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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주된 언어의 시적 담론
-조동범 작품론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관심으로 유발된 단초가 시간을 통해 의지적인 담론으로 탄탄하게 자리 잡기까지는 외부로부터 충격해 온 내전의 소요가 원인이다. 모든 사유의 출발이 관계된 접점으로부터 유입한 것이어서 결국 내면에서 성숙한 의식도 그 반응의 연장선이란 것을 말해준다. 먼저 충동으로 다가온 빌미란 것의 고뇌가 아주 미세한 파동으로 비롯하여 상처에 달라붙은 딱지처럼 자리를 잡고는 잃어버린 시간을 벌충해 간다. 결국 외부에 대한 부정성은 욕구 반응으로 볼 수 있고 그것을 충족하려는 의지로 환원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매번 새롭게 다가오는 시인들의 세계에서 다반사로 벌어진 일들도 표상적 가치에 대한 반응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사물을 통해 촉발된 사유가 상상적 의미 구축에서 반작용으로 작용한다면 부단한 새로움을 의식한 경계 바깥까지를 상상하고 있다고 봤다. 우리가 흔히 인식하고 있는 보편적 상상력의 범주는 일탈하고자 한 욕망이 문장 속에서 주문처럼 되뇌어져 증폭되고 그것이 실체로 형상화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누구나 욕망하는 삶의 지형도 그렇거니와 문학에서 특히 시라면 그 충동은 의외의 상상력을 도발하고 상징성을 초월한 외연을 보여준다. 새롭게 창작된 시가 추구하는 개별성은 기존의 보편적 인식을 초과하기 위한 최상의 시적 의도를 구현하려 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 쳐도 어차피 시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은 시인만의 전유체인 것은 사실이다. 시인만의 세계를 시적 발현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언표로 다다른 상상력에 대한 결과다. 조동범 시인의 시를 통해서 바라보고자 한 지점도 그런 보편성을 벗어난 경계 바깥이란 것을 염두에 두고 모종의 상상력이 의도한 시의성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데 있다. 시들의 주조를 관통하고 있는 맥락도 그런 면에서 본다면 사물에 대한 형상으로 전이된 감상의 유형적 변주로 표출한 것과 같다. 내면 속에 억압된 심리적 활성층이 어디까지 흘러갈 수 있는가를 시적 세계로 보여준다.
그것은 우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가령 사랑하는 연인들이 처음 만난 광화문 네거리에 눈이 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화학식처럼 변할 수 없는 모든 것은 필연이고 누군가의 죽음과 사랑, 슬픔과 기쁨을 목도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격정적인 사랑을 예감하며 펼쳐지는 건 그러므로 슬픔이 아니다. 별들의 공전과 자전처럼 펼쳐지는 예고된 미래이자 그 어떤 필연이므로 모든 것에 슬픔을 가질 필요도 없다. 수평선의 여객선과 망망대해를 떠올린다. 가도 가도 끝없는 바다의 길 역시 그러나 우연이 아니다. 해 지는 바다에서 오래도록 길항을 거듭하는 별자리를 떠올린 적이 있다. 해변에는 어느새 죽음에 이른 새들의 울음이 파도를 적시며 서성이고 있다. 그 새를 품에 안고 우는 여자가 있고 그 여자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남자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며 그리하여 예감이나 예언은 쓸모없는 추문이 될 뿐이다. 해가 지면 어둠이 오고, 어둠이 오면 누군가의 음성은 더 선명해진다. 볼 수 없는 것만이 진실인 것처럼 세계는 어둠을 통해 좀 더 명징해진다. 화학식에 반응하는 폭발이 있더라도 그러나 그것은 소멸이 아니다. 사라지는 것들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이미 아름다운 사람이며 아름다운 침묵이 지상의 유일한 언어가 되더라도 무수히 많은 말들이 지상을 떠돈다. 아무런 말도 필요 없는 세계 속에서 죽음에 이른 이들의 과거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사랑의 말도 필요 없다. 비밀이 많은 연인의 주머니에는 어느 소설가의 끝나지 않은 문자가 도착해 있다. 그러나 당신은 아름다운 시를 쓰는 사람을 사랑하려 한다. 시집의 첫 페이지를 펼치면 그곳에 모든 필연이 존재한다고 당신은 믿는다. 그리하여 시인의 음성은 필연이고 시집의 어느 구절이 천천히 걸어 나와 문득 누군가를 돌아보는 것에 당신은 끝없이 감동한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일 혹은 서울 밖으로 떠나는 버스를 탈 때 세계는 모든 이후를 예비한다고 당신은 이윽고 믿기 시작한다.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고 광화문 네거리의 폭설은 잊을 수 없는 오늘 밤과 펼쳐지지 않은 모든 미래가 되려 한다.
