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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천국을 지금 느끼는 신경이 거세된 자>의 줄거리:
지금 살아서 천국을 느끼는 신경이 거세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대 종교인과 기독 종교인들입니다. 다른 종교나 아예 하나님과 예수님 이름을 부르지 않는 무종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지요. 종교는 종교인 개개인이 직접 천국을 느끼게 되면 망합니다. 그래서 종교는 천국에 대해서 느끼는 종교인의 마음의 신경을 마취시키거나 거세합니다.
천국을 지금 느끼는 신경이 거세된 자
(사도행전 28:11~31)
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29. (없음)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천국을 지금 느끼는 신경이 거세된 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천국을 지금 느끼는 신경이 거세된 자’
어제는 28장 앞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는 경로와 도착해서 한 일 중에 작은 부분을 소개하며 결론을 맺게 됩니다. 앞부분에서는 사도 바울이 도착하게 되는 경로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반갑게 맞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다른 죄수들에 비해서 비교적 자유롭게 지낼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것과 유대인들을 만나 복음을 전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전해진 복음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반응을 보이고 다시 사도 바울이 반응을 보이면서 사도행전이 끝납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은 참 특이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전도를 위하여 특별히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계획되어지고 세워진 이방 전도의 사도입니다. 그런데 이 사도 바울이 중심이 된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마지막에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말씀에 대해 유대인들이 반응을 보이고 그 반응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유대종교를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며 끝을 맺습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유대인에게 말씀을 전하는 장면을 통해 사도행전이 끝납니다.
종교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천국 느낌에 대해 고자가 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기독교 종교인으로 살아왔다면 절단되고 거세된 천국 느낌 신경을 반드시 복원시킬 수 있어야만 합니다.
종교는 천국을 지금 느끼게 하는 마음의 신경을 거세하는 의료기관과도 같습니다. 종교인 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개신교나 천주교가 그렇습니다. 개별적으로 천국을 지금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신경이 거세된 것이 종교인의 자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개인이 지금 천국을 느낄 때 종교는 이 세상에서 없어지고 맙니다. 그렇기에 종교는 지금 천국을 느낄 수 없게 합니다. 모든 종교인에게 돈 좋음은 느낌인 반면에 하나님 좋음은 이론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좋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돈에 대한 좋음은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라는 정도의 이론에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상황은 거꾸로 되었습니다. 지금 천국을 느끼는 마음의 신경이 거세된 사람들이 바로 종교로서의 개신교인이며 천주교인들입니다. 종교가 우선시하는 것은 천국에 대해 개인이 느끼는 마음의 신경을 마취시키거나 거세하는 것입니다. 지금 천국을 느껴야 할 마음의 신경을 고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해 마음의 신경이 고자가 되지 않으면 종교인이 될 수 없고 결과적으로 종교 또한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대한 느낌을 없애는 마음의 신경 거세하기는 철저하게 이론 믿음과 마음 믿음을 구분하여 활용함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종교는 천국을 이론에 담습니다. 천국의 좋음과 천국에 계신 하나님의 좋음을 이론적으로만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 믿음을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게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공백을 채우고자 합니다. 무엇인가를 가지면 마음이 채워진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좋음의 느낌이란 언제나 믿음을 전제로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무엇인가가 좋다는 것은 그것을 가지면 마음이 채워져 만족하리라는 믿음입니다. 느낌에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좋다는 느낌은 좋다는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이러한 구조에서 종교는 마음의 믿음이 이 세상을 향하는 상태를 유지하게 만듭니다.
