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중세의 지배세력과 사상적 변화
- 羅末麗初 및 麗末鮮初의 지배세력과 儒彿思想을 중심으로 - 최 정환 Ⅰ.머리말 Ⅱ.羅末麗初의 지배세력과 사상적 변화 Ⅲ.고려시대 지배세력의 형성과 추이 Ⅳ.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대두와 사적 변화 Ⅴ.맺음말 Ⅰ.머리말 한국사의 시대구분에 있어서 세계사적 보편성과 한국사의 고유한 측면을 통일적으로 인식하여 시대구분한 일치된 견해가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 사에서 중세사회의 기점을 삼국시대, 통일신라기, 고려시대, 고려무인집권기, 혹은 조선시대로 보는 등 연구자의 시각에 따라 그 설정의 시기에 편차가 다양하다. 한편 봉건적 토지소유자(지주)와 직접생산자(전호)의 관계를 기본 축으로 하는 생산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한국의 중세사회를 통일신라기로부터 조선시대 개항기 이전까지로 보려는 견해가 제시되어 있고, 이 학설이 학계의 어느정도 지지를 얻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본 발표의 논제에서〈한국 중세의 지배세력과 사상적 변화〉라고 한 그 시기는 어느 특정한 역사이론이나 시대구분의 기준에 입각해서 붙혀진 논제는 아니다. 다만 한국사의 전체 흐름 속에서 羅末麗初와 麗末鮮初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획기적인 변혁기라는 점에서 연구자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크게 주목되는 시기이다. 또한 이 시기는 지배세력의 존재형태를 기준으로 하여 한국 중세사회의 성립을 고려왕조의 등장으로 보고, 조선의 건국을 근세의 성립으로 보려는 입론과 일치되는 시기이기도 한 것이다. 역사상 전환기라고 불리는 이 시기는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등장,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이라는 단순한 왕조의 교체에 머문 것이 아니라 사회내부에 크다란 변화를 수반하는 사회전환기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구시대의 사회체제와 질서, 이념이 붕괴되고 새로운 이념과 체제가 제시되면서, 나아가 그것이 점차 정착되어 가는 역사적인 변혁기였다. 한 시대를 이끌어가던 시대정신의 파멸과 질서체제의 동요는 정치·사회·사상적 분열과 혼란을 야기하고 이 혼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국가가 등장하고 새시대의 이념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韓國史上 나말여초와 여말선초는 사회적 변동을 겪는 시대적 전환기로서 크게 주목되는 것이다. 본 발표는 나말여초와 여말선초의 정치·사회적 변동에 따른 지배세력의 동향과 그들의 사상적 변화를 儒彿思想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그간 한국사에 대한 연구는 정치사 등 상부구조를 주로 해명하는데 치중하고, 민의 동향 등 하부구조에 대한 관심은 연구의 주대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나말과 여말에는 한국사의 어느 시기 보다도 장기간에 걸쳐 농민항쟁이 전개된 시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를 객관적으로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밑으로부터의 변화와 상부구조를 상호 결합시켜 이해하여야 만이 역사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 2차대전 이후 역사학계는 史的唯物論의 압도적 영향아래 놓여 있었다. 한편 그러한 영향아래에서도 역사과정에 고대=노예제, 중세=농노제, 근세=자본주의로 전개되는 시대구분의 보편적 기본방향만을 반영시키되, 그 지역의 특수성에 맞는 시대구분을 적용하려는 경향이 점차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서구의 역사발전과 가장 유사한 것으로 인정되는 일본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일본의 경우는 사회구성체로서는 엄연히 봉건시대(후기)인 도꾸가와(德川家康) 시대를 편의적으로 근세라 하여 구분하고 있다. 이는 봉건시대와 근대와의 중간에 서구적인 단계와는 다른 단계로 근세를 설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본사의 독자적 전개과정 때문인 것이다. 그 시대가 봉건사회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편의적으로 그렇게 설정하는 것은 서구적인 모델이 일본에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2차대전 이후 일본 역사학계는 講座派의 학문적 영향하에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오늘날 일본 역사학계는 역사를 총체로서 파악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와의 관계, 그것들을 통합해서 파악하는 방법을 모색하는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본 발표 역시 상부구조인 지배세력과 그들의 사상적 변화를 다룬 것이지만, 하부구조와 상호 결합시켜 이해함으로써 한국사의 총체적 이해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간 서구적=보편=理想像, 동양적= 특수= 악의 근원이라는 파악 방식에서 西歐 중심의 외래이론과 방법에 얽매여 형식적인 모방에 급급해 온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의 실증적 사실과 구체적인 역사 현실에 바탕을 두고 독자적인 이론과 방법을 개발하여 체계화하고, 이를 세계학계에 검증를 받는 자세가 중요하다. 이러한 시각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의 역사 현실에 바탕을 두고, 여서기는 羅末麗初 및 麗末鮮初의 지배세력과 사상적 변화에 한정하여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가능한 객관적 입장에서 정리하여, 본 학술발표 발제강연의 주제발표에 가름하고자 한다.
Ⅱ. 羅末麗初의 지배세력과 사상적 변화 1. 라말려초의 사회변동과 지배세력의 추이 신라 下代 155년 동안에 무려 20명의 왕이 교체되는 정치적 혼란이 야기되었다. 신라 하대의 정치적 혼란은 지배계층의 분열과 대립으로 나타났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쟁탈전은 진골귀족 사이의 자기 항쟁으로 전개되어 갔다. 이것은 진골귀족 내부의 분열을 뜻하는 것이었다. 원래 진골귀족들은 혈연적 유대와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공동운명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하대에 이르러 이들의 유대를 이완시켜 族黨의 분립을 가져오게 하였다. 같은 김씨 왕족이지만 족당에 따라 서로 대립하고 왕위를 둘러싼 싸움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진골귀족들의 왕위싸움은 그들의 신분 조건보다 경제력과 사병의 무력에 의지하여 이들의 분열과 대립은 확대되어 갔다. 신라 하대 이러한 정치적 혼란이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6두품과 지방 호족세력의 진골귀족에 대한 도전은 골품체제를 해체하고 신라사회의 붕괴를 촉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 6두품세력의 대두 6두품 계층은 진골체제에 기생하는 지배층의 일부로 하대 혼란기에 현실에 불만을 품고 사회체제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였다. 비록 관등이 아찬까지 밖에 오를 수 없었으나, 國學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또 渡唐留學生이 되어 유교지식을 쌓아 국가의 정책결정에 참여하거나 행정적 실무를 담당하였으며, 국왕의 近侍的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들 가운데 당에 유학하여 당의 개방된 사회체제를 경험한 일부는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체제를 개혁하려 했는가 하면 한편 새로이 등장하는 지방세력에 적극 참여하기도 하였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가 崔致遠이고, 후자의 대표적인 예로 崔承祐 와 崔彦 를 들 수 있다. 이들 6두품세력 가운데 일부는 은둔생활로 여생을 마치던가 후백제 혹은 고려의 건국에 일정한 역할을 하면서 반신라적인 세력으로 전환해 갔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으로 신라체제를 부정하고 사회모순를 개혁하는데 주된 역할을 한 것은 각 지방에서 새로 성장한 豪族들이었다. 