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卿宰
姜弘重 碑銘[鄭斗卿]
公諱弘重, 字任甫, 晉州人。 晉之姜, 東方大姓。 遠祖啓庸, 仕麗朝國子博士。 其後諱君寶文敬公、諱蓍恭穆公, 皆聞人, 載國乘。 入我朝, 諱淮仲、諱子平亦至大官。 五代祖諱詗, 大司諫, 燕山甲子, 與三子同日被禍。 夫人金氏, 慟毁不食, 血出背以終, 中廟反正, 旌其閭。 別坐諱永叔是高祖也, 子諱溫, 政府舍人。 子諱士弼, 副提學, 兄弟三人大顯, 世謂甲子之報。 子諱綖, 承旨, 卽公之考也。 妣南陽洪氏, 庶尹仁祉之女。
公生於萬曆丁丑, 氣稟溫雅, 擧止端方。 堂叔承旨公緖, 素以鑑識名, 每器之曰: “吾門之福在此兒。” 甲午, 丁母夫人憂, 喪難流離中, 棺殮不能備禮, 終身以爲慟, 常以薄殮戒家人。 癸卯, 中司馬。 丙午, 登第。 初選槐院, 時相以私有所恚竝去, 公改補成均學諭。 移拜注書、兼侍講院說書, 當詔使接見, 事多記注不錯, 諸公皆稱譽。 一日賊臣爾瞻來見承旨公。 公侍, 曰: “吾欲以說書爲弘文正字。” 承旨公不答。 去, 謂公曰: “對人以名利誘, 何居? 汝其志之。” 公終不通。 遂大憾, 駁薦翰林者, 遷禮、戶、刑佐郞, 移拜騎省。 時宮中尙淫祀, 禁掖如市, 坐執法特罷。 敍爲平安都事, 入拜兵曹正郞。 遷司諫院正言, 瞻黨將禍士林, 誣李相國恒福欲陷重罪, 公獨力救直其枉, 坐是構罷。 後除講院文學、憲府掌令, 見時事日難, 辭不就。 甲寅, 遭內艱, 毁而幾危。 服闋, 拜弼善, 遞拜成均典籍, 轉相禮、尙方正。 掌省試, 策問麟鳳龜龍, 有一擧子對“豺狼當道, 四靈何問”, 諸考官怒欲黜, 公力爭置第一。 兇徒咸憤, 以循私劾, 經年罷。 敍拜通禮, 自母后幽西宮, 除職者畏不敢肅謝, 公獨行之, 衆皆危之。 時女謁擅政以賄成, 公屢擬州郡, 輒不下。 人或爲之勸, 公正色曰: “寧餓死!” 言者不復言。
癸亥反正, 以問事郞治凶黨, 按問明允, 枉者多賴。 爲養乞外, 申相國欽秉銓, 惜其出不許, 力求爲南陽府使, 旋被玉堂選。 未久, 逆适叛, 沿邊守令, 易以武臣, 遞拜承文判校。 爲日本通信介使, 關伯曁沿路贈幣金銀、雜貨鉅萬, 無所取, 蠻人敬服。 使還, 拜軍資監正, 陞通政。 上引見, 勞之曰: “萬里風濤, 無恙往返, 幸甚。” 仍奏彼中事情及諸刷人無依歸狀, 請擇其中年少善砲者屬廩食傳其藝, 厥后火技之妙多由此。 島倭追送其贈物於朝, 上特令使臣受之, 上章固辭者三。 命賜若干貨, 辭不獲, 散諸親戚之貧無賴者。 出爲洪州牧使, 一年罷, 遭後母鄭夫人喪。 制畢, 拜刑曹參議、承政院承旨, 遞爲兵曹參議, 還拜承旨。 公前後居是職三載, 雖祈寒盛暑, 必端坐廳事, 出納惟勤。 每前奏事, 從容中度, 上未嘗不傾聽。 壬申, 仁穆王后昇遐, 古事知申掌殯殮, 特命公越例將事, 仍進階嘉善, 蓋嘗多公盡職也。 拜同知中樞, 旋出按關東。 遞又付西樞, 因臺啓以廉吏擇, 除延安府使, 遞授摠管。 先是, 漢人在椵島, 大爲西民害。 及公爲都督儐伴, 周旋咨奏, 民始按堵。 後, 以特進官入侍, 奏: “西路關防無一可恃, 無財貨以賞, 士卒多解體。 請發京儲激勸。” 不用。 是歲丙子冬, 失盡兵火, 朝廷悔
之。 以事重忤時議, 不樂在朝, 求拜靑松府使, 遞爲同知義禁府事。 俄拜成川府使, 遞歸京第。 壬午九月十八日, 以疾卒于正寢, 享年六十六。 訃聞, 遣禮官致祭弔。 從先兆葬于高陽龍步院午向之原。 凡喪葬之具, 去奢從儉, 遵遺戒也。