-<사랑하는 연인들과 모든 필연에 대한 이야기> 전문
시인은 우연히 다가온 자연 현상을 떨칠 수 없다. 일련의 사건들을 목격하면서 사소한 것으로 여겼지만, 지금껏 일어난 일의 관계들이 끝없이 파생되면서 인과因果에 따른 ‘필연’으로 확신하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사가 그냥 허투로 생성되고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치밀한 상관성으로 연계해 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처음 만난 광화문 네거리”를 걸을 때 축복처럼 내리는 눈발과 맞닥뜨린다면 그 순간 들뜬 감정을 부추길 것이며 낭만적인 충동을 진작한다. 그들만이 갖는 감상과 융합된 ‘눈발’이 절묘한 합을 이뤄낸 것이다. 눈 내리는 풍경의 분위기에서 고조될 수밖에 없는 남녀 간 사랑의 시간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시간의 유한성은 멀지 않아 눈은 녹아버릴 것이고 뜨겁게 불타던 사랑도 식어 이별의 목전까지 치달을 수 있다. 이미 예후 된 슬픔까지를 화자는 필연적인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이 세계 속에 존재하는 우연과 필연은 대립항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별개인 가치로 인식한다. 우연한 환경적 요소에는 그럴만한 상황이 충분한 이유로 존재한다는 것으로 전유한 감정과 일치된다. 이미 그렇게 인식한 세계에 대한 변화의 추이를 예감한 화자는 긍정하며 의미에 개의치 않는다. “화학식처럼 변할 수 없는 모든 것은 필연이고 누군가의 죽음과 사랑, 슬픔과 기쁨을 목도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격정적인 사랑을 예감하며 펼쳐지는 건 그러므로 슬픔이 아니다. 별들의 공전과 자전처럼 펼쳐지는 예고된 미래이자 그 어떤 필연이므로 모든 것에 슬픔을 가질 필요도 없다.”라며 변동성은 예정된 규정대로 그렇게 흘러갈 뿐이라며, 화자가 상상한 세계의 변화 과정을 자연 질서 속에서 운동하는 과정으로 이해시키려 한다. 수평선 가득 망망한 바다를 거두며 나아가는 희망을 실은 여객선도 언젠가는 슬픔처럼 당도할 길이어서 피할 수 없는 끝을 예견한다. 경로의 바다 풍경에도 개의치 않고 자유롭게 날고 있는 새마저도 어쩔 수 없이 저녁이라는 어둠에 갇히고 말 것이며 그 저녁을 안고 있을 밤하늘의 별들도 궤도를 따라 정해진 시간에 맞춰 공전과 자전으로 우리의 시야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에 맞춰진 유한한 생명도 부여된 주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든 사건의 시종始終으로 부여된 시간은 어둠으로 수렴된다. 그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어 잠시나마 슬픔에 젖어 “그 새를 품에 안고 우는 여자가 있고 그 여자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남자가 있다.”는 것마저 긍정하며 필연적인 것으로 여길 것이다. 화자는 ‘어둠’을 통해 그동안의 감춰진 과정들을 선명하게 현상하려 한다. 그토록 사랑했던 순간들도 영원할 수 없고 언젠가는 적막 같은 어둠에 들어야만 하는 시간으로 인식한다. 이제 시에서 말하고자 한 저의를 어느 정도 정리를 해야 할 시간이다. 그것은 오랜 과정으로 보여준 사랑과 그 이후 발생된 여러 정황들마저 누구나 안고 가야 할 세상살이란 것이고 필연이란 것의 끝단에는 언제나처럼 개입하는 운명 같은 ‘우연’이 자리 잡고 있는 필연적인 세계란 것을 확인해 준다. 밤이란 것의 질서는 또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부정과 긍정이 교차한 ‘어둠’은 곧 밤의 전체성으로 상징된다.