2) 호족세력의 대두 호족은 신라말에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등장하여 지방사회에서 일정한 지역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지배권을 형성하고 있던 독자적인 지방세력으로서 신라말·고려초의 사회변동을 주도한 지배세력이었다. 호족은 그 출신에 따라서 대체로 落鄕貴族 출신의 호족, 軍鎭勢力 출신의 호족, 海上勢力 출신의 호족, 村主 출신의 호족 등의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落鄕貴族 출신의 豪族 : 落鄕貴族은 본래 중앙귀족이었으나 지방에 내려가 토착세력화 된 귀족을 지칭한다. 이러한 낙향귀족에는 첫째 국가의 徙民에 의한 낙향귀족과 둘째 진골귀족의 分枝化와 자기도태 과정에서 몰락한 낙향귀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국가의 사민 조치에 의해 낙향한 귀족이건, 진골귀족의 자기도태 과정에서 몰락한 귀족이건 이들 낙향귀족은 신라 하대에 5소경과 9주의 치소를 중심으로 지방사회에 광범위하게 존재하였다. 이들은 지방에 거주하면서 토착적 기반을 마련하고 신라말의 혼란기에 이르러 호족으로 대두하였다. 그리하여 5소경과 9주의 치소는 신라말·고려초에는 대체로 유력한 호족들의 거점으로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淸州(서원소경)·忠州(중원소경)와 溟洲의 호족세력을 들 수 있다. 청주는 신라말·고려초에 여러 호족세력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龍頭寺幢竿記〉(광종 13년;962)에; 金氏를 비롯하여 孫氏·慶氏·韓氏 등의 호족이 존재 이들 가운데 청주호족의 대표적 존재는 김씨 ; 金芮宗과 金希一(堂大等) 등- 용두사의 당간 건립을 주도한 집단이다. 金言規는 태조 즉위 직후의 인사발령에서 白書省卿에 임명되고, 金勤謙은 태조대에 守司徒·三重大匡이었다. 金兢律은 그의 두 딸을 혜종·정종에게 納妃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이와 같이 청주 김씨는 청주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강력한 호족세력이었다. 손씨는 원래 경주의 6두품으로서 서원소경이 설치될 대 사민되어 온 성씨로 생각된다. 충주도 낙향귀족이 호족세력으로 등장한 곳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淨土寺法鏡大師碑〉의 陰記에 ; 법경대사 玄暉의 제자로서 비의 건립에 참여한 道官· 俗官의 인물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劉氏·金氏·朴氏·崔氏·張氏로 나타난다. 충주지방을 지배하는 유력한 호족 ; 劉兢達- 왕건의 제3비인 神明順成王后의 아버지 --왕비로 納妃할 정도로 크게 활약한 호족이었다. 박씨와 김씨는 진골귀족 출신의 호족, 유씨 최씨 장씨는 6두품 출신의 호족으로 여겨진다. *이로 미루어 보아 신라말·고려초에 충주지방에서 활약한 호족들은 경주에서 중원소경 으로 사민되어 내려온 낙향귀족 출신의 호족으로 여겨진다. 명주는 낙향귀족 김주원계 후손들이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였던 지역이다. 金順式(왕순식)은 신라말에 溟洲將軍 혹은 知溟洲軍州事로서 강력한 호족세력으로 등장 하여 명주 일대를 지배하였다.-- 그는 궁예세력이었는데 태조 11년(928)에 이르러 귀부 王乂 ; 김주원의 직계 후손으로 王姓을 하사받았는데, 그의 딸은 왕건에게 納妃되어 大 溟洲院夫人이 되었다. 이와 같이 김주원계 후손으로 구성된 명주호족은 낙향한 진골귀족 출신의 호족이었다. (2)군진세력 출신의 호족 : 신라의 軍鎭은 처음에 변경의 수비를 위하여 내륙의 요지에 설치하였다. 삼척에 설치한 北鎭(武烈王 5년, 658)은 靺鞨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고 , 평산에 설치된 패강진(宣德王 3년, 782)은 북변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후 해적의 퇴치나 해상 방어를 위하여 해안의 요지에 군진이 설치되었다. 완도의 청해진(興德王 3년, 828), 남양의 唐城鎭(흥덕왕 4년), 강화의 穴口鎭(文聖王 6년, 844)이 차례로 설치되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패강진과 청해진이다. 패강진 지역의 호족 ; 祖師인 順之·道允·折中의 가계는 각각 '家業雄豪'·'豪族'·'郡族'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 그 지역의 호족세력임을 알 수 있다. 패강진 출신의 호족 중에서 그 구체적인 존재 양상을 알 수 있는 사례는 平山朴氏이다. 朴直胤(패강진 관내 평주의 군관직),. 그의 아들 朴遲胤의 대에--유력한 호족으로 성장 박지윤과 朴守文·朴守卿 3父子는 각각 딸을 왕건에게 納妃-- 고려초에 유력한 정치세력 왕건의 祖母인 龍女(평주의 호족인 豆恩 角干의 딸)-- 평산 박씨로 추측되고 있다. 평산 박씨를 포함한 황주 황보씨·정주 유씨·평산 유씨· 동주 김씨·신천 강씨 등 패강 진 지역의 호족--태조의 6왕후 23부인 가운데 3왕후 8부인을 배출 黃州皇甫씨의 皇甫悌恭--그의 딸이 神靜王后 황보씨. 신정왕후의 딸이 광종의 왕비(大穆王后) 貞州柳氏 ; 神惠王后(柳天弓의 딸)와 貞德王后(柳德英의 딸)를 배출 平山庾氏 ; 유금필-- 그의 딸이 東陽院夫人 東州金氏 金行波의 두 딸은 大西院夫人·小西院夫人이 되었다. 信川康氏 康起珠의 딸은 信州院夫人이 되었다. 中和 金氏의 金樂·金鐵 형제, 鹽州(영안)의 尹瑄·泰評, 土山(상원)의 崔凝 등과 순지· 도윤·절중 등의 선사가 모두 이 지역 출신이다. 이와 같이 패강진 지역의 호족은 송악의 호족인 왕건 집안과 결합하여, 고려의 건국과 후 삼국 통일에 주동적 역할을 하였고, 동시에 고려 초기의 정치를 주도한 세력이었다. 청해진은 흥덕왕 3년에 張保皐에 의하여 설치되었다. 장보고는 金祐徵을 신무왕으로 즉위하게 하는데 큰 역할--중앙귀족과 연결하여 중앙정치에 진출시도-실패 - 호족세력의 대두의 단서를 열어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한편 북진이나 당성진·혈구진을 기반으로 한 군진세력은 분명히 드러나지는 않지만--궁 예 왕건과 연결(추측) (3)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세력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활동(828∼814)--군진세력으로서의 성격보다는 해상세력으 로서의 성격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 가운데 그 대표적인 존재는 松嶽 지방의 왕건 가문이다. 왕건의 선대 康忠은 --예성강 하구의 해상세력과 연결 왕건의 조부 作帝建-- 해상무역에 종사한 해상세력-- 개성을 중심으로 황해도 일부와 강화도 한강 하류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왕건 가문은 해상무역을 기반으로 대두한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이었다. 正朝 유상희 ; 예성강 하구 지역에 위치한 4州와 3縣의 사람을 동원하여 작제건을 위하여 영안성과 궁실을 축조--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이었다. 貞州(豊德)의 유천궁-- 왕건의 첫째 왕후인 神惠王后 柳氏의 아버지 왕건이 羅州를 정벌할 때(전함 수리) 후원-- 정주 포구를 중심으로한 해상세 력 출신의 호족 예성강 하구 지역 이외에도 나주·靈巖·壓海· 城·康州·蔚山 등에서 해상무역에 종사 한 해상세력이 호족으로 등장하였다. 羅州의 다련군(多憐君)은 ; 왕건의 둘째 왕후인 莊和王后 吳氏의 아버지--나주지역 해상 세력 출신의 호족이었다. 영암은 ; 신라말에 풍수지리설을 발전시킨 道詵과 그의 제자 慶甫의 출신지이다 영암최씨는 崔知夢을 배출시킨 가문이다. 최지몽은 經史를 널리 섭렵하고 천 문·卜 에 정통-- 해상무역으로 성장한 영암지역의 유력한 호족 압해(신안군)는 영산강 하구에 위치한 해상교통의 요지이다-- 能昌이 압해지역의 해상세 력을 지배하는 호족이었다. 혜성은 ; 아산만 남쪽 연안 지역--이 혜성 출신의 인물로는 朴述希와 卜智謙 박술희는 莊和王后 吳氏 소생의 武(惠宗)를 후견한 인물로서 왕건과 나주 오씨 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이었다. 복지겸의 선조는 당으로부터 와서 해상무역에 종사하여 부와 군사력을 소유한 혜성지역의 호족이었다. 강주(진주)에서도 해상세력이 대두하였다. 王逢規는-- 泉州(의령)에서 독립적 세력을 형성 하여 강주지역을 지배하기에 이른 호족이되었다. 그는 해상무역에 종사한 해상세력 울산(興禮府)은 ; 경주의 外港으로 국내외 무역의 중심지--朴允雄이 神鶴城將軍으로서 독 자적인 군사력을 행사하면서 호족으로 대두--해상세력 출신의 호족. (4) 촌주 출신의 호족 : 촌주는 촌락에서 村政을 담당하는 在地勢力의 대표자였다. 