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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13회/박혜숙 선배님.
이제 800미터 남았다.
고개만 들면 정상이 빤히 보이는 급경사 구간, 칼바람은 쉴 새 없이 얼굴을 할퀴고 숨차다. 운동장 100미터 트랙을 그려본다. 그게 8개. 한 발을 디뎠고, 또 한 발에 최선을 다 하자! 한 발짝씩 제대로 걷다보면 비로봉에 오를 수 있다. 후배가 계속 잡아주고 가방을 들어주며 에스코트한다.
오은선 대장이 히말라야 완등을 하던 마지막 발자국을 떠올렸다. 3시간 반 째 설산을 오르고 있는데 이젠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전에 쥐가 난 적이 있는 오른쪽 종아리에서 찌릿한 느낌이 와 뒤꿈치를 먼저 대고 앞꿈치로 힘을 주어 아이젠을 콱 박는다.
대한 날, 백두대간의 끝자락 소백산 비로봉에 도달했다. 1439m 비석을 끌어안고 사진을 찍는다.
난 이렇게 힘들게 왔는데, 그곳의 사람들은 싱싱한 모습으로 설경에 빠져있다. 흰 눈을 덮고 의연히 서 있는 1394m의 연화봉과 소백산 천문대를 본다.
주목이 추위에도 푸른빛을 띠고 늠름하다. 여기에서 주웠던 속까지 빨갛던 지팡이와 끝없이 이어지는 능선을 타며 헤매던 그 여름이 다가왔다.
70년대 우리 4H 서클에선 충북 단양군 가곡면으로 봉사활동을 왔다. 여자들이 적어 대원들 밥 챙길 사람이 가야한다는 바람에, 대원들 환송 나왔다가 그냥 끌려왔던 농활이었다.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낯선 상황에 적응하려니 무척 고생스러웠지만 따뜻한 인심과 사람 냄새에 젖었던 시간이었다. 10일 간의 일정이 끝나고 마지막 밤 온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학예발표를 했다. 난 ‘어머님 은혜’를 불렀다.
동네 4H 회장이 우리 마을을 위해 너무 고생만 했는데, 이 뒷산이 소백산이니, 등산을 하고 단양엔 알려지지 않은 동굴이 많은데 동굴 탐사도 하고 가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 열이틀이 계획 없이 즉석에서 결정되고 행동으로 옮긴 것을 보면, 젊음이란 것이 얼마나 무모한 열정에 휩싸이는 것인지 자신이 겪고 난 일인데도 이해가 안 된다.
열하루 째 마을 대원들의 안내로 소백산을 오른다. 경사가 급한 길을 계속 걷는데, 마을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라 우리 말고는 오르는 사람이 없다.
꼭대기로 갈수록 나무키가 작아지더니 푸른 초원이 끝없이 펼쳐졌고, 여름철 야생화가 주황, 흰색, 보라색으로 바람에 나부끼는 길을 우린 야생마처럼 뛰어다니고 경사진 언덕은 데굴데굴 굴렀다. 풀 양탄자 위에서 소리 지르고 풀밭에 대자로 누웠다.
그러자 진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하얀 치자 꽃 같은 데서 피어나던 향이 지금까지도 생생한 걸 보면 후각에 얽힌 추억이 역시 강렬하다.
그러다 얼굴에 빗방울이 떨어져 하늘을 보니 아까까지 해가 났었는데 우린 구름 속에 있고 100미터 앞도 안 보인다. 그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기능성 등산복도 없어 우리는 비를 홈빡 맞으며 하산을 서둘렀다. 능선에서 속까지 빨간 지팡이를 주워 짚으며 내려왔다.
한 30분을 걸었는데 아무래도 올라오던 길이 아니었다. 4H청년들도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고 있었다. 상록수에 나오는 박동혁을 닮은 우리 측 회장이 물었다.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다. 날이 좋으면 우리 동네로 내려가는 산봉우리가 보이는데, 구름에 가려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이 안 된다.
