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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수 시 20편-시집 『침묵의 결』 중에서>
눈〔雪〕
눈은 하늘이 내리는 게 아니라
침묵의 한가운데서 미끄러져 내리는 것 같다
스스로 그 희디흰 결을 따라 땅으로 내려온다
새들이 그 눈부신 살결에
이따금 희디흰 노랫소리를 끼얹는다
신기하게도 새들의 노래는 마치
침묵이 남은 소리들을 흔들어 떨치듯이
함께 빚어내는 운율 같다
침묵에 바치는 성스러운 기도 소리 같다
사람들이 몇몇 그 풍경 속에 들어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먼 데를 바라본다
그 시간의 갈라진 틈으로
불쑥 빠져나온 듯한 아이들이 몇몇
눈송이를 뭉쳐 서로에게 던져대고 있다
하지만 눈에 점령당한 한동안은
사람들의 말도 침묵의 눈으로 뒤덮이는 것 같다
아마도 눈은 눈에 보이는 침묵, 세상도 한동안
그 성스러운 가장자리가 되는 것만 같다
침묵의 벽
침묵의 틈으로 앵초꽃 몇 송이
조심조심 얼굴을 내민다
그 옆에는 반란이라도 하듯
빨간 튤립들이 일제히 꽃잎을 터뜨린다
가까이 다가서듯 솟아 있는
성당 종탑에는
발을 오그린 햇살들이 뛰어내린다
한 중년 남자가 저만큼 간다
헐렁한 모자에 얼굴 깊숙이 파묻은 채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걸어간다
나는 잃어버린 말, 새 말 들을 더듬으며
유리창 너머 풍경들을 끌어당긴다
침묵은 이내 제 길로 되돌아가고
봄 아침은 또 어김없이
그 닫힌 문 앞에서 말을 잃게 한다
빗장은 요지부동, 안으로 굳게 걸려
문을 두드릴수록 목이 마르다
새 말, 잃어버린 말들은 여전히
침묵의 벽 속에 가부좌 틀고 앉아 있다
벚꽃
겨우내 웅크리던 벚나무들이
가지마다 꽃잎을 가득 달고 서 있다
간밤에 침묵이 떨궈낸
하얀 보푸라기들을 뒤집어쓴 듯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이른 봄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뛰어내리는
햇살들이 그 위에 포개져
더욱 하얗게 빛을 쏘아대는 벚꽃들
새들은 마치 이 신성한 광경을
나직한 소리로 예찬이라도 하듯이
벚나무 사이를 날며 노래 부르고 있다
하지만 이내 온 길로 하나같이
다시 되돌아가버리고 말
저 침묵의 눈부신 보푸라기들
오래된 귀목나무
오랜 세월 동안
말들을 침묵 속에 다져온 것일까
마을 어귀의 저 귀목나무는,
잎사귀들은 마치 그런 말에서 돋아난
침묵의 결과 그 무늬들 같다
신성한 말들만 파랑 치고 있다
아주 오래된 저 귀목나무는
까마득히 오래된 침묵의 한가운데서
느리게 솟아오른 광휘 같다
오로지 말 없는 말에만 귀 열어
깊이깊이 안으로만 쟁이고 되새김질해
그윽한 빛을 뿜어내는 것 같다
그 그늘에 낮게 깃들인 나는
작아지고 작아지기만 하는,
끝내 허물도 벗지 못하는 애벌레 같다
말 없는 말들
그에겐 말 없는 말을 듣는 귀가 있다
그런 귀가 없는 나는
그 깊고 높은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
내가 말하는 건
그가 소리 내어 말을 하지 않기 때문,
내가 입을 다물게 되는 것도
그가 말 없는 말을
소리 없이 하기 때문이다
그의 품에서만 높고 깊은 말로 바뀌는
저 말 없는 말들은
그만 누리는 아득하고 신성한 말의 성찬일까
나의 헐벗은 이 기도는
말 없는 말로 되돌아가는,
