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니(65)-Le Havre와 Dunkerque에서 본 간만의 차와 제철소 입지 르 아브르(Le Havre)는 대서양으로 흘러 들어가는 세느강(Sceine, 센강) 하구에 위치하고 있었다. 파리에서 세느(Scine)강을 따라 대서양까지 가면 그곳이 르 아브르라고 말했다. 트래픽 잼에 따라 파리에서 서너 시간이 걸려 일찍 가야 오전 중에 항만을 볼수 있다고 한다. 파리를 떠나 세느강을 따라 가면서 강 연변에 프랑스의 산업체들이 보였다. 당시 프랑스는 농업국이어서 파리에서 느낌은 관광객과 피아르 가르뎅 같은 명품을 파는 관광산업과 포도주나 생산 판매하는 농업국으로 사는 줄 알았는데 세느강 변의 산업체들을 보니까 역시 프랑스도 공업이 발전한 서구 산업국라는 걸 새삼 느끼게끔 했다. 당시는 도로사정도 그래서인지 7시에 출발해서 휴게소에서 잠깐 쉬고 도착했는데 10시 반이 조금 넘었다. 르 아브로 항만청에 들어가 세심 매니저는 항만운영팀장에게 인사를 시키면서 ‘이번에는 포항제철 GM이 르 아브르를 보고 싶다고 오셨다’고 소개 시켜주었다. 나도 명함을 드리며 한국 포스코(당시 포항제철의 영문명은 현재의 명칭인 POSCO)에서 온 누구라며 항만을 좀 보여 주시면 고맙겠다고 인사를 했다. 그는 손님이 왔는데도 자기 책상에 앉아서 명함을 주며 ‘이번에는 무얼 보러 오셨냐’는 것이다. 공무원은 어디 가나 그런 모양이었다. 세심매니저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불어로 이야기하더니 그제야 응접세트로 자리를 옮겼다. 처음엔 조금 놀랐지만 세심에서 섭외가 쉽지 않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럴수록 당당하게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실은 르 아브르항은 됭 케르크항 다음이지만 ‘귀항이 프랑스의 제1항이라고 해서 프랑스에 온 김에 좀 보았으면 한다’고 엉거주춤 설명했다. 그는 자기 책상에서 명함첩을 갖고 오더니 ‘한국사람이 이렇게 백여명이 다녀갔는데 또 더 볼 게 남았느냐’면서 명함첩을 펼쳐 보였다. 한국사람의 명함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정면돌파를 하기로 한 이상 준비해간 선물을 드렸다. 그는 선물을 열어보지도 않고 바로 일어나서 자기 책상 뒤의 캐비닛을 열어 보이며 이게 전부 한국사람들이 준 선물이라고 보여주었다. 캐비닛 안에는 인형을 비롯해서 부채와 소품 가야금도 보였다. 다행히 신랑신부 인형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프랑스도 관청은 세구나 싶었지만 시치미를 뚝 따고. ‘이 인형은 한국 전통적인 결혼식의 신랑신부의 모습’ 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흥미조차 느끼지 않고 ‘오는 사람마다 간만의 차가 심한 곳에 제철소를 지을 수 있느냐고 묻는데 한국이 르 아브르와 똑 같은 항만을 만드느냐’고 거꾸로 물었다. 상당히 난처했다. 커피라도 주면 한잔 마시며 숨을 고르겠는데 커피 한잔도 안 주며 몰아치듯 말했다. ‘한국인에게 간만의 차가 있어도 충분히 제철소를 지울 수 있고 간만의 차가 심한 프랑스 대서양 연변에도 제철소가 있다’고 수 없이 대답했는데 또 그것을 확인하러 GM이 오셨냐’는 것이다. 순간 ‘아, 그거였구나 회장님이 선입감이 없이 보는 대로 보고 와서 보고 하라는 게 간만의 차가 많은 해안에도 대형제철소를 지울 수 있는지 여부를 생각해보라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속을 스치며 이제야 회장님의 뜻을 이해하는 듯했지만 항만관리사무소에서는 한마디로 귀찮다는 시늉이었다. 당시 한국엔 한참 제 2제철소를 포항제철과 별도로 충남 서산시 가로림 만에 건설하려고 시도하다가 그걸 포항제철이 인수받아 계속 확장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서해안은 간만의 차가 많은 곳이었다. 