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코이카 자문관으로 스리랑카 정부에 근무하던 때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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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이건 정말 카메라로 촬영해둬야 한다는 그런 장면을 마주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런 순간에는 늘 빈손이다.
며칠 전에, 또 바로 어제 아침에 나는 그런 순간을 만났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 내 심상 속에 기록된 풍경이 하나 더 있다.
1. 며칠 전, 아마도 저 지난 주
교육부에서 나오면 바로 길 건너 버스 정류장이 있다.
앞에서 글로 올린 것처럼 늘 타고 다니던 벤이 낡아 폐차가 되는 바람에 나는 다시
아주 소박한 스리랑카 소시민이 되었다.
지난 주 그날도 청사 건너편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가톨릭 사제 한분이 곁에 서 있다.
당연히 스리랑카 사람이다. 하얀 사제복에 까만 헝겊벨트를 두른 그 호리호리한 신부님은
무슨 용무가 그리 많은지 버스에 오르면서도 계속 전화다.
버스에 올랐는데 누가 성직자 전용 좌석을 차지하고 앉았다가 황급히 자리를 비켜준다.
참고로 스리랑카 버스에는 제일 오른 쪽 2인승 첫 좌석에는 Reserved for clergy라는 표시가 있다.
불교국가이므로 스님들만 Clergy 에 해당되는 줄 알았는데 가톨릭 신부님도 당당하게 앉는 걸 보니
모든 종교에 공통되게 적용되는 모양이다.
참고가 또 하나, 오른쪽은 clergy, 왼쪽 첫 번째 좌석은 For the disabled, 장애인을 위한 자리고,
두 번째는 for the pregnant mother, 임산부들이 앉게 만들어진 자리다.
여하튼 Clergy 석에 좌정한 사제가 아직 전화통화에 열중하신 가운데 버스가 다음 정류장에 섰는데
이번에는 상당히 건장한 스리랑카 승려 한분이 버스에 오른다.
주황색 장삼을 차려입은 스님은 스리랑카 남자가 많이 그렇듯 드러난 양팔에 털이 부숭부숭하다.
앉을 자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clergy 석 신부님의 비어있는 왼쪽 자리, 신부는 호리호리한데
승려는 조금 거대해서 좁지 않겠는가 하는데 승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불쑥 끼어 앉는다.
당연히 서로 통성명도 하지 않은 양대 종교의 성직자 두 사람이 함께 앉아 가는데
신부님은 아직도 전화통에 매달려 몸을 구부려 앉았고 무심한 스님은 좁은 자리가 답답한 듯
오른 팔을 좌석 뒤로 길게 뻗어 걸친다.
순간 햄릿형의 가느다란 신부님은 본의 아니게 털이 부숭부숭한 고릴라 스님 팔에 안긴 형국이 되었다.
안긴 신부는 안긴 줄 모르고 그냥 전화대화에 열중이고 역시 무심한 스님은 열대나라의 권태로운 세상풍경을
창너머로 바라보며 사념에 잠겨 간다.
카메라가 있었다면 나는 당연히 사진을 찍어두었을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그 사진은 뉴욕타임즈지나 이 블로그가 속한 조선일보에 Top Photo -그런 용어가 있기나 하랴마는-로 선정되지는 않았겠는가.
그러고 보면 어쩌면 그 두 양반은 불교식으로 오랜 전생의 귀여운 막내 동생과 의젓한 큰 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2. 어제 아침 풍경
아침 출근길 역시 버스에서였다. 시내 중심가를 벗어나는 지점인데 그리 크지 않은 절이 하나 보인다.
절을 본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어떤 사내의 뒷모습을 발견한 것이었다.
남자는 조금 허름한, 청색 티에 헐렁한 바지차림인데 그 절의 쇠로 된 대문에 기대여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쇠로 된 대문이지만 얇은 파이프로 된 구조라서 절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가 누군가 했다. 그냥 지나가는 행인인가, 아니면 길거리를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인가.
그런데 자세히 보니 절 안쪽에는 사람들이 몇 보였다. 나이가 지긋한 의젓한 스님이 앞서 절 경내를 걷는데
작은 동자승이 한 걸음 뒤를 따라간다. 또 그 뒤를 어른 둘이 걷고 있다.
절 안쪽의 일행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얼마 있다가 조금 전의 동자승이 쇠문쪽으로 다가온다. 그러더니 문 바깥의 사내와 얘기를 주고받는다. 동자승은 자주 땅을 쳐다보고 바깥의 어른은 이상하게 간절하고 애틋하다.
아, 그러고보니 그들은 부자간인 모양이다.