夫人坡平尹氏, 僉正起禎之女, 麗朝佐命功臣莘達之後, 生於庚辰, 聰慧淑哲, 通曉義理。 事君子無違, 奉祀享必誠。 待妾媵接宗黨, 俱盡其道, 矩範可式。 年九十有一, 視聽不迷, 子姓繩繩, 榮慶萃至。 雖公積德, 亦夫人種德者然。
子三人。
, 判官, 娶僉知鄭恢遠女, 生二子: 碩老, 縣令; 碩耉, 文科佐郞。 次琠, 府使, 娶都事韓允謙女, 無子。 有側室子女, 皆幼。 次頊, 牧使, 娶司議李昌源女, 生二子: 碩賓, 文科都事; 碩臣, 司馬爲府使後。 側室子珷, 司馬, 娶牧使洪履一女, 生子女幼。 女長適參判鄭斗卿, 不育。 次適進士李錫亨, 有三子二女: 昌興, 司馬; 文興; 壽興。 女長適士人兪命新, 次適進士沈相。 側室女適校尉奇恬, 生二子二女。 內外諸孫五十餘人。
公天性愷悌, 律己簡約, 恬潔自守, 不事交遊。 常謂子弟曰: “吾未見喜動而不敗者。” 又曰: “才不可强也, 廉貪我爾。” 立朝幾四十年, 未嘗汲汲爲進取計。 位亞卿, 屢典州府, 寒素若韋布, 家徒四壁。 及喪, 金相國堉及諸弔客咸歎其淸白。 惜乎! 以公淸名節行, 若可以有爲, 扼於時不大用, 用亦多斥外, 年位俱不滿德, 可憾也。 用子
原從勳, 贈吏曹判書。 斗卿少贅, 今已白首, 知公之志操內行莫如余。 銘曰:
於赫晉姜, 族鉅海東。 自昔迄今, 世出名公。 燕山絶天, 賊虐賢輔。 有諫而死, 實惟公祖。 公念厥祖, 忝爾之懼。 世道險艱, 不變平素。 知熱守寒, 知樂守苦。 世之所趨, 公獨不赴。 世之所避, 公獨不顧。 觸忤群小, 不憚彼怒。 賢相之誣, 是暴是白。 策士之直, 是取是擢。 不紹厥聲, 以是爲刻。
강홍중[姜弘重]의 비명(碑銘) 정두경(鄭斗卿)
악군인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된 강공의 묘비〔岳君江原道觀察使贈吏曹判書姜公墓碑〕
공(公)의 휘(諱)는 홍중(弘重)이요, 자(字)는 임보(任甫)이며, 진주(晉州) 사람이다. 진주 강씨는 우리나라 대성(大姓)으로 먼 선조 강계용(姜啓庸)은 고려 때 국자 박사(國子博士)를 지냈고, 그 후손 문경공(文敬公) 휘 군보(君寶), 공목공(恭穆公) 휘 시(蓍)는 모두 명성이 드러난 사람으로 국사[國乘]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에 들어와 휘 회중(淮仲)과 휘 자평(子平) 역시 높은 관직에 이르렀으며, 5대조 휘 형(詗)은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는데, 연산조(燕山朝) 갑자 사화(甲子士禍) 때 같은 날 세 아들과 화를 당했다. 부인 김씨는 그 충격으로 아무 것도 먹지 못하다가 등에서 피가 나 죽고 말았는데, 중종 반정 때 정려(旌閭)되었다. 별좌(別坐) 휘 영숙(永叔)은 고조부이며, 그 아들 휘 온(溫)은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이며, 그 아들 휘 사필(士弼)은 부제학(副提學)으로, 형제 세 명이 세상에 크게 드러났으니, 세상에서 갑자 사화 때 당했던 화의 보답이라고들 했다. 그 아들 승지(承旨) 휘 연(綖)이 바로 공의 부친이며, 어머니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서윤(庶尹) 홍인지(洪仁祉)의 딸이다.
