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는 아브라함으로부터 겨우 430년 이후에 율법을 받았는가?
갈라디아서 3: 17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이것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의 근거는 모세 율법을 지키는 공로가 아니라 - 비록 그 율법이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하여 도입되기는 했지만 (22-24절) - 은혜의 약속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한 말이다.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란에서 이주해 온 때와, 모세와 이스라엘 군중이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던 때와의 사이에는 실제로는 645년 가까운 간격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바울이 이야기한 430년보다도 215년이 더해진 기간이다. 이것이 정말로 불일치일까? 아니, 천만의 말씀이다. 여기에는, 바울이 생각한 최고 연대(最古年代: terminus a quo)에 대한 단순한 오해가 있어 왔을 따름이다.
갈라디아서 3:16에서 바울은 창세기 13:15(아브라함이 애굽에 머물다가 돌아온 이후)과 창세기 22:18(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거의 제물로 바칠 뻔했다가 돌아온 이후,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들을 가리켜 말했다. 만약 이삭이 거의 제물로 드려질 뻔했을 때의 그의 나이가 열 두 살이었다면, 언약 약속을 갱신하던 바로 이 때가 아브라함이 112세 때, 즉 그가 하란으로부터 이주해 온 37년 이후였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바울은 단지 별로 신뢰할 수 없는 70인역의 출애굽기 12:40("이스라엘 자손이 애굽과 가나안에 거주한 지 사백 삼십 년이라")을 의지했다는 어떤 사람들의 주장이 성립되지 못한다. 여기에 삽입된 "가나안에"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부터 야곱이 주전 1876년에 애굽으로 이주하던 때까지의 215년에 해당된다. 여기서 바울은 “약속들을 가리켜 말하고 있는데, 그 약속들 속에는 아브라함이 처음 가나안에 도착한 때부터 37년 이후에 재확인된 바로 그 약속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430이라는 숫자가 적용될 수 있는 데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진짜 해결책을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여기서 바울은 아브라함 족속의 역사 속에서 두 개의 주요한 단계, 즉 언약시대와 율법시대를 대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은혜의 언약의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까지 여러 번 반복되었다. 이 후기의 언약 갱신은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있어서의 약간의 차이만 제외하면, 본질적으로는 창세기 12장의 원래의 선언과 동일한 것이었다. 사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을 재확인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마지막으로 나타나신 것은, 야곱이 주전 1876년에 애굽을 향하여 가나안을 떠나기 직전이었다(참조. 창 46:2-4). 그러므로 430년이라는 합계는 실제로 매우 정확한 수치였으며,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야웨를 만난 것은 바로 이 430년의 기간이 정확하게 지난 이후였다. 여기에는 어떤 불일치도 없다.
글리슨 아처, 『성경 난제 백과사전』(생명의말씀사, 1996년), pp.556∼557.
첫댓글 초신자분들도 글리슨 아처의 사전을 하나 비치하고 틈틈히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좋은 내용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공감 감사합니다.
<IVP 성경주석: 예언서>, 갈라디아서
3:15-25 율법의 위치. 바울은 율법에 대해 그러면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한 후에 율법이 어떻게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할 것인가에 관해 부연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 율법의 관계란 과연 무엇인가?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의 초점은, 율법은 약속보다는 나중에 (15-18절) 그리고 그 약속의 성취보다는 앞에(19-25절)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첫째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율법의 언약을 주신 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성립된 후 400년 이상 지난 때였음을 지적한다[‘언약’(covenant)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보통 '유언'(will) 또는 ‘계약’(testament)을 의미하나 칠십인역에서는 '언약'이란 의미의 표준 히브리 용어를 번역하는 데 사용되었다. 바울이 이중적인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분명하다. 즉 나중에 온 언약이 먼저 온 언약을 무효화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율법이 은혜의 약속이 아닌 다른 근거로 유업을 줄 수 있다면 실제로 율법은 앞선 언약을 무효화하게 될 것이다.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은 실제로 그 두 가지 언약 사이에서 양립할 수 없는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17절). 유업은 은혜를 통해서 오든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온다. 그런데 그것은 전자를 통해서 오는 것이므로 후자를 통해서는 올 수 없다(18절; 참고․ 롬 4:5). 이 논증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그리고 아마 유대주의자들까지도) 받아들였던 어떤 것, 즉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16절). 이 점온 뒤에 계속되는 논증에서 중요하게 될 것이다.
