才不若德(재불약덕) -재주는 덕만 못하다. 이상호(전 천안아산경실련대표, 소소감리더십연구소 소장) =================================================================== 才不若德(재불약덕) : 才(재주 재), 不(아니 불), 若(같을 약) 德(덕 덕) 재주(능력)는 덕(德)만 못하다. 오늘날은 재주 중심의 사회다. 하지만 예로부터 사람에게는 재주보다 덕이 우선이라 하였다. 세상 사는 데도 재주보다는 덕이 부족하여 낭패를 보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사람들은 재주에만 급급한 경우가 많다. 소동파는 이를 한탄하면서 생자시(生子詩)를 썼다. 그가 생자시에서 강조한 것은 無才無德到公卿(무재무덕도공경)즉 재주도 덕도 없이 공경에 이르기를 원하였다. 이는 정말 재주도 덕도 없는 것을 원한 것이 아니라 재주와 덕을 함부로 드러내지 말 것이며 오로지 겸허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오로지 재주에만 매달리니 세상이 더욱 사나워지는 것 같다. ===================================================================
1. 재주라는 야만 선생님들이 길거리에 모여 교권 회복을 부르짖고 학생들의 교육권을 회복하기 위해 절규하고 있다. 자녀들을 재주 있는 자녀로만 키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왜곡된 사랑과 자녀교육관은 교육의 상당 부분을 파행으로 몰아갔다. 그것이 교사들을 수렁에 빠뜨리고 거리로 나오게 하였다. 교육은 재주보다 중요한 것이 인간성 함양인데 교사들을 수렁에 빠뜨리는 부모들의 마음에 도사린 교육은 재능교육만 교육으로 여기는 것 같다. 오늘날 거의 모든 학교 교육은 재주를 함양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3세쯤 되어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는 때부터 국어를 제쳐두고 영어를 가르치는 부모들이 늘어나고 있다. 모두 아이들을 똑똑하게 키우고 싶은 강한 욕망 때문이다. 그러니 취학 전 지식교육은 엄청나게 성장하는데 인간성 교육은 아예 발을 붙일 틈이 부족해졌다. 거기에는 똑똑한 아이 즉 재주 있는 아이로 키우겠다는 부모의 욕망이 드러난 것인데 때로는 그 똑똑하게만 키운 자식이 부모도 몰라보고 자기 이기심과 욕망만 채우는 아이로 둔갑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재주는 인간을 위한,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성을 파괴하는 야만이 되어 버리게 된다. 재주는 흔히 재능, 능력, 기술 등의 말과 통한다. 오늘날 모든 교육의 핵심은 이 재주를 함양하는데 두고 있다. 그러나 그 재주에는 항상 덕이 깃들어 있어야만 그 재주가 재주로서의 가치를 발휘한다. 만약 덕이 없는 재주는 인간성 없는 검객과 같다. 사람을 해치거나 자신을 수렁에 빠뜨리는 흉기가 될 때도 많다. 그래서 옛날부터 선각자들은 재주를 함부로 드러내거나 자랑하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유명한 철학자 에픽테토스(Epiktetos 55경~ 135경, 그리스 철학자, 정치이론가)는 “읽고 쓰는 재주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 대해 한층 착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아무 가치가 없다.”고 하였다. 모든 지식은 다른 사람을 깨우치고 착하게 살도록 하는데 가치가 있다. 이는 똑똑함보다는 지식의 선한 가치와 선한 활용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상당수의 지식인은 지식을 선한 영향력의 행사를 위한 수단이 아닌 자기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는 사례가 많다. 그러니 재주가 야만으로 둔갑할 때가 많고 재주를 가진 자는 인간과 문화를 위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가 아니라 인간을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자들이 많다. 그래서 재주는 야만이 될 때가 있다. 그래서 프랑스의 철학자 로슈푸코(La Rochefoucauld 1613~1680) 는 “사람의 재주라는 것은 인물이 크면 그 재주가 살고, 인물이 작으면 그 재주가 도리어 화가 되고 원수가 되기 쉽다. 그래서 자기의 재주를 옳은 방향으로 발휘하기 위하여 마음을 먼저 닦아야 한다”고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선각자들은 인간의 삶과 교육에 있어서 재주보다는 인격과 덕망이 우선임을 강조하였다. 그 이유는 예로부터 재주라는 것이 자기를 파멸시킴은 물론 타인까지 혼란에 빠뜨리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모든 영역에서 능력 우선 사회가 되면서 인격과 덕망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재주는 야만으로 흘러 자신과 세상을 혼돈으로 빠뜨리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도 많다. 컴퓨터 능력이 뛰어난 자가 해킹을 하거나 나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경우도 그렇다. 그 모든 이유는 재주를 모든 것의 우위에 두는 바람에 인격과 덕망을 등한시한 결과이다. 그런 재주는 인간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을 파괴하는 야만이 될 때가 많다. 그래서 才不若德(재불약덕) 즉 재주는 덕만 못하다.
