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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송(悟道頌)
前生誰是我전생수시아 平平平仄仄
來生我爲誰내생아위수 仄平仄仄平
今生始知我금생시지아 平平仄平仄
還迷我外我환미아외아 平平仄仄仄
<鶴鳴禪師>
전생에는 누가 나이며
내생에는 내가 누구인가?
금생에 가짜 나에 집착해서
도리어 나 밖의 나(참나)에게 헤맸구나!
이 오언절구(五言絶句) 평기식(平起式) 게송은 학명선사(鶴鳴禪師)의 오도송(悟道頌)이라고 한다. 압운(押韻)은 수(誰)는 상평성(上平聲) 지통(支統) 운족(韻族)이고, 아(我)는 상성(上聲) 가통(哿統) 운족(韻族)이다. 이 오도송(悟道頌)도 근체시(近體詩) 평측(平仄) 운에는 맞지는 않다. 학명선사(鶴鳴禪師)는 한말(韓末) 고승(高僧)이다. 법명(法名)은 계종(啓宗)이고, 법호(法號)는 학명(鶴鳴)이다. 전남영광(全南靈光) 출생(出生)이고 속성(俗姓)은 백씨(白氏)다. 꿈속에 산다는 몽뭉유(夢中遊) 게송(偈頌)을 보면 시작이니 끝이니 구별하지 말게나 겨울 가고 봄이 온다고 해도 해가 바뀐 듯 하지만 보시게나 저 푸른 하늘이 달라졌던가? 부생들이 어리석게도 꿈속에 사는 걸세<妄道始終分兩頭 冬經春到似年流 試看長天何二相 浮生自作夢中遊> 칠언절구(七言絶句) 평기식(平起式) 게송이다. 식심분별(識心分別) 하지 말라는 게송이다. 시작이니 끝이니 하는 것도 알고 보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별망상(分別妄想)이라는 말이다. 봄이니 겨울이니 하는 것도 법성(法性)의 본체(本體) 자리에서 보면 바뀐 것은, 하나 없다는 말이다. 괜히 중생들이 꿈속에서 꿈꾼 말이라는 말이다. 학명선사 자료를 찾아보니 출가 사찰이 순창 구암사로 나온다. 순창은 화옹의 고향이다. 학명 계종(鶴鳴啓宗) 선사는 법명은 계종(啓宗)이고 자호는 백농(白農)이며, 법호가 학명(鶴鳴)이다. 선사의 속성인 백(白)과 함께 일반인들에게는 “백학명 스님”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867년(고종 4년)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에서 아버지 백락채, 어머니 박씨(朴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영특한 자질을 보였고 서당에서 유학을 공부했으나, 15세가 될 무렵부터 가세가 기울어 학업을 닦지 못하였다. 이후 모필(毛筆) 제조기술을 익혀 부모와 두 동생을 정성껏 보살피며 생계를 이어나갔으며, 그 여력으로 논밭 몇 두락을 사들이기도 했으나 20세 되던 해 갑자기 부모(父母)가 모두 돌아가셨다. 인간사(人間)의 허무(虛無)함을 느낀 선사는 부모의 장례를 다 마친 후, 집안일을 동생들에게 맡기고는 붓 상자를 메고 명산 유람 길에 올랐다. 각지를 두루 방랑하던 어느 날, 전북 순창군에 있는 구암사(龜岩寺)에 이르러 당대의 고승인 설두(雪竇) 화상의 설법을 듣고 또, 40 여명의 학인들이 여법(如法)하게 묵좌(默坐)하고 가르침을 받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출가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영광 고향마을로 돌아와 불갑사(佛甲寺)의 환송장로(幻松長老) 수하에서 출가하고 금화(錦華) 선사로부터 계(戒)를 받으니, 법명(法名)은 계종(啓宗)이다. 몇 달 후 금화(錦華) 선사의 상좌가 되었다. 24세 되던 1890년 봄, 스님은 구암사를 찾아가 내전(內典)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이어 귀산사(龜山寺)의 설유(雪乳) 강백(講佰) 스님을 계사(戒師)로 삼아 구족대계(具足大戒)를 받았다. 그 후 스님은 귀산사를 비롯 지리산 영원사와 벽송사, 조계산 선암사와 송광사 등지에서 이름있는 선지식(善知識)을 두루 참방(參榜)하기를 10여년 하면서, 경(經)-율(律)-논(論) 삼장(三藏)을 널리 통달하였다. 30세 되던 해인 1900년 3월, 다시 금화선사에 의해 건당(建幢)하고 은사께 판향(辦香)하여 법통(法統)을 이었으니, 백파(白坡)선사로부터는 7대 법손(法孫)이 되고 설두(雪竇) 선사에게는 증손(曾孫)이 된다. 이때 받은 법호(法號)가 학명(鶴鳴)이다.
