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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스러운 침묵
이송희
1. 경계와 응시
오늘날 시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고통과 상처, 침묵과 무감각이 일상화된 현실 속에서, 시는 여전히 감각과 윤리의 영역을 탐색하며 말하려 한다. 시인은 이러한 질문에 응답하며, 경계에 선 존재를 응시하고 그 너머를 상상하는 시적 전략을 통해 시의 역할과 가능성을 모색한다. 즉, 말해지지 않는 고통, 상처, 죽음의 실재를 응시하며, 그 경계를 넘어서는 감각을 언어로 불러내고자 한다. 시인은 분열된 주체의 내면을 정직하게 드러내며, 침묵과 결핍마저 시의 전략 안으로 끌어들인다. 김덕남과 정두섭의 시는 이러한 시적 실천을 통해 실재와 윤리, 아브젝트(abject)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독특한 사유를 드러낸다.
먼저, 김덕남은 예술과 일상, 여성성과 시대적 억압의 경계를 넘나들며, 고통을 창조로 변환하는 시를 보여준다. 그의 시는 피아노 건반을 오르내리는 일상의 움직임에서부터 여성 예술가들의 육체적·정신적 상처를 그려내는 데까지, 일상의 서정을 치열한 감각으로 밀고 나간다. 반면 정두섭의 시는 삶과 죽음의 문턱, 도시에 부유하는 절망과 침묵 속에서 인간 존재의 공허를 응시한다. 그는 죽음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감각이 사라진 공간을 통해 오히려 죽음의 실체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김덕남은 사회적 상징질서 속에서 배제된 여성 예술가들의 ‘실재’를 은유로 재현하고, 정두섭은 언어화되지 않는 죽음의 실재를 사물과 풍경을 통해 감각화한다.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abject)’ 개념으로 보면 김덕남의 시는 억압된 몸과 예술, 정체성을 끌어올려 주체성을 복원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정두섭의 시는 사회적으로 외면받는 ‘죽음과 상실’을 응시하는 윤리적 태도를 드러낸다. 두 시인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존재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인간을 붙잡고, 그 흔들림 속에서 언어로 길을 만든다. 고통을 예술로, 절망을 풍경으로 전환하는 이들의 작업은 동시대 시가 나아가야 할 감각적·윤리적 방향을 제시한다. 이들의 시는 말해지지 않았던 고통, 보이지 않았던 진실을 말하고 드러냄으로써 언어의 윤리를 실천한다. 이는 예술이 단순한 위로를 넘어, 존재의 진실을 응시하고 발화하는 실천의 장이어야 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2. 반음계의 리듬으로 말하는 사람 - 김덕남론
김덕남 시인은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였으며, 시조집 문워크 moonwalk, 거울 속 남자외 2권과 봄 탓이로다 등으로 독자적인 감각과 비유를 구사해왔다. 이번에 선보이는 그의 시적 세계는 개인의 일상과 사회적 맥락, 예술적 형상화가 섬세하게 맞물리는 특징을 지닌다. 특히 「피아노 계단」에서는 청년 세대의 불안과 경쟁을 음악적 메타포(음계, 터치, 연주 등)를 통해 은유적으로 풀어내며, 일상의 리듬을 예술적 감수성으로 변주하는 감각을 보여준다. 반면, 「낙장불입 –프리다 칼로」, 「그물을 던지는 남자」, 「성숙의 시대」 등에서는 예술가들의 고통과 창조, 저항을 통해 여성 예술가로서의 주체성과 역사적 억압을 재조명한다. 특히 그는 몸과 감정, 시대와 예술의 경계를 교차하며 ‘존재의 진실’과 ‘예술의 윤리’를 탐색하는 데 집중한다. 이러한 시인의 탐색은 낭만적 회화성보다는 치열한 자기 응시와 사회비판적 시선으로 구현된다.
