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군 國民保導聯盟 제1회 민간인 희생자合同 慰靈祭 봉행 |
일시:2021년12월22일(수)오후2시
장소:장흥군 안양면수문리
주최:장흥군청
주관: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국민보도연맹유족회
후원:진실화해위원회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안양면 수문마을공동체
(사)장흥문화공작소
장흥군 國民保導聯盟 제1회 민간인 희생자合同 慰靈祭추모사
존경하는 장흥군 유족여러분! 그리고 내외귀빈여러분!
오늘 장흥군 國民保導聯盟 제1회 민간인 희생자合同 慰靈祭를 맞이하여 숙연한 마음으로 이자리에 섰습니다 장흥은 억불산.가지산.천관산을 비롯한 명산과 물의도시 탐진강이 유유히 흐르며 곡창지대를 이루어 풍요롭고 인심좋은 호남의 관광도시로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따뜻한고장입니다.
임진왜란때 호남의 의병장으로서 무공을 떨치다 장열하게 순절한 고경명장군과 3부자의 충절은 민족의귀감이되고있습니다. 일제강점기시절 조국의자유와 해방을위한 독립운동가를 200여명이나 배출한 애국충절의 고향이기도합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한국전쟁의참화는 피할수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밝혀진것만해도 전쟁발발전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이후 장흥군관내에서 부당한 국가공권력에 의해서 보도연맹사건및군경토벌작전과 부역혐의로 약150여명의 비무장민간인이 학살되었습니다.
존경하는 장흥군 유족여러분!
이제 2기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한지 1년이 다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여건속에서 출범한 진화위가 조사에 제속도를 내지못하고있으며 특히 장흥군은 진실규명신청이 저조한지역으로 나타나고있습니다 이에 장흥군 구성원들은 홍보를 더욱 강화하여 미신청유족을 발굴하여 신청독려를 해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울러 영령들을 추모할수있는 추모공원부지를 확보하고 추모탑을 건립하여 다시는 이땅에 불행한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함께합시다.
오늘 제1회 장흥군 합동위령제는 전쟁이끝난지 70여년만에 안양면수문리에서 봉행되고있습니다.만시지탄이 아닐수없습니다. 전쟁의참화를 피하지못하고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영령들의 넋을달래고 부모형제를 졸지에 잃어버리고 그로인하여 사회적 불이익을당하며 인고의세월을 살아오신 장흥군유족들에게 진심으로 위로의말씀을 올립니다.
원혼들이시여!
철석이는 득량만바다가 바라보이는 오늘 정성스럽게 준비한 제수와 맑은술을 올리나니 흠향하시옵고 하늘나라에서 편히쉬옵소서 코로나의 위험속에서도 합동위령제를 봉행하신 조계룡회장님과 장흥군 정종순군수님과 관계부처와 시민단체여러분께 감사의말씀올립니다. 감사합니다.
2021년 12월22일
상임대표의장 윤호상 대독 선용규보성회장 |
1950년 7얼 22일(음력 6월8일) 장흥경찰서에 구금된 40여명의 보도연맹원이 장흥군 안양면 수문리 앞 바다에 줄줄이
엮인 채 돌에 매달아 산채로 수장시키고 떠오르는 사람은 다시 총살시켰다고 합니다.
[장흥군 학살현황]
(한국전쟁전쟁 전 피해)
장흥에서는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1월 5일 장흥 관산지서 소속 경찰들이 농안리 손돈태 가족들을 마을 우물가로 끌어냈다.
경찰은 손돈태에게는 좌익활동을 하다가 도피중인 아들 손천석을, 손금태에게는 14연대에 근무하던 중 여순사건 때 행방불명된 큰아들 손용반을 찾아내라며 총 개머리판 등으로 무차별 구타를 하였다.
손돈태의 처 등이 이에 항의를 하자 이부접 등 세 명을 일렬로 세워놓고 사살하였다. 그 후 손일태의 집으로 가서 손일태 등 6명을 사살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장흥지역에서도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했다. 1950년 7월 22일 장흥군 안양면 수문리 앞 바다에 두 사람씩 손이 묶인 채 빠뜨려진 후 사살되었고 또 다른 주민들은 안양면 해창저수지 인근 야산에서 희생되었다.