이후 구암사(龜巖寺), 운문사(雲門寺) 등 여러 사찰에서 강석(講席)을 열어 후학양성(後學養成)에 힘을 쏟았으니 많은, 대중들이 모였다. 그러나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생사해탈(生死解脫)에 있는데 이를 얻기 위해서는 경전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끼고, 32세 되던 1902년 가을 학명선사는 홀연히 학인들을 모두 해산시킨 다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에 몰두, 열 해가 넘는 세월을 지나고서야 부처님과 조사들의 입명(立命)한 경지를 깨달았다. 이 무렵 학명선사께서 수도정진(修道精進) 중에 읊으신 오도송(悟道頌) 위에 있는 오도송(悟道頌)이다. 그런 수행과정 중에도 학명선사는 부안 내소사와 변산 월명암(月明庵)의 주지직(住持職)임을 타의로 번갈아 맡아야 했으며, 특히 월명암에서는 선사를 찾아오는 선객(禪客)들이 수행 거처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요사채와 선실을 중건 또는 신축하였다. 1914년 봄 백양사(白羊寺) 산내 암자인 물외암(物外庵)에서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한 ‘백양산가(白羊山歌)’를 지었다.
그 해 봄에는 중국 소주와 절강지방을 여행했고, 소주에서 당대의 선지식으로 유명했던 비은(費隱)선사와 수시(垂示)문답을 나눠 선지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이름난 사찰들을 살폈는데, 이때 일본의 선학(禪學)을 세계에 널리 선양한 스즈끼 다이세스의 스승인 임제종 본산인 원각사의 관장 석종연(釋宗演) 선사와 만나 필담으로 선문답을 나눴다. 이때 필담으로 나눈 선문답은 당시 동행한 아사히, 신문기자(新聞記者)에 의해 대서특필(大書特筆) 되어, 학명선사의 특출한 조사선(祖師禪)의 기풍이 일본 천하를 뒤흔들었다. 석종연 선사가 학명 선사에게 묻기를, “그대 이름이 정녕 학명(학의 울음)일진데, 어디 한번 학 울음소리를 내보라”고 했다. 그에 학명 선사께서는, “늙은 소나무 가지가 굽 돌고 옹이가 많아서 발붙일 데가 없나이다.“라고 화답했다. 이에 석종연 선사는 무릎을 치면서, “이는 조선 고불(古佛)이로다 ” 하고 찬탄하며 부처님 뵙는 예를 표했다고 한다. 그렇게 1년간의 여행을 마치고 학명선사는 1915년 고향으로 돌아와 부안 내소사(來蘇寺) 주지로 잠시 있다가, 변산 월명암(月明庵)의 선원(禪院) 조실(祖室로 있으면서 만허(滿虛) 등과 함께 폐허로 방치되었던 월명선원(月明禪院)을 중흥(中興)했다. 1919년 3월 훗날 원불교를 창교한 소태산 박중빈이 월명암을 찾아와 10여일을 머물렀는데, 이때 학명 선사께서 소태산의 물음에 답하며 불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해 7월에는 소태산이 자신의 제자이자 훗날 2대 종법사가 되는 정산 송규를 수 개월간 학명의 상좌로 맡겼다. 1923년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스님이 월명암 근처에 있는 양진암(養眞庵)에 잠시 머물다 떠나면서 학명 선사에게 “이제, 그만 세간에 나오셔서 중생을 제도(濟度)하시라는 간곡한 청이 담긴 의미의 시를 바쳤다. 이에 학명은 이틀 밤낮을 주장자를 짚고 선원 뜨락에 서서 지새우며 고민했다. 한용운 스님이 게송 이수를 주었는데, 게송 내용을 보면 이 세상밖에 천당은 없고, 인간 세상에는 지옥이 많네, 장대 끝에 우두커니 섰을뿐, 어찌 한걸음 내딛지 않는가?<世外天堂少 人間地獄多 佇立竿頭勢 不進一步何> 일에 임하면 고생이 많고 사람을 만나면 이별이 있네, 원래 세상 이치가 이러하거니, 남아라면 얽매임 없이 멋대로 살리<臨事多艱劇 逢人足別離 世道固如此 南兒任所之>이다. 이틀 밤낮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후에 학명선사는 1923년 봄에 내장사로 내려와서 선농불교(禪農佛敎)를 본격화(本格化)하는 신호탄(信號彈) 되었다.