정리해보자면 종교는 채워지기를 바라는 마음 믿음이 세상을 향하게 하고, 하나님에 대한 좋음은 이론 믿음에만 관계하도록 만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예수 믿으면 죽어서 천국 간다.”라는 말은 아주 위험합니다. 사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잘못된 표현입니다. 예수 믿으면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살아서 천국의 좋음을 느끼게 됩니다. 살아있는 동안 천국과 하나님이 돈, 건강, 형통, 번영보다 좋다는 것을 마음에서 실제로 느껴본 적이 없는데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천국과 천국에 계신 하나님을 좋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마음의 믿음과 느낌이 없다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절대 천국에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은 종교와의 영원한 결별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28절을 보면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던 유대종교와의 영원한 결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종교로써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마찬가지로 영원한 결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제 살펴본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독사에 물리게 됩니다. 정확히는 독사가 손에 매달려 있는 것을 사람들이 다 지켜보게 됩니다. 몸과 몸으로 만나는 세상에 대한 둔감함이야말로 사도행전이 마지막으로 제시하고 있는 내용적 결론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 멜리데 섬의 추장인 보블리오의 아버지였습니다. 이 사람은 열병과 이질에 걸려 심각한 탈수현상과 탈진에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바로 세상을 향한 열병입니다. 바울이 이 사람을 고친 것은 십자가를 붙잡을 때 세상을 향한 열병으로부터 온전히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십자가 복음으로 살아갈 때 눈에 띄게 나타나는 특징은 바로 세상에 대한 절대 둔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독사에 물린 사건으로 잘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절대 둔감을 결론으로 가져올 수 있는 이유는 사도행전이 바로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실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 작정을 할 때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은 바로 이 세상에 대한 둔감함이라는 것이 사도행전의 내용적 결론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반드시 주지해야 될 사항이 바로 종교와의 결별임이 본문을 통해 강조되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 둔감해지기 위해서는 절대로 종교와 섞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종교와의 갈등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순절 이후 그리스도인 전체를 말하는 교회가 생기면서부터 유대종교와의 갈등은 있어왔습니다. 같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마음에서 느끼는 대상은 달랐기에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마지막에서 종교와의 화해와 일치를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종교든 기독교 종교든 종교와는 영원히 결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사도행전의 결론이 내려집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 종교생활과 복음생활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26~27절을 보면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종교가 마음을 둔감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유대종교인들이 하나님과 개별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종교의 시스템을 만들게 된 뒤로 제일 두려워했던 것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듣고 깨닫고 보고 알아서 하나님께 돌아와 마음이 고침을 받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였습니다. 본래 믿음이란 하나님과의 개별적 만남입니다. 그로부터 온전한 마음의 고침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존재 이유가 없어진 종교는 사라져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종교는 마음의 고침을 가장 두려워하였습니다.
이것이 복음생활이 종교생활과 영원히 결별해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종교가 마음을 둔감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앞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예를 통해 십자가 생활화의 결과가 세상에 대한 절대 둔감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입으로만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종교생활 또한 절대 둔감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러나 이 절대 둔감은 세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 문제입니다. 복음생활은 이 세상에 대한 절대 둔감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갑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손에 매달린 독사를 내버려 둘 정도로 무심했던 것에서 잘 드러났습니다. 반면에 종교생활은 천국과 천국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절대 둔감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갑니다. 그렇기에 복음생활과 종교생활은 절대로 같이 갈 수가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복음생활의 바탕이 되는 세상에 대한 절대 둔감은 곧 하나님에 대한 절대 민감함입니다. 그런데 종교생활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절대 둔감이고 이는 곧 세상에 대한 절대 민감함을 바탕에 두고 진행되어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생활과 종교생활은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절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결론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종교생활의 둔감함의 정체를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밝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종교인들이 당신을 믿지 않음을 두고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시며 마태복음 15장 8절에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술로 공경하였다는 것은 곧 이론으로만 하나님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좋음을 느끼는 신경은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서 완전히 끊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반드시 채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끊어진 신경은 세상을 향해 뻗게 됩니다. 이처럼 종교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척하지만 실제 마음이 좋음을 느끼는 대상은 세상입니다.
좋음을 느끼는 마음의 신경을 세상에 뻗을 때 나타나는 증상은 세상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세상에 대해 예민했다면 독사에 물렸을 때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기겁을 하며 떨치려고 했을 것입니다. 꼭 이러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마음의 신경이 세상에 뻗어있다면 이 세상 모든 일에 대해서 무척 민감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돈이 조금만 덜 벌려도 마음이 걱정과 우울과 근심에 휩싸입니다. 누가 조금만 자존심을 건드려도 발끈합니다. 그리고 미래가 한없이 걱정스럽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세상에 대해 예민하게 자극되고 흥분되고 상기된 상태를 유지할수록 천국과 천국에 계신 하나님의 좋으심에 대해서는 아무 느낌도 없이 둔감해집니다.