두 번째로, 바울은 율법이 약속의 성취보다 먼저 왔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 약속의 성취에 이르는 길을 예비했다는 것을 강조한다(19-25절). 여기서 주가 되는 요점은 모세 율법이 지니는 일시성이다. 그것은 자손 즉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일정 기간만 주어졌던 것이다(19절). 일단 믿음의 실제가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 나타났을 때 율법의 감독 기능은 폐지되었다(25절).
율법은 그 약속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죄 있는 백성들을 ‘가둠으로써’, 그리고 마치 로마 시대에 '파이다고고스(paidagogos, 아이들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은 노예)가 그의 책임 하에 맡겨진 사람들을 교정했듯이 그들을 지키고 제한함으로써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었던 것이다(‘paidagogos'라는 용어는 24절과 25절에 나오지만 NIV에서는 문자적으로번역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모세의 유전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종속되는 것이었으며 앞으로 나타날 복음을 위해 백성들을 실제로 준비시킨 것이었다. 이 사상은 4:1-7에서 더욱 상세히 다루어진다.
율법의 기능의 종속성은 19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밝혀진다. 첫째, 율법은 ‘더한’(add) 것이다. 즉 그것은 원래의 언약은 아니다. 둘째, 율법은 '범법함으로써' 주어졌다. 이 말은 율법의 의도가 죄를 억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혹은 그보다는 그 범법을 드러내기 위해서(롬 3:19-20; 4:13-15; 5:13) 그리고 심지어 죄를 더하게(롬 5:20; 7:7-11 의 뜻으로) 하기 위해서라는 의미일 수 있다.
셋째,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중보자의 손'을 통해 제정되었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언약에 대하여 율법이 갖는 모종의 열등함을 가리킨다(20절의 정확한 의미는 많은 학문적인 논의와 해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분명하다). 요컨대, 율법은 생명을 나누어 주지 못하고 의롭게 하지 못한다. 율법은 약속의 그 은혜로움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목적을 더 이루어 가며, 믿음으로 의롭게 되기 위해서 그 율법에 대하여 죽을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2:19).
@장코뱅 위 주석은 400년 이상 지난 때라고 하네요. testament의 의미도 알겠습니다. 잘 읽어 보겠습니다.
@장코뱅 갈라디아서의 주석을 통해서 율법의 위치를 정확하게 짚어주니 은혜롭습니다.
모세의 유전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종속되는 것이었고 앞으로 나타날 복음을 위해 백성들을 실제로 준비시킨 것이었다는 설명이 유용합니다. 율법의 기능의 종속성에 대한 설명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코람데오 공감합니다. 잘 배우겠습니다.
@코람데오 공감합니다22
처음엔 무슨 말인가 하고 잘 몰랐는데 다시 읽어 보니 의미를 알겠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은혜의 언약의 약속들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반복적으로 갱신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마지막으로 나타나신 것이 주전 1876년 애굽으로 떠나기 직전이었으니, 애굽에서 종살이 한 430년 이후에 정확하게 시내산 언약이 있었다고 이해한 바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거네요.
창 12장의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야곱이 애굽으로 떠나기 직전에 다시 반복하셨다는 내용, 즉 원래의 선언과 후기의 갱신 내용이 동일한 것이었다는 말씀이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성경은 정확하게 알수록 더 은혜가 되고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예리하게 잘 읽으셨네요. 글리슨 아처의 책들이 교과서로 쓰이는 이유가 있을만큼 책 내용이 좋은 것 같습니다.
깊은 내용 좋은 댓글에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
이 글을 읽고 성경을 많이 읽고 공부해야 할 필요성을 더 자극받아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