예전 선사께서 내소사 주지로 있었던 9년 전 만허(滿虛)스님과 만암(曼庵) 스님의 계책에 따라 곡차삼매(穀茶三昧)의 상태에 잠겨 들었고, 이후 8척 장신인 만허스님의 등에 업히고 만암 선사의 부추김을 받으면서 월명선원 조실로 모셔져 올라서게 된 뒤 그 도량을 지키게 되었는데 그때 10년을 기약했던 다짐 그대로 이후에는 한 발걸음도 산문 밖 땅을 딛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내 오랜 수행을 멈추고, 하산하여 퇴락한 정읍 내장사(內藏寺)를 다시 일으켜 세워달라는 당시 백양 사주지 만암(曼庵) 선사의 청으로 내장사 주지로 전임했다. 이후 “선농일치(禪農一致)”라는 기치를 걸고 정읍 내장사의 중창불사를 일으키고 선불교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일에 나섰는데 선사께서 주창한 내장선원규칙(內藏禪院規則은 다음과 같다. 하나, 선원의 목표는 반농반선(半農半禪)으로 한다. 둘, 아침에는 경전을 읽고,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좌선을 함으로써, 스스로 참선하고 수행정진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먹을 것을 마련한다. 이후 내장사 중창불사 3년 만에 극락보전(極寶殿)을 중건하고 선원(禪院)을 새로 짓고, 흩어져 있던 부도(浮屠)를 모아 부도(浮屠) 전에 안치했다. 참선하는 대중들을 받아들였고, 절 살림을 유지하기 위해 황무지를 개간해 전답이 80두락에 이르렀다. 그 후 선원을 유지할 경제적 토대로 벼 40여석을 추수할만한 농토를 확보했다. 학명선사는 항상 수좌들에게 “농사를 지으면서 참선을 해야 한다. 는 반농반선(半農半禪)을 주창하여, 놀고먹는 중이라는 비난을 듣지 않도록 당부하며, 스스로 호미를 들고 일하면서 조사들의 화두(話頭)를 드는 모범을 보였다. 또한, 선사께서는 학인들에게 범패(梵唄)와 창가(唱歌)를 부르며 선리(禪理)를 연구하도록 했으며 인근의 어린 학동들을 모아 ‘천수경’과 ‘발원문’을 가르쳐 교화에 힘썼다. 한편 학명선사는 달마도를 잘 그렸다고 전하는데, 스스로 “나를 보고 혹 달마와 흡사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 그 말을 듣고 보니 갑자기 나도 그 말이 진실인가 여겨진다”고 찬(贊)을 붙였을 정도였다. 1929년 3월 통도사 극락암에서 수행하던 경봉(鏡峰)과 선문답을 나눈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후 청정과 수행으로써 평생을 살던 학명선사는 1929년 3월 27일 고벽(古碧)스님을 불러 오늘이 정읍 장날이 아니냐. 짚 세기 네 죽과 당목 한 필을 사오너라. 스님 그것은 그렇게 많이 사다가 무엇 하시렵니까? 어, 쓸 일이 있겠지. 실행만 하려무나, 그렇게 고벽스님을 시장으로 내려가게 한 다음 법권(法眷) 태모(太模) 스님을 불러 오늘 내가 갈 터이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시자를 불러 양치질과 목욕을 마치고 나서, 달마도 좌상(坐像) 6장을 그렸다. 그리고 제자 운곡(雲谷)을 불러 ‘원각경(圓覺經)’의 보안장(普眼章)을 독송하게 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미소 지으며 입적하니 세수 63세, 법랍 43세였다. 그날 저녁 한 줄기의 흰 광채가 하늘 서쪽까지 3일 동안 뻗쳤다고 전한다. 3일이 되는 날 동하인(洞下人)으로 하여 상여(喪輿)를 메게 하고 선사가 지어 두신 (해탈곡), (선원곡), (참선곡) 등에서 특히 48구로 구성된 (열반가)를 택하여 선창자가 소리를 메기면 뒤따르는 사람들은 일제히 받게 하였다.
