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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로자 룩셈부르크의 메시지
원고]20세기 로자 룩셈부르크의 메시지 - 현사연 발체.hwp
작성일 : 2018.01
작성자 : 김 태균
차 례
1. 문제의식 1
2.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 5
1) 로자 룩셈부르크 5
2) 로자 룩셈부르크 논쟁 6
① 1890년 중후반 룩셈부르크-카우츠키- 베른슈타인 ‘수정주의 논쟁 6
② 1903년 룩셈부르크-레닌 ‘민족문제 논쟁’ 8
③ 1905년 러시아 혁명과 대중 파업 그리고 자발성 9
④ 당 조직 운영 논쟁 - 민주주의와 중앙집권주의 논쟁 10
⑤ 민주주의 논쟁 11
3. 결론 12
1. 문제의식
1987년 7월 5일 울산의 현대엔진 노동조합 창립총회를 시작으로 출발한 7,8,9 노동자 대 투쟁은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이 형성된 이래로 최대의 규모이 대중적 투쟁이었고 6월 항쟁에 의해 쟁취된 절차상 민주주의에 이어 경제적 민주주의 그리고 실질적 민주주의를 쟁취하려 했다는 점에서 87년 6월 항쟁을 잇는 노동자 계급의 대중적 투쟁이었다. 7월 5일부터 시작된 87년 노동자 대 투쟁은 8월 28일 이 석규 열사 장례투쟁에 이어 9월 1일 서울 택시 노동자들의 총 파업 투쟁 그리고 9월 3일 현대중공업 노동자들과 그 다음날이 9월 4일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노태우 정권이 폭압적 탄압으로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된다.
비록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전개된 노동자 투쟁이었지만 87년 노동자 대 투쟁은 한국 전쟁 이후 가장 대중적으로 단 시간에 폭발한 투쟁이었다. 이 기간 동안 총 3,241건의 쟁의행위와 하루 평균 44건의 파업 투쟁이 전개 되었으며, 노동자 대 투쟁이 일어나기 전인 1987년 6월 말 당시의 노조 수는 2,742개, 조합원 수는 105만 명으로 조직률은 15.7%였는데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운동이 활성화하면서 노조 수와 조합원 수가 급증해 1989년에는 노조 수 7,883개, 조합원 수 193만 명, 조직률은 19.8%으로 노동조합 운동이 양적으로 급성장했다. 통계상의 87년 노동자 대 투쟁에 대한 평가 이외에도 ① 전 지역, 전 산업에 걸쳐 일어난 최대 규모의 노동자 대중 투쟁이었으며, ② 노동법의 울타리를 넘어 ‘선 파업 후 협상’이라는 법을 무시한 투쟁이었고, ③ 그 격렬함에 있어서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투쟁이었다. 또한 이 투쟁은 ④ 3개 월 만에 끝난 투쟁이 아니라 민주노조 운동을 예고하는 장엄한 역사이며 출발이라는 전노협 마지막 위원장이었던 양 규헌 위원장의 평가 내용을 보면 87년 노동자 대 투쟁이 한국 노동운동에 미친 영향을 미뤄 짐작할 수가 있다.
87년 노동자 대 투쟁이 마무리 된지 30년이 흘렀다. 공돌이와 공순이로 취급 받았던 한국의 노동자들이 당당하게 사회의 일원으로 시민권을 획득하고 새로운 사회로의 전망을 열어 재낀 시간이 30년이 흐른 것이다. 30년의 시간은 한국 노동운동에 있어 많은 변화와 부침을 가져왔다. 한국 노동운동은 87년 노동자 대 투쟁 이후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의 건설, 1995년 전국 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의 출범이라는 성장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또한 1997년 ‘국민승리21’에 이어 2002년 민주노동당 창당 후 30년이 흐른 지금은 변혁 당, 노동 당, 민중 당, 정의 당 등 다수의 진보정당 창당으로 까지 이어졌다.
많은 시간이 흐른 만큼 많은 성과도 존재했지만 역으로 부침의 과정도 많이 있었다.
공돌이와 공순이로 불렸던 한국 노동운동이 87년 노동자 대 투쟁을 거치면서 ‘자주성’, ‘민주성’, 변혁지향성‘이라는 자기 계급의 고유한 이념을 획득했고 이러한 이념은 1990년 전노협 출범과 함께 ’노동해방・평등세상을 위한 비타협적 노동운동론‘으로 까지 정립되었으나 1995년 민주노총 출범과 동시에 ’국민과 함께 하는 타협적 노동운동론‘으로 개량화 되었다. 또한 계급적 산별노조 운동은 여전히 기업별 노동조합운동의 관성이 유지된 채로 모양만 산별노조로의 전환 과정을 거치고 있으며, 노동자 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는 의회투쟁으로 매몰되면서 진보정당 건설로 집중 되고 있는 실정이다.