그 안 보이는 길 위에서 목마르게 서성이는,
말 없는 말들을
찾아 나서는 안간힘일 뿐,
나의 말은 기도 속 그 환한 말의
언저리 어디쯤에서 가까스로 맴돌기도 하지만
이내 그 말 속에 묻혀버리고 만다
겸구(箝口)
며칠째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하고 싶은 말들을 애써 누르고 또 누르며
침묵 저 너머의 말들을 기다린다
말은 말들을 부르고
사방연속무늬처럼 퍼져나가려 하겠지만,
그 틈바구니에 낮게, 아주 낮게 엎드린다
언제 날아왔는지, 작은 새 몇 마리가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에 앉아 조잘거린다
내가 하지 않는 말을 마치 대신이라도 하듯이,
햇살이 이마가 따갑도록 쏟아져 내린다
새들은 쉴 새 없이 나뭇잎에 말을 끼얹고
아이들이 그 그늘에 모여 앉아 종알댄다
한낮의 침묵은 여전히 견고한 담장,
새들의 조잘거림도, 아이들의 종알댐도
그 담장에 부딪쳐 튕겨나가는 탁구공 같다
입을 굳게 다문 채 말들을 잠재운다
며칠째 견디기 힘든 말들에 시달리면서도
아주 낮게, 더더욱 낮게 마음 조아린다
멧새 한 마리
앞마당의 계수나무 빈 가지에
앉아 있는 멧새 한 마리,
차츰 짙어지는 어둠살 뒤집어쓰며
지저귀기 시작한다
창을 열고 귀 기울이면
새는 어느새 어둠이 아닌 제 노래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제 둥지를 찾아들기 전에
오늘 하루치의 못다 한 노래를
마지막으로 부르고 있었던 것인지,
계수나무 너머로는
구름에 온몸을 가린 보름달,
별들이 총총 눈 뜨기를 기다리는 동안
멧새는 제 노래 속으로 날아가버리고,
바람만 느리지만은 않게
빈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다
봄, 봄
아이들이 하늘로 공을 튕겨 올린다
서로 높이 튕기려고
큰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공들은 이내 떨어져 튄다
놀이터 옆에 웅크리고 서 있던 나무들은
뿌리로 모았던 힘을
다투어 퍼 올린다
잎이 돋아나고 꽃잎들이 터져 나온다
안으로만 소리 지르듯
하늘로 팔을 뻗는다
낮게, 따스하고 도탑게,
뛰어내리는 햇살은
아이들도 나무들도 살며시 감싸 안는다
아이들이 튕겨 올리는 공과
나무들이 뻗는 팔은
마치 완연한 봄의 전령들 같다
높이 오를수록 떨어질 때 멀리 튀는 공,
팔 뻗을수록 터져 나오는
나뭇잎과 꽃잎 들,
오로지 시간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간다
계수나무
정원사들이 잎들 돋아나는 계수나무 둥치에
사닥다리를 놓고 가지치기를 한다
요란한 전기톱 소리,
새들도 지저귀다 숨을 고르며 날아간다
하지만 잘린 가지들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시멘트 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쌓인다
연초록 잎사귀들이 햇빛을 받으며 반짝인다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간밤 꿈속의 두 장면이 뇌리를 스친다
어린 시절 누나가 즐겨 부르던 동요 속의
계수나무와 옥도끼와 토끼들,
절두산 성지와 그 절벽 아래
굽이 돌아 나가는 강줄기,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
봄이면 도지는 몸살 때문일까
내가 저 잘려 나뒹구는 계수나무 가지쯤이라도
