舍監日誌
파적 삼아서 하나둘씩 신변을 정리하는 일도 노래(老來)의 여가 선용이 될 듯싶어서 어제는 묵은 수집물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언뜻 품위 있는 끈으로 정성스럽게 묶은 두툼한 봉투가 하나 눈에 띄는데 예사롭지가 않았다.
겉에는 '이 빛나는 보석들을 나의 회상의 보금자리에 길이 간직하리라' 라고 적혀 있고 아래쪽에는 작은 글씨로 '여자 기숙사 사생들의 다정한 사연들 - 1988년 8월 31일' 이라고 쓰여 있다.
말이 되는지 어떤지도 모르지만 '빛나는 보석' 이니 '회상의 보금자리‘ 니 하는 말들이 설익은 시어(詩語)처럼 열없이 느껴진다.하여간 그때만 해도 아직 60대 중반이어서 낭만 끼가 조금은 남아 있던 것 같다.
1988년 8월 말일이면 내가 정년퇴임하기 6개월 전인데 마지막 보직으로 맡았던 여자 기숙사의 사감의 임기를 마치는 날이다.
사생의 수는 120명쯤으로 기억되는데 낮에는 등교하므로 사감의 임무는 주로 저녁시간에 그들의 생활을 돌보는 일이었다.
현진건의 단편소설 'B사감과 러브레터'에는 여학교의 사감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40에 가까운 노처녀인데 외모는 시들고 거칠고 말라서 볼품이 없는데다 눈매는 몹시 쌀쌀하고 엄하고 매서운 성품으로 묘사되었다. 이 작품을 읽어 본 사람에게는 여학생기숙사의 사감에 대한 선입견이 아주 젬병일 듯싶다.
그 외에 이 사감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은 사생들에게 오는 러브레터인데 노처녀의 질투가 심했던 것 같다.
우리 사생들도 사춘기의 절정에 접어든 시기여서 풍기문제에 신경을 쓸 일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의 사감시절은 사신검열(私信檢閱)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때여서 러브레터 따위에 신경 쓸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임기를 마치고 나올 때 사생들이 자발적으로 다정한 사연들을 한 묶음 안겨준 것을 보면 B사감과 같은 모진 성품은 아니었던 듯싶다.
거듭 밝힌다면 그때 나는 40여 년의 교직생활을 거의 마감하는 시점이었고 또 보직도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리하여 안일하게 사감의 임기만 채울 수 없다는 생각에서 사생들에게 추억으로 남을 만한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일상생활에서 벗어난 견학이나 문인과의 대화, 전시회 등 색다른 행사들을 착안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마침 독립기념관이 개관한 직후여서 우리나라의 가장 의미 있는 명소일 듯싶어서 이곳을 첫 견학장소로 삼았다. 그 뒤에는 아우내의 유관순(柳寬順)열사의 사당과 생가 그리고 단국대학교의 석주선(石宙善) 의상박물관도 참관했다. 그날은 마침 공휴일이었는데도 원로 관장님께서 직접 나와서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고 진열품에 대해서도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가는 곳마다 우리 사생들은 깊은 감동을 받은 것 같아서 두고두고 즐거운 추억이 될 듯싶다.
한편 감수성이 강한 시기에는 문학에 대해 이해를 높이는 것도 매우 뜻있는 일일 듯싶어서 '문학인과의 대화' 의 시간을 마련했다.
첫 번째로 박연구, 이정림, 정재은 세 분의 수필가를 초빙했는데 몇 시간 동안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차분하게 대화가 이어졌다. 그날의 장면이 아직도 선연한데 박연구, 정재은 두 분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니 인생무상을 실감한다고나 할까.
두 번째는 대전에서 활동하고 있는 리헌석, 최자영의 두 시인을 초청했는데 두 사람이 다 나와는 사제 간이고 사생들과는 선후배사이다. 많은 시인들 가운데서 사생들과 동문인 두 사람을 초청한 것은 문인이 아주 먼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자극을 주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그 뒤에는 구혜영, 오영석, 유재용 세 분의 소설가를 초빙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무렵 전국적으로 학원의 소요사태가 절정에 이르렀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우리 대학에서도 제자들이 강단(講壇)을 점거하고 스승들이 마룻바닥에 앉아서 제자들의 훈시(?)를 듣기도 했다. 대학이 양로원이냐며 늙은 교수들은 보따리를 싸라고 윽박질렀다. 그렇지 않아도 기가 죽는 늙은이들의 기를 아주 죽여 놓았다. 사제 간의 윤리는 진흙탕에 내팽개쳐진 꼴이었다.
