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시를 쓴 화가, 오늘은 평생교육원에서 모딜리아니에 대해 공부한다. 이번 학기의 강의 주제인 ‘포스트 휴머니즘 시대의 인간 교실’에 맞춤 교복이다. 연관된 회화 한 점이 단톡방에 올라왔다. 여자가 은밀한 곳의 체모를 드러낸(누워있는 나부)라는 명화이다. 경매가가 수수료 포함해서 약 1.900억 원에 달하는 판매 당시 세계 미술품 경매 사상 역대 2위의 작품이라고 한다.
혼자 보기 아까워 그림값과 함께 퇴직자 모임의 단체 대화방에 올렸다. 모임 회장이 댓글을 달았다. “저의 눈으로는 도저히 그런 고가의 그림으로 보이질 않습니다.” 잔잔한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으니 묵묵부답으로 있을 수가 없다. “모딜리아니가 살아생전에 가난으로 고통을 받은 이유가 그 시절 호사가들의 눈이 딱 우리들 수준의 안목 때문이라고 해야겠죠?” 그 이후로 다들 조용한 걸 보니 비싼 그림 감상에 푹 빠져 버린 모양이다.
건립한지 스무 해가 넘은 아파트가 시시각각 삐걱거리며 늙어 가고 있다. 집에서 지낼 일이 많아 은퇴 직전에 큰맘 먹고 내부를 올 수리했었다. 창호는 쓸 만해서 손을 대지 않았다. 그 이후 태풍이 오더라도 유리창에 테이프를 붙이는 정도로 무난히 넘어가곤 했다. 시간이 흐르고, 바람의 강도가 세지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바람이 불면 창문이 통째로 덜컹거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테이프를 치는 것은 기본이요, 창틀 사이에 신문지를 뭉쳐서 끼우기도 하지만 왈캉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작년 가을에 태풍이 두어 차례 몰아치더니 결국에는 같은 라인의 여러 가구가 앞 유리창이 파손되는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그 이후로 아내의 시름이 깊어 갔다 유명 제품으로 하자니 수중의 돈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고, 돈에 맞추자니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별도의 주머니가 동이 난 내 처지로는 그냥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여자들은 나이가 들면 집이 편안해야 한단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아내가 밤새 잠을 설치게 되니, 창호 교체가 우리 부부의 숙원 사업이 되고 말았다.
우리 집 뒤 베란다 창문 너머에는 바로 숲이 우거져 있다. 아파트가 산 끝자락을 깎아 세웠기 때문이다. 산 초입에는 아파트보다 더 오래된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며칠 전부터 성당 지붕에 인부들이 보이더니 도색 작업이 한창이다. 벽면은 흰색으로, 지붕은 초록에서 주황색으로 바뀌고 있다. 짙어가는 신록에 산뜻함을 더한다. 그 멋있는 정경도 창문을 열지 않으면 뿌옇게 보인다. 기존 설치된 유리창 앞뒤 면에 세월의 때가 묻어나는 현상이다.
하루는 아내가 전단지 묶음을 놓고 이리저리 전화를 하더니 뭔가 결단을 내린 모양이다. 얼마 전 꼭대기 층의 창호를 교체할 때 알게 된 시공업자와 과감하게 계약을 한다. 공사 업자를 불러 실측을 하고 난 뒤부터는 나도 방관자로만 일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미 공사를 한 우리 라인 여러 집을 외곽에서 살펴보고 업자에게 몇 가지 수정을 요구했다. 아내는 진작 이야기하지 왜 이제 와서 난리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하긴 좀 머쓱하다. 아내는 손 없는 날을 정해 공사 일자를 잡았다. 공교롭게도 평생교육원 수업 날과 겹친다.
같이 수업을 받는 교육생 중에 공직에서 은퇴하고 관세사를 하는 올해 팔순인 남자 사진작가가 있다. 그가 시청 전시관에서 두 번째 사진전을 연다고 한다. 교육을 마치고 우르르 몰려갔다. 마음은 공사 중인 집에 있지만 한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하는 의리상 따로 행동할 수가 없다.
‘여행의 기억’이란 주제로 전시된 50여 작품을 둘러보니 그의 예술적 혼이 피부로 와닿는다. 노작가(老作家)는 타이티 보라보라섬의 작품 앞에 서서, 기묘한 형태의 오테마누산과 환상적인 라군, 민트빛 바다는 여느 여행지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라고 해설했다. 사진 예술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정말 멋져 보인다.
관람 후 단체로 식사하러 갈 때 슬그머니 빠져나와 차를 몰고 부리나케 귀가했다. 혼자서 외롭게 현장을 지키던 아내가 반색을 한다. 공사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다. 해가 질 무렵 창호 설치가 끝나고, 베란다에서 임시로 피신시켜 놓은 장독과 화초, 짐들을 다시 제자리로 옮기고 나니 수개월간 뭉쳐 있던 응어리가 눈 녹듯 사그라진다.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의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 ~ 1920)는 이탈리아 리보르노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1906년부터 파리에서 살기 시작한 그는 몽마르트와 몽파르나스의 비좁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며 술과 대마초, 사랑과 시를 벗 삼던 잘생긴 보헤미안이었다. 생전에 성공이라고는 맛보지 못한 모딜리아니. 몽파르나스와 라스파유가의 전설적인 여러 술집에서 술값 대신 손님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살던 고달픈 삶. 결핵으로 인한 병약한 몸. 이런 비극적인 것들이 농축되어 연인을 목이 길고 눈동자가 그려져 있지 않는 비정상적인 초상을 그리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만 35세의 나이에 결핵에 걸려 무일푼으로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사망할 때까지 그는 오직 예술에만 몰두했다. 그가 죽은 다음 날, “저승에 가서도 당신의 모델이 되겠다.”고 한 젊은 잔 에뷔테른은 어린 딸을 남겨둔 채 만삭의 몸으로 부모님이 사는 건물 6층에서 투신하여 생을 마감했다. 그가 없는 세상에서는 한시도 숨을 쉬며 살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모딜리아니가 남긴 스케치북 한쪽에는, “내가 추구하는 것은 현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현실도 아니다. 나는 무의식, 즉 인간의 본능이라는 신비를 알고 싶다.”는 예술적 신조가 메모 형식으로 적혀 있었다.(마로니에북스)
창호공사가 끝난 다음 날 아침. 아내가 뒤 베란다 쪽에서 나를 급히 부른다. 가까이 가니 이번 공사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라고 하며 창문 밖을 가리킨다. 항상 흐려있던 곳이 투명 유리로 바뀌었다. 창틀에는 새로 단장한 성당의 지붕, 숲을 이룬 길쭉한 소나무들, 신록이 짙어가는 산봉우리 들이 한 폭의 풍경화로 멋들어지게 어우러져 있었다. 아내가 소장한 가격을 가늠할 수 없는 불멸의 명화(名畫)이다.
첫댓글 그 당시는 저도 같이 수업을 들은 것 같아요. 새삼 당시가 그리워 지네요.
우리 노작가 홍덕기 선생님이 보고 싶네요.
바쁘신 중에도 다녀가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