간만의 차가 심해도 독(Dock)를 쌓으면 제철소를 지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말씀하신 대로 잘 알지만 전공이 전기라서 전기시설을 한번 보고싶다고 부탁했다. ‘전기시설?’ 하더니 그는 ‘설명은 해 줄 수 있어도 전기실은 보안구역이라 안된다’고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러면서 벨을 눌러 한여자를 불러 ‘한국에서 GM이 왔으니 항만을 안내하라’고 지시했다. 금발의 여인은 세심직원에게 이어폰을 주고는 항만이 너무 넓어 자동차로 투어를 시작한다며 설명은 이어폰으로 들어라 는 것이다. 가끔 차를 세우기도 하고 서행하면서 손가락으로 시설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런 상태에서 도대체 무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안내원이 가는 대로 이어폰을 통해 설명을 듣는 것뿐이었다. 언로우드(Unloader)부터 시작해서 하루 물동량이 얼마나 출항하고 입항하며 간만의차 때문에 썰물때는 갑문(Lockgate)을 닫아 수위를 유지한다고 했다. 나는 갑문을 본적이 없어서 그거라도 보고 갈려고 세심직원에게 부탁했다. 그는 불어로 홍보 요원에게 통역을 했다. 원칙적으로 위험 때문에 차에서 내릴 수 없다며 갑문이 보이는 곳까지 갈 터이니 차내에서 보라고 했다. 갑문을 가까이서 바라보며 ‘갑문에서 누수가 심해 수위가 낮아질 때는 어떻게 하냐고 또 물었다’. 그녀는 ‘해수 펌프를 가끔 사용하지만 그런 일은 별로 없고 비상용이라고 만했다’. ‘해수펌프에는 전동기가 부착되어 있는데 전동기는 부식에 문제가 없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홍보요원이라 시설면에서는 잘 모른다고 했다. 홍보요원은 항만투어 안내 요원이었다. 그러니 자세한 것을 더 물어봐야 답변을 얻을 수가 없을 것 같았지만 이번에는 예를 들어 질문을 했다. 한국에서는 갑문의 누수로 언로더의 와이어가 선 박에 못 미친 적이 있는데 이곳은 그런 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웃으며 언제 건설한 것이냐며 프랑스는 최신형이라 그런 일이 없다는 거다. 그러면서 설명은 이어폰으로만 들어 달라는 거다. 홍보요원은 코스대로 안내만 하지 더 이상 자세한 것은 설명드릴 수 없다’며 웃었다. 그 웃음이 귀여워 참았지만 해외에 다녀보며 이런 대우는 처음이었다. 이어폰은 됭케르크 항과 함께 프랑스의 제2 항만으로 프랑스의 전 수출품과 수입품을 취급하고 있다는 자랑 뿐이었다. 운영팀장실로 돌아와서 나는 전공이 전기라서 펌프와 전동기의 부식에 문제가 있을것 같다고 했더니 그는 ‘르 아브르가 아무 탈없이 돌아가니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했다.’ 세심 직원이 중식이나 같이 하자고 운영팀장에게 제의했지만 그마저 거부했다. 식사 중에 이것저것 물어볼 까 했는데 그런 기술적인 사항보다 상업적인 사항 외는 더 들을 수가 없을 것 같아 더 권 하지 않고 르 아브르 항만을 빠져나왔다. 그렇다면 내 앞에 다녀간 사람들은 무얼 어떻게 듣고 갔을까? ‘르 아브르가 건재하니 제철소를 지어도 된다’는 이야기만 듣고 갔을 것 같았다. 이걸 보려고 며칠씩이나 시간을 낭비해가며 파리에서 기다렸다는 생각을 하니 한심했다. 그런 설비는 갑문을 제하고는 포철 항만에서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회장님께 보고 드릴 사항이 아무것도 없었다. ‘한국사람이 백여명이나 다녀갔는데 또 왜 왔느냐? 고 묻더라고 보고 할 수는 없었다. 더 더욱이 회장님의 목적을 알았으니 앞 사람들처럼 프랑스에서 잘하고 있으니 간만의 차가 있어도 제철소는 건설할 수 있다’고 보고 하기에는 회장님의 심기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항만의 전기시설이라도 제대로 보았으면 좋았을 터인데 한숨이 절로 났다. 세심 세일즈 매니저도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걸 알아차리고 ‘프랑스의 관청 분위기가 너무 세서 그렇다’ 며 한국은 어떠하냐고 물어서 ‘똑 같다’며 서로 웃었다. 