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가나안 북부 지역 정복
말씀 : 여호수아 11:1-23
여호수아가 이들 원주민을 조금도 불쌍하게 여기지 않고 전멸시켜서 희생제물로 바친 까닭은, 주님께서 그 원주민들이 고집을 부리게 하시고,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망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을 전멸시킨 것이다. (v20 새번역)
여호수아는 가나안 남부 지역 정복에 이어 이제 북부 지역과 전쟁을 치릅니다. 하나님께서 같은 편이니 결과는 이스라엘의 완벽한 승리로 끝맺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의 일등공신은 제 생각으로는 바로 하솔 왕 야빈이 아닐까 싶습니다. 북부 지역에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이 큰 하솔왕이 주변 국가들에게 연합군을 결성하여 이스라엘과 맞서자고 제안하는 바람에 여호수아는 일일이 찾아다니며 전쟁을 치르는 수고를 덜고 ‘원샷 원킬’ 단 한 번의 전쟁으로 적을 모두 물리치고 북부지역을 점령합니다. 그물을 한번 던져 물고기를 모조리 잡는다라는 뜻의 일망타진을 할 수 있었으니 물고기들을 한곳으로 모아준 하솔 왕 야빈의 공이 어찌 크지 않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공을 인정받아 야빈은 어쩌면 지옥에서 지내더라도 그나마 지옥불에서 조금이라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 중 여호수아가 왜 그렇게 잔인하게 가나안 사람들을 진멸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가 밝혀집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의 칼끝이 아니더라도 진멸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시대에 마침 때가 찼을 뿐이었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언약을 맺으시면서 가나안의 아모리 족속에 관하여 다름과 같이 예언의 말씀을 해주십니다.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창 15:16) 이 말인즉 사대 만에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때는 가나안 족속의 죄악이 가득 찬다는 말씀이십니다. 죄악이 얼마나 가득 차 넘쳤는지 무생물인 땅조차 그 주민을 토하여 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레 18:25) 결국 여호수아의 칼끝에 죽임을 당하지만 엄밀하게 따지자면 그들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죽음을 맞게 된 것입니다.
남부와 북부까지 가나안 전 지역을 전멸시킨 여호수아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나와 가족이 죽는 사생결단의 냉혹한 전쟁터라고 하지만 호흡 있는 모든 생물을 다 진멸시켜야 했던 여호수아의 멘탈은 무너지지 않고 잘 견딜 수 있었을까요? 보통 사람 같았으면 아마 거의 반 미치광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여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씀은 전쟁 시작 전에는 가나안 족속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격려의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연전연승하며 적을 물리치게 된 이후로는 오히려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을 칼로 죽이는 일은 그들의 죄가 관영한 결과이니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적을 진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는 당부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주님!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말씀을 가나안 족속의 멸망을 보며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죄에 문제에 있어서 가나안 족속뿐 아니라 세상에 사는 그 누가 자유스러울 수 있을까요? 심지어 사도바울조차 스스로를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였으니 제 경우는 닐러 무삼하리오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너는 내 거야’ 말씀하시며 하나님 편에 끼워 주지 않으셨더라면 가나안 족속의 멸망이 바로 내 모습임을 고백합니다. 지금도 낡은 수도에서 물 새듯 알게 모르게 끊임없이 죄를 짓고 있지만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맑히시는 주의 보혈로 흰 눈보다 더 깨끗해 지리라 믿습니다.
https://youtu.be/_emR-RfLsI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