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고 바쁜 하루였다.
하루 24시간으로는 도저히 처리할 수 없는 빡빡한 일정, 빠른 세월을 한탄할지라도, 내일의 한 시간을 빌리고 싶다.
25시간이었다면 여유있게 소화했을 길고 긴 하루 점검해 본다.
새벽 6 : 00
모닝콜에 화들짝 일어나 화장실로 향한다.
건강검진으로 어젯밤 8시 이후 아무것도 마시지 못했지만, 습관적으로 변기에 앉았다.
간단한 용변을 마치고 양치한다.
어제 높게 나온 혈압이 생각나, 잠시 양치를 멈추고 거울에 비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너 괜찮냐? 괜찮은 거지!"
화장실에서 나오니 아내는 혈압계를 들고 기다린다.
아무래도 불안하다며 한 번 더 체크해 보잔다.
아내도 불안한 수치에 놀랐나 보다.
부부는 서로에게 걱정거리를 만들지 않고 백년해로해야 하는데, 늘 신경 쓰는 일을 만든다.
평소 혈압은 130을 넘지 않았는데, 어제 150 언저리였다.
기계가 이상이 있나 싶어 아내도 체크를 해보니 정상이다.
잘못된 수치라고 치부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체크했는데, 역시 145가 나왔다.
140 이상은 건강검진을 하지 못한다.
혹시 나가 역시 나가 될까 불안해진다.
새벽 6 : 30
가을(개)이와 아침 산책을 한다. 정원의 구린내를 막기 위해 365일 아침, 저녁으로 용변을 밖에서 누인다.
개를 운동시키면서 나 또한 운동한다고 생각한다.
눈이 오나, 바람 불고 추워도 하얀 서리 밟으며 나가는 게 일상이 되어 버렸다.
비 오는 날 만은 비 맞은 개의 비릿한 냄새 때문에 나가지 않는다.
아직 여명이 밝아 오지 않은 상태, 발길에 채는 돌멩이가 겨우 보일 정도의 밝기다.
이른 시간, 하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파크골프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저렇게도 좋을까?
새벽 6 : 50
혼자 식욕 없이 간단하게 차려 먹는 아내의 아침 밥상머리에 앉아 멍때리고 있다.
혈압 수치에 대한 걱정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맹독의 뱀이 또아리 틀고, 아가리를 벌리는 느낌이다.
스스로 놀라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괜찮을 거야라며 스스로 안심시키기에 바쁘다.
아내도 걱정이 되는지 손으로 혈압을 체크하라 한다.
아침 7 : 35
아침에 일어나 마시는 용융소금물도 마시지 못하고, 식후에 먹는 비타민C 1000mg 2알도 먹지 못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허기를 느끼지 못하겠다.
목욕도 탕 속의 따뜻한 물이 혈압을 상승시킬까봐 샤워만 하고 나왔다.
병원에 들어서며 매점에 선배가 있는지 봤더니 아직 오픈 전이다.
지하 건강검진센터에 1번의 번호표를 받고서도 20분을 더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일찍 왔다.
기다리는데도 맹독의 독사는 입을 쩍쩍 벌리고 설친다.
긴장을 풀려고, 깊게 심호흡하며 온갖 노력을 펼쳤다.
아침 8 : 30
검진표 작성에 필요한 질문이 쇄도 한다.
수술한 적이 있느냐. 어떤 약을 먹느냐. 술과 담배는 하느냐. 암에 걸린 적 있느냐.
혈압 때문에 긴장을 안 하려고 하는데, 자꾸 신경 쓰이는 것만 묻는다.
드디어 혈압 체크다. 외투 벗고, 왼손을 내민다.
대장간의 풍로 돌리듯 혈압계에 공기를 주입한다. 긴장된 심장이 쿵쾅쿵쾅.
팽창된 공기압으로 터질듯한 맥박, 정점에서 멈쳤다가 서서히 내려간다.
아가씨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간호사가 염라대왕처럼 무섭게 느껴진다.
"혈압은 130으로 정상입니다. 상의 입으시고 안으로 들어오세요."
땅이 꺼질 듯 "휴~"소리가 나온다. 정말 긴장된 순간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무런 대상 없이 그냥 "감사합니다"라는 인사가 나온다.
매년 방과 후 강사(바둑)를 하기 위해서 '공무원 채용 건강검진 확인서'를 제출해야 한다.
올해는 건강검진 대상자이므로 암 검사를 받으면 수수료 4만원 면제해 준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위 조영술 검사'를 받는데, 하얀 액체 먹는 것이 상당히 괴로웠다.
오전 9 : 30
오늘이 대한노인회 군 지회 정기총회가 있고, 새로운 노인회장의 선거도 있다.
마을회관에 들러 유인물을 챙겨 군민체육관으로 향한다. 너무 늦게 간 죄로 주차를 먼 곳에 해야 했다.
체육관에 꽉 찬 대의원들로 눈을 둘만한 곳이 없다.
처음 경로당 회장을 맞고 보니 눈설고 낯설다.
입후보자는 두 명인데, 남녀 성 대결 같은 구조다.
여성 후보자는 전체 고령자에 여성 비율이 2/3인데, “이제 여성이 회장 할 때가 되었다”라고 주장한다.
모두 회의에는 관심이 없고, 노인회장 선거에 동분서주한다.