시간의 음계가 발밑에서 솟는다
한 걸음 터치하면 미로를 탐색하듯
어둑한 새벽을 딛고 인턴들이 달린다
두 걸음 내디디면 역광에 눈이 찔려
어버버 살아가다 오금이 저려와도
사리와 조금 사이로 달 하나를 품는다
고래등 올라타려 인파를 헤쳐간다
앞태도 뒤태도 반음계 올린 하루
발끝을 힘껏 내밀어 문고리를 당긴다
- 「피아노 계단」 전문
피아노에는 건반마다 고유한 소리가 있다. 이 시는 청년들의 일상과 그 안에 담긴 불안, 경쟁, 희망을 음악적 메타포를 통해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시간의 음계가 발밑에서 솟는다”는 피아노의 건반을 밟는 행위와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상을 겹쳐 놓으며, 삶의 리듬과 시간의 흐름이 우리가 디딘 걸음 속에 있다는 인식을 제시한다. 즉, 계단 하나하나를 밟는 일이 곧 음계를 누르는 것이고, 이는 생의 리듬과 연주의 일부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청년들은 “한 걸음 터치하”며 마치 “미로를 탐색하듯” 불확실한 현실을 살아간다. 인턴들은 아직 방향이 보이지 않는 미로 같은 사회에서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새벽을 향해 달려간다. 이 장면은 사회 초년생의 막막함과 조급함, 그러나 멈추지 않는 열정을 담고 있다.
시적 화자가 두 걸음 내디디며 마주한 '역광'의 이미지는 중요하게 작용한다. “역광에 눈이 찔”린다는 표현은 빛을 향해 나아가려다 오히려 시야를 잃는 역설적인 상황을 말한다. 이는 곧 욕망이나 야망이 오히려 삶의 방향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며, “어버버 살아가다”는 표현을 통해 이러한 방황과 혼란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한다. 오금이 저려오는 까닭은 예측하지 못한 두려움이나 좌절을 은유하며, 이를 현실의 냉정함, 혹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으로 묘사한다. 사리와 조금은 바닷물의 밀물과 썰물이 극명하게 차이 나는 시기와 그렇지 않은 시기를 의미하는데, 이는 삶의 변화와 감정의 진폭을 보여주는 자연의 은유라 할 수 있다. 그 사이에서 달 하나를 품는다는 것은 희망, 꿈, 혹은 감정적 위로를 잃지 않으려는 자세로 읽힌다. 이는 방황 속에서도 빛을 찾으려는 인간의 본능이자, 시인이 품고 있는 낙관주의의 표지가 아닐까.
“고래등 올라타려 인파를 헤쳐간다”는 표현을 통해 도시인의 삶을 더욱 생생하게 포착한다. 시인은 지하철 출근길 풍경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지위나 성공을 향해 밀려드는 경쟁의 한복판에 선 개인을 묘사한다. 고래등은 검은 피아노 건반의 상징이기도 하는데, 그것이 곧 더 높은 위치, 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을 대변한다. 특히 “앞태도 뒤태도 반음계 올린 하루”는 외모나 태도조차 경쟁의 요소가 되는 현대사회의 아이러니를 풍자하면서, 일상의 긴장감과 불협 속에서도 삶을 조율해 나가는 개인의 분투를 드러낸다. 이러한 현실에서 화자는 “발끝을 힘껏 내밀어 문고리를 당긴다”. 이는 하루를 마무리하며 집으로 돌아온 행위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시도하는 상징적 ‘문 열기’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는 주체적인 선택의 몸짓이며, 하루하루를 연주하듯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인간상을 정리하는 마침표라 할 수 있다.
야생의 눈썹으로 알몸의 떨림으로
주사위 던졌으나 출구 없는 미로였다
뼛속의 날갯자락이 부서지던 그 봄날
세기의 낯선 벼랑 철심으로 떠받치며
침대에 몸을 묶어 자화상을 그렸다
천장의 거울 속에서 내가 내게 매달려
혁명이나 조국은 등줄기에 파묻었다
없는 다리 그려내면 날개가 솟아날까
온몸에 못을 박고는 별을 찾아 떠났다
* 멕시코 화가(1907~1954).
- 「낙장불입 - 프리다 칼로」 전문
이 시에는 한 인간의 고통과 예술, 그리고 존재에 대한 처절한 응시가 담겨 있다. 시적 화자는 실존 인물인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를 호출하면서, 그녀의 삶을 통해 불가역적인 운명과 그에 대한 예술적 응전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시의 제목인 ‘낙장불입落張不入’은 '한 번 떨어진 패는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뜻으로,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결정적 순간이나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을 상징한다. 이는 프리다 칼로가 겪은 교통사고와, 이후 그녀가 평생 안고 살아야 했던 고통과 직결된다. 프리다 칼로의 생애 초반과 불안정한 현실은 “야생의 눈썹으로 알몸의 떨림으로/주사위 던졌으나 출구 없는 미로였다”는 구절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야생의 눈썹’은 실제 칼로의 외형적 특징이자, 그녀의 강인한 성격과 저항적인 여성성의 상징이다. ‘알몸의 떨림’ 또한 무방비 상태로 세계와 마주한 존재의 불안, 혹은 여자로서의 연약함과 폭력의 경험을 암시한다.