내 가노라, 내 가노라, 오던 길로 내 가노라, 오던 길이 어데 메뇨? 열반 피안, 거게 런가? 이렇게 선창하면 나무불, 나무불, 나무아미타불' 12字로 화답하니, 그날은 일색(日色)이 희미하고 운무도 비애를 돕는 가운데 염불 소리만 처량하였고, 불교식인 까닭으로 곡성을 내지 못하게 하였으나 아래 동네 민중은 마치 부모의 상을 당한 것처럼 애통함을 금치 못하여 흐느끼는 소리가 길마다 집집마다, 은은하였다고 한다. 중간 노제(路祭)를 만암 선사의 애도문(哀悼文)으로 정중히 거행하고 다비소(茶毘所)에 이르러 방화식(放火式)을 마치고는 감독자 몇만 남아 있게 한 뒤 모두 돌아왔다. 화장장과 사원이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어찌 된 것을 몰랐으나 그날 자정이 되어 한 줄기 흰 광명이 서천으로 걸렸음을 사하촌 사람들이 많이 보았다 한다. 습골시(拾骨時)에 손가락 세 개 넓이의 백색 영골(靈骨) 1편과 오색 사리 70과(顆)를 얻었다. 1934년 12월 학명선사의 제자 고벽(古碧), 매곡(梅谷), 다천(茶泉)등이 주도하여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이 찬(讚)한 비명(碑銘)을 받아 사리탑(舍利塔)을 세웠다. 저서로는 ‘백농유고(白農遺稿)’가 있었는데 책 출간을 위해 준비하다 전량 소실되었고 전한다.
이외에도 인생무상과 불교의 자비를 노래한 ‘원적가’ ‘왕생가’ ‘신년가’ ‘해탈곡’ ‘선원곡(禪園曲)’ ‘참선곡’ ‘망월가’ 등이 있다. 학명선사는 훼손된 월명암과 내장사를 중창하여 지역의 불교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쉬운 글과 말로 불법의 정수를 알리고자 노력했던 선각자이자 한국근대불교(韓國近代佛敎)의 혁신을 위해 평생을 바친 운동가였다. 그리고 달마도 그리기를 즐겼던 학명선사는 직접 노동하고 노래 부르면서도 치열하게 정진한 수행자이자, 당대에 중국과 일본 불교계까지 조선의 선지를 널리 휘날렸던 선지식(善知識) 이다. 학명선사는 달마도를 즐겨 그렸다고 한다. 선사님의 달마도에 있는 게송을 보니, 지축을 밟아 뒤집으려해도 땅은 꿈쩍도 하지 않고, 하늘문 밀어 넘어뜨려 봐도 하늘은 되려 높구나! 쇠로만든 배 둥실 띄워 소실산으로 돌아온다마는 오늘날 세상에는 바람과 물결이 일어 나는구나!<踏翻地軸地不動 推倒天關天更高 穩泛鐵船歸少室 至今天下起風濤> 칠언절구(七言絶句) 측기식(仄起式) 달마게송(達摩偈頌)이다. <귀중한 자료가 될 것 같아서 옮겨 첨삭한 글임> 오늘은 근래(近來) 선지식인 학명선사 오도송을 반추해 보았다.
여여법당 화옹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