지방관을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국가로부터 村主位畓을 지급받았다. 촌주는 租·調 수취와 역역 동원에 관여하여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고 정치적 군사적 실력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진성여왕대 이후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촌주는 정치 군사 경제적 실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지방세력을 형성하여 호족으로 성장하여 갔다. 郡·縣의 城을 근거지로 하여 城主라고 불리어지는 호족 가운데는 촌주 출신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왕건의 선대인 康忠과 龍建은 上沙粲·沙粲을 칭하고 있어, 송악군의 촌주로 추측되기도 한다. 아무튼 촌주가 호족이 되었다는 직접적이고 확실한 사례는 별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2. 羅末麗初 思想界의 變化 1) 불교사상의 변화 신라 하대에 사상계의 변화로서 크게 주목되는 것은 불교에서의 禪宗의 등장이다. 선종은 혜공왕 때 神行이 당에서 北宗禪을 들여왔고, 그 후 憲德王 때 道義가 南宗禪을 전래하였다. 신라 하대의 9산은 도의가 迦智山派를 개창한 이후부터 시작하여 가장 늦게 利巖이 須彌山派를 개창함으로써 선종 9산이 형성되었다. 신라 하대에 지방호족이 대두된 분위기 속에서 선종이 크게 유행하자 敎宗은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선종은 「不立文字」·「見性悟道」를 표방하고, 경전에 의하지 않고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불성을 깨치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外息諸緣」즉 밖으로부터의 모든 인연을 끊고 깊숙한 山間에 파묻혀 수행과 坐禪을 행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러한 선종사상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여, 중앙정부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지방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는 지방호족의 의식 구조와 부합하게 되었다. 신라 하대 선종의 유행은 지방호족이 대두된 사회상과 고려사회로 이행되어 가는 변화를 떼어 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신라 하대에 중앙 왕실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지방호족이 대두하여 사회의 개혁과 변동을 주도해 가는 시세에 편응하여 선종은 크게 유행하였다. 선종의 9山禪門은 迦智山門(道義)·實相山門(洪陟)·桐裏山門(慧哲)·鳳林山門(玄旭)·獅子山門(道允)· 山門(梵日)·聖住山門(朗慧)·曦陽山門(道憲)·須彌山門(利嚴)을 지칭한다. 이러한 9산선문 외에도 9산선문에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산문을 이루고 있는 선사들이 많았다. 慧昭는 하동의 雙溪寺에서 산문을 이루어 번창하였고, 順之는 五冠山 瑞雲寺에서 仰禪風을 펴고 있었다. 왕건과 연결된 寶壤은 청도의 雲門寺에서 산문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의 선풍은 雲門宗 계통이었다. 신라말의 普耀선사는 海龍王寺를 열어 그 開山祖가 되었다.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나말여초에는 9산선문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고, 모두 曹溪宗으로으로 불렀다는 주장도 있다. 9산선문은 고려 후기 禪宗界를 반영하는 것이지 나말여초의 선종계를 망라한 체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嗣子傳承되는 독립된 산문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라 여겨지며, 9산문 외에 선종산문이 더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禪師들은 대부분 중앙의 지배층에서 몰락한 6두품 이하의 하급귀족 출신이거나 중앙 진출이 불가능한 지방호족 출신이었다. 나말여초에 선종 승려로 30인 정도의 비문이 전하고 있는데, 그 중 약 절반이 김씨이다. 김씨가 아닌 나머지 승려는 6두품 이하의 신분층에 속해 있고, 김씨라 하더라도 王都 출신이 아닌 선사들은 6두품 이하의 신분층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山寺 梵日의 祖父인 述元은 溟洲도독을 지냈고, 實相寺 秀澈의 증조부는 蘇判(잡찬)을 지낸 진골이었다. 이들은 아마 조부 때까지만 하더라도 진골이었으나 6두품으로 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朗慧의 가계는 본래 진골이었으나 그 아버지 範淸 때에 6두품으로 떨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낭혜가 무열왕의 8대손이라서 7세대 동일 친족집단의 傍系에 속해있었거나 아니면 범청이 金憲昌의 亂에 가담했었기 때문에 난이 평정된 후 6두품으로 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9산선문은 지방호족의 세력 기반을 배경으로 성립되었다.(迦智山門의 건립에 관여한 金彦卿== 낙향호족, 曦陽山門은 沈忠과 加恩縣장군인 熙弼에 의하여 건립되었고, 鳳林山門의 건립에는 進禮城 軍主인 金律熙와 金海府 進禮城軍事 明義將軍인 金仁匡 등 加耶系 김씨 세력이 관여하였으며, 須彌山門의 건립에는 왕건 및 외척인 皇甫氏 세력이 후원하고 있었다. 聖住寺는 金仁問의 후손인 金昕의 세력 근거지에 낭혜가 주지, 사굴산문은 강릉지방의 호족인 金順式이 후원) 나말여초의 선종사상의 경향은 진성여왕을 전후하여 크게 변하고 있다. 진성여왕 이전에는 개인주의적이었고, 왕실과 지방호족의 쌍방에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초기 선종은 왕실과의 관계를 고려하는 측면에서 교학적 경향을 완전 부정하지는 않았다. 후삼국 정립기가 되면 선종사상은 개인주의적인 면보다 「外化」에 비중이 두어졌다. 따라서 지방의 대호족들이 주위의 군소 지방호족을 포섭 동화해 감을 합리화하였다. 이러한 선종사상의 경향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더욱 강화되어 敎禪一致의 사상을 가능하게 하였고, 고려초의 교선일치 사상은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통합하려는 경향이 일어나게 되었다. 2) 유교사상의 변화와 유·불·선 3교의 융합 신라 하대에는 선종이 지방호족의 후원을 받으면서 유행하였을 뿐 아니라 유학도 발달하였다. 유교사상은 중대 무열왕계 왕권의 전제화 과정에서 왕권강화의 政治理念으로 기능을 하면서 발달하였다. 유교는 주로 6두품 지식인을 중심으로 수용되었는데, 중대에 왕실이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진골귀족을 억압하는 대신 그들과 이해를 달리하는 6두품 귀족과 결탁하여, 근시기구를 확장하고 측근정치를 지향하였다. 6두품 출신은 國學에 입학하거나 당에 留學한 유학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유교 정치이념은 국왕의 권력집중에 이론적 뒷받침이 되었다. 6두품 출신들이 골품사회의 신분적 제약을 학문적 능력에 의하여 극복하려고 하였지만, 진골귀족들의 반발에 부딪치자 결국 골품제를 비판하고 사회의 모순을 개혁하려는 방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신라 하대의 유교사상은 신라사회의 모순에 대하여 비판하고 도전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신라 하대에 이르러 渡唐留學生이 많이 배출됨으로써 유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실력위주의 풍조가 유행하였다. 신라말의 유교사상의 변화는 유교 정치이념을 추구하면서 아울러 불교·도교· 풍수사상은 융합하여 함께 이해하려는 경향이 확산되어 있었다. 신라말 유교사상의 변화를 반영한 대표적인 인물은 崔致遠이다. 최치원은 불교와 유교가 서로 모순된 관계가 아니라 양자는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 如來와 周公·孔子는 출발은 비록 다르지만은 마지막에는 하나로 돌아가는 것으로 서로 이치를 같이하는 것이다. 양자를 겸수하지 못하는 것은 두 가지를 다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沈約이 이르기를 공자는 단서를 열었으며 석가는 그 이치를 다하였으니 그 위대함을 아는 자(양자를 겸수한 자)라야 비로소 至道(극치)를 말할 수 있다.(崔致遠, 〈雙溪寺眞鑑禪師大空塔碑〉, 《朝鮮金石總覽》 上, 1919, 67족〉. 