‘주사위를 던졌으나 출구 없는 미로’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그녀의 삶의 선택은 자유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필연적인 고통으로 귀결되었음을 암시하며, 이후 그녀의 사고와 생애 전반의 운명론적 비극성을 내세운다. “세기의 낯선 벼랑 철심으로 떠받치며”는 한 여성의 삶이 고통이라는 낯선 벼랑 위에 세워졌음을, 그리고 그녀의 몸을 떠받친 철심은 육체적 고통과 그로 인한 억압, 강제된 정지를 은유한다. “침대에 몸을 묶어 자화상을 그렸다”는 칼로의 작업 환경을 사실적으로 설명하는 동시에,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스스로를 기록하고 창조한 예술 행위를 묘사한다. “천장의 거울 속에서 내가 내게 매달려” 그림을 그리면서 그녀는 주체와 객체가 혼재된 자아의 분열을 수없이 겪었다. 고통 속에서 자신과 직면해야만 했던 예술가의 처절한 내면을 섬뜩하게 그려낸 부분이다.
“혁명이나 조국은 등줄기에 파묻”는 칼로의 행위는 개인적 고통 앞에서 이념이나 시대정신마저도 무력하게 만드는 삶의 무게를 보여준다. 그녀는 화가이자 사회운동가였지만, 육체적 고통 앞에서 이상도 잠시 접어두어야 했던 현실을 대변하는 구절이다. “없는 다리 그려내면 날개가 솟아날까”라는 질문에는 결핍을 창조로 치환하려는 예술가의 몸부림이 담겨 있다. 괴저병으로 다리를 잃었기에, 혹은 움직일 수 없기에, 그 자리에 날개를 상상하고 그려내는 것이다. “온몸에 못을 박고는 별을 찾아 떠”난 프리다 칼로의 삶은 예술적 희생과 초월의 이미지로 마무리된다. 고통을 전시하고, 그 고통을 딛고 별을 향해 떠나가는 결의가 이 시를 비극으로 끝맺기보다는, 고통 속에서도 창조를 향해 나아간 존재의 위엄으로 마무리 짓게 한다.
도도한 목선 세워 그림 속 들었다가
어깨너머 눈으로 붓을 잡고 울었지
첩첩한 세계를 벗겨 박힌 쐐기 뽑으려
에덴의 사과를 따 아담을 유혹했지
금기 깬 남성 누드 화폭에 담아내며
그물을 던지는 근육, 눈요기로 탐했지
* 프랑스 화가 수잔 발라동(1865~1938)의 그림.
- 「그물을 던지는 남자」 전문
이 시는 프랑스의 여성 화가 수잔 발라동의 예술 세계와 삶을 주체적으로 해석하며, 여성 예술가로서의 도전과 사회적 금기에 대한 정면 돌파를 다루고 있다. 시는 전통적인 남성 중심의 미술사에서 대상화되던 여성을, 능동적인 주체로 전환시킴으로써 시각적 권력과 젠더 질서를 전복한다. 시적 화자는 그녀의 그림 속으로 직접 들어가 “도도한 목선”을 세우고 “어깨너머 눈으로 붓을 잡고 울었”음을 고백한다. 이는 그림 밖에 있던 여성이 이제는 화가로서 화면 안으로 들어와 붓을 들고 창조하는 존재가 되었음을 상징한다. 하지만 그 시작은 눈물로 이루어진다. 이 ‘울음’은 감성의 표출이자, 사회적 제약 속에서 예술을 향한 갈망과 억압의 경계에서 터져 나온 절규로 볼 수 있다. “첩첩한 세계를 벗겨 박힌 쐐기 뽑으려”는 여성 화가로서 그녀의 모습은 사회적 장벽, 즉 남성 중심의 미술계 구조와 관습에 저항하는 용기있는 방식이었다. 젠더 편견이 심한 시대, 여성 예술가가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을 넘어, 사회적 구조를 벗기고 박힌 쐐기, 즉 고정된 성 역할, 시선, 권력의 구조를 제거하려는 급진적 행위를 시는 강한 언어로 묘사한다.