세상을 바꿔도 서 너 번 바꿀 수 있을 만큼 벅찼던 87년 노동자 대 투쟁이 30년이라는 시간을 보냈으나 여전히 노동자 민중의 삶은 팍팍하기만 하다. 아니, 30년이라는 시간이 무상할 만큼 오히려 더욱 더 살기가 어려워진 듯싶다. 단지 삶의 문제만이 아니라 노동운동 나아가 노동해방운동에 있어서도 전말이 그리 밝지만은 않은 듯하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1987년에서 2017년을 넘어 2018년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아니 더욱 더 우리네 삶이 변함이 없고, 노동자 계급의 노동해방투쟁이 쉽지만은 않은 듯 여겨지는 상황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필자가 「20세기 로자 룩셈부르크의의 메시지」라는 제목의 원고를 접하면서도 필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고민과 질문이 바로 이것이었다. 전체 인구 5천만 명 중에 실업자의 수가 1천만 명이 넘고 청년 실업자의 수가 40만 명을 넘는 시대, 고용된 노동자의 수 중 절 반 이상이 비정규직이고, 10만 명 당 25.6명이 자살을 하고 있으며 10대 청소년 자살률이 OECD 가입 국가 중 불명예스럽게 1위를 하고 있는 2018년 한국, 전노협에 이어 민주노총으로 발전하고 87년 당시에는 하나도 없었던 진보정당이 3-4개나 되는데도 불구하고 한국 노동운동의 전망이 그리고 노동해방투쟁의 전망이 그리 밝지만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1871년 파리코뮌이 시작된 해에 폴란드에서 태어난 로자 룩셈부르크는 1차 세계대전이 마무리 된 1919년 죽임을 당했다. 1917년 2월과 10월 전개된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시절에 룩셈부르크는 감옥에서 구금생활을 했으며, 러시아혁명을 이끌었던 레닌에 비해 룩셈부르크는 독일 혁명을 위해 분투해 왔다. 1917년 동 시대에 러시아와 독일이라는 공간을 넘어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었던 러시아 혁명에 대해 레닌과 룩셈부르크의 논쟁 그리고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와의 논쟁은 2018년 한국 자본주의에서 노동해방투쟁을 전개하는 우리 모두에게 무엇을 던져주고 있는 것일까? 1917년과 2018년이라는 시간의 차이, 러시아와 독일이라는 공간과 한국이라는 공간과의 차이를 넘어 룩셈부르크의 논쟁이 한국에서 투쟁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주문하고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필자의 졸고 「20세기 로자 룩셈부르크의 메시지」를 시작하게 된 이유이다.
본 졸고는 1917년 러시아 혁명과 독일 혁명을 둘러싸고 고민되었던 룩셈부르크의 사상을 간략하게 정리를 해 볼 생각이다. 특히나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둘러싼 논쟁,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당 내 민족문제를 둘러싼 논쟁, 대중의 자생성과 의식성을 둘러싼 논쟁, 민주주의와 중앙집권주의라는 조직 운영 관련한 논쟁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둘러싼 룩셈부르크의 사상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위와 같이 몇몇 논쟁을 중심으로 룩셈부르크의 사상을 살펴보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이자 본 졸고의 연구 목적이기도 하다.
우선 첫 번째는 레닌과 룩셈부르크를 ‘인텔리의 주입 또는 의식성 혹은 중앙집권적 조직운영’과 ‘대중의 자발성 또는 조직운영의 민주주의’로 대립시킴으로써 전통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을 분리시키려고 하는 그리고 이를 통해 20세기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부정이라는 악의적 음모에 대한 폭로이다. 쏘련을 중심으로 한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국가 자본주의론을 비롯한 다양한 반쏘 논리의 바탕에는 전통 마르크스주의와 레닌과의 분리 또는 스탈린과의 분리 음모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리 공작의 한축에는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의 음모적 대립이 존재한다. 결국 이러한 대립의 논리는 21세기 ‘새로운’ 사회주의 건설로 이어지고 있다. 본 졸고는 바로 이러한 반쏘 논리의 한축에는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립이라는 악의적 음모가 있음을 폭로하고자 한다.
