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me 주는 견고한 피난처
Text Pslm 71,1-9
(1)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2)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3)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심이니이다 (4)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하소서 (5)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6)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7)나는 무리에게 이상한 징조같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 (8)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 (9)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
1.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가르치신 중요한 것들 중에 하나가 ‘염려하지 말라’ 혹은 ‘근심하지 말라’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성도의 견고한 피난처이신 주님을 믿는 기독교 성도라면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염려도, 근심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도 근심하고 걱정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성도는 절대로 염려하거나 근심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본문 성경 시편 71,1-9절은 시인이 하고 있는 근심과 걱정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그 근심과 걱정을 위하여 어떻게 하면 좋은지를 보여줍니다. 시인의 이야기가 오늘 말씀을 나누는 우리 모두에게 은혜가 되어 지혜롭고 굳건한 믿음이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꼭 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2. 먼저, 시인이 하고 있는 걱정과 근심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1절은 수치를 당하게 될지 걱정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4절은 자신이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 떨어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7절에서는 “무리에게 이상한 징조같이 되었사오나”라고 근심하고 있는 것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시인은 늙어 쇠약할 때에 일어날 일들을 염려하고 있는 것을 9절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시인이 걱정하고 근심하는 내용은 시인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본문을 읽는 모든 사람이 인정하리라 생각됩니다. 수치를 당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그 기본형이 ‘보쉬’입니다. 상대방의 모욕적인 말과 행동으로 극도의 부끄러움과 창피를 느끼는 것을 가리킵니다. 또한 4절의 악인이란 단순히 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 정도를 넘어 실제적으로 상대에게 악행을 일삼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자들에 대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들은 불의한 자이며 흉악한 자입니다. 불의한 자는 올바른 표준에서 벗어나는 나쁜 행동 혹은 그러한 행동을 일삼는 자이며흉악한 자는 마치 누룩이 밀가루 반죽 전체에 번지듯이 그 인격이 죄악성에 의해서 뿌리 깊이 오염되어 있는 상태 혹은 그러한 상태에 놓인 자를 지칭합니다. 이는 마16,6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고전5,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에서 사도 바울께서 말씀하신 누룩과 같은 뜻을 가집니다. 이 단어는 악하게 행동하는 데 익숙해 있는 극악한자들에 대하여 사용되기에 맞는 말입니다. 그런 이들의 손에서 놀아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시인을 불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7절의 “무리에게 이상한 징조같이 되었사오나”라고 근심하는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이 마치 이상한 것을 볼 때의 눈초리로 보는 것을 의미하며, 9절의 늙어 쇠약할 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염려는 늙어 쇠약할 때에 사람들에게서 소외되고 무시당하며 그래서 함부로 취급당할 것에 대한 염려입니다. 늙어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자식에게까지 버림받는 것은 누구나 견디기 힘든 일일 것입니다만 실제로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염려를 하고 근심을 하며 걱정을 할까요? 그것은 자신이 살면서 그런 일을 당하는 사람을 보거나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구나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자신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확률이 없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걱정이 생기고 같은 염려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회의 분위기나 경향이 점점 더 심하게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농후해지는 것을 보고 느낀다면, 그런 분위기가 내 가족과 주변에서도 느껴진다면 그 불안감은 한층 더 높아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떻습니까? 연일 방송되는 TV 뉴스의 사건 사고의 내용은 더욱더 그 악함과 흉포함이 심각하게 되어 있음을 보실 것입니다. 묻지마 폭행, 무차별 폭행, 저지른 범죄에 대해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 범죄자들의 행각 등은 언제 어디서나 나 자신도 그런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불안이 생기게 합니다. 외국에 놀러 가자며 치매에 걸린 부모를 데려가서는 현지에 버려두고 온 자식들의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오니 자신도 늙고 병들었을 때에 대한 걱정에 휩싸이게 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사람의 이런 걱정과 염려는 그리스도인에게도 해당이 됩니까? 악한 시대를 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이 시의 저작자로 알려진 다윗은 후세의 우리에게 같은 근심과 염려를 하라고 이런 기록을 남겨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신앙인에게 있어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임을 가르쳐주기 위해 이 시를 남겼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당연히 있어서는 안 될 근심이요 걱정이라 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여러분, 오늘 근심과 걱정과 염려로부터 해방되는 주님의 은혜가 발견되는 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3. 수치를 당하며,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 떨어지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조롱받는 듯한 시선을 받고, 늙고 쇠약할 때 버림받는 염려와 불안과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열려 있음을 믿으십시오.