“에덴의 사과를 따 아담을 유혹했지”에서 화자는 자신을 이브에 빗대며, 신의 금기를 깨뜨리고 아담을 유혹한 주체로 등장한다. 이는 단지 성적 도발이 아니라, 기존 질서의 전복을 위한 상징적 행위로 읽을 수 있다. 이브는 역사적으로 죄의 근원으로 낙인찍혔지만, 이 시에서는 오히려 금기를 깨뜨린 존재로서 자율성과 욕망의 상징으로 재해석된다. 특히 아담은 뒤에서 망설이는 존재로 묘사되는데, 이는 수잔 발라동이 살아가며 경험했던 소심하거나 허세에 가려진 남성들에 대한 풍자로 볼 수 있다. 전통적 남성성을 비틀어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금기 깬 남성 누드 화폭에 담아내며/그물을 던지는 근육, 눈요기로 탐했지”라는 고백은 기존의 성적 시선을 전복하는 강력한 이미지의 발현이다. 이 시에서 남성은 더 이상 주체가 아닌 대상이다. 수잔 발라동은 남성 누드를 통해, 여성이 관찰하고 표현하는 존재임을 선언하며 ‘그물 던지는 근육’을 오히려 눈요기로 소비한다. 이는 남성의 육체를 관능의 대상으로 소비하면서, 그동안 여성에게만 부여되었던 시각적 대상의 위치를 전환하는 페미니즘적 전복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물’은 남성의 권력과 통제력을 상징하지만, 여기서는 그것조차 ‘눈요기’로 전락한다. 그물 던지는 힘의 제스처가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고, 오히려 감상과 소비의 대상으로 되돌려지는 것은 보수적인 인식에 대한 수잔 발라동의 저항적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모른 척 끌려가며 닿을 듯 내미는 손
다가서면 멀어지는 휘청이는 달빛 아래
잉걸불 끄지 마세요, 사랑이란 족쇄로
청춘의 뜨거움도 영감의 번뜩임도
당신의 이름으로 거둬간 로댕이여
세상에 우뚝한 당신, 나를 훔치지 마세요
* 프랑스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1864 – 1943)의 조각품.
- 「성숙의 시대」 전문
이 시는 프랑스 조각가이며 로댕과의 스캔들로 세기의 관심을 받았던 카미유 클로델의 비극적인 삶과 그녀가 겪었던 사랑과 예술 사이의 갈등, 여성으로서의 고통스러운 예술 활동을 서정적이고도 날카로운 시어로 그려낸다. 시의 제목인 ‘성숙의 시대’에서 ‘성숙’은 원숙함과 완성의 이미지이지만, 이 시에서는 개인의 욕망이 제도와 관계 속에서 억압당하며 부서지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특히 여성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적 능력을 온전히 실현하지 못하고 로댕의 이름 아래 소비되고 잊히는 현실은, 단지 한 인물의 비극을 넘어 시대적 문제로 확장된다. “모른 척 끌려가며 닿을 듯 내미는 손”은 카미유의 양가적인 내면 상태를 암시한다. ‘모른 척 끌려간다’는 표현은 수동성과 체념을, ‘닿을 듯 내미는 손’은 여전히 갈망과 열망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이는 곧 그녀가 로댕을 향한 사랑과 예술적 협업 속에서 느꼈던 기대와 좌절을 상징한다. “다가서면 멀어지는 휘청이는 달빛 아래” 비춰지는 그녀의 삶은 로댕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희미하고 불확실한 사랑을 표현한다. 달빛은 희망이면서 동시에 잡히지 않는 환영이다.
화자는 “잉걸불 끄지 마세요, 사랑이란 족쇄로”라고 애원하듯 말한다. 잉걸불은 아직 꺼지지 않은 열정과 가능성, 즉 카미유의 예술적 잠재력을 의미하는데, 시인은 그것이 ‘사랑이란 족쇄’로 꺼져버렸음을 지적한다. 이는 로댕과의 사랑이 단순한 개인적 상처가 아니라, 카미유의 창작 열정을 질식시킨 억압적 관계였음을 고발하는 것이다. 로댕은 까미유의 연인이자 스승이었지만, 동시에 그녀의 이름을 지우고 그녀의 영감과 창조를 자신의 이름으로 가져간 인물이었다. 화자의 분노는 “당신의 이름으로 거둬간 로댕이여/세상에 우뚝한 당신, 나를 훔치지 마세요”라는 강한 비판과 호소로 이어진다. 여기서 '거둬갔다'는 표현은 로댕이 카미유의 조형 언어, 예술적 모티프, 정체성을 자신의 예술 속에 흡수한 행위를 의미한다. 그가 ‘세상에 우뚝’한 조각가가 된 데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카미유의 존재가 본질적으로 기여했음을 드러낸다. “나를 훔치지 마세요”가 단순 호소가 아닌 자기 존재의 독립성과 예술적 주체성을 지켜내고자 하는 절규로 읽히는 이유다.