유교를 발단(시초)으로, 불교를 극치(끝맺음)로 보아 양자간의 조화를 통한 하나로 간주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孔子와 子貢과의 관계를 釋迦와 迦葉과의 그것과 비유하면서 ‘무언 속의 마음의 일치’를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유교의 인도주의나 불교의 득도과정은 방법상의 차이뿐이라는 주장이다. 3畏는 3歸와 비교되며, 5常은 5戒와 같은 것이다. 왕도를 실천하는 것이 佛心이 부합되는 것이 다(崔致遠, 〈聖住寺朗慧和尙白月 光搭碑〉, 《朝鮮金石總覽》 上, 79쪽). 人心은 곧 佛心이며 부처의 뜻과 유교의 仁은 통하는 법이다(崔致遠, 〈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 碑〉, 《朝鮮金石總覽》 上, 88쪽). 유교와 불교가 서로 통하는 것이라는 최치원의 주장은 나말의 유교사상이 변해가는 과정을 엿보게 한다. 나말의 유교는 불교 외에도 老莊思想 및 道敎의 영향을 받아 그 정신세계의 변동은 결국 3교의 융합된 觀念形態로 나타났다. 신라 하대사회에 신선사상의 전개는 신라 고유의 土着사상이나 신앙에 근거하였으며, 유교나 불교신앙과 융합하여 유행한 듯하다. 유·불·선 3교가 융합하여 신라 토착의 고유한 정신을 만들었다는 것은 鸞郎碑의 序文에 “나라에 玄妙한 道가 있으니 그 이름은 風流이다. 敎를 만든 근원은 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그 핵심은 유·불·선 3교를 포함하고 중생을 교화하려는 것이다. 말하자면 집에 들어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벼슬하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魯 司寇(孔子)의 가르침이요, 無爲한 일에 처하고 不信의 敎를 행하는 것은 周 柱史(老子)가 으뜸으로 세운 바이며, 모든 악한 일을 행하지 않고 착한 일만 수행하는 것은 竺乾 太子(釋迦)의 교화이다”라고 하였다. 최치원은 花郞徒의 정신을 본래 신라에 고유하게 있었던 玄妙한 道 즉, 風流道에서 구했는데, 그것의 근원은 仙敎에 있었지만 그 추구하는 바는 유·불·선 3교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라 하였다. 道義를 연마하고 歌樂으로써 즐기며, 山水를 유람하는 화랑도의 수련방식은 선교의 수양에 근원하였지만, 그들이 행하는 정신은 유·불의 교의에 투철하였다. 화랑도의 정신이 비록 신라 하대의 최치원에 의해 유·불·선 3교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이 강조되었지만, 유·불을 함께 이해하려는 경향은 비단 최치원에게 한정되었다기 보다는 신라말의 선사들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신라 하대에 유·불·선 3교의 융합사상은 유·불이나 유·선 또는 선·불 등의 교의가 서로 교섭을 가지면서 조화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세련된 흉합논리를 갖추면서 전개되었다. Ⅲ. 고려시대 지배세력의 형성과 추이 신라 하대에는 禪宗이 유행하고 유교가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대두하여 이들 儒·彿과 風水圖讖思想이 결합되는 사상계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사상계의 변화를 주도한 6두품 계층과 지방호족의 대두는 골품제 기반 위에 성립된 신라사회를 붕괴시키고 사회개혁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국초의 호족세력 위에 성립한 고려사회는 고려왕조의 중앙 집권화정책에 따라 점차 변하여 갔다. 지방의 호족들이 중앙정치에 참여하여 官僚化되는 동시에 점차 門閥貴族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고려왕조가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마련하고 국가의 기반을 확립한 것은 成宗代 였다. 성종은 중앙관제를 제정하여 집권적 통치기구를 마련함과 동시에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성종 2년에는 전국의 12牧에 외관을 파견함으로써 중앙의 통치력이 지방으로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이 해에 戶長·副戶長 등의 鄕吏職制를 개편함으로써 중앙으로 진출하지 못한 대부분의 지방호족들은 지방관의 보좌역인 鄕吏의 지위로 격하되었다. 반면에 성종 때 유교정치에 입각한 중앙집권정책을 추구함에 따라 새로운 지배세력이 형성되어 갔다. 이들은 대체로 신라 6두품 출신의 유학자들과 지방호족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관료가 된 계층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 지배세력은 성종 이후 점차 그 기반이 닦아져 하나의 사회계층으로 정착되면서 門閥을 형성하여 귀족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사회를 문벌귀족사회라고 그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고려의 중앙집권체제는 성종대 정비되기 시작하여 顯宗을 거쳐 文宗대에 이르러 완성을 이루면서 귀족사회는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門閥貴族이 지배층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 걸쳐 고려사회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들 문벌귀족들은 그들의 사회적 신분을 유지하기 위하여 왕실과 귀족들 상호간에 중첩되는 혼인관계를 맺어 폐쇄적인 通婚圈을 형성하였다. 고려의 대표적인 귀족가문은 安山 김씨와 仁州(慶源) 이씨였다. 안산 김씨는 金殷傅의 가문으로써 현종부터 문종 때까지 왕실의 외척이 되었고, 인주 이씨는 李子淵의 가문으로 안산 김씨에 이어 문종부터 인종 때까지 외척이 되어 정권을 독점하였다. 이 밖에도 海州 최씨(崔 ), 坡平 윤씨(尹瓘), 慶州 김씨(金富軾) 등도 고려의 이름있는 문벌귀족들이었다.이들 문벌귀족들은 宰樞 兩府의 중요한 요직을 차지하여 정치권력을 독점하였다. 그들의 자제들은 科擧나 蔭敍에 의해 관리로 임명되고, 가문을 배경으로 재상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그들은 관직에 따른 전시과 외에 功蔭田柴를 지급 받고, 국자감에 입학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 졌다. 일부 특권신분인 문벌귀족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당시 사회를 움직이는 주도세력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려사회를 문벌귀족사회라 하는 것이다. 고려의 귀족사회는 결국 毅宗 24년(1170)에 일어난 武臣亂에 의해서 붕괴되었다. 武臣政權의 수립으로 이전까지의 문벌귀족사회는 붕괴되고,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따라서 무신난은 고려사회 변화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의종 24년에 일어난 무신난에 의하여 수립된 무신정권은 元宗 11년(1270) 林衍 부자가 몰락할 때까지 꼭 100년간 계속되었다. 이 동안 무신들은 초월적인 권력을 가진 武人執政을 정점으로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정권을 독점하였다. 100여년간 계속된 무신집권기는 집권 무신 내부의 분열과 몽고의 침략으로 막을 내리고, 그 사이 새로이 권력층으로 부상하여 문벌을 형성한 권문세족이 사회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고려후기에는 이들 권문세족에 대한 새로운 세력이 또다시 대두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신진사대부 계층이었다. 이들은 보수적인 권문세족에 대립하여 사회모순을 직시하고 개혁을 주장하였다. 고려후기의 사대부는 能文能吏型의 新官人層에서 발원하여 14세기에는 신진세력으로서의 사대부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신진사대부는 고려말에 온건파와 개혁파로 분기를 이루었다. 이들 말기의 개혁파 신진사대부는 이성계와 결탁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되었던 것이다. Ⅳ.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대두와 사상적 변화 1. 권문세족의 성장 무신란 이후 문신 중심의 문벌지배체제가 와해되면서 고려후기에는 여러 갈래의 출신기반을 가진 인물들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무신의 권력 장악, 몽고와의 장기간 전쟁, 원의 종속구조가 지속되는 동안에 당대에 권력층으로 부상하거나 지속적으로 관료를 배출하여 문벌을 형성한 부류들을 權門世族이라고 그 성격을 규정하여 왔다. 