밤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 어느새 불안과 공포, 슬픔이나 두려움 따위는 흘러나온다. 밤이 사라진다 해도 밤의 원죄는 여전한 음모를 서성일 것이다. 밤은 언제나 돌이킬 수 없는 불운의 두근거림이 되려 한다. 지난 세기의 불길함으로 남은 밤과 단단히 걸어 잠근 문틈을 엿보며 거리를 배회하는 악몽은 아직도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낮과 밤에 대해 생각한다. 오래전에 불타 죽은 마녀의 이야기는 거짓이 아니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밤은 거짓말하는 소년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것은 완전한 악몽이며 끝없는 환락이고 느닷없는 미지와 두려움이다. 어둠이 사라지면 불안과 공포, 슬픔과 두려움은 소멸하는가. 그러나 어둠이 사라진다고 밤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우리가 어느새 세상의 모든 어둠을 잃어버린다 해도 불안과 공포, 슬픔이나 두려움은 끝나지 않는다. 원죄는 밤의 시간에 깃들어 있기 마련이다. 죽음은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가. 사랑은 어느 곳으로부터 시작되고 끝을 맺는가. 파국은 밤의 또 다른 이름인가. 오래전에 죽은 흑인 노예의 은밀하고 사적인 시간을 떠올린다. 그러나 밤은 여전히 사랑이 시작되는 어둠의 시간이 되지 못한다. 잃어버린 밤일지라도 밤은 밤이다. 잃어버린 밤으로부터 여전히 밤은 시작되는구나. 또 다른 밤을 예비하며 우리는 영원히 밤을 잃어버리지 못한다. 저물녘의 장엄함을 마지막으로 모든 것은 끝났나. 종언을 고하는 음모처럼, 잃어버린 밤으로부터 밤은 끝도 없이 흘러나온다.
* 로저 에커치의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교유서가, 2022)의 제목을 차용했으며 일부 단어를 모티프로 삼았다.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전문
낭만적인 풍경이라도 밤과 낮의 분위기는 모호하여 상반될 수밖에 없다. 그런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화자는 시의 전체성으로 ‘로저 에커치’의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의 ‘밤’을 초대해놓고 있다. 어둠으로 다가온 ‘밤’은 낮의 들뜬 감정을 일순간 바꿔놓고 만다. 낮의 즐거운 마음과 달리 “밤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 어느새 불안과 공포, 슬픔이나 두려움 따위는 흘러나온다.”는 것을 보더라도 그것 또한 예정된 징후로 현실 속에서 의도한 실체가 되어 나타난다. 당연히 낮의 해가 빛을 잃게 되면 사방이 어둠에 갇히고 사물적 아름다운 풍경은 괴이한 형상으로 변화된다. 밤이라는 환경은 낮의 시간 동안 알 수 없던 일들을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것을 생산해 낸다. 풍경만이 아니라 그곳을 바라본 화자의 마음도 심정적 공동으로 빠져든다. 한번 전이된 불안감이나 공포심은 어둠이 사라져도 생생하게 기억 속에 저장된다. 불안과 공포의 시간은 환한 낮의 시간으로 돌아와도 좀체 사라지지 않고 불안한 분열을 거듭해 “돌이킬 수 없는 불운의 두근거림이 되”어 심리적 안정을 무너뜨리고 만다. 