2. 才不若德(재불약덕)과 소동파의 생자시(生子詩) 예로부터 선각자들은 재주는 사람을 교만하게 하는 그릇이요, 남이 꺼리는 창고요, 재화를 일으키는 중매장이(홍만종, 순오지)라 하였다. 많은 사람이 재주를 위하여 애써 노력하고 재주를 자랑하며 재주를 겨루고 살지만, 그 재주가 인간을 교만에 흐르게 하고 삶을 파괴하는 주범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중국 송나라 시대의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소동파(蘇東坡, 1036~1101)는 그의 생자시(生子詩)에서 이렇게 읊었다. 人皆養子望望聰(인개양자망망총) 사람은 모두 자식을 기름에 총명하기를 바라건만 我被聰明誤一生(아피총명오일생) 나는 이 총명함으로 일생을 그르쳤네 但願生兒愚且蠢(단원생아우차준) 바라건데 아들 낳거든 어리석고 우둔하여 無才無德到公卿(무재무덕도공경) 재주도 덕도 없이 공경에 이르기를 -홍만종 『순오지』에서- 이 시를 인용한 홍만종은 이렇게 말하였다. “자녀를 낳아 재주 있는 자녀로 키우고자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원하는 바이다. 하지만 옛사람이 이토록 재주가 없기를 바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재주가 있고 총명하면서 착하지 못한 것보다 차라리 재주는 없어도 덕이 있는 것이 낫다는 뜻에서였다. 세상에 재주만 조금 있고서 도(道)를 듣지 못한 자는 또한 경계할 줄 알아야 하겠다.(홍만종 『순오지』)” 재주가 사람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사람을 망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 말의 진심은 겸허함을 배우라는 것이다. 겸허함이 깃든 재주는 쓸모 있지만 오만함이 깃든 재주는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 망가뜨리는 흉기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소동파는 왜 이런 시를 썼을까? 소동파는 송나라(북송) 시대에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과 함께 '3소'(三蘇)라고 일컬어지며, 이들은 모두 당송 8대가에 속하는 대문장가들이다. 우리에게는 문장과 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1068년은 신종(神宗)이 즉위하자 참지정사(參知政事:부재상) 왕안석(王安石)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가 중앙정부의 물자 조달을 합리화하기 위한 균륜법(均輪法), 농촌에 저리자금을 융통하여 빈농을 보호하려는 청묘법(靑苗法) 등 이른바 신법(新法)을 시행하였다. 이때 신법에 비판적이었던 소동파는 감관고원이라는 지극히 사무적인 업무를 담당하다가 지방 근무를 청하여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에서 근무했고, 이어 밀주(密州:지금의 산둥성)·쉬저우(徐州)·후저우(湖州) 등지의 지방관을 역임했다. 또한 그는 신법으로 인해 고생하는 농민들의 생활상을 시로 묘사했다. 후저우 지사(知事)로 있던 1079년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어사대(御史臺)에 체포되어 수도로 호송되었다. 다행히 사형을 면한 그는 100일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황주(黃州) 단련부사(團練副使)로 좌천되었다. 그것은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황주에 거주할 의무만 주어진 일종의 유형(流刑)이었다. 그의 황주에서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부인은 양잠을 했고, 본래 병영이었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이 땅을 동파(동쪽 언덕)라 이름 짓고 자신을 동파거사라고 칭했는데, 그의 호는 여기서 유래했다. 그 유명한 〈적벽부 赤壁賦〉가 지어진 것도 이곳에서였다. 1085년 신종이 죽고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신종의 어머니이며 철종의 할머니인 선인태황후(宣仁太皇后)가 섭정을 했다. 그녀는 뤄양(洛陽)에 은둔해 있던 사마광(司馬光)을 불러들여 왕안석 일파가 만든 신법들을 폐지했다. 이때 소동파도 다시 발탁되어 예부랑중(禮部郞中)을 시작으로 중서사인(中書舍人)·한림학사지제고(翰林學士知制誥) 등의 요직에 올랐다. 그러나 사마광의 신법 폐지가 모역법(募役法)의 폐지에 이르는 등 과격해지자, 소동파는 중서사인이 되어 수도로 올라온 동생과 함께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했다. 사마광이 죽은 후 당쟁이 시작되었고, 선인황태후마저 사망하자 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철종은 신법을 부활시켰으며, 소동파는 다시 좌천되어 혜주사마(惠州司馬)로 임명되었다. 