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순종도 정확하게는 점과 흠이 있지만, 그래서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지만, 점도 없고 흠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성령의 사역이 무엇인가 할 때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요14:26). 이때 단지 말씀이 생각나는 정도로만 있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에스겔서의 말씀처럼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떨어져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까지 역사하시는 게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지까지도 이끌어 역사하신다는 겁니다. 자유의지라고 말하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부패한 우리의 의지조차 말씀으로 이끌어 결국 열매를 맺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오늘 본문 7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님께서는 4절에서 “내 안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내 안에 거한다는 것은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 거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성령의 역사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함께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너희가 내 안에 거한다는 것은 내 말이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이요, 내 말이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은 거기에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열매가 없을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독특하게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합니다. 열매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데 갑자기 기도와 관련해서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8절에서는 다시 열매에 대해 말씀합니다. 지난 시간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방편으로 말씀이 있다고 말했지만 말씀과 함께 기도도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방편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5)고 전합니다.
일단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고 할 때 거기에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말씀에 대하여 성령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역사하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의 말씀을 하실 때도 그렇고, 15장의 말씀을 하실 때도 그렇지만 이 말씀을 하시면서 제자들을 격려하시고 위로하신다고 해서 저들이 이 말씀을 다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깨닫게 되는 것은 언제냐?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들려질 수는 있지만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이 있는 곳이면 언제나 나타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때가 있습니다.
또 때가 되어 말씀의 역사가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래서 거룩과 관련된 열매를 맺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항상 유지되면서 성장하는 모습으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다윗 등 존중 받을 만한 선진들도 보면 한결 같다기보다는 괜찮을 때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을 때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만 보더라도 분명하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 믿음이 한결같은가? 한결같이 늘 자라기만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넘어지고 일어나면 또 넘어지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일어서는 것은 힘든데 넘어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여러분, 중생한 사람일지라도 우리 안에는 부패함이 남아 있어서 말씀으로 교훈과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말씀으로 교훈과 책망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부패와 관련된 열매들을 맺을 때가 있습니다. 드물게 맺는 것이 아니라 자주 맺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또한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이 땅에서조차 완전성화가 어떻게 불가능하겠습니까? 그가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죄책은 제거하시되 부패는 남겨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완전성화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와 싸우게 하십니다. 죄와 싸우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죄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말씀과 열매를 말하다가 기도를 말씀하시는가? 간단히 말하면 너희는 풍성한 열매와는 거리가 있는 자들이란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분의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열매가 얼마나 됩니까? 오히려 부패의 열매가 더 많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은 포도나무로부터 영양분은 계속해서 공급 받는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는다는 것은 죽은 가지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로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하라고 하십니다. 이때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는 것은 내 욕심대로 세상적인 것들도 구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당연히 말씀 안에서만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하면 이루신다는 겁니다.
특별히 열매와 관련해서 기도를 말씀하시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도의 의미가 나에게는 없지만 하나님께 있는 것을 구하여 받는 것이라고 할 때 모든 열매의 주체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사람들은 기도조차 공로로 돌리는 경향이 있어서 기도를 많이 하고 유창하게 하는 것을 신앙이 좋은 것인 줄로 알지만,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구하여 받는다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는 결코 공로로 돌릴 수 없습니다. 그 말은 자랑꺼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도는 나의 없음을 겸손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부족하다, 없는 자라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실제로 우리에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중생되었을지라도 우리 안에는 부패성이 있어서 죄 외에는 내놓을 수 있는 게 전혀 없다는 것이 우리의 진실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무슨 공로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열매에 대한 이야기에서 기도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결국 열매도 우리 안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구해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새겨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이 마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을 사용하신다고 할 때 그런 은혜의 역사가 있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두 번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모든 열매의 주체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기계처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인격체로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사도 바울의 고백으로 설명하자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더 열심을 낸다는 것, 이것이 기도의 의미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한다고 해서 기도하는 자에게 열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열쇠는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체이시지만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심으로 열매 맺는 그 일에 동참하게 하시고 참여하게 하십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홀로 행하시지만, 그런 측면에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거기에 기도가 있게 하시고 열심을 내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열심을 냈는데 그 열심조차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기도하지만 기도하여 받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실제로 기도도 우리로부터 시작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안에서 기도하게 하심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드심으로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과정 가운데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열매가 있게 하십니다.