그런 증후로 봤을 때 “지난 세기의 불길함으로 남은 밤”은 당시의 안정된 질서를 파괴하면서 낮이 갖는 현실성을 초과하여 우리의 삶 전반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밤의 시간으로 대체되는 긴장의 트라우마는 일상에서 악몽처럼 불안을 가중시킨다. 우리가 그토록 고대했던 인간적인 삶 대신 불안으로 잠식해온 밤의 시간을 거슬러 간다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그 밤은 암흑 같은 시간으로 누군가의 감시와 혹독한 공포를 감내해야 했던 기억 저편을 생생히 떠올리고 있다. 그로 인해 인간성의 파괴와 공존해야 할 시대의 가치관은 여지없이 짓밟혀졌고 상실감은 현재까지 세기 전의 영향을 받고 있다. 산업화 이후 밤이 활동의 시간으로 유입 확장되면서 밤의 시간을 배회하던 사람들이 늘어났다. 자의든 타의든 인권탄압의 주구들과 이데올로기의 진영에 갇혀 스스로 부정해 온 그들의 행위에 대한 합리화와 사회 괴리를 극복하려 하지 않았다. 그 간극을 극대화시킨 모든 것의 정점에는 인간이 포기해 버린 ‘밤’의 시간 안에서 은밀하게 이뤄졌다는 것을 화자는 주지한다. 우리가 희미하게 알고 있는 사건들의 전말도 알고 보면 ‘밤’의 흐려진 분별력을 공포심으로 극대화하여 통제 불가능한 유효성을 늘려가며 현재와 미래까지 포함하고 있다. 과연 “어둠이 사라지면 불안과 공포, 슬픔과 두려움은 소멸하는가. 그러나 어둠이 사라진다고 밤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우리가 어느새 세상의 모든 어둠을 잃어버린다 해도 불안과 공포, 슬픔이나 두려움은 끝나지 않는다.”라는 화자의 단호한 단언이다. 밤을 통해 인간적인 학대로 죽음을 맞이한 흑인 노예의 비극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다른 유형으로 반복 계획되고 자행된다. ‘밤’은 유효성을 잊지 않도록 매일 같이 우리 곁을 유혹한다. 그 밤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밤이지만, 어쩔 수 없는 현대인에게는 회피해야 할 시,공간이 아니다. ‘밤’은 삶의 전체를 관통하는 시적 메타포로 불안과 처절한 전쟁의 공포로 도처에서 발호한다.
이윽고 나는 이름을 갖지 못합니다. 이름도 없이 누워서 바라보는 하늘은 푸르고 새들은 또 어디로 날아가는 겁니까. 먹구름이 몰려오면 비는 내립니까. 아니면 눈이 옵니까. 비석도 비문도 없이 모든 추도는 더 이상 들리지 않습니다. 이곳은 춥고 더럽고 두고 온 것들이 자꾸 생각나지만 외롭지는 않습니다. 쇄빙기가 항구의 얼음을 부수는 겨울이 오려나 봅니다. 부서진 얼음을 헤치고 오는 화물선은 어느 곳으로 떠나려 합니까. 어느 심야의 극장에 갔던 날도 떠오릅니다. 학교에서 바라본 구름과 햇살, 빌딩 옥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던 화가도 생각납니다. 어느 날 우리가 발굴된다면 비로소 이름을 가질 수 있습니까. 이곳은 춥고 더럽고 여전히 나의 눈은 감기지 않습니다. 비가 내려 물이 차오르면 감지 못한 나의 눈은 출렁이는 통곡을 고요히 흐느낍니다. 어디선가 포성이 들리는 듯합니다만 나의 귀는 이미 먹었고, 이곳은 그저 겨울이거나 봄이거나 혹은 여름이거나 가을일뿐입니다. 두고 온 것들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름도 없이 누워 있는 것은 나의 유일한 슬픔입니까. 밀과 보리가 자라도 밀과 보리가 자라도 노래 부를 농부는 없고, 제철소의 남자들은 망치를 잃어버린 채 자꾸만 무릎을 꺾습니다. 영원히 나는 이름을 갖지 못할까요. 이름도 없이 누워 바라보는 어둠은 참혹하고 운동장의 아이들은 어느 밤을 향해 걸어갑니까.