길거리 식당에서 간단하게 중식을 하고 됭케르크(던커크)로 향했다. 대서양 연안을 따라 4시간 정도나 북쪽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됭케르크 제철소에 친구가 근무하고 있어서 그와 석식을 하며 좀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서 기대를 모았다. 됭케르크로 가는 도중에 그는 차를 세우며 여기가 2차대전때 노르만디 상륙지점이라며 아이젠하워 장군이 독일군에게 치명타를 가해 2차대전을 역전시킨 곳이라며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약 100m 떨어진 해안가에 조형물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깍아지른 절벽 위에 충혼비가 서 있고 그 바닥에 소총을 거꾸로 세우고 철모를 씌워 놓았고 성화대에는 파리 개선문처럼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꽃이 피워 올랐다. '프랑스인들은 이곳을 지날 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위해 반드시 기도를 하고 지나간다’고 했다. 그가 기도하는 동안에 나도 묵념을 드렸다. 순간 당시 한창 당시 유행하던 ‘비목’ 노래가사와 모윤숙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는 시가 생각났다. 한국도 6.25때 나라를 지키다 산화한 군인이 많은데 국군묘지(지금 현충원)외에서는 그분들의 넋을 기리는 곳이 없다. 먹고 살기가 빠듯해서 보다 국민성에 더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됭케르크 까지는 생각보다 멀어서 거의 4시간이 걸려 저녁 무렵에 약속한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 졌다. 식당 입구의 대형 홀 천정의 샹들리에 등(Chandelier lamp)에 압도당했다. 벽면 장식도 각 가지 조각품들로 장식되어 조그마한 궁전이래도 그렇게 들을 것 같았다. 어텐던트(좌석을 안내하는 직원, Attendant)를 따라 사전 예약이 된 아늑한 작은 룸으로 안내되었다. 룸 벽면이나 창가의 장식품도 요란했다. 프랑스의 고급 식당이라고 는 파리에서 마지막 종합회의 후 단 한번밖에 가본적이 없어서인지 모르지만 파리보다 더 화려하고 웅장하며 넓어 보였다. 프랑스의 제 1항구도시라니 파리 못지 않을 식당이 있는 것도 당연한 듯했다. 얼마 안 있어 손님도 도착했다. 세심직원과는 친구 지간이라며 불어로 조금 이야기하더니 소개 시켜주었다. 관례대로 서로 명함을 교환하며 악수를 했다. 그는 됭케르크 제철소 원료처리부(The raw material processing department)의 매니저였다.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이제야 해수간만의 차와 제철소의 관계를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그는 내명함을 두 세번 다시 보며 GM이세요 하고 물었다. 세심직원이 그렇다고 말했다. 그는 자리를 함께 해서 기쁘다고 했다. 그들이 회사에서 진짜 GM(회장)과 함께 식사하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함께 해서 기쁘다고 답례는 했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세심과는 친구라며 그런지 계속 둘이서 불어로 이야기를 해서 내가 끼어 들 틈이 없었다. 그러다가 웨이트(Waiter)가 주문을 받는데 음식의 선택과 조리방법 하나하나에 대해물었다. 불어라서 알아듣지도 못해 세심직원이 다시 영어로 설명해주었지만 알 수가 없었다. 서양 정통요리를 먹어본 적도 없거니와 그들의 음식문화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세심직원에게 ‘업 투 유어 레콤멘데이션’(당신의 추천대로, UP to your recommendation)을 연발하다가 메인디시(Main dish, 주식)는 스테이크와 생선이 있는데 이곳은 생선이 많은 곳이라 스테이크 보다 생산을 추천했다. 