3. 죽음을 기억하는 법 – 정두섭론
정두섭 시인은 2022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이후, 시집 마릴린 목련을 발간하며, 절제된 언어와 상징적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구현해 왔다. 그는 존재의 위태로움, 삶과 죽음의 경계, 도시적 고독과 인간의 본능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데 중점을 둔다. 자살, 죽음, 소외, 생존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직접적인 서술을 피해, 사물과 공간을 매개로 은유적 시선을 구현하는 점이 특징적이다. 특히 「마포대교」나 「죽음竹音」에서는 죽음이라는 실존적 문제를 다루되 감정의 과잉 없이 무감각한 시대의 풍경을 드러내는 방식이 돋보인다. 또한 「달비계의 노래」나 「시절이라는 시절」과 같은 작품에서는 노동, 시간, 생명, 성 등의 주제를 사회적 시선과 존재론적 감각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풀어내는 방식으로 시적 확장을 시도한다.
찢어진
우산 하나
새벽 강 건너다가
젖을 데 더는 없어
우산 접고 비를 꺼낸다
신발은
왜 저기까지만
바래다주는 걸까
- 「마포대교」 전문
자살이라는 사회적 비극과, 그 비극을 둘러싼 개인의 절망을 극도로 절제된 이미지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서울의 자살 명소로 알려진 ‘마포대교’를 직접적으로 지시하며, 시적 화자가 놓여 있는 상황을 단번에 각인시킨다. 이 장소성만으로도 독자는 ‘생과 사의 경계’라는 긴장된 정서를 직감하게 된다. 마포대교에 가면 자살 예방을 위한 ‘한 번만 더’ 라는 동상이 있다. 2024년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14,87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것은 암으로 인한 사망률보다도 높은 수치이며, 10대에서 40대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라고 한다. 이것을 하루 평균으로 환산하면 매일 40.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OECD의 2배 이상이며 남자가 여자보다 2.5배 더 많다고 한다. 자살 원인은 주로 중장년의 실직과 이혼, 유명인의 자살 영향, 코로나 여파라고 언급하지만, 무엇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사회나 조직에서 자신의 역할을 잃고 그저 모두에게 내가 짐이 되어버렸다는 생각, 그리고 소속감이나 유대감을 잃고 그 무엇으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하고 온갖 세파에 시달리며 홀로 남겨졌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자살을 예방할 근원적인 해결 모색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찢어진 우산 하나/새벽 강 건너다가”는 행위에서 시적 화자의 고단한 삶과 보호막이 이미 손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찢어진 우산’은 더 이상 비를 막아주지 못하는, 즉 삶의 폭우로부터 화자를 보호해 줄 안전망이 사라진 상황을 은유한다. 새벽이라는 시간 또한 생의 끝자락, 강은 죽음의 경계 혹은 저승으로 건너가는 상징적 통로로 읽힌다. “젖을 데 더는 없어/우산 접고 비를 꺼”내는 상황은 절망의 극점이다. 이미 몸과 마음이 다 젖어 더는 잃을 것도 없는 상태, 즉 희망이 고갈된 순간을 드러낸다. ‘우산을 접는다’는 행위 역시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보호막과 체념을 내려놓는 태도이며, ‘비를 꺼낸다’는 역설적 표현은 화자가 고통과 절망을 스스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시적 화자는 더 이상 외부의 폭우와 싸우지 않고, 내면화된 절망을 꺼내 현실과 합치시키는 과정을 보여준다.