-<마리우폴> 전문
지구상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에 휩싸인 나라가 ‘우크라이나’다. 푸틴의 대 러시아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감행한 침공의 이유가 ‘신나치(네오나치)’ 정권으로부터 ‘우크라이나’를 해방하겠다는 구실로 삼았다. 세계의 이목을 의식한 면피용 명분도 황당할 뿐 아니라 도무지 이유가 되지 않는 핑계를 대며 일으킨 추악한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방과 인접한 ‘마리우폴’은 지난해 2월 개전 후 수일 만에 러시아 육· 해군에 포위되면서 가장 치열한 공방을 거듭한 격전지다. 그로 인해 마리우폴은 도시 기반이 처참하게 파괴되었고 너무 많은 것들을 잃게 된다. 비참한 상황에서도 죽음을 불사한 우크라이나 아조프 연대의 군인들과 민간인들은 아조우스탈 제철소를 중심으로 3개월 가까이 저항하면서 세계적 이목이 집중된 곳이다. 처절한 항전을 거듭하며 많은 민간인과 군인들이 죽어갔고 안타깝게도 항복을 해야만 했다. 그런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화자는 담담히 세상을 바라보며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 우크라이나의 참상을 산자의 목소리로 전언한다. “이윽고 나는 이름을 갖지 못합니다.”라며 전쟁으로 인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간 사람들의 주검마저 정중한 수습은 고사하고 아예 유기遺棄된 상황이다. 전쟁과 아랑곳없이 여전히 푸른 조국의 하늘과 그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새들을 바라보며 죽음을 맞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를 자책하는 빙의의 말소리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생전처럼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무기력한 죽은 자의 모습은 그야말로 비참한 것이다. 그 시선은 산자의 것이 아닌 유체이탈한 영혼의 시선이다. 도무지 감기지 않는 눈을 뜨고서 마리우폴 곳곳을 누비고 있다. 그 정경은 살아생전 가슴속에 새겨진 일상들이 파노라마처럼 되살아난다. 쇄빙기가 항구의 얼음을 깨던 이맘때와 화물선이 터진 물길을 가르며 기적을 울리고 어디론가 떠나가고 생전 그곳에서 보았던 풍경들이 아련히 살아났을 것이다. 다하지 못한 말 중 그리움 가득 밀려오는 “어느 심야의 극장에 갔던 날도 떠오릅니다. 학교에서 바라본 구름과 햇살, 빌딩 옥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던 화가도 생각납니다.”며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어 배회하는 영혼이다. 그것의 의미는 잊어버린 사람들의 이름과 예전 아름답고 평화롭던 조국을 다시 찾아달라는 간절함이다. 조국을 위해 죽어 이곳에 유기된 주검으로 놓여있지만, 밀려오는 설움은 꼭 망자만의 것은 아니다. 산자만이 들을 수 있는 포성소리 마저 귀먹어 더는 들을 수 없는, 살아 있어도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의 파괴된 삶을 대변하고 있다. 제철소의 노동자로 살아온 시간과 찬거리를 준비한 평범한 아낙의 삶은 전쟁으로 모조리 파괴되어 평온한 일상은 꿈만 같은 현실이 되었고 살아 있어도 죽음은 꼭 별개가 아니다. 극심한 폐허 속에서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못할뿐더러 더는 기억마저 지워져 버렸다. 제철소 안을 방패 삼아 최후의 항전을 거듭한 마리우폴의 군인들과 시민들이 무참히 죽어간 현장의 전언은 투항 이후에도 계속된다. 이제 “두고 온 것들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름도 없이 누워 있는 것은 나의 유일한 슬픔입니까. 밀과 보리가 자라도 밀과 보리가 자라도 노래 부를 농부는 없고, 제철소의 남자들은 망치를 잃어버린 채 자꾸만 무릎을 꺾습니다. 영원히 나는 이름을 갖지 못할까요. 이름도 없이 누워 바라보는 어둠은 참혹하고 운동장의 아이들은 어느 밤을 향해 걸어갑니까.”라는 물음에 숙연한 공포가 전율해 온다. 더는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만행 앞에 남과 북으로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우리로서 남의 일이 아니란 것이어서 죽음의 묵시록처럼 섬뜩하다.