공은 만력(萬曆) 정축년(丁丑年, 1557년 선조 10년)에 태어났다. 기품이 온아(溫雅)하고 행동 거지가 단정하고 방정했다. 당숙(堂叔)인 승지공(承旨公) 강서(姜緖)는 평소 감식(鑑識)을 잘하는 것으로 이름이 있었는데, 매번 그의 재기(才器)를 중히 여겨 말하기를, “우리 가문의 복(福)은 이 아이에게 있다.”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난리를 당해 떠돌아다니는 중이라서 장사 치르는 데 예의를 갖출 수가 없었던 것을 종신토록 애통하게 여기어 항상 간소한 장례를 치를 것을 집안사람들에게 경계하였다. 계묘년(癸卯年, 1603년 선조 36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병오년(丙午年, 1606년 선조 39년) 과거에 올라 처음 괴원(槐院)에 뽑혔다. 당시 재상이 사사로이 분노하는 바가 있어 함께 공을 물리쳐, 공은 성균 학유(成均學諭)에 보임되었다가 주서 겸 시강원 설서(注書兼侍講院說書)에 이배(移拜)되어 조사(詔使)를 접견하는 일을 담당하여 기주(記注)한 것이 많았는데, 잘못된 것이 없었으므로, 제공(諸公)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하루는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승지공(承旨公)을 뵈러 왔고, 공이 모시고 있었는데, 말하기를, “설서(강홍중을 말함)를 홍문 정자(弘文正字)로 삼고 싶습니다.”했다가 승지공이 대답하지 않으니, 가버렸다. 승지공이 공에게 말하기를, “상대방이 명리(名利)를 가지고 유혹하면 어떻게 너는 뜻하겠느냐?”하였으나, 공은 끝내 통달하지 못하자 드디어 크게 유감스럽게 여겨 한림(翰林)으로 추천한 자를 논박하였다.
예조 좌랑(禮曹佐郞)ㆍ호조 좌랑(戶曹佐郞)ㆍ형조 좌랑(刑曹佐郞)으로 옮겼다가 병조(兵曹)로 이배되었다. 이때 궁중에서는 음사(淫祀)를 숭상하여 궁궐이 저자와 같이 되고 말았는데, 법을 집행하는 데 연좌되어 특별히 파직되었다가 서용되어 평안 도사(平安都事)가 되었으며, 내직으로 들어와 병조 정랑(兵曹正郞)에 제배되었고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옮겼는데, 이이첨의 무리가 사림(士林)에게 화를 입히고자 상국(相國) 이항복(李恒福)을 무고하여 중죄에 빠뜨리려고 하니, 공이 홀로 힘써 구제하였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다가 이에 얽혀 파직되었다. 뒤에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의 문학(文學)과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제수되었으나 당시 일이 날로 어려워지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갑인년(甲寅年, 1614년 광해군 6년)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지나치게 슬퍼하다 몸이 상해 거의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다. 상을 마치자 필선(弼善)에 제배되었고, 성균 전적(成均典籍)에 옮겨 제배되었다가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ㆍ상의원 정(尙衣院正)으로 옮겼다. 성시(省試, 회시(會試))를 맡아 ‘인봉귀룡(獜鳳龜龍)’에 대해 책문(策問)하였는데, 어떤 한 응시자가 ‘시랑(豺狼)이 길을 막고 있는 터에 네 가지 영물(靈物)에 대해서는 왜 묻는가?’라고 답하자, 뭇 시험관들이 화를 내며 쫓아내려 했으나 공이 힘껏 다투어 1등에 놓았다. 그러자 흉악한 무리들이 모두 분하게 생각하여 사사로움을 좇아 탄핵하며 해를 넘기다가 파직시켰는데, 서용되어 통례원 통례(通禮院通禮)에 임명되었다. 모후(母后, 인목 대비(仁穆大妃))가 서궁(西宮)에 유폐되고부터 관직을 제수 받은 자들이 감히 사은 숙배를 하지 못했으나 공은 홀로 행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다. 당시 여알(女謁)이 정권을 마음대로 하여 뇌물이 성행하였는데, 공은 여러 차례 지방관으로 뽑히게 되었지만 그때마다 보내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혹시 뇌물을 바치라고 권하면, 공은 정색하여 말하기를, “차라리 굶어 죽겠다.”하니, 말한 자가 다시는 말하지 못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에 인조 반정이 일어났는데, 문사 낭청(問事郞廳)으로 흉악한 무리들을 다스리는 데 잘못된 것을 살피고 물어 명백하게 한 것이 많았으며, 모친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원했을 때는 상국(相國) 신흠(申欽)이 인사권을 쥐고 있어 그가 외직으로 나가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허락하지 않았으나 힘써 요구하여 남양 부사(南陽府使)가 되었는데, 조금 지나서 옥당(玉堂)에 피선되었으며, 오래지 않아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연변 수령(沿邊守令)을 무신(武臣)으로 바꾸었다.