그러나 권문세족에 대한 개념 규정에 재검토가 이루어지게 되면서 權門과 世族은 그 지칭하는 대상을 달리해야 한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권문은 원간섭기 국왕 측근세력을 포함하여 가문배경에 관계없이 권력층이 된 부류를 지칭하고, 世族은 당시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던 문벌가문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후기 사회세력으로서의 최고 지배층을 굳이 개념화하려면 이를 세족으로 지칭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권문세족의 중요한 근거로 삼아온 충선왕 복위교서에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15가문의 '宰相之宗'도 사대부 가문으로 보아야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러나 '권문'이 단순히 '權臣'·'權貴' 등과 동일한 뜻을 지니는 것인지 더 세심한 검토가 필요하며. 이들이 세족과 함께 고려 후기사회에 큰 비중을 차지했던 세력인 만큼 에 다각적인 분석이 필요하다는 견해도 제시되어 있다. 고려후기 지배새력으로 성장한 '권문'과 '세족'의 가문을 대체로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①전기 이래의 문벌귀족으로 성장한 가문, ②무인집권기에 집정무인 자신의 가문, ③무신란 이후 '能文能吏' 형으로 성장한 가문, ④원간섭기에 對元關係의 전개 속에서 신흥세력으로 등장한 가문으로 분류해 볼 수 있는 것이다. ①전기로부터 문벌귀족으로 성장하여 무신집권기에도 여전히 사회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던 가문은 무신정권에 충직한 문신으로 인정되거나 무신들과 혼인관계, 친교를 맺어 무신정권의 탄압으로부터 벗어나 지속적으로 관료를 배출할 수 있었다. 定安任氏·鐵原崔氏 ·慶州金氏·橫川趙氏 등 문벌가문에는 이 시기 62명의 宰樞 인물 가운데 1/4이 넘는 16명의 재추급 인물을 배출할 정도 였다. ②무신집권기 최고의 가문은 집정무인 자신들의 가문이었다. 무신정권 초기에는 정권이 자주 교체됨으로써 그들 자신의 가문을 성장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4대에 걸쳐 집권한 최충헌의 牛峰崔氏 가문은 권문이었음은 물론 가세 역시 문벌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무신집권기에 비록 집정무인의 지위에 있지는 않았지만, 무반 출신으로 그들의 가세를 신장시켜 문벌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 예컨데 彦陽金氏 金就礪는 거란의 침입을 격퇴하고 몽고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시중직에 오르는 등 고위직을 역임하여 가세를 신장시킬 수 있었다. 平康蔡氏 蔡松年은 몽고 침입 때 대장군으로 활약하면서 무공을 세워 平章事가되고, 가문의 기반을 닦았다. 安東金氏 金方慶의 경우는 몽고와의 항쟁, 삼별초군의 진압과 일본원정에 참여하여 두각을 나타내고, 그것이 그의 가문을 문벌로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③한편 무신집권기에는 하급관료나 향리의 자제들이 과거를 통해 관료로 진출하여 가문의 기반을 다진 새로운 세력들이 있었다. 이른바 '能文能吏' 층이 이들이다. 학문적 교양을 쌓고 행정실무에 능력을 갖춘 이들은 최씨정권기부터 진출하기 시작하여 지속적으로 관료를 배출하면서 세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驪興(黃驪)閔氏 閔令謨 가문과 趙永仁·趙 등을 배출한 橫川趙氏는 그러한 대표적인 가문이다. ④원간섭기에 원과의 관계를 통하여 국왕 측근세력으로서 새로운 신흥 권력층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들은 몽고어 譯官, 원의 공주를 따라온 怯怜口, 內僚, 宦官, 鷹坊관계자, 侍從臣 등으로 국왕의 嬖幸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平壤趙氏 高興柳氏 漆原尹氏 瑞原廉氏 海平尹氏 등은 국왕 측근세력으로 활동하여 권력층이 되어 다른 세족과 성격이 좀 달랐지만 또한 이를 세족으로 간주하는 견해도 제시되어 있다. 평양 조씨 趙仁規는 몽고어 역관으로 충렬왕을 수행하면서 권력층으로 부상하였다. 고흥 유씨 柳淸臣은 部曲吏 출신으로 몽고어를 잘하여 충렬왕 측근세력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 攸基와 손자 濯이 모두 고위직을 역임하여 세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칠원 윤씨 尹秀는 충렬왕대에 鷹坊使로 활동하면서 국왕 측근세력이 되어 가세를 신장시켰고, 그의 손자 桓이 공민왕대에 侍中을 역임하여 그의 가문을 세족의 지위에 오르게 하였다. 서원 염씨 廉承益은 충렬왕의 측근세력으로 세족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해평 윤씨는 충숙왕과 충혜왕의 측근세력이었던 尹碩의 활약으로 세족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권문과 세족은 고려후기의 지배세력으로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兩府인 僉議府의 宰臣이나 密直司의 樞臣이 되어 都評議使司에서 합좌하여 국정을 총괄하였다. 전기 도병마사 시절에는 그 구성원이 5宰·7樞로 구성되었으나 고려후기에는 도평의사사의 구성원이 확대되어 7·80명에 이르는 宰樞가 회의에 참여하였고, 그 기능도 확대되어 최고의 정무기구가 되었다. 이들 재추직은 권문과 세족에 의해서 독점되었다. 권문과 세족은 兩府宰樞의 고위관직을 차지하고 도당에서 중요 국사를 회의 결정하는 권한을 가짐으로써 최고의 지배세력으로 부상하였다. 권문과 세족은 경제적으로 대토지소유자가 되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 지급 받는 祿科田이나 녹봉보다 불법적인 토지겸병을 통하여 광대한 농장을 소유하여 사회모순을 심화시키고 있었던 주체가 되었다. 그들은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親元的인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그들은 기성의 정치권력을 유지하고 경제적 기반을 존속하기 위하여 새로운 개혁을 반대하는 보수세력이었다. 전기의 문벌귀족이 가문 자체의 권위로 귀족적 특권을 누렸음에 비하여 세족은 현실적인 관직을 통하여 정치권력을 행사하였다는 점에서 관료적 성향이 농후하였다. 고려후기의 지배세력은 가문위주의 문벌귀족에서 관료적 성향이 짙은 권문세족으로 변천되어 갔던 것이다. 2. 신진사대부의 대두 고려후기의 지배세력을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대립국면으로 설정하고 권문세족의 친원적 태도나 불법적으로 농장과 노비를 증대시켜 정치와 사회 질서를 문란케 한 사실을 비판하면서 새로 등장한 사회세력이 신진사대부였다는 인식은 최근 20여년 가까이 일반화된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권문세족과 사대부의 개념과 성격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부정하고 새로이 개념을 규정하기도 하였다. 즉 권문세족 또는 신진사대부등 용어의 용례를 검토하여 이들을 정치지배세력으로서의 대립적 존재로 보는 것이 잘못된 구도이며, 그 개념도 잘못 사 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논의의 주된 내용은 士大夫를 지방의 중소지주, 한미한 가문출신으로 보고 정치적 향배도 반원적 개혁의 주축으로 보던 기존의 견해에 대해 사대부에는 권문세족 출신도 다수 포함되어있다는 사실을 밝혀, 종래의 입장을 부정하고 '사대부’라는 용어의 개념을 검토하여 고려 후기 신진관료층을 사대부라고 칭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용어에 대해서도 이들을 신진사대부 대신 新進士類, 新進官僚, 新興官人, 新興士族 혹은 新興儒臣 등으로 지칭할 것을 제시하는 입장으로 집약된다. 무신집권기의 능문능리의 신관료와 성리학을 수용하여 불교를 배척하고 고려말 개혁의 주체가된 신진사대부와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인식이다. 무신집권기에 새로운 官人의 형성 과정에서 吏族이나 지방의 향리출신이 많이 중앙에 진출하였다. 이들은 예전의 문신이나 무신과는 형태를 달리하는 지배계급으로 ‘能文能吏’의 신관료였다. 