그러자 생선종류부터 조리방법에 대한 것까지 물었다. 역시 업투유어 레콤멘데이션이라고 답했지만 생선 찜(Steam fish)을 원했다. 바로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전통요리라고 한다. 먹는 방법을 몰라 그들이 먼저 먹는 걸 보고 따라서 먹었다. 포크나 나이프도 바깥에서부터 그들을 따라 하나하나 사용했다. 프랑스 정통식사는 두 번째지만 파리에서 처음 먹었을 때보다 더 호화스러운 것 같았다. 가지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나오더니 메인 디시가 나왔다. 생선도 먹기 좋게 뼈를 추려낸 채였다. 이제나저제나 하며 식사 중에 항만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데 기회를 잡기가 어려웠다. 메인 디시가 끝나고 후식이 나올 때 약간의 공백이 있었다. 세심직원이 한국에서 간만의 차가 있는 곳에 제철소를 건설하려는 데 어떤 문제점이 있는가 조사하러 왔다고 소개를 해주어 말문을 열어 주었다. 세심은 회장의 뜻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어느정도 규모의 제철소를 짓느냐고 물었다. 연산 1000만톤 정도라고 했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원료부두와 제품 부두의 선좌 수를 물었다. 아직은 엔지니어링도 하지 않아 아무런 데이터도 없다면서 갑문식 독에서 누수라던지 관련장비의 부식에 대해 어려움이 없냐고 물었다. 갑문 독의 누수는 해수로펌프로 보완하고 부식문제는 정비로 카바가 되어 현실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그 보다 원료수급과 제품 출하가 제철소의 한계를 가지고 온다고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이라 무슨 뜻이냐고 다시 물었다. 간만의 차가 심한 곳은 만조 때 원료선이나 제품출하선이 들어오거나 나가는데 그게 하루 2회밖에 할 수 없다는 거다. 더구나 선박은 직각바람을 맞으면 독(Dock)으로 도선하기가 어려워 그런 날은 만조때에도 원료선이나 제품 출하선을 도선할 수 없다고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원료부두나 제품부두가 크게 되고 마지막엔 독을 통해서 출입하는 선박수가 한계에 달하면 원료공급도 차질이 생기고 제품출하도 지연되어 제철소의 규모도 제한을 받아 됭케르크 제철소도 연산 600만톤에서 더 이상 확장을 못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회장님이 걱정하는 바의 답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로 갑문을 통과하는 선박수에 따라 제철소 규모도 제한 받는다 는 것은 원료수급과 제품출하의 제한으로 대형제철소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다. 그는 덧붙여서 한국 기상천문대가 얼마나 정확하게 예보할지는 모르지만 예보가 잘못되면 그 기회마저 놓친다며 프랑스 기상대가 정확히 예보하지만 풍향에 따라 원료선이나 제품출하선이 연 평균하면 하루 1.7회정도도 어려워 됭케르크 제철소도 확장을 생각해서 20m캐널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회장님이 선입감없이 보는 대로 보고 와서 보고하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인 것 같았다. 간만의 차가 심한 가로림만은 천만 톤 규모의 제철소 입지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이었다. 됭케르크 제철소 견학도 하고 싶었지만 수속이 복잡하다며 어렵다고 했다. 그 다음 날 파리로 돌아오면서 회장님께 보고 할 자료를 어떻게 정리해서 보고할까 하는 생각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