“신발은/왜 저기까지만/바래다주는 걸까”라고 화자는 의문을 품는다. 그러나 이 의문은 생과 사의 경계에 선 이의 고독을 절절하게 표현하기 위한 장치다. 신발은 삶의 여정을 함께해 온 일상의 상징이며, ‘저기까지만’이라는 표현은 삶의 한계, 사회적 지원과 공동체의 부재, 혹은 절망의 문턱에서 멈춰버린 동반자를 암시한다. 이는 물리적으로는 신발이 강가까지만 갈 수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어떤 것도 이 마지막 길을 함께해 주지 못하는 인간의 고립감을 드러낸다.
e 편한 세상 벽이 군데군데 바래서
낮잠 깨운 노랫줄에 예리가 지나갔다
바람이 붙잡았으나 바닥이 받았으나
움켜쥔 하늘 몇 점 맥없이 풀어놓고
널브러진 구름 곁에 둘러선 달비계들
허공이 바닥인지라 다시금 또 다시금
유리창 안 철부지들 휘둥그레 사이로
깜짝 놀란 여드름 찰칵찰칵 사이로
빈집을 지키는 개의 어리둥절 사이로
- 「달비계의 노래」 전문
고층 건물 외벽을 청소하거나 도장하는 노동자의 시선을 통해, 도시의 일상성과 그 너머의 고독, 인간 존재의 위태로움을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시인은 '달비계'라는 생소하면서도 구체적인 장비를 시의 중심 소재로 삼아, 노동의 자리에서 바라본 세계를 시적으로 풀어낸다. 제목 속 ‘노래’는 달비계 위에서 ‘부르는’ 노래이자, 삶과 현실을 바라보며 흘러나오는 무언의 감정, 혹은 도시 풍경에 스며든 가느다란 생의 서사로 읽힌다. “e 편한 세상 벽이 군데군데 바래서”는 아파트 브랜드명을 빗댄 익숙한 현실을 끌어들이며 시작된다. ‘편한 세상’이라는 이름 아래 실제로는 바래고 낡아가는 외벽, 즉 겉으로 보이는 안정과 내면의 균열 사이의 간극을 드러낸다. 이 ‘바랜 벽’은 곧 청소나 도장을 해야 할 작업 대상이자, 도시가 겪고 있는 노후와 피로의 징후이기도 하다. “낮잠 깨운 노랫줄에 예리가 지나갔다”는 시적 화자인 노동자가 건물 외벽을 오르며 마주한 순간적인 장면들을 시각적·청각적으로 그려낸 부분이다. 여기서 ‘노랫줄’은 달비계에 연결된 줄이자, 공중에 떠 있는 일상 노동의 밧줄이고, ‘예리’는 단지 한 아이일 수도, 또는 도시 안에서 우연히 스쳐 지나간 누군가의 따뜻한 존재감일 수도 있다.
“바람이 붙잡았으나 바닥이 받았으나/움켜쥔 하늘 몇 점 맥없이 풀어놓고”는 노동의 물리적 불안정성과 존재의 덧없음을 동시에 암시한다. 바람과 바닥 사이, 허공에서 작업하는 노동자는 마치 생과 사의 경계에 선 듯한 긴장 속에 있으며, 그가 바라보는 ‘하늘 몇 점’은 그저 흩어지는 구름처럼 무력하다. 이는 곧 삶의 불확실성과 인간 존재의 무력함을 압축한 이미지이다. 그리고 “널브러진 구름 곁에 둘러선 달비계들”은 시공간적으로 멈춰 있는 달비계의 무리를 통해, 이 작업이 단지 개인이 아닌 수많은 도시 노동자들이 공유하는 삶의 조건임을 암시한다.