무엇입니까? 다윗은 1절에서 말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주께 피하는 것이 바로 그 해결책이라는 것입니다. 3절에서는 주님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시어서 성도의 반석이시요 요새가 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2절에서 말하기를, 주께 피하면 성도에게 항상 피하여 숨을 수 있는 반석과 요새가 되시는 주님께서 주의 의로 성도를 건지시고 풀어 주시며 귀를 성도에게 기울이셔서 구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시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5절)시며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고 또 주님께서는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자신을 택하여 주신 분(6절)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것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15,14에서 성도를 당신의 친구라 하셨습니다. 히7,25에는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시는 분이라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롬8,34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라 하였으며 롬8,26-27에서는 성도의 보혜사이신 성령께서는 인간의 연약함을 도우시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 하였습니다. 요엘 예언자는 욜2,32에서 외칩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라고.
주님은 성도에게 있어서 견고한 피난처(7절)입니다. 또한 성도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는 분(고전10,13)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불안이 엄습하여 염려하고 근심하며 걱정이 될 때는 주님을 피난처로 삼아 주님께 피하기만 됩니다. 아니 불안해 하는 대신 늘 피난처이신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성도에게 피난처이며 도피성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오살한 자가 죽은 자의 가족에게 보복 사형을 당하는 것을 보호하여 정당한 회중 재판을 받을 때까지 보호하기 위해 여섯 개의 도피성을 만들게 하셨습니다.(수20장) 그 성들은 예수님께서 장차 성도의 피난처가 될 것에 대한 예표요,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 도성들은 게데스, 세겜, 헤브론, 베셀, 라못, 골란에 있었는데 그 이름들이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게데스는 성소라는 뜻으로 예수님이 우리의 정죄 성소임을 말하고. 세겜은 어깨라는 뜻으로 잃어버린 양을 어깨에 메고 오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말하며, 헤브론은 친교라는 뜻으로 단절된 하나님과 나와의 관례를 이어 사랑의 부자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말합니다. 베셀은 요새라는 뜻으로 노아의 홍수 때 유일한 구원의 요새는 방주 안 뿐이었는데 그 방주는 예수의 예표입니다. 라못은 높임이란 뜻으로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높임을 받는 것을 말하고 골란은 성별이란 뜻으로 성도를 세상과 정욕과 사단의 오염에서 성별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심을 말합니다.
여러분, 성도는 좋을 때에도 주님을 피난처로 삼고 살아야 하고 어려울 때에도 그냥 주님을 피난처로 삼고 사는 것이 옳습니다. 편안할 때라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여건이 어렵다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사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성도는 여건이 좋아서 평안히 살고 환경이 좋지 않아서 불편하게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좋은 여건 속에 근심거리가 숨어 있고 나쁜 여건이 도리어 좋은 환경일 수도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의 경향을 따라 가면 걱정과 근심은 떠날 날이 없지만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따라 살며 주님 안에 거하는 생활을 하면 세상의 흐름과 관계 없이 성도는 평안하게, 행복하게,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혹시 성도의 피난처이신 주님을 몰랐다면 지금 그 피난처 안으로 달려가십시오. 그러면 걱정 끝, 행복 시작이요. 염려 끝, 평안 시작입니다. 이 은혜가 충만하기시를 기도합니다.