다시 본문 26절을 떠올려봅니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선지자들과 예수님과 사도들까지 요청했던 것은 동일하였습니다. 이분들의 사역과 활동을 통해 요구했던 것은 하나님께 둔감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이 민감한 사람이라면 선지자나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활동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가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둔감하고 세상에 대해 민감한 상태에서는 이러한 깨달음은 주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행동하셔도 도무지 관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해 민감하게 느끼는 동안에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무런 느낌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꿀이나 초콜릿을 먹고 난 후에 사과가 전혀 달게 느껴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대한 느낌의 자극이 크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에 대한 느낌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선지자들과 예수님과 사도들은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을 듣고 행동을 보면서도 도무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 느낌이 없다면 그것은 세상에 대해 민감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종교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합니다. 종교의 지도자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전매특허라도 낸 것처럼 사용합니다. 이들은 교인이나 선민들에게 계속해서 하나님과 연관된 이론만을 가르치면서 정작 마음의 신경이 세상에 뿌리내린 상태에 대해서는 끊으려 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끊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개별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면 소위 종교지도자는 설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개별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가 될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마음의 신경이 하나님께로 뻗어갈 수 있는 통로가 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는 개별적으로 하나님의 좋음을 느낄 수 있게 해주시는 사건입니다. 이 복음의 사건은 십자가를 붙잡고 있는 동안에 세상에 대한 느낌은 계속해서 둔해지다가 마지막에는 완전히 끊어지게 됩니다. 세상에 대해 마음의 거세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있는 동안에 마음의 신경은 하늘로 뻗어감으로써 천국의 좋음에 대해서는 극도로 민감한 상태를 유지하게 됩니다. 천국의 좋음에 대한 느낌이 민감해질수록 이 세상에서는 무슨 일을 만나더라도 둔감해집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는 상황을 특별히 좋다고 여기진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현장에 관한 기록 어디를 보아도 이 상황을 특별히 싫어했다고 느끼게 하는 부분도 없습니다. 몸이 돌에 맞아 죽는데도 싫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둔감해 보입니다.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의 신경이 세상에 대해서 완전히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몸으로 만나는 세상의 상황에 대해서 마음의 신경이 끊어지자 좋거나 싫다는 느낌 자체가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복음의 효과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복음을 붙잡고 생활화할 때에 나타나는 특징 또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십자가 생활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몸으로 만나는 세상에 대한 둔감함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사도행전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물론 십자가 생활화에는 세상에 대한 둔감함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 살펴보았듯이 십자가 생활화에는 풍성한 은혜가 존재합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몸으로 만나는 세상에 대한 절대 둔감함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람의 마음은 무엇인가로 채워지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채워질 대상을 찾고자 더듬게 됩니다. 이럴 때 세상에 대해 둔감한 사람은 천국에 대해 극도로 예민해집니다. 천국에 대한 느낌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는 이와는 반대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극도로 민감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권장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잘 믿으면 이 세상에서 좋다고 느껴지는 것들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수 믿으면 죽어서 천국 간다.”라는 말은 미래에 대한 걱정의 보험을 들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상태를 문제시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해 둔감하다 못해 끊어지기를 요구하는 복음의 방향성과는 정반대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좋으신 하나님과 마주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이 세상으로부터 빠져나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종교는 세상이 좋다는 상태를 내버려 두기에 종교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마지막으로 종교와의 결별을 선언한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종교는 이 세상에 대해 절대 민감한 마음을 유지하도록 권장하고 보호합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에 대해서는 마음의 신경이 마취되고 끊어진 것같이 둔감해집니다. 이론과 교리로만 하나님이 좋으시고 천국이 좋은 곳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지만 실제 좋음의 느낌은 전혀 주고자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누가복음에 이어 사도행전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살펴본 이유는 저자인 누가에 의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하나로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음 시간부터는 요한복음을 살펴볼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첫 장부터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천국에 대해 무척이나 예민합니다. 사도행전의 끝부분과 요한복음의 시작이 연결되는 셈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불쑥 시작됩니다. 태초는 시간과 공간이 시작되기 이전의 시간입니다. 태초에 대한 언급은 천국에 대해 구체적이고 깊은 마음의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 천국의 예민함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 대해 예민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볼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별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9장 51절의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는 말씀 뒤로 모든 내용이 세상을 떠나시는 예수님의 별세에 집중됩니다. 세상을 떠나는 것은 곧 세상에 대해 둔감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제시된 것이 권세였습니다. 권세는 스스로 있는 자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시며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만이 좋음이시라는 것이 그 내용이었습니다. 누가는 이러한 내용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 가르쳐 주었습니다. 특히 사도행전에서는 마음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 세상을 살 때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절대 둔감함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절대 둔감함은 하늘에 대한 절대 민감함입니다. 이 하늘에 대한 절대 민감함에 대한 내용은 요한복음으로 이어집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에서 주지해야 할 내용은 절대로 종교의 체제 안으로 들어가서 종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유대인에 대한 관심은 유대종교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유대인 동족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종교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기독교 종교에 대한 결별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종교에 속한 개개인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복음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우리의 바람도 사도 바울의 바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종교체제는 잘라내야만 합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극도로 예민하고 세상 밖에 있는 천국과 천국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극도로 둔감하게 만드는 종교와는 결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독사에 물렸을 때 아랑곳하지 않았던 사도 바울처럼 세상에 대해서는 둔감하며 하늘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극도로 민감한 상태를 유지해 나가야 되겠습니다. 의식으로 십자가를 놓치지 않을 때만 이 일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 들려주신 신비하고 심오하고 절대적인 진리의 말씀들을 잊지 않게 하시고 나의 것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종교생활의 잔재가 말끔히 걷히게 하시고 오직 복음생활을 통해 은혜 속에서 헤엄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