“유리창 안 철부지들 휘둥그레 사이로/깜짝 놀란 여드름 찰칵찰칵 사이로/빈집을 지키는 개의 어리둥절 사이로”는 외벽에서 바라본 도시의 일상 풍경이다. 달비계에 매달린 시선이 바라보는 다층적인 현실을 보여준다. 유리창 안의 ‘철부지들’은 어린아이들이거나 무심한 일상의 도시인일 수 있으며, ‘깜짝 놀란 여드름’과 ‘찰칵찰칵’은 아파트 입주민들이 이색적인 풍경에 놀라는 장면을 사진에 담는 모습을 묘사한다. 반면, ‘빈집을 지키는 개’는 도시의 고독과 단절을 은유한다. 이들은 모두 유리창 안, 즉 보호받는 내부 공간에 있는 존재들로, 허공에서 일하는 시적 화자와는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속엣말 못 뱉어서 귀라도 기울이려
당나귀 파묻어 둔 폐사지에 들었으나
들을 말
더 없다는 듯
귀를 지운 석물 두엇
대숲은 어데 가고 근질근질 마른 풀들
바람도 비켜 가서 비밀처럼 조용한데
발아래
하마터면 밟을 뻔
놓쳐 버린 그림자
- 「죽음竹音」 전문
죽음이 마치 생명처럼 다시 사라져 버리는, 즉 죽음의 개념조차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는 시대의 풍경을 제시한다. 제목의 ‘죽음’은 한자 ‘竹音’으로 병기되어 있다. 이는 ‘대나무 소리’로 읽히며, 죽음과 죽(竹, 대나무)을 겹쳐 놓은 언어유희적 표현이다. 대나무 숲의 소리, 즉 생전의 마지막 메아리마저 사라진 세계에서, 시인은 우리가 더 이상 죽음을 똑바로 응시하거나 기억하지 않는 무감각한 현실을 묘사한다. 시적 화자는 “속엣말 못 뱉어서 귀라도 기울이려/당나귀 파묻어 둔 폐사지에 들”어간다. 여기서 ‘당나귀’는 고대 이솝 우화 속, 비밀을 말하지 못해 땅에 묻는 존재를 연상케 하며, 폐사지라는 공간은 기억과 신앙, 인간의 목소리가 사라진 장소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 장소조차 “들을 말 더 없다는 듯/귀를 지운 석물 두엇”만이 자리하고 있다. 석물은 묘비나 무덤 앞의 상징물이며, 귀가 지워졌다는 것은 더 이상 죽은 자의 말도, 산 자의 속삭임도,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세계를 상징한다. 죽음을 마주한 장소에서조차 죽음을 기억하려는 의지나 기능조차 소멸된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진다.
“대숲은 어데 가고 근질근질 마른 풀들”만 있으며, “바람도 비켜 가서 비밀처럼 조용”하다. 예전에 존재했던 대숲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아무 힘도 생기도 없는 ‘마른 풀’만이 남았음을 보여준다. 바람조차 머무르지 않는 이곳은 죽음이 이뤄지던 생의 흔적, 장례의 공간마저 공허해진 현실을 상징한다. 모든 비밀은 조용해졌고, 말해질 것도, 기억될 것도 없다. “발아래/하마터면 밟을 뻔/놓쳐 버린 그림자”는 시적 화자가 무심코 지나칠 뻔한 존재의 흔적, 즉 무덤이나 망자의 그림자, 혹은 죽음 그 자체를 의미한다. 여기서 ‘하마터면’과 ‘놓쳐 버린’이라는 표현은, 죽음조차도 의식되지 않은 채 잊히고 있는 현실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인간은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존재이지만, 이 시에서는 죽음마저도 비물질적이고 비가시적인 것으로 변모하여, 사람들의 관심과 감정으로부터 이탈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대서大暑
도마를 튕겨 나간
한탄강 쏘가리는
칼이
스윽, 쳐다봐도
죽을 둥 살 둥 가는데
매미가
왜 숨이 막혀
일대가 조용한 건지
동지冬至
그 무슨
말 못 할 사정
한 사발 속 비웠나
먹자골목
가로등 아래
설한이 붉디붉어
발가락
시린 비둘기 떼
토사를 쪼고 있다
망종芒種
마중물처럼
비는 마음처럼
옹당이만 남았다
몇 날째
여러 입술이
짬짬이 다녀갔다
그러고
한 종지 남아
부푸는 달 입을 헹군다
곡우穀雨
꽃은 핀다, 갑자기
발랑 발랑
까진
꽃
뼈마디 찢는 소리
그늘을 밀어낸다
어머머
저 생식기 좀 봐
눈 비비는
바람들
- 「시절이라는 시절」 전문
‘대서’, ‘동지’, ‘망종’, ‘곡우’ 등 사계절을 상징하는 24절기 중 일부를 중심으로, 인간 삶의 단면과 생의 허망함, 자연의 순환 속에서 일어나는 욕망, 좌절, 소멸을 촘촘하게 엮어낸 시적 연작이다. 각 절기마다 시간의 흐름이 고유한 풍경과 감각, 존재의 상태로 표현되며, 시인은 절기의 시간성을 빌려 인간의 본능, 희망, 무기력, 혹은 성적 욕망까지를 포착한다. 단순한 절기를 묘사하는 서정시가 아니라, 자연의 시간에 포갠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통찰의 시라 할 수 있다. ‘대서(大暑)’는 한여름의 가장 무더운 절기로, 본능과 생존, 그리고 절박함이 교차한다. “도마를 튕겨 나간 한탄강 쏘가리”는 죽음을 피하려는 생의 본능이며, 그 생명이 “칼이 스윽 쳐다봐도 죽을 둥 살 둥”인 모습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발버둥치는 존재의 위태로움을 상징한다. 한여름이면 거리마다 요란하게 울어야 할 매미가 조용한 이유를 묻는 시인의 시선은, 생의 본능적 열망(짝짓기)을 실현하지 못한 존재의 허망함을 짚는다. 매미가 짝을 짓지 못하면 존재의 이유도 사라진다. 이 절기는 곧 생존과 욕망이 충돌하는 계절이다.