그림1) 레닌과 룩셈부르크의 분리 그리고 반쏘 반공 논리
두 번째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중심으로 레닌과 그리고 독일사회민주당 내부에서 베른슈타인 및 카우츠키와의 논쟁을 통해 룩셈부르크가 20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 시공간을 넘어 21세기 한국에 던져주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라는 점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러한 확인 작업은 결국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노동해방을 꿈꾸는 많은 독자들의 고민의 꺼리들이 룩셈부르크의 메시지를 통해 그리고 구체적으로 노동해방투쟁을 투쟁의 주체인 조직(당) 건설을 어떻게 해 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볼 졸고를 통해 독자들과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함이다.
그림2) 레닌과 룩셈부르크의 논쟁 - 시공간을 중심으로
2. 러시아 혁명을 둘러싼 룩셈부르크의 사상
1) 로자 룩셈부르크
파리코뮌이 성립된 1871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로자 룩셈부르크는 바르샤바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다가 15세에 폴란드 프롤레타리아 당에 가입해 총파업 투쟁 등을 주도하다가 제정 러시아 탄압에 의해 스위스로 망명을 가게 된다. 스위스 망명 이후 로자 룩셈부르크는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1897년 폴란드 산업발전 관련한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이후 로자 룩셈부르크는 1898년 독일 지인의 아들과 위장 결혼을 하여 독일 시민권을 획득한 뒤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사회주의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룩셈부르크는 제2인터내셔널에 참여해서 당시 국제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의 베른슈타인과 독일 수정주의에 맞선 논쟁을 전개했다. 독일 ‘수정주의 논쟁’은 독일 사회민주당이 독일의 혁명을 위한 수단으로 의회정치를 통한 점진적 개혁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노동자 계급의 혁명 투쟁을 선택 할 것인가? 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이후 룩셈부르크는 1903년 러시아의 레닌과 ‘당 조직 논쟁’을 전개했는데 이는 직업적 혁명가를 중심으로 한 레닌의 당 조직 노선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문제제기였다.
이후 1905년 1월 22일 발생한 러시아 상트페테부르크 투쟁에 참여코자 바르샤바로 돌아가 폴란드 사민당을 창당하고 폴란드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폴란드에서 룩셈부르크는 반러시아 운동과 폴란드 독립을 주창한 폴란드 내 사회주의자들과 계급문제와 민족문제 관련한 치열한 논쟁을 전개했으며, 이 과정에서 폴란드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러시아 간첩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고 이 과정에서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수감에서 풀려난 룩셈부르크는 독일로 돌아와 독일 사회민주당내 정치학교에서 1907년부터 1914년까지 교사로 근무하면서 『자본축적론』을 집필하였다. 1914년 독일 사회민주당이 독일정부의 전쟁 예산을 승인해주면서 2차 인터내셔널(1889~1916)이 붕괴되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이때 독일 사회민주당의 당의 결정에 반대해면서 논쟁을 전개했고 이후 룩셈부르크는 탈당을 하고 1916년 스파르타쿠스 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룩셈부르크의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이후 1918년 독일 공산당을 창당하면서 1월15일 대규모 독일 노동자 투쟁을 조직하고 이 투쟁은 독일 군대에 의해 진압을 당하게 되는 가운데 룩셈부르크는 그 이듬해인 1919년 1월 15일 체포되어 살해를 당한다.
2) 룩셈부르크 논쟁
① 1890년 중후반 룩셈부르크-카우츠키- 베른슈타인 ‘수정주의 논쟁’
독일 사회민주당은 공식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고는 있으나 지금의 한국 노동운동 내 분파 구분처럼 급진좌파 - 중간(앙)파 - 수정주의(우파, 개량주의) 파로 구분이 가능하다. 급진좌파의 리더 격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중간파인 카르 카우츠키 그리고 수정주의파의 리더 격인 에두아르크 베른슈타인이다. 독일 사회민주당내 분파 형성의 쟁점은 어떻게 사회변혁(사회주의 혁명)을 이룰 것인가? 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독일 사회민주당내 수정주의를 중심으로 한 논쟁은 크게 3 단계로 구분이 가능하다. 첫 번째 단계가 1890년대 중반부터 베른슈타인에 의해 제기된 수정주의 논쟁이다. 두 번째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나타난 경제 민주주의 구상을 둘러싼 논쟁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나타난 사회적 시장 경제론 전환을 둘러싼 논쟁이다.