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에 체배(遞拜)되었으며, 일본 통신사(通信使)가 되어 갔을 때에는 관백(關伯)과 연로에서 금은과 잡화 등 거만(鉅萬)을 폐백으로 주었으나 취한 바가 없자 남방의 오랑캐들이 존경해 감복하였다. 사신에서 돌아와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제배되었고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위로하며 말하기를, “풍랑의 만리 길을 무사히 갔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다.”하였다. 이에 저들의 사정과 여러 데리고 돌아온 사람으로 의지할 곳이 없는 상황을 아뢰면서 그중나이 젊고 화포(火砲)를 잘 쏘는 자를 택하여 늠식(廩食)을 풍족히 주어 그 재주를 전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뒤 화포 기술의 신묘함이 이로 말미암은 것이 많았다. 섬나라 왜놈들이 뒤따라 와 폐백으로 주었던 물건을 조정에 보내오자 임금이 특별히 사신들에게 받아 가게 하였는데, 글을 올려 굳이 사양한 것이 세 번이었으나, 명하여 약간의 재화를 하사하므로, 사양하여도 되지 않아서 가난하여 의지할 데 없는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외직으로 나가 홍주 목사(洪州牧使)가 된 지 1년 만에 그만두었고, 계모 정 부인(鄭夫人)의 상을 당하여, 3년상이 끝나자, 형조 참의, 승정원 승지에 임명되었고 체직되어 병조 참의가 되었다가 도로 승지에 제배되었는데, 공이 이 직책에 앞뒤로 모두 3년간 있으면서 비록 큰 추위와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도 반드시 단정히 앉아 왕명의 출납을 맡아 오직 부지런하였고 매번 어전에서 일을 아뢸 때는 조용하게 법도에 알맞게 하였으므로, 임금이 일찍이 경청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임신년(壬申年, 1632년 인조 10년)에 인목 왕후(仁穆王后)가 승하하자 옛 승지였다고 하여 빈렴(殯殮)의 일을 맡기면서 특별히 공에게 전례를 뛰어 넘어 상사를 받들어 행할 것을 명하였으며, 이어 품계를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올렸으니, 대개 일찍이 공이 직분을 다함을 훌륭하게 여겨서였다. 이어서 동지 중추(同知中樞)에 제배되었고 잠시 뒤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체직되어 또 중추부(中樞府)에 임명되었는데, 대계(臺啓, 사헌부ㆍ사간원의 계사(啓辭))에 의해 염리(廉吏)로 뽑혀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제수되었고, 체직되어 총관(摠管)에 임명되었다. 이보다 앞서 한인(漢人)들이 가도(椵島)에 있으면서 조선의 서도(西道) 지방 백성들에게 큰 해를 끼쳤는데, 공이 도독 빈반(都督儐伴)이 되어 자주(咨奏)를 주선하기에 미쳐 백성들이 비로소 편안히 살 수 있게 되었다. 후에 특진관(特進官)으로서 입시(入侍)하여 “서로(西路)의 관방(關防)은 믿을 것이 하나도 없는데다가 상으로 줄 재화(財貨)도 없어 병졸들이 많이 해이해졌다.”고 아뢰면서, 서울의 비축 식량을 보내어 격려할 것을 청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했는데, 그해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 겨울에 병사를 다 잃게 되자 조정에서 이를 후회하였다. 어떤 일로 당시의 의론과 크게 저촉되었으므로 조정에 있는 것이 즐겁지가 않아 청송 부사(靑松府使)를 요구해 제배되었고, 체직되어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가 되었다. 얼마 뒤 성천 부사(成川府使)에 제배되고 체직되어 서울의 집으로 돌아왔다가 임오년(壬午年, 1642년 인조 20년) 9월 18일 병으로 침소에서 졸(卒)하니, 향년 61세였다. 부음이 임금에게 알려지자 예조의 관리를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고 조문하였다. 고양(高陽)의 용보원(龍步院) 선영의 남향 언덕에 장사지냈다. 무릇 장사를 치르는데 사치를 버리고 검소를 따랐으니, 공의 유훈(遺訓)을 따른 것이다.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 첨정(僉正) 윤기정(尹起禎)의 딸로, 고려조 좌명 공신(佐命功臣) 윤신달(尹莘達)의 후손인데, 경진년(庚辰年, 1580년 선조 13년)에 태어났다.