된 것 같아서 그런 것일까
때마침 시샘 많은 바람이 소맷자락 흔들고,
잔가지들이 잘려버린 계수나무는
머리 잘린 먼 산을 향해 절을 하는 것 같다
산딸나무
집을 나설 때마다 마주치는 산딸나무,
계절 따라 몇 차례 몸을 바꿔도
느낌은 언제나 그대로다
사람의 아들 예수와 산딸나무 십자가,
그 기막힌 골고다 언덕의 사연 때문일까
귀가 때도 어김없이 나를 굽어보는 산딸나무
늦봄에 흰 십자가 꽃잎턱에 맺히던 열매는
어느덧 영글어 검붉은 핏빛,
잎사귀들도 붉게 물들었다
산딸나무 꽃은 왜 꽃이 아니고
열매를 받치는 십자가 모양의 꽃잎턱일까
잎도 열매도 때 되면 성혈처럼 붉어지는 걸까
꽃 피우기보다 오직 열매를 받치기 위한
꽃잎, 그 받들어진 열매 빛깔 따라
붉게 타오르다 지고야 마는 잎들
집을 나서거나 돌아올 때마다
나보다 먼저 나를 굽어보는 산딸나무,
단풍도 열매도 이젠 다 비워내려 하고 있다
야상곡(夜想曲)
깊은 밤, 이름 모를 새들이
창 너머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귄다
귀를 가까이 가져가보면 그 소리는
낮에 못다 부른 노래의 후렴 같다
어둠을 부드럽게 흔들어 깨워
따스한 이불 한 채를 지어보려는
주문 외는 소리 같다
박자를 맞추기라도 하듯
바람은 나지막이 창유리를 두드린다
어두운 하늘에는 잔별들이 총총,
달빛 실오라기들도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속살 비비대는 나뭇잎들은 저희끼리
무언가 연신 속살거리고 있다
눈 감고 가만히 귀를 모으면
바로 아랫집에서인지, 위층에서인지,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낮고 깊은 선율, 눈앞에 어른거리는
저 성스러운 빛과 소리의 무늬들,
바람도 새들의 지저귐도
오로지 그 언저리에서 맴도는 것만 같다
알레그로
맑은 아침, 새들이 떼 지어 난다
나무들이 그 경쾌한 리듬을 탄다
어떤 나무는 날아오를 듯 잎사귀들을 흔들고
어떤 나무는 뿌리에 힘주며 춤을 춘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앞산 어디에선가 뻐꾸기가 울고
산발치의 미루나무 높은 가지에는
까치들이 분주하게 새 둥지를 짓고 있다
구름은 늘보처럼 산마루를 기웃거리고
희멀건 낮달이 멋쩍은 듯 그 뒤를 따라간다
불현듯, 느린 리듬을 다 깨뜨려버리듯
팬텀기 몇 대가 폭음을 쏟아내며 멀어진다
지독한 몸살도 이젠 거반 나은 걸까
베란다에 밀쳐둔 배낭과 등산화에 눈이 간다
며칠 만에 커피 몇 모금도 제맛이다
마음은 어느새 앞산 옹달샘에 닿아 있다
나는 왜 예까지 와서
오다가 보니 낯선 바닷가 솔숲입니다
갯바위에 부딪치는 포말을 내려다보는
해송의 침엽들도, 내 마음도 바다 빛깔입니다
아득한 수평선 위로 날아가는
괭이갈매기 떼,
마음은 자꾸만 날개를 달지만
몸은 솔숲 아래 마냥 그대로 묶여 있습니다
일정한 박자로 솔밭 앞까지 들이치는 파도는
이 뭍의 사람들이 그리워서 그런 걸까요
왔다가 되돌아가면서도 끝없이 밀려옵니다
나는 왜 예까지 와서
괭이갈매기들 따라 날아가고 싶은 걸까요
돌아가야 할 길마저 지우면서
마음만 따로 수평선 저 멀리 가고 있습니다
날 저물어 어둠살 그러안고 앉아 있으면
수평선 위로 돋아 오른 손톱달,
이마 푸른 저 적막,
눈 감아보면 이 세상일은 죄다
갯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는 포말입니다
오래된 해송 침엽 같은 내 마음 무늬들도
파도에 실려 밀려왔다가는 이내 쓸려갑니다.