이들은 주로 科擧를 통하여 등장한 관인으로서 ‘학자적 관료’이며 ‘관료적 학자’의 성격을 갖는‘사대부’의 祖型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향리층은 新興官人 즉 士大夫의 모태가 되었을 뿐이고 향리층의 전면적 官人化를 달성한 것은 아니어서 향리층과 신흥관인 즉 사대부를 동일선상에 놓고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진사대부는 고려 후기에서 말기로 접어들면서 정치 사회적 기반을 확립시키고 나아가 조선건국에 주동적 사명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개혁세력으로서의 신진사대부의 모습이 뚜렸해지는 것은 공민왕대부터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충선왕(1298, 1309∼1313)부터 충목왕대(1341∼1344)까지 간헐적으로 추진되던 개혁이 공민왕대의 개혁과 동질성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대부를 고려시대 지배세력을 칭하는 역사적 성격을 가진 용어로 처음 사용한 이래 이 용어를 더욱 발전 심화시켜 충선왕대 개혁에 참여한 신진관료를 신흥사대부로 정의하였다. 이와 함께 新進士類·新興士族·新興儒臣의 개념도 등장하였다. 여기서는 현재 학계에서 가장 많이 통용되고 있는 사대부를 사용하였다. 고려후기의 새로운 관인층을 지칭하는 사대부는 시대적 여건에 따라 그 성격에 차이가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는 공통되는 성격을 갖고 있으나, 세부적으로는 시기에 따라서 조금씩 차별성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고려후기 사대부는 3시기로 구분하여 논해질 수가 있다. ①제1기의 사대부는 무신집권하에서 能文能吏의 관리로 등장하여 정치에 참여한 文士로서 사대부의 祖型이라 일컬을 수 있다. 이들은 주로 서리나 향리 출신으로 과거를 통해 진출한 新進官人으로 중소지주적 위치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新進士人·新興官人 등으로 표현되며, 현실인식에 있어서 사회 모순에 대한 문제 제기는 미약하였다. 최씨집권기의 문신들은 체제에 아첨 또는 타협하는 입장이었던 반면에 대외적으로 몽고와의 항쟁과정에서 민족의식의 발로로 國祖 檀君이나 고구려 시조 東明王의 존재를 부각시켜 민족의 자주의식과 역사의식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②제2기의 사대부는 14세기 새로운 麗元關係하에서 官途에 진출한 과거관료들로서 성리학 수용에 앞장 선 사람들이다. 성리학은 安珦·白 正·李齊賢 등을 중심으로 적극 수용되었다. 이 시기에 지방 향리 출신으로 과거를 통해서 중앙에 진출하여 현달한 가문출신자를 중심으로 성리학이 적극 수용되었다. 이제현을 비롯하여 禹倬·安軸·李穀·白文寶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을 일반적으로 신진사대부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고려는 국왕 부자간의 갈등이 일어나고 관료의 내분 등으로 정치적 혼란이 거듭되던 시기였다. 왕들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嬖幸 등 측근세력을 구성하여 파행적인 정치가 전개되고, 정상적으로 진출한 관료들은 왕의 측근세력에 의하여 정치일선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사대부는 사상적으로는 유교적 도덕정치를 지향하고 불교를 異端視하면서도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는 수준에 그치고 불교와 유교의 공존을 인정하였다. 정치적으로는 기존의 권문세족과의 혼인관계나 권세가와의 타협으로 권력지향적인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기존의 권문세족이나 국왕 측근세력과의 연결을 통하여 자신들이 귀족화되어 감으로써 그들의 개혁론은 한계성을 갖는 것이었다. ③제3기의 사대부는 제2기에 등장한 사대부들의 후손이나 새로이 관인으로 등장한 과거출신의 유신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은 공민왕대의 반원적 분위기와 함께 권문세족을 배제하고, 신돈의 田民辨整 개혁에 참여하거나 李穡이 成均館을 重營하고 학풍을 크게 진작시키는데 참여한 유신들이다. 이들은 성리학 수용의 제2세대라 할 수 있고, 성리학에 대한 이해도를 더욱 심화함과 동시에 불교를 이단시하여 배척하였다. 이들 신진사대부는 우왕대 李仁任의 권세하에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으나, 우왕 14년(1388) 崔瑩의 요동정벌에 반대하는 이성계의 신흥세력과 연계하여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들은 당시 현실모순을 타개하는 방편으로 전제개혁을 주장하고, 친명정책을 표방하면서 원과 연결된 권문세족을 제거하고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진사대부는 온건파와 개혁파로 갈라지게 되었으며, 개혁파는 전제개혁과 廢假立眞을 추진하며 새 왕조 건국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상에서 요컨데 고려후기의 사대부는 能文能吏의 신관인층에서 발원하여 14세기에는 신진세력으로서의 사대부로 등장하였고, 신진사대부는 고려말에 온건파와 개혁파로 분기를 이루었다. 이들 말기의 개혁파 신진사대부는 이후 조선초의 양반신분을 구성하는 지배세력의 모체가 되는 것이다. 3. 고려 불교사상의 변화와 동향 신라 하대 선종이 새로 성립되면서 시작된 敎·禪의 사상적 양립은 고려초에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었다. 고려초기의 불교계는 신라 불교를 그대로 계승하여 화엄종을 중심으로 한 교종과 9산선문의 선종이 양립하고 있었다. 화엄종 내에서도 南岳派와 北岳派가 분열되어 있었고, 선종은 각 지방의 호족세력과 연결된 채 각기 독립된 교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불교계의 분열은 단순히 교리상의 문제에서만이 아니라 당시 정치세력의 분열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었다. 麗初 이래의 호족세력을 억압하고 왕권을 강화한 光宗은 정치세력의 분열을 해결하고 국가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불교계의 정비에 관심을 기울였다. 즉 교종과 선종의 내부분열을 교종은 교종대로, 선종은 선종대로 각각 통합한 뒤 다시 敎·禪의 대립을 극복함으로써 전체 불교의 통합을 꾀하려 하였다. 먼저 교종은 화엄종 北岳派의 均如를 후원해서 통합을 이루고, 한편 선종은 당시 중국에서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흡수하려는 사상체계로 나타난 延壽의 法眼宗을 수입하여 이를 중심으로 각 지방의 禪門을 정리하였다. 나아가 이 법안종과 삼국시대 이래의 天台學을 융성시킴으로서 敎·禪의 대립을 극복하려 하였다. 그러나 광종이 죽은 후 광종대의 개혁정치를 주도했던 사람들이 모두 제거됨으로써 천태학과 법안종도 쇠퇴하여 종파로서 성립하지 못하고 다만 그 융합사상이 뒤에 義天이 천태종을 개창할 때에 밑거름이 되었다. 정치적으로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가 확립되고 문벌귀족에 의한 귀족사회가 만개하는 고려중기에는 보수적 귀족불교인 法相宗이 새로이 화엄종과 양립하였고, 禪宗은 종단에서 세력이 밀려나게 되었다. 이 때 화엄종은 고려왕실과, 법상종은 당시 최대의 문벌귀족인 仁州 李氏와 각각 연결되어 불교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 결과 교·선의 대립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그 대립은 1백년간이나 계속되었다. 화엄종 측에서 義天이 등장하여 법상종을 융합하고, 나아가 선종을 통합하기 위한 일대 불교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는 먼저 性相兼學을 내세우면서 화엄종의 입장에서 법상종을 통합하여 교종을 정리하고, 나아가 敎觀兼修를 주장하면서 새로 천태종을 개창하여 선종을 포섭함으로서 교·선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의천은 당시의 대문벌귀족인 인주 이씨세력과 연결된 법상종교단 측의 공격을 받아 한때 지방으로 밀려나기도 하였으나, 인주 이씨세력을 억압하고 즉위한 숙종의 후원으로 숙종 2년(1079) 國淸寺가 창건됨으로써 한국의 천태종을 창립하였다. 의천에 의한 천태종의 창립은 단순히 하나의 새로운 종파의 창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선으로 분열되었던 전 불교교단을 재편하여 교·선의 대립을 극복하는 사상적 과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천의 교선통합사상은 절충적인 성격이 강하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불교 교단을 天台宗과 曹溪宗으로 양분시키는데 그쳤다. 