‘동지(冬至)’는 밤이 가장 긴 어두운 겨울을 상징하는데, 삶의 고단함과 사회적 소외, 경제적 피폐함이 짙게 묻어난다. “그 무슨 말 못 할 사정/한 사발 속 비웠나”는 술로 삭이는 인간 군상의 현실을 보여준다. ‘먹자골목’과 ‘가로등’이라는 배경은 삶의 끝자락에서 흔들리는 사람들, 혹은 노동과 가난, 외로움이 공존하는 밤거리를 그려낸다. “설한이 붉디붉”은 것은 추위 속에서도 욕망 혹은 분노가 타오르고 있음을 암시한다. “비둘기 떼/토사를 쪼고 있다”는 도시의 척박한 생존 풍경을 은유한 대목이다. 동지는 가장 밤이 긴 절기이지만, 또한 가장 짧은 낮이기도 하여, 죽음 직전의 숨 한 모금 같은 시간으로 은유된다.
‘망종(芒種)’은 씨앗이 흙에 들어가는 절기이지만, 이 시에서는 파종보다는 결핍과 부재, 반복되는 허무가 강조된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마음이 매번 덜 채워진 채 돌아서는 감정의 잔해는 “마중물처럼 비는 마음처럼 옹당이만 남았다”는 표현 속에 담긴다. ‘옹당이’는 항아리의 바닥에 남은 물, 즉 마지막 흔적이다. 사랑 혹은 기대를 가지고 “여러 입술이 짬짬이 다녀갔다”는 묘사는 무의미한 반복, 또는 관계의 피로를 드러낸다. 종지에 남아 달의 입을 헹군다는 마무리는, 비워진 감정의 그릇이 다시 차오르기를 바라는 무력하지만 애잔한 희망으로 읽힌다.
‘곡우(穀雨)’는 봄비가 곡식의 성장에 영향을 주는 절기로, 여기서는 폭발적인 생명력과 성적 에너지로 표출된다. “꽃은 핀다, 갑자기/발랑 발랑 까진 꽃”이라는 과감한 표현은 생명의 탄생보다는 성의 노골적 충동, 생식의 물성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이다. “뼈마디 찢는 소리/그늘을 밀어”내듯 움츠렸던 욕망이 계절과 함께 다시 터져 나오는 듯하다. 이 장면은 자연에 내재된 생식 본능과 인간의 시선이 교차하며, “저 생식기 좀 봐”라는 발언은 인간이 자연을 대상화하고 성을 소비하는 시선을 풍자적으로 드러낸다. 곡우는 생명의 기원이지만, 동시에 노출과 자극, 생명 이전의 원초적 본능을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4. 침묵 너머의 언어
김덕남과 정두섭의 시는 각기 다른 주제와 미학을 지니면서도, 경계에 선 존재를 응시하고 그 경계 너머를 탐색한다는 점에서 맞닿아 있다. 김덕남은 여성 예술가들의 고통과 주체성, 청년 세대의 불안과 꿈을 예술적 형상화로 승화시키며, 감정과 역사를 시적 언어로 재구성한다. 정두섭은 죽음, 노동, 도시의 고독 같은 주제를 절제된 이미지와 감각적 공간으로 포착하며, 침묵과 무감각의 세계에서 새로운 감각의 통로를 연다. 이들의 시는 단지 서정에 머물지 않고, 시와 현실, 예술과 삶, 윤리와 감각의 다층적 관계를 사유하는 장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이들의 시는 동시대 한국 시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과 윤리적 실천의 지점을 예시한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침묵을 뚫고 발화하려는 이들의 언어는 오늘날 시가 어떻게 살아 있는 존재를 다루어야 하는지를 깊이 있게 보여준다.
이송희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열린시학 등에 평론을 쓰며 문단 활동, 시집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 외 6권, 평론집 및 연구서 유목의 서사 외 6권, 고산문학대상, 오늘의시조문학상 등 수상. 전남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음.
-《정형시학》2025. 겨울호. 집중조명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