그에 대한 탄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를 질시하는 정치인들로 인해 하이난섬(海南島)으로 유배되어 그곳에 주로 거주하던 리족(黎族)과 함께 비참하게 생활했다. 철종의 죽음으로 휘종(徽宗)이 즉위하면서 제거옥국관(提擧玉局觀)이라는 명예직에 봉해져 상경하던 도중, 큰 병을 얻어 창저우(常州)에서 66세의 생을 마감했다.(다음 백과) 그는 많은 시와 문장을 남겼으나 정작 살아서의 삶은 평탄하지 못했다. 위 소동파의 생자시는 아마 그의 말년에 쓴 것으로 추정한다. 어쩌면 지나간 인생을 돌아본 그는 재주가 원인이 되어 온갖 고초를 겪었던 것으로 자신을 회고한 것이라 여겨진다. 위의 시에서 소동파는 사람이 재주와 덕보다는 공경에 이르기를 간구하였다. 이는 역설적으로 재주와 덕을 앞세우지 말아야 공경에 이를 수 있음을 강조한 듯하다. 공경에 이른다는 것은 어떤 점으로는 공경대부라는 벼슬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시의 無才無德到公卿(무재무덕도공경)에서 ‘재주도 덕도 없이’라는 말은 재주와 덕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것, 즉 겸허의 미덕을 알고 실천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야만 공경에 이를 수 있다.[**공경은 중국 진나라에서부터 실시된 관료제도로 3공(승상, 태위, 어사대부)과 9경(소부, 치속대사, 종정, 진객, 정위, 태복, 위위, 낭중령, 봉상)을 일컫는 것이다. 우리나라 조선 시대로 말하면 3정승과 6 판서를 포함한 조정 고위직을 일컫는다고 보면 좋을 듯하다.] 소동파 자신은 그 재주를 함부로 드러내어 결국 삶의 많은 고초를 겪었음을 회고한 것이리라. 그렇게 본다면 無才無德到公卿(무재무덕도공경)는 역설적인 표현이다. 재주와 덕을 드러내지 않는 겸허의 미덕을 지녀야 공경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삶에서 자신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은 ‘재주 없음’보다는 겸허를 잃은 오만인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은 오늘날도 맞는 말이다.
3. 才不若德(재불약덕)하는 삶의 지혜 노자(老子)는 도덕경에서 곡즉전(曲則全) 즉 굽은 나무는 몸을 보전하여 수명을 다한다(노자 도덕경 제22장)고 하였다. 곧게 자란 나무는 미처 다 자라기도 전에 좋은 나무라 하여 베어간다. 그리고 사용하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폐기 처분된다. 그래서 자기의 수명을 다하지 못한다. 굽은 나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무 곳이나 자신을 굽히고 비굴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삶의 유연함과 겸허함을 일컫는 것이다. 장자(莊子) 천하편(天下篇)에서도 “세상 사람들은 다 복을 구하되 나는 몸을 굽혀 보전하려 한다”고 하였다. 몸을 굽혀 보전하려 한다는 것은 자신을 함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유연함과 겸허함을 강조한 말이다. 노장(老壯)사상에서 전체적으로 흐르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道)는 삶의 유연함과 겸허함을 강조한 것이다. 소동파와 홍만종 역시 한때 노장사상에 깊이 접했음은 그들의 학문의 궤적과 삶을 통해 알 수 있다. 才不若德(재불약덕)하는 삶의 지혜는 자신의 삶을 보전하고 천수(天壽-주어진 수명)를 누리는 지혜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망가뜨리는 이유가 재주가 없음이 아니라 오만하기 때문이다. 건강을 해치는 것도 건강을 과신하는 오만에 기인하며, 인간관계를 망치는 것도 자신의 오만 때문인 경우가 더 많다. 잘 나가던 사업을 망치는 것도 과욕이 부른 오만인 경우가 더 많으며, 큰 사고를 저지르는 경우도 능력만 믿고 함부로 대드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 겸허하고 유연하면 관계를 잘 반전시킬 수 있고 자신을 지킬 수 있다. 젊어서 성공한 사람이 뒷날 낭패를 당하는 경우도 대부분 오만함이 용솟음쳤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업신여기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푼다(구약성서 잠언 3장 34절)”고 하였다. 그 才不若德(재불약덕)의 지혜의 중심에 겸허함과 유연함이 있다. 오늘날 아무리 심한 경쟁사회라 하지만 학교 교육에서 아이들에게 才不若德(재불약덕)의 지혜를 가르치는 일은 중요한 것 같다. 인성교육은 모든 교육의 최상위이며 가장 우선이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