본 졸고에서는 룩셈부르크와의 논쟁으로 표현되는 첫 번째 단계 즉 1980년대 중반부터 베른슈타인에 의해 제기된 수정주의 논쟁을 중심으로 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 그리고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논쟁을 살펴볼까 한다.
독일 사회민주당 수정주의 분파의 대부인 베른슈타인은 1896년부터 1898년까지 『신시대』지에 연속물로 기고한 「사회주의의 제 문제」라는 원고를 통해 수정주의를 제기했다.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의 제 문제」를 보면 한 마디로 정통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독일 혁명 투쟁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자본주의가 자기모순에 의해 필연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인데 베른슈타인은 독일의 상황을 보면 생산의 집중도 없고, 대규모 기업에 의한 소규모 기업의 소멸도 없고, 산업과 상업에 있어서도 집중이 매우 느리고, 농업에서의 소규모 생산단위의 소멸도 발생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베른슈타인은 독일의 경우 쁘띠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 화 하지도 않았고 노동자 계급의 생활조건이 향상되면서 계급투쟁이 향상되기는커녕 약화 되면서 사회적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결국 베른슈타인은 신용의 확장 등으로 자본의 순환이 빨라지면서 자본주의에서 더 이상 위기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보통 선거권이 확장되고 노동조합이 발전하면서 무장 혁명이 일어나지 않아도 사회주의가 도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베른슈타인의 주장에 대해 독일 사회민주당내에서는 아래 표1)처럼 지지(적극적 지지파와 비판적 지지)와 반대로 나누어졌다.
표1)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판단
적극적지지
(개량주의)
폴마르(Georg von Vollmar) : 바이레른 사회주의자이며 가장 열렬한 베른슈타인 옹호자
다비드(David) : 제국의회 의원과 바이마르 때 국회의장을 역임한 농업이론가
프랑크(Ludwig Frank) : 1차 세계대전 발발 때 적극적인 활동을 자원한 이상주의자이자 애국주의자
아이스너(Kurt Eisner) : 윤리적 사회주의자
콘라드 슈미트 : 가치이론과 사회주의의 철학적 기초에 대해 관심을 쏟았던 경제학자
캄프마이어(Paul Kampmeyer) 등
* 이 들은 대 부분 {월간 사회주의(Sozialistische Manlatshefte)}집필 활동을 통해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적극지지 했다.
비판적지지
(개혁주의)
노동조합 지도자 : 레기엔(Legien), 라이파르트(Leipart), 팀(Tim), 움브라이트(Umbreit), 엘름( von Elm)
당직자 : 에버트(Friedrich Ebert)
보호주의자 : 쉬펠(Schppell), 칼베르(Calwer), 힐데브란트(Hildebrand)
반대
카우츠키와 로자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는 1896년부터 1898년까지 『신시대』지에 연속물로 기고한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의 제 문제」가 1899년 『사회주의의 전제 조건과 사회민주당의 임무』로 출간이 되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을 시작했다. 룩셈부르크의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은 1899년에 발행된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Sozialreform oder Revolution)』에 의해 구체화 되었다.
룩셈부르크는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Sozialreform oder Revolution)』를 통해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비판했다. 위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독일 사회민주당 수정주의 논쟁은 어떻게 사회변혁을 이룰 것인가? 에 대한 답이었다. 즉 아래로부터 노동자 대중 투쟁을 통해 일으킬 것인가? 아니면 선거나 교섭을 통해 이룰 것인가? 의 문제였다. 이에 대해 룩셈부르크는 두 전략이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전술이라 주장을 하면서 전통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했다.
“정치권력 장악과 사회혁명에 반대하며 그 대신에 개혁 입법을 택하는 사람은 사실 같은 목표를 이루는 더 평온하고 안정적이지만 느린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는 전혀 다른 목표를 지향한다. 그는 새로운 사회 질서를 수립한다는 입장이 아니라, 낡은 질서의 겉모습을 수정한다는 입장을 택한 것이다.”
한편 중간파의 대부였던 카를 카우츠키의 경우 룩셈부르크와 공동보조를 맞추면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을 했지만 카우츠키와 룩셈부르크와의 사이에서 미묘한 주장의 차이가 있었고 이러한 차이는 이후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로 나타났다.
카우츠키와 룩셈부르크의 차이는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의 전제 조건과 사회민주당의 임무』에서 자본의 집적과 집중 그리고 독점화 현상이 일어나지만 주식회사라는 방식을 통해 부의 분배가 일어나는 현장을 근거로 한 수정주의 주장에 대한 비판의 과정에서 나타났다.