4. 마지막으로, 본문은 피난처이신 주님께 가는 길을 안내합니다. 첫째는 믿음의 길입니다. 주님을 반석이시오 요새로 믿으셔야 합니다.(3절) 또한 주님만이 (유일한) 소망이심을 믿어야 하고(5절) 자신이 주께 선택된 사람임을 믿어야 합니다.(6절) 둘째는 기도의 길입니다. 시인은 ‘마소서’ ‘구원하소서’ ‘되소서’ ‘하소서’ 등의 말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로 하나님은 성도를 위해 스스로 일하시지만 그래도 성도는 그리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여야 한다고 합니다.(겔36,37) 셋째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입니다. 6절에서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하였고 8절에서는 “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라 하였습니다. 사43,21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고 사42,8에서 주님은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도피성은 각 지파가 사는 지역의 중앙에 위치했는데 죄인들이 어디서나 가까운 곳으로 빨리 피하게 하기 위함이었고 도피성까지의 길도 아주 잘 닦여져 있었는데 그 이유는 누구나 도피성으로 가는 길을 잘 알 수 있어야 하고 피하기에 좋은 길이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신19,3)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도피성으로 가는 길은 넓이가 14m나 되었으며 길에는 표지판을 크게 세워놓았다고 합니다. 피난처이신 주님께로 가는 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세례 요한 이래로 천국은 침노를 당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과 기도와 주께 영광 돌림의 길로 피난처이신 주님께로 쉽게 그러나 안전하게 가실 수 있습니다. 지금 달려가십시오.
우리나라에 IMF 사태가 터졌을 때, 많은 사람이 엄청나게 걱정했습니다. 회사가 망하여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빚을 갚지 못하여 부도를 낸 사람들이 아주 많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IMF 사태를 겪으면서 한국 사회 전부가 모든 것을 우선하는 최고 가치의 것은 재물이라 여기는 ‘돈 중심 사회’로 바뀌었습니다. 그때부터 학교도, 병원도, 심지어 정부와 정부 기관까지도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체제와 CEO를 선임 제1 조건으로 하는 현상이 벌어졌고 지금도 그 추세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제일 안타까운 것은 기독교회마저 별다른 저항 없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 중에 그리스도인도 예외없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착시현상입니다. 따라가면 망하는 신기루입니다. 처음부터 소망은 주님께만 있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성도는 눈에 보이는 환경 여건과 관계없이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갈릴리 바다를 항해하던 배가 풍랑을 만났듯이 우리 인생에도 잔잔한 바다도 있고 풍랑이 이는 바다도 있습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그 어떤 때에라도 성도는 주님만 믿고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께 부르짖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안하다 할 때에도 눈앞의 평안에 속아 세상 중심의 사람이 되지 말고, 모두가 죽겠다 할지라도 눈앞의 어려움에 눈이 가리어져 역시 세상 중심의 사람으로 바뀌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보다 안정된 삶, 소위 ‘안전지대’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경제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늙어도, 퇴출되어도, 권력에서 밀려나도 막강한 경제력만 있으면 편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돈으로 금고를 사고, 경비시스템을 설치하고, 최고급 자동차를 타고 다닙니다만 그런 것들이 오히려 위험의 표적입니다.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중 시해된 분이 있습니다. 당시 대통령 주위에는 국가 안전의 대명사로 불리는 육군참모총장 대통령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등이 있었으며 말 그대로 안전하다는 안가(安家)에 있었는데 바로 그곳에서 살해되었습니다. 가장 안전한 곳이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위험한 곳이 된 것입니다. 세상에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만이 안전합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안전지대(safe zone)를 찾지 말고 신앙지대(faith zone)에 거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사나 죽으나, 평안하거나 어렵거나, 기쁘거나 슬플 때, 그 어느 때에라도 저와 여러분은 오직 주님으로만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복되며 가장 소망이 있는 길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이 은혜가 꼭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라”(시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