쨍한 푸른빛
푸른빛이 쨍하게 차갑다
금방 깨져버릴 것만 같다
산골 외딴집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들 사이로 흐르는
실내악의 경쾌하고 쌉싸름한 선율
등 뒤에서 누가 볼륨을 더 높인다
간간이 현악기 선율에 포개지는
탬버린의 투명한 소리
순간, 고드름 하나가 섬돌에 떨어져
산산조각, 깨져버린다
멧새들이 황급히 날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하늘도
깨질 듯 쨍한 푸른빛이다
은목서(銀木犀)에 홀리다
시월 하루, 날 저물 무렵
은목서 곁에서 차마 발길 돌리지 못해
멍하니, 마냥, 흔들리고 있네
온 길도 갈 길도 다 내려놓고
가는 시간도 붙들어 앉히고 싶어지네
초록 넓은 잎사귀들 사이에 숨듯 말 듯
환하게 피어오른 은목서의 은빛 꽃잎들,
은은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온몸 감싸 안아 앉아 있게 하네
-홀린 듯 그윽한 이 황홀
눈 지그시 감고 나를 들여다보면
그 향기 비단 옷자락 펄럭이며 날아가네
산 넘고 강을 건너 꿈결인 듯 아득히,
날개도 없이, 날아오르고 있네
눈을 뜨면 언제나 그 자리인데도
넋이 나간 듯, 넋을 부르듯,
그 향기에 빠져 흔들거리고 있네
갈 길도 온 길도 다 잊어버린 채
저문 날 은목서 곁에 그대로 묶여 있네
느릿느릿
밤이 더디게 깊어간다
아파트 창의 불빛들이 하나둘 꺼지고
멀리서 개 짖는 소리
달빛이 서늘하게 흘러내린다
별들도 슬며시 내려올 것만 같은데
점점 또렷해지는 풀벌레 소리
아파트 입구에는 술 취한 사람 몇이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풀리다 엉키다가
뿔뿔이 흩어져 간다
제각각 그림자도 갈지자다
나도 저토록 취해 오락가락
눈앞의 집을 찾아 헤맨 적 있었던가
낙엽이 발등에 시나브로 떨어진다
나도 집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왠지 잠이 좀체 오지 않을 것 같다
나무 아래서 느릿느릿 내 속으로
들어가다가 다시 되돌아 나온다
마음만 느릿느릿 집 쪽으로 가고 있다
다시 술타령
서랍을 정리하다 찾은 사진 한 장,
낡은 서류 틈에 끼어 오랜 세월 잠자던
사진 한 장이 울컥, 눈물 쏟게 한다
어린 아우와 어머니 곁에서 활짝 웃고 있는
반세기 전 어느 하루,
헐벗어도 따스했던 그 하루의 한 순간
이젠 저 머나먼 밤하늘에
그러안듯이 반짝이며 떠 있는 두 모자별,
술주정하는 아들별의 등을 연신 쓸어내리고
다독이시는 어머니별
귀가 순해진 지도 이미 오래됐건만
그 한 순간이 너무 아려 울음 터뜨리는 나를
저 모자별은 뭐라며 내려다보고 있을까
어머니 품이 그리워 홀연 떠나버린지도 모를
천하 술꾼 아우가 너무 야속하기만 해
술이 술을 당겨 취해버린 밤
사진을 들여다보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술이 나를 다 마셔버리도록
이슥해진 이 세상의 밤
입암리 처가 고택
입암리* 처가 고택은 빈집이다
아무도 살지 않아 대문이 닫혀 있어도
불청객들이 문전성시다
오랜만에 들어서니
단골뿐 아니라 뜨내기들로 북새통이다
담장 아래 목단꽃 작약꽃 줄대꽃 들이
제멋대로 흐드러지거나 시나브로 지고
텃밭과 마당에는 온갖 잡초들이 뒤엉켜 춤을 춘다
벌과 나비 들이 때를 만난 듯 날아들고
바삐 뛰어다니는 쥐새끼들,
응달에는 지렁이가 어슬렁거리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뒷산 멧새들도 끼어든다
지붕의 골기와 사이로 얼굴 내민 작은 풀꽃들이
뜬구름과 함께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일까
뻐꾸기는 이따금 안 보이는 데서 반주를 넣는다
몇 해째 살거나 보살필 사람이 없어
허공처럼 텅텅 비어 있는 이 큰 골기와집은
아직도 멀리 대처에 사는 주인을
기다리기나 할까
대문의 자물통마저 녹슬어도 가슴 활짝 열어
뜨내기들이나 불러들이는지도 모른다
백수가 머잖은 이 집주인 내외분은
고층 아파트와 요양원으로 나뉘어
따로따로 꿈속에서만 이따금
이 집의 대문과 방문을 여닫으실 것이다
*경북 포항시 북구 죽장면에 위치한 마을.
무늬 화백(華白)
서녘 노을 붉게 물들 무렵, 산길에서 우연히 만난
옛 친구가 요즘 무얼 하며, 어떻게 사느냐고 묻는다.
