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5. 28
취임 2주년을 맞아 대통령이 KBS와 단독 대담을 갖는다고 청와대가 발표했을 때 많은 이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싸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KBS 대담? 뻔한 용비어천가겠지." 하지만 5월 9일 저녁, 90여 분에 걸쳐 진행된 대담은 예상을 사뭇 벗어난 것이었다.
그 한 대목이다. "자유한국당 입장에서 보면 (중략) 야당의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정국을 끌어가고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대통령께 독재자라고 얘기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독재자 얘기 들으셨을 때 어떤 느낌이셨습니까?"
정부의 일자리 정책을 조롱하는 듯한 대목도 있었다. "집무실에 일자리 상황판이라고 하나요, 그게 아직 있습니까?" "지금도 있고요." "오늘 보셨습니까?" "하하, 네. 대체로 월별 단위로 발표되기 때문에 매달 수정이 되는데요." (중략) "상황판을 자세히 설명해 주실 필요는 없을 것 같고요."
방송 즉시 정부·여당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비난이 폭주했다. "국가원수를 상대로 인상 쓰고 말 끊고 오만방자하다." "비아냥대는 말투, 논쟁을 하려는 태도가 거슬린다." "공영방송답지 못하다." 신문의 '문'은 물을 문(問)이 아니라 들을 문(聞)이라며 총리까지 나섰다. 역으로 보수 진영에서는 찬사가 쏟아졌다. 모든 게 연출이라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문 정파적 갑론을박에 끼어들 의도는 전혀 없다. 하지만, 이번 대담이 "공영방송답지 못하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공영방송의 본질적인 의미와 역할 차원에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문제 지적인즉, 모름지기 국민의 방송이라고 하는 공영방송의 대담 프로그램은 평균적 시청자들의 눈높이에서 편안하고 매끄럽게 진행되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일견 타당해 보이는 이 같은 인식이 잘못되었고, 심지어 우리 공영방송의 발전을 가로막은 '주범'이라고 본다.
결론을 미리 제시하면 '편안한' 공영방송은 공영방송의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다. 좋은 언론의 잣대가 편안함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비록 형식에 그칠지언정 정치권력이나 주주가 아닌 국민을 대표하는 형식으로 의사 결정 기구(공영방송이사회)를 구성하고, 국가나 기업이 아닌 국민 부담금 형식으로 재원을 충당(수신료)하는 공영방송 제도 설계의 본질은 공영방송을 어떤 권력의 눈치도 살피지 않는 '불편한' 방송,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지만 사회적으로 필요한 내용을 다루는 '탈(脫)시장적' 방송으로 만들고자 함이다.
KBS 송현정 기자의 대통령 대담이 의미심장했던 것은 이러한 맥락이다. 권력 앞에 당당한 자세, 투박한 태도, 직설적인 질문들은 "편안한" 공영방송에 젖어 있거나 그에 비판적인 사람들 모두에게, 공영방송의 본질인 '불편함'을 상기시키고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게 해주었다.
이 대담 방송이 나가고 10여 일 후인 5월 21일 KBS는 다국적 의료기업의 소아용 인공혈관 공급 중단 문제를 다룬 시사기획물 '인공혈관, 예고된 혼란'을 방영했다. 각종 예능과 오락물이 판치는 상황에서 시청률과 처음부터 무관한, 하지만 생명을 구하려는 프로그램이었다. 이틀 후 문제의 해외 기업이 인공혈관 추가 공급에 합의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필자는 이 같은 공영방송 프로그램들로부터, 최근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무관심과 경영난 속에 존립의 정당성마저 위협받는 우리 공영방송을 회생시킬 소중한 전문직주의(professionalism)의 원형을 발견한다.
우리 공영방송의 실패는 제도의 실패에 앞서 공영방송 구성원들의 실패였다. 공영방송 위기 극복의 출발점은 그 어떤 외생적 제도 변화에 앞서 구성원들의 변화일 수밖에 없다. 공영방송 기자 및 PD들이 누가 사장으로 내려오건 흔들림 없이 취재·보도 및 프로그램 제작 현장에서 자신의 전문직적 소명(召命)을 실천할 때 사회 구성원들의 신뢰는 서서히, 하지만 분명하게 회복될 것이다. 이는 공영방송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고, 정치권력에 의한 후견주의적 인사 관행의 실효성을 약화시켜 궁극적인 공영방송의 독립성 확보에 기여할 것이다.
정부·여당의 무능함에 한숨 쉬고 그 대안이 지리멸렬한 야당들이라는 사실에 절망하는 이 시기, 언론이 유일한 희망임을 절감한다. 그 한 축에 힘겹게 공영방송을 지켜가는 기자·PD들이 있다. 그 소중한 노력을 지지하며 이 작은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윤석민 /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