10시에 시작된 회의는 12시에 투표에 들어간다.
검진 때문에 아침 거르고, 지인과의 점심까지 못 먹게 되었다.
먼 곳부터 투표하고 보니, 가까운 우리는 맨 꼴찌다.
결국 체육관 나올 때 12시 40분이 넘었다.
오후 1 : 00
거추장스러운 옷(중절모에 롱코트와 머플러)을 훌훌 벗어 버리고, 간편한 복장으로 정양늪 생태학습관으로 향한다.
정양늪 해설을 위한 교구 만들기 체험이 있다.
이유야 어쨌든 아침과 점심을 쫄쫄 굶었지만,
바쁜 일정으로 정신이 없어서인지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겠다.
안 그래도 바쁜데 또 한 가지 일이 발생 된다.
군 육아지원센터에서 7세 아동을 위한 바둑 강의 문의가 들어왔다.
창고에 무질서하게 쌓여진 교구를 다시 정리하고,
맹꽁이, 학, 소리 나는 새, 등등을 만들고 나니 4시다.
부랴부랴 달려가 7월에 바둑 강의하기로 약속하고,
병원에 들러 '공무원 채용 검진 결과지'를 찾아 집으로 달렸다.
저녁 5 : 00
아내와 머리 염색(헤나)하기로 했다.
다음 주에 떠나는 일본 여행 준비 차원이다.
날렵한 솜씨로 눈썹까지 다 바르고, 랩으로 머리를 감싼다.
색만 다를 뿐이지 '미라'가 따로 없다.
'헤나'는 한 시간 후에 감아야 한다.
두 끼를 굶은 허기진 배를 위해, 아내는 짬을 이용해 밥상을 거나하게 차린다.
아침엔 망부석을 앉혀 놓고 밥 먹고, 저녁은 '미라'와 함께 식사하는 느낌일 것이다.
100세 시대에 황혼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웃으며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저녁노을 보며 공원을 산책해야 할 나이다.
하지만 아직도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제대로 되는 '워라밸'이 그립다. 늘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이자 미안함이다.
저녁 6 : 20
이곳은 황강이 흐르는 수려한 곳이다. 그러다 보니 달 목욕이 일상화되어 있다.
고집 센 영감님이 돌아가시고, 자녀가 부모님의 유지를 받들어 운영하는데 일찍 문을 닫는다.
‘미라’ 머리에 모자를 눌러 쓰고, 안경까지 벗고 인사를 하니 알아보지 못해 멀뚱멀뚱 그린다.
부실한 목욕탕이지만 떠나지 못하는 바보들만 다니는 곳이다.
하지만 동료들의 정은 최고다.
물이 좋아 좋고, 조용해서 좋고, 정이 많아 좋고, 넓은 주차장에 1층이라 들락거리기 편해 좋다.
노력과는 달리 적자운영으로 언제 문 닫을지 조마조마하다.
하얗게 쉰 머리칼을 염색하니 10년은 젊어졌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옛 모습이 겹쳐 스쳐 간다.
저녁 7 : 00
가을이 저녁 산책시키러 나간다.
하루 중 최고의 낙이 산책이다 보니, 아니 데리고 나갈 수 없다.
‘레터리버’ 대형 견은 힘이 좋아 끌려 나간다.
아무리 "천천히 가자"고 외쳐도 소용없다. 어찌 보면 끌려가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고삐를 꽉 잡아야 하니 팔 운동 되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티다 보면 다리에 힘이 실린다.
"세월 베고 길에 누운 구름 한 조각"도 서산으로 넘어가 어둑어둑하다.
하지만 파크골프맨들 차량이 나이트 켜고 흙먼지 일으키며 지나간다.
어떤 운동이든 즐겁고 재미있다. 하지만 중독은 위험하다.
새벽노을 보고 나가서, 저녁노을까지 보내고 들어가는 것은 아주 위험한 중독 상태다.
나 또한 운동을 좋아하지만 저렇게 광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언젠가 격한 운동으로 몸이 망가져 봐야 느낄 것이며, 느끼는 순간 늦다.
이제 망가져 버리면, 절대 회복이 불가능함을 알아야 한다.
밤 7 : 20
새벽부터 어수선했던 하루가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침과 점심을 그른 배고픈 사람을 위해 정성으로 준비한 저녁 만찬은 그야말로 꿀맛이다.
아~ 살 것 같다.
고맙다는 말 대신 아내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수저 놓자마자 비타민C 2000mg 2알을 꿀꺽 삼킨다.
24시간이 짧은 하루였다.
느림의 미학으로 노년을 여유롭게 살아야 하는데, 아직 활동을 멈추고 있지 않으니 걱정스럽긴 하다.
하지만 어느 날 집에 박혀있으니, 좀이 쑤셔 지낼 수가 없었다.
나이 잊고 세월 잊고, 열정적인 활동을 할 수 있으니 그나마 행복한 삶이라 본다.
병들고 아파 제대로 걷지도 먹지도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몸 관리 잘해서 9988234하도록 열심히 노력하자.
하루 24시간이 짧다면, 활발한 25시간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쪼그라든 23시간으로 살 것인지는 자신의 몫이다.
아무쪼록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 정말 하루가 바빴다.
그 바쁜 일정을 거뜬히 해냈다면, 그건 만족스러운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