남들은 화백*이라고 불러주기도 하나, 할 말이 궁색
하다. 백수이면서도 늘 쫓기고 바쁘지만, 무늬만 그
래서다. 앞날이 불투명해도 돈을 조금은 벌기 때문에
문화예술 관련 날품팔이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둔다.
부부가 받는 연금으로 생활에는 구김살이 없다는 그
는 헤어질 때가 가까워지자 또 말을 건다, 늘 바쁘게
사는 것 같은 내가 부럽다며, 시집 한 권을 내면 얼마
쯤 버느냐고 묻는다. 할 말이 더더욱 궁색하다. 시는
돈이 안 되고 명예도 안 된다고 말하려다가 역시 그
만둔다.
얼마 전에 부부가 함께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는 그
는 등산도 이젠 지겹다며, 하루하루 시간 죽이기가 두
렵단다. 내가 먼저 시간 여유가 넉넉한 날 전화할 테
니 언제 술자리 한번 가지자고 선수 치며 손을 내민
다. 밤 행사에 나가야 얇은 봉투라도 받을 수 있는 날
이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화려한 백수’의 줄임말.
어느 새벽
-일본 나루토에서
꼭두새벽에 잠 깨어
-나는 왜 낯선 데서는 세 시간도 못 자지,
속으로 투덜거린다
욕조의 따끈한 물에 마음까지 한참 푹 담갔다가
잠옷 바람으로 전원을 넣고 노트북을 켠다
느닷없이 방이 아래위로 요란하게 흔들린다
초조하게 구석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창밖에서 어슴푸레 불빛 받는 바다를 내다본다
-쓰나미가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군
공포의 순간이 지나고 방을 뛰쳐나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작동이 되지 않는다
계단을 따라 황급히 내려가는 동안
무슨 말인지, 자체 방송의 차분한 목소리-
호텔 로비엔 사람들이 잠옷 바람으로
몰려나와 웅성거리고 있다
리히터 5의 지진으로, 여진은 없을 거라고
누군가 우리말로 귀띔해준다
고베 지역에서는 18년 만의 지진이라고도 한다
끽연 구역에 우두커니 서서 줄담배를 피우는 사이
날이 밝고,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한다
얼마 전 고베의 지진박물관에서 본
참사 장면들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린다
누군가 등 뒤에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한다
-모든 게 한순간이여, 그 한순간 차이뿐이여
□이 태 수(李 太 洙)
△ 1947년 경북 의성 출생
△ 197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그림자의 그늘, 우울한 비상의 꿈, 물속의 푸른 방, 안 보이는 너의 손바닥 위에, 꿈속의 사닥다리, 그의 집은 둥글다, 안동 시편, 내 마음의 풍란, 이슬방울 또는 얼음꽃, 회화나무 그늘, 침묵의 푸른 이랑, 『침묵의 결』 등 12권과 육필시집 《유등 연지》 등
△대구시문화상(문학), 동서문학상, 한국가톨릭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대구예술대상 등 수상
△매일신문 논설주간, 대구한의대 겸임교수, 대구시인협회 회장, 대구문학관 건립 공동추진위원장, 대구도시공사 이사,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등 지냄
△현재 금복문화재단 이사, 이육사시문학상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목월문학상 심사위원, 대구시인협회 고문, 대구독서포럼 고문, 수성못페스티벌 추진위원장
첫댓글 회장님
시 정리하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
'나는 왜 예까지 와서' 낭송하겠습니다.
'말 없는 말들 '신청합니다.
신청해 주신 두분 고맙습니다.
두분 더 신청 받고 마감합니다^^
'다시 술타령' 신청합니다
느릿느릿 신청합니다
신청해 주신 분 고맙습니다.
1월 목시는 회장님을 비롯한 다섯분으로 마감합니다 ^^
죄송합니다. 일정이 있는것을 깜박했네요. 꼭 참석하려 했는데.. 맘으로 응원합니다.
총무님
수고 많으십니다.
눈 낭송하겠습니다.
'다시 술타령' 차옥경 전임회장님 낭송 신청 해주셨습니다.
인터넷이 안된다고 연락왔네요^^
네 회장님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