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던 가닥이 그대로
"핫도그 한 개 주세요." 여러 곱창 식당 가운데 어색하게 끼여있는 자그마한 가게 앞이다. 한쪽에서는 연신 찹쌀 반죽으로 도넛과 핫도그를 만들어 튀김 솥에 넣고 있다. 도넛이 동나 다시 나오기를 몇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찹쌀 반죽이라 그런지 부드럽게 넘어가던 핫도그 맛을 생각하니 군침이 돌아, 그냥 갈까 망설이던 마음을 접었다. "엄마는 반세기를 살았네." 딸의 농담을 들은 지도 벌써 몇 년이 흘렀는데. 이 나이에 유치원 아이들처럼 핫도그를 사 먹다니. 나무젓가락에 꽂아 놓은 밀가루 섞인 소시지는 좋아하지 않는데.
어릴 적 우리 집엔 항상 식빵이 넘쳐났다. 없는 살림에 아이 다섯이라 군것질할 형편은 아니지만, 식빵이 넘쳐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아버지가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셔서 고생하시다 미군 부대 식당에 다니시게 되었다. 직장을 갖게 되어 선도 보게 되었고 어머니와 가정을 꾸리고 오 남매를 키우셨다. 퇴근길 아버지 자전거 짐칸에는 누런 기름 먹인 종이봉투에 식빵이 한 아름 담겨 있었다. 어른이 되어 들은 이야기지만, 미군 부대 정문에서 퇴근 때마다 삼엄한 몸단속을 했다고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식빵 담긴 봉투는 통과시켜 주었다고 하셨다. 그것도 모르고 흔하디흔한 빵이라 생각했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이다. 그 당시 아무런 대책 없이 결혼했다. 남편은 노동문제상담소에 다녔고 집에서 만삭의 몸으로 남편을 기다렸다. 하는 게 없어 무료하기만 했던 하루, 허기지면 떠오르는 게 빵이었다. 제과점 빵은 엄두도 못 내었다. 몇 번을 망설이다 슈퍼에 가서 소브르빵 옥수수빵 등을 한 개 골랐다. 한입씩 베어 먹으며 동네 한 바퀴를 돌다 보면 어느새 홀쭉한 빈 봉투만 내 손에 남아 있었다. 남들은 임신하면 별의별 색다른 것들이 먹고 싶다는데 왜 하필 빵이 먹고 싶었을까? 삼백만 원의 전세 한 칸에 마땅한 소득도 없이 살던 신혼 시절, 내겐 빵 하나도 큰마음을 먹어야 사 먹을 수 있었다. 다른 먹거리는 감히 눈앞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 당시 딸기를 이른 봄에 먹는다는 건 상상조차 못 했다.
돌도 안 된 아이를 맡기고 시작한 눈높이 선생님. 30여 명의 아이를 학교에서 돌아와 학원가기 전 짬 나는 시간에 밤늦게까지 가르쳐야 했다. 배가 아무리 고파도 빵조차 사 먹을 시간이 없었다. “저녁 시간 오붓하게 식구들과 같이 식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학교 다녀온 우리 아이도 집에서 따스하게 맞이할 수 있다면…….”
이제 시간도 경제적 여유도 생겼다. 어릴 때는 질리도록 먹어 별생각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 빵이 한가한 저녁 5시만 되면 눈앞에 아른거린다. 마침 수제 빵집이 옆 가게에 생겼다. 여전히 한참을 고르다 제일 싼 식빵을 산다. 빵 하나로 서운했던 임산부의 여운이 남아선지 식빵 한 봉지가 어느새 자취를 감춘다. 탄수화물 중독증이라는 병을 키울까 두렵다. 그나마 자제를 해야 하기에, 빵에 얽힌 그 시절을 머릿속에 대신 떠올려 본다. 아직도 다 채워지지 않은 허기가 또 다른 모습인 핫도그로 내게 나타나 오늘도 가게 앞을 지나치지 못하나 보다.
첫댓글 핫도그에서 시작해 어린 시절, 임신, 눈높이 선생님 시절, 현재, 핫도그로 마무리는 완벽한 구성을 가지고 있는 글입니다. 하나의 이미지로 시작해 여러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다시 그것이 이미지로 새롭게 들어오는 것, 이게 현재 글쓰기의 최고 틀입니다. 계속 응원합니다. 저도 하루에 한 번 빵 같은 밀가루 음식 먹습니다. 맛있습니다.
엄마가 된다는 건 힘든 일이지요.
나는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깐 포도라는 통조림만 먹은 생각이 나네요 ^^
잘 먹지 않던 국수 였지만 그때 먹은 매운 비빔국수에 눈물이 날 뻔 했답니다.
옛날을 생각하게 하는 생생한 이야기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화이팅 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