20여 명은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지 의견이 분분했다. 산악회 활동과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하던 제일 경험이 많고 멋진 대원이 앞장을 섰다.
“여기는 표지판도 없는데 아무데나 내리막길이라고 내려가다 다시 올라가며 능선을 뱅뱅 돌게 되고 산 위에서 조난당합니다. 모든 등산로는 계곡의 물길을 가로지르며 놓여있고 물은 아래로 흐르기 때문에 계곡을 타야 아래로 내려갑니다. 뱀이 있을지 모르니 지팡이를 하나씩 만들어 길을 헤치며 바짝 붙어 내려갑시다.”
여름이라 한껏 우거진 숲길을 막대기로 헤쳐 가며 반 시간 즈음 오니, 아까 물 마셨던 곳이 나오고 동네 청년들이 이제야 길을 알겠다고 웃었다. 산골 물은 그 동안의 비로 불어 허벅지까지 차올라 서로 손을 붙잡고 계곡을 건너며 내려 오니 족제비 같이 젖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도 안 오는 우리를 찾아 마을 어른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다음 날, 그렇게 놀랐으면 돌아가야 하는데, 단양의 작은 동굴 탐사를 같던 것을 보면 젊은 날 나도 어지간한 말썽꾸러기였나보다. 큰 바위가 있어 도무지 그 뒤에 동굴이 있으리라곤 짐작도 할 수 없는 곳이었다. 한국전쟁 때 마을 사람들이 이 동굴에서 피난을 했던 곳이다.
장작에 솜을 싸고 석유를 뿌린 후 불을 붙여 하나씩 주었는데 한참 들어가니 산소가 적은지 불이 꺼졌다. 잘 보이지도 않아 앞 사람만 붙잡고 가는데, 앞에서 엎드리라고 했다. 갑자기 좁아지고 밑으론 물이 흐르는 동굴을 생전 처음 포복자세로 기었다. 다시 넓어지더니 계곡물이 흐르다 고여 있었다. 마을 청년들은 여기 호수가 명주실 한 타래를 넣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다고 하며 소원을 빌라고 했다. 초를 켰던 흔적으로 미루어 마을사람들의 기도터 같았다. 아름다운 날들이 영원하기를 빌었다.
눈덮인 주목 지킴 터를 보며 빨간지팡이를 주웠으니 이 근처를 헤매었던 것 같다. 조난당할 뻔한 우리를 숲이 우거진 계곡을 뚫고 살려낸 멋쟁이와 박동혁을 닮았던 회장을 비롯한 대원들과 모든 연락이 끊어진 지금 아련한 추억만 가득하다.
지금은 곳곳에 표지판이 잘 정비되어 있고, 국립공원 아저씨들도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경상북도 영주를 지나 비로사를 들머리로 하여 올라올 때는 끝없이 경사진 길을 가파르게 올라 왔는데, 비로봉에서 옹달샘을 지나 충북 단양 쪽 천동쉼터로 날머리를 잡아 내려오니 넓은 길이 눈썰매장 같다. 산이 떠나가는 웃음소리와 함께 친구가 비닐 돗자리를 눈썰매 삼아 타고 내려왔다.
후배가 요번엔 내 차례라며 돗자리에 앉히고 스틱을 잡으라고 하고 끌어주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그런데 발을 번쩍 드니까 다시 오른쪽 다리가 뭉치는 듯 해 멈추고 등산화 신은 발끝을 안쪽으로 당기길 반복하니 다시 스르르 풀렸다. 무리한 등산을 할 때는 아스피린을 먹고, 무릎보호대를 착용하는데 안 가져와 3시간의 하산이 역시 무리였다.
그래도 젊은 날의 추억이 가득한 소백산을 이 나이에 여러 후배의 도움을 받으며 정상까지 6시간 반의 사투 끝에 완등을 한 이 희열감! 오랫동안 남아 있으리라.
24회/이연훈 13.01.30.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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