출가한 아들을 만나러 아버지는 저기 어딜까, 아누라다푸라나 트링코말리나 칠라우 같은 외지에서
콜롬보까지 찾아와 아들이 수도하는 절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콜롬보를 찾아오는 시간도 길었고 절 대문 앞에 막연히 서 있는 그 기다림의 시간도 길었을 것이다.
부자가 세속의 인연으로 만나는 장면은 그걸로 잠깐, 내가 탄 버스는 신호등이 바뀌므로 그 자리를 떠났다. 아비는 그 잠깐의 상면 뒤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아주 예전 읽었던 어느 스님의 책이 있다. 아주 유명한 스님인데 이름은 잊어버렸다. 그 분은 성년이 되고난 다음에 출가해서 도를 깨쳤다고 하는데 스님이 금강산에서 또 어디에서 십 수년 동안 수행하며 도를 깨치는 동안
고향에는 속세의 아내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었다. 살고 있으면서 남편의 귀환을 고대했을 것이다.
그가 득도해 조선팔도를 다니며 설법을 하던 때, 그는 유독 자기의 고향에만은 가지 않았다. 세속의 가족들,
특별히 아직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착하고 우직한 아내의 얼굴을 대할 용기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언젠가는 고향을 찾았다. 고향의 군중 앞에서 설법을 하는데 저 뒤쪽에 세속의 부모님 얼굴이 보인다. 부모는 나중에 조용히 찾아와 단 한번이라도 속세의 집을 방문해줄 수 없느냐 청한다.
그는 그 부탁만은 거절 못해 집을 찾아가는데 집에는 예전의 아내가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두워진 고향집을 나서려는데 부모가 다시 애원을 한다. 스님은 도를 통해서 그 즐거움으로 살지만 우리 같은 속인은 어찌 사느냐, 혈통을 이을 피붙이라도 만들어주어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결말은 아내와 하루 밤을 지내고 새벽에 집을 영영 나섰다는 그런 내용이다. 그 얘기를 읽던 날의 허망함과 슬픈 마음이 이제도 새롭다.
얼마 전 여기서 상당히 많이 알려진 스님을 만났다. 아주 잘 생긴, 그러면서 스리랑카 가난한 계층의 아이들 교육에 헌신하고 있는 멋있는 스님인데 운영에 어려움이 크므로 내게 도움을 청해온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은 없으니 가진 분들을 연결해주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 스님한테 한번 물어보았다. 열두살에 동자승이 되어 부모와 집을 떠났다는데 그 삶이 어렵지 않았는가 하고. 스님의 답은 너무 간단 명료해서 좀 실망스러웠다. 자기는 평생의 꿈이 승려가 되는 것이어서 그런 건 문제될 게 없었다고.
그러나 말이 그렇지 어떻게 문제될 게 없었겠는가? 이 떼로라는 훌륭한 스님에게도 사춘기의 고독과 삶에 대한 불안과 고향집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왜 없었겠는가. 떼로의 기억 속에도 감추어진 하나의 그림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다만 떼로는 절 안쪽에서 바라본 두고 온 속세의 모습이고 나는 그 바깥, 속세에서 절 안을 그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았을 뿐이겠고.
3. 아주 오래전 기억 하나
십년 전, 아니지 아마도 그 보다 많이 전이겠다. 학교 교감으로 있을 때인데 교무실에서 정원쪽을 보니 학부형 한 분이 등나무 아래 벤치에 혼자 앉아 있다. 내가 잘 아는 아버지다.
충북 영동에 사는 분인데 당시 교육청에서 운전직으로 일하는 분이었다.
겉모습으로 보면 큰 키에 마르고 약간 거친 인상을 주는데 별로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엄마는 사교적인 분이었다. 활달하고 잘 웃고 그래서 사교성을 발휘해서 나름대로 사업을 하는 능력 있는 여성이었다.
충주 재활원에 있는 아들 형제를 만나러올 때는 항상 두 사람이 함께였는데 그 날은 아버지 혼자다.
아마도 공무로 충주까지 누구를 태우고 왔다가 잠시 짬을 내어 학교에 들른 모양이다.
아버지는 혼자 앉아 줄담배를 피우는데-그 때는 학교가 금연구역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도 담임선생이 그 시간 수업이 끝난 후에 내보내기로 했었나보다. 그러다가 수업을 마치는 차임벨 소리가
울리고 조금 있다가 형제가 등나무 벤치쪽으로 다가가는게 보인다.
형은 그 때 초등학교 5, 6학년 쯤, 동생은 한 2, 3학년된 아직 귀여운 꼬마였다. 상급생 형은 아빠처럼 말이 없는 타입이고 작은 아이는 그냥 철없고 귀엽기만한 꼬마였다.
아이들이 나타나니 아빠가 담배를 끄고 일어선다.