베른슈타인을 비판하고자 했던 카우츠키는 ‘과소소비론’을 통해 비판했다. 카우츠키의 ‘과소 소비론’은 기계 자동화 등으로 자본주의에서 잉여생산이 증가하지만 노동자의 임금수준이 낮아 그 잉여를 다 소비 할 수 없고 자본가 또한 생산된 잉여생산을 흡수하지 못함으로 ‘과소소비’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과소소비’로 인해 자본주의에서 위기가 발생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잉여생산이 자본화 되어 ‘잉여자본의 수출’이 발생하는데 식민지와 제국주의가 발생하면서 자본주의의 생명이 연장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카우츠키는 사회주의 혁명은 자본주의의 성장 등 객관적 조건이 성숙될 때 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서구 자본주의는 아직 객관적 조건이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함을 주장하면서 룩셈부르크와도 차이를 보였다.
카우츠키와 룩셈부르크의 차이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반대라는 점에서는 동일했지만 아래 카우츠키의 글처럼 노동자 대중의 자발성에 근거한 혁명성의 부정이었다.
“사회주의 정당은 혁명적 당이지만 혁명을 일으키는 정당은 아니다. 우리의 목표가 혁명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음을 우리는 안다. 우리의 적대자들에게 혁명을 막을 힘이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혁명을 창조할 힘이 없음도 우리는 안다. 혁명을 일으키거나 혁명을 위한 길을 닦는 것은 우리의 과업이 아니다.”
이러한 카우츠키는 이후 1차 세계대전 관련한 예산을 승인한 독일 사회민주당과 같은 입장에 서면서 이를 반대했던 룩셈부르크와 대립을 하게 된다.
② 1903년 룩셈부르크-레닌 ‘민족문제 논쟁’
1917년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었던 그리고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의 집권당인 소련 공산당의 전신은 1889년 창당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유럽과 아시아를 가로질러 존재했지만 그중 러시아인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이에 차르 체제는 다민족 러시아를 통치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러시아 민족 우월주의’라는 민족주의 사상을 활용했는데 이러한 차르 통치 이데올로기에 대응하기 위한 논쟁이 바로 1903년도부터 진행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민족문제 논쟁’이었다.
1903년 개최된 당 대회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민족문제’ 관련 1) 국가에 속한 모든 민족들의 자결권을 적극 지지했으며 또한 모든 시민은 2) 자신의 모국어로 교육받을 권리를 옹호했다. 이러한 당 결정에 대해 레닌을 중심으로 한 볼셰비키는 소수 민족의 권리를 지지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당 대회 결정 사항을 옹호했고 이에 반해 멘셰비키는 이를 부정했다.
이 과정에서 폴란드를 모국으로 두고 있는 룩셈부르크는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민족문제’ 관련한 결정 사항을 반대하면서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폴란드의 독립권을 지지 하지 않았다. 이러한 룩셈부르크의 판단은 당시 폴란드의 경우 독립투쟁을 민족 자본가들에 의해 주도 되고 있었다는 현실에 근거했다. 즉 폴란드의 독립은 사회민주주의로의 해방이 아니라 민족 자본가들이 주도하는 독립이라는 현실적 판단(전술적 판단)에 근거해서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결정에 반대를 했었다는 점이다. 즉 이러한 룩셈부르크의 판단은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폴란드의 조건에 근거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레닌은 “룩셈부르크는 폴란드 ‘민족문제’를 부르주아지들을 도와선 안 된다는 점에 골몰한 나머지 러시아 흑색 단을 돕고 있다”고 룩셈부르크의 입장을 비판했다.
③ 1905년 러시아 혁명과 대중 파업 그리고 자발성
룩셈부르크는 1905년 러시아 혁명 이후 전개된 대중파업 논쟁에서 자발성을 강조하게 된다. 노동자 계급이 외부의 개입 없이 자신의 계급적 본질을 인식하고 실천한다고 주장하였다. 더불어 룩셈부르크는 사회민주주의 혁명에 있어 대중의 자발적 행동에 근거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 전 러시아 제국을 포함한 유럽의 각국에서는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이 전개되었다. 예를 들면 1902년 벨기에의 총파업, 1896년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섬유 노동자 4만 명이 14-15시간이나 되는 장시간 노동 철폐를 주장하며 파업 투쟁했고 1903년 남 러시아 석유 노동자 파업 투쟁, 1904년 러시아 로스토프 철도 노동자와 오데사 노동자, 12월 바쿠 석유 노동자 파업 투쟁이 그것이다.