그리고 당시의 사원들이 귀족들의 願堂으로서 재산도피나 정권싸움의 수단이 되었고, 왕실 출신인 의천으로서는 불교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세계를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귀족불교를 대중화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의천의 천태종 개창과정에서 와해된 선종 계통은 가지산문(迦智山門)에서 학일(學一, 1052∼1144년)과 사굴산문에서 탄연(坦然, 1070∼1159년), 지인(之印, 1102∼1158년) 등과 또 거사인 이자현(李資玄, 1061∼1125년), 윤언이(尹彦 , ?∼1149년), 권적(權適, 1094∼1146년) 등이 출현하여 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 중기에도 선사상이 부흥되고 또한 서서히 독립된 교단으로서의 기반을 재정비하기에 이르렀으나 당시 사회구조의 보수적인 추세 속에 함몰될 수밖에 없었다. 또 이 당시 거사들의 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던 점은 여러 각도에서 해석이 되고 있지만, 무신란 이후 수선사 계통의 선종이 부각될 수 있는 신앙결사의 토대를 제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 修禪社와 白蓮社의 結社運動 무신란 이후 불교계에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그것은 禪宗의 부흥과 신앙 결사 운동으로 특징지어 진다. 이전까지 왕실 및 문신귀족들의 비호를 받으면서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던 교종 중심의 불교계는 무신정권의 가혹한 탄압을 받아 교종종단은 급격히 쇠퇴하고, 그 대신 義天 이후 침체해 있던 선종 세력이 최씨정권과 제휴함으로써 새로이 대두하였다. 아울러 무신란 이후 당시 사회의 기존의 보수적인 경향이 강화된 불교계에 대한 비판운동으로 수선사(修禪社)·백련사(白蓮社) 등의 신앙결사 운동이 전개되었다. 修禪社 結社運動 ; 수선사는 知訥이 1182년(명종 12) 정월에 개경의 보제사에서 개최한 담선법회에 참석하여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면서 동지 10여 명과 함께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거하여 결사를 맺을 것을 약속함으로써 출발된 것이었다. 그 뒤 지눌은 창평의 청원사, 하가산 보문사, 팔공산 거조사, 지리산 상무주암 등지를 유력하면서 수선에 힘썼다. 특히 거조사에서는 「勸修定慧結社文」을 1190년(명종 20)에 반포함으로써 정혜결사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200년(신종 3)에는 송광산 길상사로 그 근거지를 옮겼으며, 최충헌의 집권(1196) 이후 무신세력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1204년에 고려왕실로부터 사액을 받아 정혜결사의 명칭을 수선사로 하였던 것이다. 普照國師 지눌의 사상은 頓悟漸修와 定慧雙修로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사실을 먼저 깨닫고(先頓悟), 이를 바탕으로 수련을 계속하여야 하며(後漸修), 이 수행에 있어서는 定·慧를 함께 닦아야 한다(定慧雙修)는 것이다. 선종을 위주로 해서 교종을 융합하려는 지눌의 敎禪 통합의 교리는 이후 수선사를 바탕으로 曹溪宗이 확립되어 우리나라 불교 교단의 주류가 되었다. 지눌의 수선사는 기존의 불교계의 제반모순과 폐단을 자각하고 이에 대해 단순한 비판과 반성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를 개혁하려는 실천운동으로 승화시켜 당시 불교계뿐 아니라 사회변동기에 처한 독서층이나 정토신앙을 신봉하는 지방사회 일반 민중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지눌의 뒤를 이은 眞覺國師 慧諶은 지눌의 宗旨를 더욱 발전시키는 한편 崔瑀 정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對蒙抗爭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수선사는 최충헌 집정 말기부터 시작하여 최우 집정기에 이르러 불교계를 주도하는 대사원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 당시 수선사를 주도한 인물은 혜심이었다. 혜심 이후에도 이러한 분위기는 계속 유지되어 수선사 제4·5세인 혼원(混元)과 천영(天英) 단계에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최씨정권이 몰락한 1258년 이후 대몽항전기를 거쳐 원지배기로 접어들면서 가지산문의 일연 계통이 부각됨으로써 서서히 퇴조하였다. 白蓮社 結社運動 ; 신앙결사 운동은 조계종 계통에 이어서 천태종에서도 일어났다. 백련사는 천태종 승려인 圓妙國師 了世(1163∼1245)에 의해 개창된 신앙결사이다. 요세는 1174년에 천태종 승려로 입문하였으며, 1185년 봄에 개경의 천태종 사찰인 高峯寺에서 개최한 법회에 참석하였다가 그 분위기에 크게 실망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신앙결사에 뜻을 두게 되었다. 지눌처럼 요세도 개경 교단에 실망하고 개경을 떠나 한때 지눌의 권유로 선을 닦은 일이 있다. 요세는 1198년(神宗 원년) 가을에 동지 10여 명과 더불어 여러 지역을 유력하다가 靈洞山 長淵寺에서 법석을 열고, 거기서 지눌의 권유를 받고 修禪하며, 定慧社가 松廣山으로 옮겨갈 때에도 동행하였다. 이렇게 출발한 요세는 지눌에 의해 수선에 대한 체험을 하기도 하였으나 이로부터 사상적인 전환을 하게 된 것은 1208년(熙宗 4년) 봄에 영암의 藥師庵에 거주할 때이다. 이때 홀연히 생각하기를 '만약 天台妙解를 發揚하지 못하면 永明延壽의 120病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지눌과 결별하고 天台敎觀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天台法華思想에 의한 수행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전환을 계기로 하여 요세는 1216년(고종 3년) 전남 강진의 토호세력인 최표(崔彪)·최홍(崔弘)·이인천(李仁闡) 등의 지원에 따라 약사암에서 강진 萬德山으로 주거를 옮겨 백련결사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1221년(고종 8년)에 帶方(남원)太守 卜章漢의 요청에 의해 남원 관내의 백련사에서 제2의 백련사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 후 1232년(고종 19년)에 白蓮社는 普賢道場을 개설하여 체제를 정비하고, 1236년(고종 23년)에 天 이 지은 白蓮結社文을 공포하여 공식적으로 결사를 표방하였다. 了世의 신앙과 수행은 天台止觀과 法華三昧懺, 그리고 淨土往生으로 집약된다. 즉 法華思想에 의한 천태지관을 바탕으로 정토관을 계승한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요세는 대중들과 같이 날마다 53體佛을 12번씩 돌며 禮懺하여 혹심한 寒暑에도 쉬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이와 같은 禮懺과 彌陀佛의 염송에 의해 西方淨土에로의 왕생을 구하는 정토신앙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처럼 禮懺과 정토왕생을 강조한 요세의 사상체계는 지눌의 그것에 비하여 보다 대중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눌의 頓悟漸修 사상은 自心을 頓悟하고, 定慧를 꾸준히 雙修해 나가는 것이었다. 지눌 역시 淨土觀을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주 대상으로 한 사회계층은 지방사회의 지식층이었다. 요세 역시 지식층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농민이나 천민과 같은 기층사회의 백성들을 널리 포용하려는 면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白蓮社도 역시 普賢道場을 개설한 뒤부터 崔瑀政權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중앙 관직자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아마 그것은 최씨정권의 대몽항쟁에 대한 백연사의 지원에 따른 결과가 아닌가 짐작되나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어떻든 요세에 이어서 靜明國師 天因(2세 社主)과 眞靜國師 天 (4세 社主)등 8국사를 배출하면서 크게 번성하였다. 曹溪宗과 天台宗에서 각기 전개된 수선사와 백연사의 신앙결사운동은 그 사상과 수행방법에 차이가 있으나 당시 불교계의 모순에 대한 비판과 자각에서 비롯되었다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지눌과 요세 등 그 주도세력이 전기와 같이 왕족이나 문벌귀족이 아닌 지방의 향리나 독서층이었으며, 민중을 상대로 지방으로 확산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불교개혁운동이라고 그 성격을 규정지을 수 있다. 