추위와 함께라도 행복할 수 있을까요. 졸음이 옵니다. 어디선가 흘러간 유행가가 들리는 듯도 합니다. 어둠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해 가는 듯 깊고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담요를 움켜쥔 손은 어느새 뜨거워진 듯하고 바람의 결을 따라 오래된 밤의 냄새는 흘러갑니다. 담요 한 장으로 충분할 수 있을까요. 이곳은 너무 춥고 눈 내리는 밤이므로 나는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졸음이 오네요. 잠들면 안 되는 건 알지만 잠과 꿈은 달콤하고요. 담요 한 장만으로 모든 것은 충분합니다. 여기가 어디인지 나는 알 수 없고 한 장의 담요로 숲과 어둠과 길은 남겨졌습니다. 걸어도 걸어도 오늘 밤은 끝이 없고 이윽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누가 나를 데리러 올까요. 누군가가 과연 있기는 한 겁니까. 돌아보면 불구의 어둠만이 다리를 절뚝이며 길 위를 서성이고 있습니다. 사고인지 아닌지, 무섭게 붕붕대는 바람은 등고선을 따라 거대한 공중이 되어갑니다. 길의 끝은 있습니까. 담요 한 장으로 감출 수 있는 어둠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제 내겐 아무것도 없습니다. 눈 내리는 길과 숲과 어둠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남국으로 향하던 날의 비행기와 담요를 떠올리면 나는 이제 어느새 담요 한 장으로 남습니다. 담요 한 장으로 모든 것은 충분합니다. 졸음이 쏟아져요. 어디선가 흘러간 노래가 들리는 듯도 합니다. 이것이 죽음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담요 한 장으로 모든 것은 충분합니다.
-<블랭킷> 전문
낯선 시어의 출현은 상당한 동기와 이유를 충족했을 때 가능한 것으로 조동범 시인의 ‘블랭킷’이란 말도 나름 주체와 타자 사이의 상호주관적인 구조 속에서 개입된 사유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작은 몸에 먼저 닿았을 포대기를 블랭킷으로 이해한다면 어떨까 싶다. 이후 다양한 형태의 블랭킷이 만들어져 유아기부터의 심정적 전형을 이뤄온 의미도 커 시적 세계로 호명했을 것이다. 아기 때부터 작은 몸을 안아주듯 감싼 안온감에서 느껴졌을 모성적 온기를 성인이 되어서도 벗어날 수 없어 불안해하는 ‘블랭킷 증후군’을 앓는 사람도 있다. 그 이면에는 우리 사회 일상이 그만큼 불안한 것임을 증명해준다. 누구나 경험했겠지만, 추위에 오랫동안 노출되면 감각기관의 마비와 정신적 이완이 급속히 진행되면서 발생되는 졸음 현상이 수반된다. “추위와 함께라도 행복할 수 있을까요. 졸음이 옵니다.”라며 분별과 이성으로 선택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니라 외부에 의해 강제된 최면 현상이어서 제어할 수도 없다. 본래의 품성대로 존재할 수 없는 강박한 사회 현실을 수용해야 한다면 이성적 판단은 배제되거나 무용할 뿐이다. 그토록 열망한 욕망들은 차차 사라져 버렸고 현실 속에서 가장 필요한 작은 “담요 한 장만으로 모든 것은 충분합니다.”라는 절박감은 최소한의 본능적 욕망이다. 그런 것마저 충족할 수 없는 시간은 자꾸 흘러 죽음에 이를 듯한 혼미는 더 잦아진다. 도저히 이전으로 살아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감이 깊어질수록 유아기적 본능은 강해진다. 