특히 1902년 벨기에 노동자들이 파업 투쟁은 제2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파업투쟁 전술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를 촉발시켰으며 룩셈부르크의 경우 두 개의 논문을 통해 벨기에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을 계기로 정치적 대중 파업이 가지는 혁명적 성격을 노동자자 계급의 특별한 무기라고 지적하였다. 룩셈부르크의 노동자 파업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이후 1905년 러시아 혁명을 거치면서 대중 파업론을 정식화 시켰다.
“이전의 부르주아 혁명에서는 한편으로는 혁명적 대중의 정치교육과 지도가 부르주아 정당에 의해 수행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의 과제가 정부의 전복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바리게이트 선상에서의 단기간의 싸움이 혁명 투쟁의 적합한 형태가 될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노동자 계급이 혁명이 도성에서 스스로 교육하고 조직하고 지도해야 하며, 또한 혁명 그 자체가 기존의 국가권력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본가의 착취에 대해서도 투쟁해야 함으로 대중파업은 프롤레타리아의 광범위한 계층들을 동원해서 행동으로 이끌어 갈수 있고 혁명적으로 만들며 조직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방법이 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것은 자본가의 착취를 억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존의 국가권력을 약화 시키고 전복 시킬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럼으로 대중파업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모든 위대한 활동의 자연스럽고도 자발적인 초기 형태인 것이다”
이러한 룩셈부르크의 대중관은 당과 엘리트를 떠나 노동대중에게 직접적으로 호소하여 대중의 혁명적 창발성을 조직하기 위해서이다. 1918년 11월 전개된 독일혁명의 실패 이후 룩셈부르크의 발언을 통해서도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판단을 확인할 수가 있다.
“지도부가 실패했다. 그러나 지도부는 대중에 의해, 대중을 통해서 새롭게 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대중은 결정적인 요소이다. 즉 그들은 혁명의 궁극적 승리가 기초해 있는 바위이다. 그들은 그 임무를 맡고 있다.”
④ 당 조직 운영 논쟁 - 민주주의와 중앙집권주의 논쟁
논쟁의 과정에서 룩셈부르크가 대중이 자발성을 중심으로 당 조직운영을 제기한 것은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규약문제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분열될 때였다. 당시 레닌은 규약문제를 둘러싸고 1904년 『One step forward, Two step back』이라는 논문을 통해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규약문제로 불거진 당 조직운영에 대해 정리했는데 룩셈부르크가 이 책에 대한 답변으로 같은 해에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조직문제』를 쓰면서 논쟁이 전개되었다.
러시아 사민당 규약문제에 관한 룩셈부르크의 주장은 “중앙집권제가 러시아가 사회민주주의 조직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경고하면서 사회민주주의 운동에서 자본주의의 경제적 체질에서 생겨나는 강력한 집중화 경향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부인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노동자 계급 그 자체의 순조로운 발전과 창의성을 저해 할 수도 있다고 본 점에 있다.
결국 룩셈부르크는 관련 논쟁에서 혁명정당은 노동자 계급의 전위가 되어야 하고 중앙집권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레닌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지나치게 중앙집권적’이라는 점에서 의견을 달리했다.
“중앙위원회는 지시자의 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지정한 주체는 노동자 계급의 집단적 자아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노동자 계급은 실수를 범하면서도 역사의 변증법을 스스로 배울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다. (중략) 역사적으로 볼 때 진정으로 혁명적인 노동운동이 범하는 오류가 최고로 전능한 중앙위원회의 무오류보다 훨씬 더 풍요로는 가치가 있다.”
⑤ 민주주의 논쟁
룩셈부르크의 민주주의 개념은 노동자 대중 파업과 당 그리고 자발성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우선적으로 룩셈부르크는 민주주의를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기본적으로 구분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형식적 민주주의(정치, 국가)의 다름이 아니며,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실질적이고 내용적(경제, 시민사회) 민주주의였다.