전남일보사의 『광복 30년』에 의하면, 후퇴하던 장흥경찰이 주민 30여 명을 안양면 앞 바다에 수장시켰다.
<토벌 피해>
인민군은 7월 28일 장흥에 진입하여(장흥군지) 9월 28일 철수했다고 한다. 경찰이 장흥읍을 수복한 시기는 9월 30일(또는 10월 5일)이었다.
국군 수복 후 장흥에는 유치면 보림사계곡으로 피신한 인근 지역 주민들이 경찰토벌작전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은 사실이 확인된다. 이로 보아 경찰서와 각 지서에 의해서도 적지 않은 피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확인된 피해 사실은 장흥경찰서, 대덕지서, 장평지서, 안양지서에 의한 것이다.
장흥에서는 국군 수복 후 경찰이 젊은 사람들을 이웃 마을로 소개시켜 노인들만 남아있던 장평면 제산리 이목마을에 10월 26일 경찰토벌부대가 진입하였다. 경찰이 이목 마을 전체에 불을 지르자 들판에서 추수를 하고 있던 젊은 사람들이 놀라 마을로 돌아왔다.
경찰은 이들을 집결시킨 후 빨치산과 내통하기 위해 마을로 왔다면서 장도수 등 7명을 연행하여 그 중 6명을 마을 앞 냇가에서 사살하였다. 경찰에게 연행된 다른 주민 한명도 어디선가 희생되었다.
다음 날인 1950년 10월 27일 장흥경찰서 소속 기동대 20~30명이 부용산자락 마을인 용산면 운주리에 진입하였다. 기동대는 2개조로 나누어 1개조는 마을 앞산을 수색하고, 또 다른 1개조는 마을의 집을 수색하였다. 경찰은 마을사람들을 마을 정자나무 아래에 집결시킨 후 마을사람 개개인을 조사한 후 이광준 등 7명의 양 손을 묶어 트럭에 싣고 가다가 이중 5명을 용산면과 관산면 사이 솔티재에서 학살했다.
1950년 11월 1일 경찰토벌대가 천태산 정상에서부터 대덕면 연정리 산정마을로 내려왔다. 경찰이 마을에 들어오면 젊은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는 소문이 돌자 마을사람들은 무조건 피신을 했으나 박일규 등 3명이 수색 중인 경찰에게 붙잡혀 마을로 끌려왔다.
마을로 내려온 경찰은 집집마다 수색하여 화장실에 숨어있던 주민 1명을 그 자리에서 사살하였고, 마을에 숨어있던 주민들을 붙잡아 마을회관 앞으로 데려왔다. 경찰은 마을사람 모두를 마을회관 앞으로 모이게 한 후 주민 2명을 그 자리에서 사살하고, 산에서 잡힌 약산면 피난민 3명과 주민 4명을 마을 앞 대나무밭에서 사살했다.
1950년 11월 27일 경찰 토벌대가 다시 장평면에 진입하였다. 청용리에 경찰이 온다는 소문이 돌자 마을 젊은이들이 1km 떨어진 이웃 하동마을로 피신했다. 그러자 그날 밤 경찰 토벌대가 하동마을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청용마을에서 피신해 온 주민들과 하동마을 주민 등 7~8명이 사살당했다.
다음날 새벽 경찰 토벌대는 청용마을에 와서 마을주민들을 마을회관 앞에 집결시켰다. 주민들을 끌어가는 과정에서 경찰 토벌대는 마을주민 한 명을 그 자리에서 사살하고, 다른 주민 4명을 연행했다. 경찰 토벌대는 이들을 연행하던 중 남자 1명을 마을 어귀에서, 또 다른 남자 1명을 생판리 고개에서 사살했다. 장평지서까지 끌려갔던 2명의 여성은 다음날 풀려났다.