극도로 위태로운 시간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겠지만, 처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정신이 흐려졌다 잠시잠깐 돌아오는 기력이란 것도 한계가 있다. 그런 시간이 경과할수록 몸은 자꾸 쇠해져 상태는 악화된다. 인간의 의지와는 다른 세계 속에서 존재해야 할 실존적 고뇌란 것도 더는 가동되지 않는다. “돌아보면 불구의 어둠만이 다리를 절뚝이며 길 위를 서성이고 있습니다. 사고인지 아닌지, 무섭게 붕붕대는 바람은 등고선을 따라 거대한 공중이 되어갑니다. 길의 끝은 있습니까.”라고 묻지만, 이미 위험한 환경에 노출된 그곳에서 자위적인 대처를 할 수 없는 화급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꿈꾸었을 남극이다. 그 남극은 우리의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신비한 지점이 아니라 욕망의 한계가 어디까지 허용되는 가를 추론해 볼 수 있는 절망지점이란 것을 확인시켜 준다. 결국 인간의 욕망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연히 다가온 사고로 인해 지금껏 꿈꿔온 희망마저 앗아가려 한다. 그 세계란 결코 합리적이지 않아서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려야 할 때다. 필요한 것은 오직 내 몸을 덮어줄 수 있는 작은 담요 한 장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이란 것의 가치가 얼마나 허망한가를 ‘블랭킷’으로 보여주고자 한 표현 중첩은 형이상학적 영역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다.
오래도록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사람을 본 적 있다. 들판에 서서, 그림자가 길어지는 시간에 이르기까지 지평선을 바라보는 사람을 본 적 있다. 지평선 너머로 맹렬히 사라지는 구름을 볼 때. 그는 잠시 눈물을 흘린 듯도 하였다. 사라진 구름은 이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지평선을 향해 나아가도 너머는 언제나 세계 저편이고, 그건 마치 사건의 지평선 같은 것이어서 끝없이 물러서며 너머를 드러내는 법이 없다. 지평선 너머는 애초에 불가능한 현실. 지평선을 향해 가면, 세계의 끝을 향해 가는 장엄함과 침몰하는 저녁이 끊임없이 펼쳐지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알 수 없지. 해가 지는 지상의 끝으로부터 어둠이 몰려오면 그는 이윽고 혼자가 된다. 구름은 이제 사라지고 없는 것. 사라진 구름을 보지 못한 건 세계의 모든 진실. 이제 지평선 이편과 저편의 경계는 불확실한 미래가 되려 한다. 지평선 너머로 날아가는 새들의 날개마다 어둠이 깃들고 지평선은 이제 천천히 고개를 꺾어 깊이를 알 수 없는 공중과 한몸이 된다. 너머의 구름 속에서 불우한 사건과 불구의 지평선은 울음을 터트리는가. 그러나 그것은 알 수 없지. 오래도록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지평선 너머 알 수 없는 것들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그림자의 헐벗은 목소리가 있다. 이제 모든 것은 어둠이고 어둠은 드디어 세계의 모든 진실이 되어버린다.
