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반여동 중리마을 남평문씨 순평부원군파 중리 문중
남평문씨 할머니의 애향정신과 신라시대 천년고찰 인지사
반여의 지명은 ‘서리 반(盤)’, ‘같을 여(如)’로 ‘서린듯하다’로 해석한다. 반여의 터가 장군대좌형의 명당의 기운이 ‘서린듯하다’로 풀이된다. 지형이 소반처럼 동그랗다는 뜻에서 ‘반여’란 지명이 사용된 것이다. 1740년 간행된 <동래부지>에 의하면, ‘반여리(상리마을)는 동면 관내에 있으며, 관문에서 8리 거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1904년 간행한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에 의하면, ‘동상면 관내에 반여동이 있다. 반여동의 호수는 19호이다’라고 하였다. 1960년 중반에는 42호로, 정(鄭) 씨, 김(金) 씨 등의 성씨가 살고 있었다.
중리(中里) 마을은 반여1동 지역으로 반여동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었던 자연마을이다. 반여동에는 원래 상리(上里)·중리(中里)·무정리(舞亭里)·삼어리(三漁里) 등 4개의 자연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중리는 그중에서 중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중리(中里)라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이 마을은 남평 문씨(南平文氏), 청도 김씨(淸道金氏) 등이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유교숭상사상이 짙은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는 1700년 경 남평 문씨 할머니가 살았다. 할머니는 자손이 없어 죽으면 재산을 마을에 기증하기로 마음먹었다. 할머니께서는 마을 유지에게 “내가 죽으면 장례를 치르고 성묘와 제사를 지내 달라”고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할머니의 재산은 임야(16,000평, 반여1~3동 산복도로 주변)와 전답(1,000평)을 마을에 기증하였다. 문 씨 할머니 묘소는 장산 기슭에 있었으나, 태광산업 부지로 설정됨에 따라 반여3동으로 이장했으나 또다시 수재민 이주로 주택지가 되자 반여초등학교 뒷산 양지바른 곳에 안장하였다. 중리마을 주민들은 학교를 세우기 위해 할머니의 재산을 처분하여 공사 기금을 지원하여 장산초등학교가 개교(1946. 9. 1)하게 되었다. 할머니의 거룩한 애향정신을 이어받은 중리 주민들은 매년 8월 10일 산소에 모여 성묘와 제사를 지내고 할머니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본지 515호 참조)
1740년 간행된 <동래부지> 불우편에 보면, ‘중리마을 장산 쪽으로 올라가면 신라시대 창건한 인지암(仁智庵)이라는 암자가 있었으나 빈대가 너무 많아 폐사되었다’라고 하였다. 지금도 이 일대에는 옛 기왓장이 나와 절터의 흔적임을 알 수 있다. 인지초등학교, 인지중학교의 교명이 이 일대에 인지암이 있었기에 명명되었다고 한다.
중리 마을에 1940년 경 장산숙이란 서당이 있었다. 이 서당은 마을과 태광산업 담장 경계지점인 반여1동 연립주택(반여1동 850번지) 자리에 있었다. 서당 주위에는 버드나무숲과 실개천이 흐르고 환경이 아름다웠다. 서당의 학동(學童)은 상리·중리·무정·삼어마을 자녀 30여 명이 하루 3시간 정도 천자문 등을 강의하였다. 숙장(塾長)은 이시형·박창관 선생이었다.
중리서당은 1946년 9월 1일 장산초등학교가 개교한 후 문을 닫았다. 중리 당산은 중리마을 장산 기슭(반여1동 산 119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제당은 조선시대 1800년 경 건립되었다고 추정된다. 매년 1월 14일 자정에 당산제를 지내고 거릿대제는 마을 입구(반석교회 옆)에 있는 당산나무(소나무 두그루, 100여 년생)에서 지낸다. 지금은 당산제를 올리는 시간도 오후 6시로 변경하였으며 거릿대제는 지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