그 큰 키가 그날따라 이상하게 외롭게 느껴졌다. 아이가 특히 형이 먼저 아빠한테 다가간다. 아이는 청각장애라 말을 못하지만 수화로 하는 어떤 요란한 몸짓도 없다.
아비가 몸을 굽혀 큰 아이를 끌어안는다. 안고는 그냥 얼굴을 맞대고 그대로 한 동안 멈춰 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또 아이는 이제 어느 정도 철이 든 그 조숙한 아이는 집이 멀어 한 달에 두어 번이나 만나는 그 아버지에 대해 만약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아이는 무슨 말을 했을까?
작은 꼬마는 아직 아빠한테 가지 않고 저기 학교쪽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나는, 또 우리는 농학교에서 듣지 못하는 아이들을 교육하면서, 함께 살면서 말을 가르치려고
또 세상에의 길을 열어주려 최선을 다했었다.
농아학교는 각 도에 보통 하나밖에 없으므로 먼 지역에 사는 아이들을 산골이건 어디건 일일이 찾아가서
학교로 데려왔다. 가족들을 설득했고, 간혹 농아인인 부모가 아이를 멀리 보내려 않으면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를 통해서라도 아이를 충주에 데려오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했다.
그런데 교육을 시키고 말을 가르친다는 목표에 열중한 나머지 우리는 그 가정에, 아빠와 엄마와 작은 아이들에게 그 헤어짐이, 떠나서 보고 싶고 그리워함이 얼마나 참기 어려운 큰 고통인가를 간과하기도 했다.
아니 전혀 모르지는 않았지만 등나무 아래서 아들을 기다리는 아빠만큼 과연 실감했는지는 자신이 없다.
요사이 한국에서는 청각장애 학교에서의 어두웠던 사실을 다룬 “도가니”라는 영화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상영중이라고 한다.
소설로 만든 작가가 연재를 시작하던 때 나는 그 이야기를 일부 읽었다.
사실 그 시점 훨씬 전에 그 농아학교의 문제는 이미 사회적으로 많이 알려지고 쟁점화되었고
특수교육을 하는 우리들은 물론 더 가까이 근접되어 있었다.
그 학교에서 성폭행의 대상이 된-아마도 가장 주된 피해자인-아이 하나를 그 지역 인권단체에서
충주학교로 데려와 우리가 맡아 지도하고 있었고 아이의 깊은 심리적 상처를 치료하고 아이를
사회 일반의 과도한 관심과 시선으로부터 보호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언젠가 MBC 무슨 수첩이라는 프로에서 PD가 찾아와 아이를 취재하겠다 했을 때 우리는 거절했었다.
PD의 관점이 많이 염려스러웠고 그런 식의 프로가 제작 방영될 경우에 특수교육 자체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비판이 -극히 무책임한- 교육에 있어서의 득보다는 쪽박을 깨뜨리는 엄청난 大失을 초래할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장 급한 것은 이제 적응을 시작한 아이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여하튼 그런 시점에서 소설은 진행되더니 그것이 책으로 나오고 영화로 나오면서 한국사회에 엄청난 파장과
충격을 던지고 있다.
세상의 눈과 우리 교육자의 눈은 어떤 경우 아주 미묘한 평행을 만들기도 한다.
세상은 공분하고 단죄하라고 소리치고 또 그것을 통해서 새로 누구를 징벌할 것이다.
그것은 사회의 규칙이고 정의가 맞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교육자는 반드시 그와 같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마치 솔로몬의 재판에서 아이 엄마가 누군가를 정하는데 팔을 잡아당겨 이기는 쪽이라고 해도 정말 엄마는 힘껏 당겨 아이를 빼앗지 못하는 것처럼.
솔로몬처럼 사회의 다중은 교육을 이해해줄 것인가?
글을 쓰다가 골짜기로 접어들었다. 우리가 다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이, 교육을 시키려고 아이를 부모에게서
떼어내온 일이 세월이 한참 지나 어떤 반성의 돌아봄을 주는 것처럼 사회도 다중도 언젠가 그런 작은 부분에 대한 발견이 있기를 바래본다.
이 아이들로부터 전체로서 우리가 용서를 구하는 그런 시간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첫댓글 아이들이 나타나니 아빠가 담배를 끄고 일어선다.
그 큰 키가 그날따라 이상하게 외롭게 느껴졌다. 아이가 특히 형이 먼저 아빠한테 다가간다. 아이는 청각장애라 말을 못하지만 수화로 하는 어떤 아비가 몸을 굽혀 큰 아이를 끌어안는다. 안고는 그냥 얼굴을 맞대고 그대로 한 동안 멈춰 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또 아이는 이제 어느 정도 철이 든 그 조숙한 아이는 집이 멀어 한 달에 두어 번이나 만나는 그 아버지에 대해 만약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아이는 무슨 말을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