-<너머의 세계와 사건의 지평선처럼> 전문
사유 ‘너머’란 세계를 경계 지으며 어디까지 포함할 것인가와 예외로 할 내적 변화를 상상해야 한다. 한동안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너머로 맹렬히 사라지는 구름을 볼 때. 그는 잠시 눈물을 흘린 듯도 하였다.”라며 예사로운 모습으로 지켜봤을 것이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해 질 녘 붉어진 노을을 보며 벅차오른 감동을 주체할 수 없어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일상 속의 전경이 새롭게 다가온 것은 ‘지평선’이란 경계를 통해 분리된 이쪽과 저편으로 길게 들어선 ‘그림자’를 예의 주시했다는 데 있다. 그 지점의 분리선을 기준으로 월식에 잠긴 달을 보고 당혹하듯 우린 순간 이성적인 분별이 아닌 신앙심으로 귀의하는 것이다. 똑같은 위치에서 반복되는 자연 현상에 대한 감각을 전언적 의미로 환기하여 문학적으로 인용 확장하려 한 사실이다. 그 전면에 존재한 자연과 인간의 교감적 층위가 별개가 아닌 공감으로 자전하면서 변증법적 수렴으로 낮과 밤의 차이가 확연하다는 것을 알았다. 긴 여운을 드리운 ‘그림자’의 길이만큼이나 막막해진 심연 속 파고는 눈물샘을 자극할 수밖에 없다. 자연의 형상으로 빚어진 그림자는 인간의 의지로 가공할 수 있는 모양이 아니라 자연 발생적인 것으로 찰나에만 존재하기에 여하한 경우에도 반복되거나 재현될 수 없는 고유한 원형 자체이다. 화자는 그런 감동의 끝마저도 다시 볼 수 없는 밤으로 치환하여 불안으로 엄습한 어둠으로 포장된 세계가 갖는 사후적 모습을 상상한다. “해가 지는 지상의 끝으로부터 어둠이 몰려오면 그는 이윽고 혼자가 된다.”라며 낮과 어둠을 묘한 대비로 병치시켜 상이한 세계의 잉태와 출현을 암시한다. 어둠에 묻힌 상태에서 모든 판단의 순간을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해야 하는 고독한 시간으로 되물린 까닭이다. 이런 변화는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신)에 의해 도래한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사라진 구름을 보지 못한 건 세계의 모든 진실. 이제 지평선 이편과 저편의 경계는 불확실한 미래가 되려 한다.”는 화자의 전지적 발언은 분리 지점인 지평선도 다른 공간과 맞닿은 동일한 곳이라고 말해준다. 어둠과 바깥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확실성을 사실로 확인해 준다. 이제 그 지평선을 덮은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분별할 수 없는 인간의 판단력은 죄다 상실되고 없다. 단지 하나의 실체로 환원되어 존재할 뿐이다. 반복적으로 다가왔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의 실체란 것도 인간의 눈으로 착시한 형상에 불과하단 방증이다. 이제 또 하루의 시간을 지나온 자오선 너머로 어제와 다른 시간이 진실처럼 한 동안을 현혹하다 사라질 것이다. 모든 사물에 인간의 생각으로 규정한 것들을 무화하는 어둠으로 매일 반복해서 실행된다. 세상은 “이제 모든 것은 어둠이고 어둠은 드디어 세계의 모든 진실이 되어버린다.”는 화자의 단언은 다섯 편의 시속에서 변주한 형용으로 발화된다.
조동범 시인의 시 다섯 편을 통해 보여준 시적 세계는 큰 맥락 안으로 관통하며 추론적 담론을 실체화한다. 인간이 마음으로 생각한 세계란 것의 무용함을 시적인 세계를 통해 환기하여 발화한 것이다. 지금껏 자연 현상들 속에서 우리의 가치를 부여하고 분별 지어 구분하려 했고, 그럴 때마다 형상만 달리 드러낼 뿐이지 동일하다는 것의 변주란 것을 되새겨준다. ‘필연’적 사고와 ‘밤’에 대한 우회적 발언도 인간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더 깊은 층위에서 발원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발발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갇힌 ‘마리우폴’의 치열한 공방은 한쪽이 포기해야만 끝이 날 처절한 참상이다. 전쟁의 한 복판에 내던져진 ‘마리우폴’ 사람들의 삶마저도 의지와 상관없는 부조리한 세계관으로 이해된다면 참으로 비통한 일이다. 이어 ‘블랭킷’의 시 행간에 비유된 시적 메타포도 인간이 추구한 욕망의 크기와 상관없이 전개되는 상황을 통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절망감에서 표출된 진정한 욕망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너머’란 지점도 지금껏 보여준 연장선으로 볼 수밖에 없는 시적 변주의 유형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조동범의 시에서 보여주고자 한 문장은 삶의 부면을 아우르는 표면적안에 사유의 깊숙한 지점까지를 함의하고 있다. 그 지점은 화자를 통해 전언한 기표를 통해 기의로 미끄러져 변주를 거듭해 시의 어디에나 있을 법한 잉여나 초과된 문장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상상적 사유의 층위를 알레고리화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