결국 3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된 자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더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이끌어 가시는데, 말씀과 함께 오늘 본문은 기도까지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면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이런 열매에 대하여 오늘 본문 8절은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깨끗해 진 자들에게서 열매를 찾으시는가? 더 풍성한 열매를 위하여 그들을 더욱 깨끗하게 하시는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지음 받은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았고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면서 어리석은 일들을 행했습니다. 그 결과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롬1:21-23). 이런 자들 가운데 일부를 구원하신다고 할 때 구원 받은 자들의 모든 목적은 창조의 목적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방식은 무엇인가? 타락한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세우는 데 있습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할 수 없기에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 그 일을 하시면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깨끗해 진 자들에게서 열매를 찾으시는 이유, 더 풍성한 열매를 위하여 더욱 깨끗하게 하시는 이유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라고 할 때 거기서 파생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는 이 말씀입니다. 이것은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지만 그때서야 비로소 제자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깨끗해 진 자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서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열매를 찾으시는 것은, 또한 더 풍성한 열매를 찾으시는 것은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열매로 그들을 알라고 말씀하실 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속한 열매를 맺음으로 그가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열매를 맺어야 하는가? 왜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하여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져야 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부패의 열매만을 내놓는데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제자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에 합당한 순종, 그리고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의 열매만이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임을,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하는 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또한 우리가 누구에게 속한 자임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열매까지 주고자 친히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겁니다.
계속해서 9절을 보시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성을 취하시고 난 뒤 때가 되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 예수님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고 하셨습니다. 이제 공생애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고자 했고, 또 그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계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성부의 성자에 대한 사랑에는 막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데는 막히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이유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너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다만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반드시 아들을 통해서입니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없이 죄인을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실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중보자이신 아들을 통해서 만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죄인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죄인을 사랑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 목숨까지 죄인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으시고자 하시는 겁니다. 즉 사랑의 절정은 장차 있을 십자가를 통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3장에서 본 것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계속해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발을 씻기심으로도 나타내셨습니다. 그런 사랑을 받은 자라면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말씀으로 이미 깨끗해 진 자들, 그러나 계속해서 깨끗해야 하기 때문에 내가 너희 발을 씻긴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이런 식으로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알리셨던 겁니다.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은 그 사랑이 중도에 포기되는 법이란 없다, 멈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하나님이 먼저 하시되 그리스도 안에서 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역시 아버지의 사랑을 따라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시기까지 하시면서 보이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앞서도 말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계명을 지키는 분으로 계셨고, 그것은 죽으실 때까지,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그의 사랑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나를 사랑해야 하는데,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도록 하신다면, 이런 말씀도 동일한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령하시되 명령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레20:7)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레20:8a)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지킬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레20:8b) 그러나 친히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기도하게 하심으로, 순종하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일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형식은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시지만, 내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계명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고, 나아가 내가 너희로 하여금 계명을 지키도록 하겠다. 그리고 그것이 열매로 있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일에 내가 너희로 하여금 동참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 이런 명령의 방식으로 알리시는 겁니다. 결국 기도, 말씀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한 방편이요, 그런 방편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홀로 일하시는 것에 동참하게 하시는 겁니다. 본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고 또한 돌아갈 것이지만 거기에 우리의 지분이 있도록 하셔서 그 지분에 대한 상급까지 허락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일하시는 겁니다. 당연히 그 상급은 우리의 공로의 상급이 아니라 은혜의 상급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왜 이 말씀을 하시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은 무엇인가? 자신이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할 때 가지로부터 열매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한다는 것은 너희의 기쁨도 나의 기쁨과 다를 바 없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으로만 충만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자녀가 좋은 대학 가는 것, 기쁨입니다. 자녀가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 기쁨입니다. 남편의 일 혹은 아내의 일이 잘 되는 것도 기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쁨,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은 그런 세상적인 것들이 아닙니다. 만약 먹고 마시는 것,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기쁨이라면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백성에게 그런 것이 충만하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을 통해 증거 하신 것처럼 그것을 주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거두시기도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기쁨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 진정한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순종할 때 외적인 평안이 있었던 것이고, 불순종할 때 그런 외적인 평안이 깨어졌던 겁니다. 외적인 평안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순종 여부가 목적이었던 겁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하자면 열매가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평안을 주시기도 하시고, 주셨던 평안을 거두시기도 하셨던 겁니다.
요한삼서은 한 장으로 되어 있는데, 4절에 보면 사도 요한이 이렇게 편지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이것은 사도 요한 마음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위해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말씀과 함께 성령 하나님을 우리 안에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1절을 다시 보시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미 너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참된 신자라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의 기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기쁨이 열매요, 그런 열매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런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기쁨도 이미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기쁨으로 여기지 않는가? 왜 그리스도의 기쁨이 아닌 세상의 것이 기쁨으로 있는가? 세상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2:15-16) 그러나 이런 우리에게 오늘 본문처럼 말씀을 주시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기쁨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을 기쁨으로 여깁니다. 그런 우리를 말씀으로 무엇이 참된 기쁨인지를 알게 하신다는 것이요,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기쁨을 더욱 충만하게 하여 그 기쁨을 구하고 그 기쁨이 나타나도록 하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의 기쁨이 무엇인지, 또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다고 할 때 우리의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충만할 수 있도록 구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확인할 뿐만 아니라 구하고 받아 그 기쁨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적인 의미에서 평안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복음으로 말미암는 어려움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기쁨만큼은 더욱 충만한 자로 있게 하십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삼서에서 말한 것처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여기에 마음을 두고 더욱 기도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