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선량하고 현명하여 의리(義理)에 환히 통하였으며, 남편을 섬기는 데 거스림이 없었고 제사를 받드는 데는 반드시 정성껏 했으며, 시첩(侍妾)을 대하고 친척들을 접대함에 그 도리를 다 갖추었으니, 규범이 되고 본받을 만했다. 나이 91세였는데도 보고 듣는 것이 혼미하지 않았으며, 자손들이 대단히 많아 영화와 경사가 무더기로 닥쳤으니, 이는 비록 공이 덕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부인이 덕을 널리 펴서 그러했던 것이다. 아들은 셋인데, 강급(姜)은 판관(判官)으로, 첨지(僉知) 정회원(鄭恢遠)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은 나았으니, 강석로(姜碩老)는 현령(縣令)이고 강석구(姜碩耈)는 문과 급제하여 좌랑(佐郞)이다. 다음 강전(姜琠)은 부사(府使)이며, 도사(都事) 한윤겸(韓允謙)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이 없고, 측실(側室)에게서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다음 강욱(姜頊)은 목사(牧使)이며, 사의(司議) 이창원(李昌源)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으니, 강석빈(姜碩賓)은 문과 급제하여 도사(都事)이고 강석신(姜碩臣)은 사마시에 합격하였는데, 부사 강전의 후사가 되었다. 공의 측실 소생인 강무(姜珷)는 사마시에 합격하고 목사 홍이일(洪履一)의 딸에게 장가들어 자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큰 딸은 참판(參判) 정두경(鄭斗卿)에게 시집갔는데 아이를 낳지 못했고, 둘째 딸은 진사 이석형(李錫亨)에게 시집가서 3남 2녀를 두었으니, 사마시에 합격한 이창흥(李昌興)과 이문흥(李文興)ㆍ이수흥(李壽興)이고, 장녀는 사인(士人) 유명신(兪命新)에게, 다음은 진사 심상(沈相)에게 시집갔으며, 측실 소생의 딸은 교위(校尉) 기염(奇恬)에게 시집가서 2남 2녀를 낳았으니, 내외 손자가 50여 명이다.
공은 천성이 화락하고 단아하여 자기를 단속함에 있어 간약(簡約)하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 깨끗하게 스스로를 지키면서 교류를 일삼지 않았다. 항상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기뻐 날뛰다가 패가 망신하지 않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하고, 또 말하기를, “재주는 청렴ㆍ빈한보다 강할 수 없다. 내가 조정에 벼슬한 지 거의 40년이 되었지만 일찍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급급해하며 계책을 취한 적이 없다.”하였다. 지위로는 아경(亞卿)에 오르고 여러 번 지방 수령을 지냈으나, 가난하게 살아 아무것도 없어 위대(韋帶)ㆍ포의(布衣) 약간에 집에는 다만 네 벽만 있고 세간이 없었으므로, 상을 당했을 때 상국(相國) 김육(金堉)과 여러 조문객들이 모두 그 청백(淸白)함에 감탄했다. 슬프다! 공의 청렴한 명성과 지조 있는 행실로써 시대에 눌려 크게 쓰이지 못했고, 쓰였다 해도 또한 외직으로 배척을 당함이 많아 수명과 지위가 모두 공의 덕망을 채우지 못했으니, 유감스럽다. 아들 강급이 원종 공신(原從功臣)인 까닭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나 정두경은 나이 어린 사위였으나 지금은 벌써 머리가 하얗게 되었는데, 공의 지조와 집에서의 행실을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기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빛나는 진주(晉州) 강씨 해동(海東)의 거족(巨族)이니, 옛날부터 지금까지 대대로 이름난 분들이 나왔다. 연산군 시절 천기가 끊어져 반적(反賊)이 어진 재보(宰輔)를 해쳐, 간하는 자 있으면 죽였으니 공의 5대조가 그렇게 되었도다. 공은 그의 선대 생각하여 욕되게 할까 두려워했네. 세상의 도의 험난하였으나 평소의 지닌 마음 변치 않고서, 더운 것 알아 추운 것 지키고 즐거운 것 알아 괴로운 것 지켰도다. 세상 사람들은 달려갔지만 공은 홀로 나아가지 않았고, 세상 사람들이 회피했지만 공은 홀로 자기를 돌보지 않았네. 뭇 소인배들에게 미움 받더라도 그들의 성냄을 두려워 않은 채, 어진 재상 모함하자 그의 결백함을 밝혀 냈도다. 책략 가진 선비의 강직을 가려 뽑자니 두렵기만 하네. 그 명성 이어지지 않을까 하여 이를 비명에 새겨 두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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