이러한 룩셈부르크의 민주주의 개념은 전통 마르크스주의와 별 차이가 없었으며 이는 “봉건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하던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서 역사적으로 결정 지워진 형태의 일정한 체계 일뿐이지만, 이러한 민주주의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정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노동계급에게 필요하고 필수적이다. 무엇보다도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에게 부르주아 사회의 전형(transformation)을 위한 도약판과 받침대가 되는 정치형태(자치, 선거권 등)를 창조해 주기 때문이다. 둘째, 민주주의는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 내에서만, 즉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민주주의적 권리의 사용을 통해서만 프롤레타리아는 그 자신의 계급적 이익과 역사적 임무를 의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간략히 말해서, 민주주의는, 그것이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을 불필요하게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이 권력이 장악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필요하게 만들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3. 결론
1919년 1월 15일 죽임을 당한 룩셈부르크(당시 47세)의 시신이 베를린 병원 지하실에서 살해를 당한지 90년 만에 발견되었다. 베를린 티어가르텐 공원에서 총에 맞아 숨져 란트베어 운하에 내 던져져 얼음 밑에 가라앉아 있다가 5개월 만에 수습되어 프리드리히스펠데 공원묘지에 매장되어 90년 동안 해 마다 묘소 주변에서 전 세계 공산당원과 좌파들의 추모행사를 진행했던 것이 룩셈부르크의 진짜 시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동 시대에 함께 했던 레닌의 경우 자본가 계급의 세계전쟁을 반대하고 내전으로 이끌어 러시아 혁명을 이끌었던 반면 룩셈부르크는 세계 전쟁을 반대하다가 우파들에 의해 살해를 당해 90년 동안 시신이 발견되지 못한 채로 매장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이후 가장 중요한 정치경제학 논쟁을 주도했던 이론가이자 활동가였다. 자본주의 발전이 가장 선진적이었던 서유럽 그리고 독일에서 활동했던 룩셈부르크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배신과 한계를 지켜보면서 새롭게 스파르타쿠스 동맹을 결성하여 독일의 해방과 세계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복무했으나 적들에 의해 살해를 당했다. 세계대전에 반대를 하면서 부르주아 전쟁을 내전으로 계급전쟁으로 전환하여 러시아의 해방 투쟁을 이끌었던 레닌과 동일하게 세계 대전을 반대하며 독일의 해방투쟁을 이끌다 살해를 당한 룩셈부르크는 세계 사회주의 운동 역사에 있어 정점을 이룬 혁명가들이다.
독일사회민주당에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사회주의의 제 문제」 에 반대하는 논쟁『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을 비롯하여 카우츠키의 「과소소비론」을 비판하며 마르크스 주의를 옹호했던 『자본축적론』은 지금도 여전히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전 세계 동지들에게 많은 고민과 과제를 제기해주고 있다. 특히 레닌의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중앙집권적 전위당 노선과 외부로부터의 사회주의 인입이라 할 수 있는 지식인의 역할과 논쟁을 전개했던 룩셈부르크의 대중 자생성과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한 논쟁은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서두에서도 지적을 했듯이 필자가 볼 졸고를 작성하게 된 이유는 우선적으로 룩셈부르크의 자발성을 왜곡하면서 레닌과의 악의적 대립 구도를 통해 20세기 쏘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악의적 부정이라는 점이다.
레닌에 의하면 사회민주주의 의식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인텔리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의 경우 장시간 꾸준히 학습을 통해 획득이 되는 것이라면, 노동자 대중의 경우 자발성이라는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한 순간에 폭발적으로 학습되어 진다. 이러한 레닌의 의식성과 자발성에 대해 룩셈부르크 또한 동의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레닌은 강력하고 중앙 집중적인 당 구성에 필수적인 조건들이 이미 러시아에 존재한다고 확신하였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조직과 규율문제와 관련하여 교육이 필요한 사람은 더 이상 노동계급이 아니라 특정 지식인들이다. 그는 노동계급을 ’규율과 조직‘에 익숙하게 한 공장교육의 영향력을 높이 찬양하였다.”
일반적으로 레닌은 엘리트주의로 그리고 룩셈부르크는 대중의 자발성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하기에 사회주의 의식이 노동자 대중 외부로부터 주입된 것이라는 주장이 레닌이 주장인 듯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독일 사회민주당 중간파의 리더인 카우츠키의 주장을 인용해서 레닌이 주장한 것이다.
물론 룩셈부르크 또한 레닌의 외부 주입 설을 동의했다. 문제는 [레닌 = 외부 주입설, 철의 규율, 중앙 집권적 . 룩셈부르크 = 자생성 + 당내 민주주의]로 대립시키면서 소련을 중심으로 한 북유럽 사회주의와 서유럽 중심으로 한 사회민주주의(복지 자본주의)를 대립시키면서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을 폄하하는 흐름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대립을 근거로 한 분류법과 20세기 사회주의 평가 방법에 레닌과 룩셈부르크를 대립시키면서 레닌을 죽이는 부르주아적 시각에 대해 우리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레닌이 철의 규율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적 조직운영을 주장하고 룩셈부르크가 자발성을 근거로 한 당내 민주주의를 주장한 것은 강조점의 차이 이자 레닌과 룩셈부르크의 운동의 토대와 조건에 의한 차이점일 뿐이다. 레닌이 활동한 1900년대 전후로 한 러시아 사회 민주주의 운동은 노동자 대중운동이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던 시기였다. 오히려 이를 지도할 지도체가 취약한 상황이었기에 레닌은 지도체 구성원이라 할 수 있는 엘리트에 대한 강한 주문이 철의 규율과 조직운영에 있어 중앙집권적 방식이었다.