나는 그래도 기숙사는 대학과는 번지수가 다르므로 이미 계획된 행사를 추진했던 것이다. 그런데 기숙사의 운영위원들의 생각은 그것이 아니었다. 대학이 환난의 의중인데 기숙사에서 행사를 감행하면 소요(騷擾)의 주동자들이 묵과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코 사감에 대한 항명은 아니라고 사정을 했다.
나는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안타까워서 강, 온 양면을 설득해 보았지만 무위로 끝났다.
내가 2년간의 임기 중에 사생들과 뜻이 안 맞아서 마음을 상한일은 이때뿐이었던 것 같다.
부득이 나와 세 분 소설가는 갑사(甲寺)의 산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그날 밤 우리는 주로 문학과 문단의 사정을 화제로 오붓한 시간을 보냈지만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희곡, 아동문학 등 각 장르의 문인들을 차례로 초빙하려던 계획도 이 일을 빌미로 종지부를 찍었다.학원의 소요사태가 진정이 된 뒤에도 국내의 정정(政情)은 어지러울 때가 적지 않았다. 각계각층의 군중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하늘에 대고 주먹질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광복 직후 혼란한 정국을 방불케 할 때면 조국이고 나발이고 다 팽개치고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나는 학창시절 마구잡이로 익힌 탁구 실력이 수준급에 이른 것으로 자타가 인정했다. 공주농고(公州農高)교사로 재직 중에는 탁구부를 창설하여 전국대회에서 패권을 잡은 일이 있다.
그때의 제자들이 그 뒤에 우리나라 탁구계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해서 나름대로 보람을 느꼈다. '원아무개가 가는 곳에는 탁구부가 꼭 따른다.'는 말이 나돌았다.
나는 여자 기숙사의 사감을 맡으면서 곧바로 기숙사의 공지에 간이탁구장을 마련했다. 건전한 취미생활을 권장하는 일도 사람의 또 다른 책무일 듯싶었다.
한편 기숙사의 식당은 회의장이나 전시장을 겸용하고 있었다.미술은 우리 대학에서는 필수 교과목이었다. 나는 가끔 사생들의 미술 실기를 겨루어서 이곳에다 작품을 전시하고 함께 감상을 했다. 매달 받는 보직수당은 이런 행사의 시상비 등으로 돌렸는데 잔잔한 기쁨은 바로 이런 경우에도 해당이 될 듯싶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주책없는 퇴물 접장이 제 몸 춘 것 같아서 겸연쩍기 이를 데 없다. 사실 내가 교육자로서 남긴 발자취는 극히 미미하다. 우수나 우량과는 거리가 먼 특별히 내세울 만한 것은 개뿔도 없는 극히 평범한 교직인생인 셈이었다. 그런데 나는 얼마 전에 지방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후배 교육자들에 대한 충고를 요청받은 일이 있다. 그때 나는 나 자신이 부족한 사람인데 주제넘게 충고할 입장이 아니라고 사양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다시 교육자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번에는 정말 힘써 정성과 열의를 다할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 말은 은연중 후배들에 대한 충고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나 자신의 반성의 뜻이 강한 발언이었다.
그것은 나의 진정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모두에서 밝힌 사생들이 안겨준 사연들은 2년 동안이나 한솥밥을 먹으면서 정을 붙여온 사이여서 떠나는 사감을 위로하는 말일 것이다.
포근함을 느꼈다고 적은 구절이 많았다. 사감님의 뜻을 받들어서 앞으로 열심히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학생, 60대 후반의 늙은이를 '영원한 Hope'니 ‘은발의 청춘'으로 추켜세운 글도 있었다.
사연을 다 읽고 나니 눈시울이 뜨거웠다. 오래오래 기억한다는 사연들도 많았는데 그것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15년 전 그때의 청순했던 사생들은 지금은 30대 중반의 주부 겸 중견교사로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인생을 '고해'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나그네' 등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은데 만만치 않은 세파를 그들이 어떻게 잘 헤쳐 나가고 있는지 걱정스럽다.그들의 인생의 토대에 나의 잔작한 정성이 얼마나 밑거름이 되었는지도………….
사실 그들을 잊지 못할 사람은 나고 고마워할 사람도 바로 나일 듯싶다.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