<부역혐의 피해>
장흥경찰서는 유치장에 감금한 주민들을 1950년 12월 4일 장흥읍 남외리(장흥서초등학교 부근) 다리 밑에서 총살했다. 당시 희생된 것으로 확인되는 주민은 부동면 평화리 고재갑이며 함께 희생된 주민들의 규모와 신원은 더 이상 확인되지 않았다.
대덕지서는 1951년 3월 15일 옹암리 박종신 등 마을 주민 5명을 내저마을 고개에서 총살했다. 희생자들은 경찰이 지정한 초소에 야경을 서기 위해 나갔다가 연행된 것이었는데, 박은수를 제외한 5명이 내저마을 고개 논에서 사살되고 박은수는 풀려났다. 이들이 희생된 이유는 국군 수복 당시 약산면의 피난민들을 배에 태워줬기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장평지서는 1950년 10월 26일 옹기를 팔러 장에 가던 등촌리 김임식을 덕산고개에서 사살했으며, 1951년 3월 17일에는 두봉리에서 지내다가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향집이 있던 진산리로 양식과 무우를 가지러 가던 주민 2명을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안양지서는 1950년 12월 21일 안양면 모령리 방대석을 연행하여 목단마을 가둥골에서 총살했다. 당시 모령리에서는 5~6명이 경찰에게 희생당했다.
유치토벌작전 중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영암경찰서 경찰 ‘금오대’ 대장 정씨(정국채)에 의하면, 장흥 유치 작전 때 몇 개 군이 합동작전을 하는 경우에는 애매하게 죽는 민간인이 많았는데, 작전 중 도망가는 사람은 모두 공비로 보았다고 한다.
국군 수복 당시 ‘경찰이 수복할 경우 인민군 점령하에 남아 있던 주민들은 모두 죽인다.’라는 소문을 들은 완도군 주민들은 일단 육지로 피하자는 생각으로 가장 가까이 깊은 계곡이 있던 장흥 유치면 보림사 계곡으로 피난하였다. 1951년 봄 경찰토벌대가 작전을 하면서 이곳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주민들을 학살했다. 보림사 계곡 동굴에 있던 피난민들은 토벌대가 난사한 총격에 집단희생되었다. 이 사실은 현장에서 생존한 최남기의 증언에 의해 확인되었다. 한편, 진실화해위원회는 완도에서 장흥 유치계곡으로 피난했던 희생자 대부분에 대해 진실규명 불능으로 판단하였다.
한편, 『한국전쟁사』에서 장흥경찰서는 1950년 10월 18일 강진경찰서를 습격하려던 300여 명을 공격하여 42명을 사살하고 5명을 생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 장흥지역에서 확인된 피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 사건발생일 | 희생장소 | 희생자 수 | 가해조직 | 비고 |
전쟁 전 | 1950. 1. 5. | 관산면 | 9 | 관산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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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 | 1950. 7. 22. | 안양면 바다 | 30 | 장흥경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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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 | 1950. 10. 18. |
| 42 | 장흥경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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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 | 1950. 10. 26. | 장평면 제산리 | 7 | 경찰토벌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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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 | 1950. 10. 27. | 용산면 솔티재 | 5 | 경찰토벌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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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 | 1950. 11. 1. | 대덕면 연정리 | 10 | 경찰토벌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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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 | 1950. 11. 27. | 장평면 청용리 | 10 | 경찰토벌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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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역 | 1950. 12. 4. | 장흥읍 남외리 다리밑 |
| 장흥경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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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역 | 1950. 12. 21. | 안양면 모령리 | 5~6 | 안양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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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역 | 1951. 3. 15. | 대덕면 옹암리 | 5 | 대덕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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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역 | 1951. 3. 17. | 장평면 진산리 | 2 | 장평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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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 | 1951. 봄 | 보림사 계곡 |
| 경찰토벌대 |
첫댓글 삼가 영령들의명복을기원드립니다
하늘날라에서편히쉬소서
구천을 헤매는 영혼들이시여
해원하소서
푸른수문바다는 그날의 참상을 알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