이에 반해 독일에서 활동했던 룩셈부르크의 경우 독일 노동자 계급이 이념적으로나 조직적으로 단련이 되어 있었지만 이를 지도한 독일 사회민주당이 이미 의회주의에 포섭되어 있었고 개량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에 룩셈부르크는 노동자 대중의 자발성을 중심으로 독일 사회민주당의 개량을 폭로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노동자 대중의 자발성을 그리고 당내 민주주의를 강하게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룩셈부르크는 노동자 대중의 의식의 조직화와 자발성을 근거로 독일 사회민주당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룩셈부르크의 판단이 러시아 혁명을 전후로 한 러시아 사회민주당 조직운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 것이다.
결론적으로 레닌은 인텔리를 믿지 못해 룩셈부르크는 노동자 대중의 낮은 의식과 실천력으로 인해 중앙집권적 방식과 민주주의 조직운영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레닌과 룩셈부르크의 악의적 대립은 룩셈부르크에 대한 단순 왜곡이 아니라 그리고 레닌에 대한 단순 왜곡이 아니라 20세기 쏘련을 비롯한 사회주의진영에 대한 악의적 반쏘, 반공 논리라는 점에서, 그리고 21세기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철저한 왜곡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며 우리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명확하게 규명해야 하는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 있는 것 이다.
두 번째 20세기 룩셈부르크가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 메시지이다. 레닌과 카우츠키 그리고 베른슈타인과의 수많은 논쟁 예를 들면 수정주의 논쟁과 민족문제 그리고 노동자 대중의 자발성 및 인텔리들의 역할 및 중앙집권과 민주주의라 할 수 있는 민주 집중제를 중심으로 한 조직운영 원리 관련한 논쟁들은 여전히 21세기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87년 노동자 대 투쟁 이후 30년이 흘렀다. 노조운동은 90년 전노협 건설에 이어 95년 민주노총 건설로 성장했으며, 정당운동은 97년 국민승리21에 이어 2002년 민주노동당을 창당하고 현재는 변혁 당, 노동 당, 민중 당, 정의 당 등 다수의 진보정당 창당으로 까지 이어졌다. 룩셈부르크가 활동했던 독일 사회민주당내 분파라 할 수 있는 ‘좌파-중간파-우파’ 또한 지금의 한국 운동 진영 내부에서 ‘현장 파(좌파) - 중앙 파 - 국민 파(우파)’로 형성되어 있는 상황이다.
민주노총으로 대변되는 노동조합운동과 진보정당으로 대변되는 의회주의 정당 그리고 활동가 조직이라 칭 할 수 있는 현장조직 운동으로 분리되어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노동자 대중의 지도체로서의 전위정당 건설은 어떠한 방식과 내용으로 건설되어야 할 것이며 지금의 ‘노동조합 - 현장조직 - 진보정당’ 구도에서 어떻게 구체화 되어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룩셈부르크의 사상과 논쟁의 과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20세기 독일과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룩셈부르크와 레닌 그리고 21세기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리들이라는 시공간을 넘어 마르크스주의가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 것은 철저하게 이 졸고를 읽고 있는 독자들의 몫일 것이다.
특히나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사회민주주의와 대치시키면서 레닌과 룩셈부르크를 대비 시키는 20세기 사회주의 평가 작업 즉 반 사회주의 책동 정책은 반 레닌주의, 반 스탈린주의, 국가 자본주의론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철저하게 사상투쟁이 요구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전체 인민 대중의 참여하지 않는다면 몇몇 지식인들이 책상위에서 사회주의의 운명을 결정 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사회주의 정당은 노동자 대중에게 혁명의 시기가 필연적으로 도래하고, 도래할 수밖에 없다는 사회적 관계들을 분석하고, 혁명의 정치적 귀결이 어떻게 나타난 것인지 명확하게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룩셈부르크의 메시지는 21세기 사회주의를 꿈꾸는 독자들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려주는 나침판의 역할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