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접란 키우기
박복자
봄바람이 베란다로 불어온다. 햇살이 창가를 드나들며 화초들마다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는다. 겨우내 움츠렸던 이파리들이 기지개를 켠다. 어떤 것들은 서둘러 새로 잎을 내는 것도 있다. 그런데 호접란은 아무런 기척이 없다. 얼마 전 꽃대가 뻗어 나오면서 반점을 몇 개 그리더니 그 뒤론 온점을 찍을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꽃은 언제쯤 피어날까?
집안의 공기정화를 위해서 베란다에 화초를 가꾸기로 했다. 실내이기 때문에 작고 앙증맞은 게 좋을 것 같았다. 집 가까이 대로에는 화원이 세 군데 나 되었다. 이 집 저 집 다니며 여러 가지 식물을 구경했다. 꽃이 아름다운 것, 이파리가 싱그러운 것, 모양이 예쁜 것 등 다양한 종류가 진열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분홍빛 나비 모양 꽃을 달고 있는 식물이 눈에 들어왔다.
호접란은 그 꽃핀 모양이 마치 호랑나비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공기정화식물이며 팔레놉시스라고도 불린다. 꽃말은 ‘당신을 사랑합니다’이고, ‘행복이 날아온다’는 뜻도 있다. 그래서 이사나 개업할 때 자주 이 꽃을 선물한다. 사람이 평안하다고 느끼는 환경에서 가장 적합하게 잘 자라는 식물로서, 조금만 특성을 알고 관리해주면 오랫동안 꽃을 감상하며 마음의 힐링을 할 수 있는 식물이라고 화원 주인이 설명을 덧붙였다. 잘 키워 집 안 분위기를 바꿔볼 마음으로 기대에 부풀었다.
베란다는 남쪽으로 향해있다. 바람이 잘 통하고 햇볕도 잘 든다. 집들이할 때 들어온 호야, 금전수, 꽃기린, 시클라멘, 뱅갈고무나무, 이름 모르는 몇 가지 다육이까지 어우러져 제법 작은 식물원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베란다부터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물과 영양제도 주면서 생육상태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허리를 굽혔다, 발뒤꿈치를 들었다, 쪼그려 앉아서 보기도 하며 아픈 식물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작년에 우리 집으로 온 호접란은 여름 끝자락이 되자 꽃잎이 한 장 두 장 떨어졌다. 마지막 한 송이가 가녀린 꽃대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더니 찬바람이 불자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잎만 남았다. 기온이 낮아지면서 관리하기도 어려워졌다. 적정 온도를 20~30도로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온도가 18도 이하로 떨어지면 저온피해를 입을 수 있어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했다. 식물들은 겨울을 잘 견뎌야 이듬해 꽃을 제대로 피우게 된다. 호접란은 이제 나의 관심대상 제1호가 되었다.
어느 날 글쓰기에 입문하게 되었다. 평소에 할 말을 제때 못해서 늘 속상해했다. 그때 그 말을 해야 했는데 하며 뒤늦게 후회하는 일이 많았다. 말을 하려면 머릿속에 문장이 정리되어야 하는데 나는 한 번에 그게 잘 안 된다. 그러던 차에 지인의 권유로 글쓰기 교실의 문우들 틈에 끼었다. 호접란이 화원에서 우리 집 베란다로 옮겨져 와 여러 식물 틈에서 자라듯.
어느 날, 선생님께서 글을 써내라고 했다. 여고 때 문예반에서 활동한 것이 전부였던 나는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호접란의 반점처럼 내 글귀도 풀리지 않았다. 체험한 것들을 풀어내기, 참신하게 말하기, 대상을 의미화 시키기 등의 말을 들을 땐 이해가 되었지만 막상 글로 표현하려니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어깨가 무거워지고 없던 신경통까지 생겨났다. 화초 가꾸기도 그렇지만 세상에 쉬운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호접란은 내 정성과 상관없이 잎이 누렇게 변해갔다. 뿌리를 뽑아 보니 약간씩 썩어있었다. 식물의 특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물만 잘 주면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게 잘못이었다. 그제야 인터넷에 들어가 호접란을 검색해보았다. 위로 올라온 뿌리가 하얗게 마른 상태에서 물을 주어야 했다. 사전 지식도 없이 꽃만 보고 좋아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화원이나 온실에서 키우는 것보다 집에서 키우기는 너무 까다로운 식물이었다.
초여름이 되자 베란다의 꽃기린은 작고 빨간 꽃봉오리를 잉태했다. 시클라멘은 일 년 내내 꽃을 피웠다 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수국도 이젠 제법 탐스럽게 꽃을 피워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호접란은 이제야 온점을 찍었다. 글쓰기에 진전이 더딘 내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막상 글을 쓰려고 하면 A4 용지 한 장을 다 채우기가 힘들었다. 꽃에 물을 주면서 하루빨리 활짝 웃는 꽃망울이 열리기를 기도했다. 바람이 잘 통하고 햇볕이 잘 드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글쓰기 강의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녔다. 소설과 산문집을 읽고 필사도 열심히 했다. 마음은 바쁘고 주위가 어수선했지만, 강의 시간은 놓치지 않고 열심히 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조금 안정이 되면서 글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재와 소재를 정하고 기, 승, 전, 결을 어떻게 풀어 쓸 것인가를 생각했다. 관련 서적을 찾아보면서 도서관 출입도 잦아졌다. 알면 알수록 어려운 글쓰기였지만 조금씩 이해가 되니 재미도 붙었다.
밖엔 바람이 불고 구름이 몰려오고 한바탕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가 쏟아졌다. 아침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날씨가 맑았다. 거실에서 베란다로 나가니 드디어 호접란 꽃대에 한 장의 꽃잎이 달려 있는 게 아닌가! 얼마나 반가운지 그 곁에 쪼그리고 앉아 유심히 살펴보았다. 작고 앙증맞은 꽃잎은 금방이라도 날개를 파닥일 것 같았다. 손으로 쓰다듬어주니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런 후 며칠 지나지 않아 분홍빛 나비모양의 꽃잎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꽃대 위에 앉아 있었다.
글쓰기도 이제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일상생활의 우선순위를 문학으로 하고부터는 온통 거기에 정신을 집중시킨다. 글을 쓴다는 건 어쩌면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너무 바쁘게만 살지 말고 천천히 삶을 즐기라고.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느린 속도로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려본다. 마치 뚜벅이 여행자가 된 것처럼 뚜벅뚜벅 길을 떠난다. 호접란이 꽃을 피우듯 언젠가는 글쓰기도 예쁜 꽃을 피우리라. 그러면 나에게도 꽃말처럼 행복이 날아오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첫댓글 수정이 잘 되었습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다른 글 쓰시면 되겠습니다. ^^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호접나처럼 아름다운 글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등단 작품으로도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