특히 지눌의 사상이 지방의 지식층에 확산되어 감에 따라 그의 心性論은 신진사대부들의 성리학 수용에 사유기반을 마련하여 주었다. 한편 조계종과 천태종계의 이러한 결사운동에 자극된 화엄종에서도 새로운 전통의 확립을 위해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때 다시 부상한 것은 의천에 의해 비판·배척되었던 均如派의 화엄학이었다. 이는 최우정권이 불교계의 대립양상을 완화하고 절충하려는 정책을 취함에 따라 상당한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8만대장경(1236∼1251)의 주조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 교정의 책임을 맡은 守其는 敎宗寺刹인 開泰寺의 승통이요 均如의 直系法孫이었다는 데서 그 같은 면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수선사와 백년사를 주도한 인물들의 불교철학은 사상적으로 최고의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당시 신앙결사에서 의도한 불교철학은 다수가 쉽게 공유할 수 있는 높은 수준에 이르지 않고서는 대장경의 주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2) 고려말의 불교계 동향 신앙결사로 특징지어지는 13세기 불교계의 혁신운동은 元의 간섭기에 접어 들면서부터 그 성격이 변질되었다. 무인정권이 붕괴되고 원의 지배하에 들게되자 정치적 사회적 변동과 더불어 불교계도 그 영향을 받아 변화가 일어났다. 修禪社는 普照와 그의 후계자인 慧諶의 법맥은 후계자들에 의해 그대로 이어져 나갔지만, 최씨정권이 붕괴되자 그와 밀착하였던 수선사 세력은 약화를 면치 못하고, 그 대신 가지산문의 一然 계통의 교단세력이 등장하여 수선사의 계승을 표방하였다. 일연은 멀리 '멀리 牧牛和尙 지눌의 법맥을 이었다'고 하여 수선사의 계승자로 자처하였다. 원 지배하에서 조계종을 대표하는 교단세력은 일연 계의 가지산문이었다. 일연은 정치적으로 왕정복고(1258년)가 이루어지고 몽고와 강화를 맺게되는 과도기에 불교계의 중추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 일연이 충렬왕의 왕명에 의해 國尊으로 책봉됨에 따라 부각된 가지산문은 원 지배기에 보수세력의 지원에 의해 그 세력을 확장하였다. 일시적으로 묘련사 계통과 교권 장악을 위해 서로 대립하기도 하였고, 고려말에는 태고보우(太古普愚) 등이 출현할 정도로 불교계의 중심세력을 형성하였다. 특히 고려 말에 보우와 혜근(懶翁慧勤)은 원으로부터 臨濟宗을 전수하였고, 또한 한때 불교계의 교·선의 통합과 정화를 시도한 적이 있다. 일연은 그의 말년에 國尊(1283)이 된 이후 麟角寺를 下山所로 삼고 그곳에서 2회에 걸쳐 九山門都會를 개최하는 등 당시 가지산문은 일연을 정점으로 하여 선종을 포함한 전 불교계의 교권을 장악한 교단으로 성장해 갔다. 이와 같은 가지산문의 번성은 왕실 및 권력층의 비호에 힘입은 바가 컸던 것이다. 물론 일연은 선·교의 서적과 함께 유교문헌까지 두루 섭렵한 명망있는 學僧으로써 당시 불교계의 諸矛盾에 대하여도 강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울러 그의 저서인 《三國遺事》에서는 서민관계 기사가 다수 수록되어 있어 그것은 곧 그가 민중생활과 인간의 옹호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견도 제시된 바 있다. 그러나 민중관계 사료가 수록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史觀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반대 의견도 나와 있다. 여하튼 일연의 의도가 어떠했던 간에 원 지배기의 가지산문을 중심한 불교계의 중추세력이 당시의 정치·사회구조 속에서 대두한 보수세력과 결탁하고 있었다는 점은 고려사회가 해체되어 가는 과정에서 불교계의 변질과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축소되고 있는 단면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백련사도 요세 이후 천인, 천책에 의해 계승되었으나 원 지배기인 忠烈王 10년(1284)에 충렬왕과 齊國大長公主의 원찰인 妙蓮寺가 건립됨으로써 백련사의 사상적인 전통이 변질되어 갔다. 묘련사를 중심으로 한 경의(景宜, 圓慧國師)·정오(丁午, 無畏國師)·의선(義璇) 등 백련사 계통의 출신 인물들은 요세·천인·천책·무기(無寄)로 이어지는 본래 결사의 경향과는 성격을 달리했다. 전자들이 비록 백련사 계통에서 출발한 승려라고 하나 왕실과 원 황실의 願刹로 건립된 묘련사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 묘련사의 건립은 원 황제에 대한 축복과 종묘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이 묘련사의 낙성을 경축하는 법회를 주관한 사람은 백련사에 主法하고 있었던 원혜국사 경의였다. 그는 이 행사 뒤에 곧바로 묘련사의 주지((1세 主法)가 되었다. 이후 18년이 지나 백련사에 머물었던 無畏國師 정오가 묘련사의 주지를 맡아 많은 활동을 전개하여 기반을 다지었다. 이리하여 백련사계통의 승려들이 묘련사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되어 묘련사는 백련사의 分院과 같이 되었다. 정오는 忠烈王과 忠宣王·忠肅王 3대에 걸쳐 禪·敎 각 종파를 총관하는 지위에 올랐고, 묘련사를 중심으로 천태종의 본거지인 國淸寺 및 瑩原寺 등 중요 사찰들을 두루 住錫하여 기존세력을 포섭함으로써 왕실의 지원 아래 교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이렇게 묘련사를 중심으로 하는 천태종의 세력 확장은 정치권력 특히 왕권과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서, 그것은 다분히 귀족불교적인 성격을 띠게 마련이었다. 또한 이들의 사상적 경향도 法華敎說과 天台疏만을 중시하여 주로 일반민중들에게 기반을 두고 法華三昧懺과 淨土求生을 추구하던 백련사의 신앙운동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 후 義璇이 충숙왕 復位 5년(1336)에 원으로부터 일시 귀국하여 묘련사를 크게 중건하면서 이 종단은 附元勢力化하는 성향마져 지녔다. 의선은 원지배기의 대표적인 권문세가로 부각된 趙仁規의 아들이다. 묘련사는 뒤에 조인규 가문에서 무려 4대에 걸쳐 4명의 승려를 배출함으로써 이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또한 조씨 가문에서 묘련사뿐 아니라 차츰 萬義寺·淸溪寺 등의 원찰까지도 확보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나아가 천태종 교권을 장악하였다. 묘련사가 친원적 권문세족인 조인규 가문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나아가 조씨 가문은 묘련사뿐 아니라 차츰 천태종 교권까지도 좌우하였다는 사실은 자각·반성운동으로 일어난 결사운동이 계승되지 못하고, 당시 불교계의 변질된 모습을 잘 보여준 것이라고 하겠다. 물론 이 시기의 천태종 승려 雲默和尙 無寄와 같이 묘련사와는 전혀 길을 달리하여 벡련사 초기의 대중불교적 특성을 계승해 가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권문들과 결탁하고 있던 당시 불교계의 보수적인 경향을 통혈하게 비판하고 일반민들에 대한 자각을 촉구했다. 그러나 그가 뜻하는 바와는 달리 당시 사회의 제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이념적 기반과 그 추진세력의 결집은 불교계 자체에서 구축되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불교계의 보수적인 경향은 교종종단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海印寺를 기반으로 하는 화엄종단의 體元은 그가 남긴 수종의 저술에서 근본적으로는 관음신앙과 전통적인 민간신앙에 바탕하고 있지만, 신비적인 靈驗과 功德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당시 사회와 불교계가 안고 있던 문제들을 본질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못했다. 고려중기 당시 최대 문벌귀족인 인주이씨와 연결을 가진 法相宗(瑜伽宗)도 무신집권으로 타격을 받아 교세가 약화되었으나. 이 종파에서는 원에 寫經僧을 파견하면서 附元勢力과 연결을 가지고 어느 정도 종세를 확보해 갈 수 있었다. 충렬왕대 이후 王師·國師가 주로 조계종(가지산문)·천태종(묘련사 계통)과 함께 법상종(유가종) 출신도 간혹 책봉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법상종(유가종) 출신으로 충렬왕·충숙왕 대에 惠永(弘眞國尊)과 彌授(慈淨國尊)가 國尊으로 책봉되어 두각을 나타냈고, 이후에는 원에 초청되었던 國一大師 海圓 이외에 두드러진 인물은 없었다. 법상종은 혜영과 미수 등이 국존으로 채봉되어 종세를 확장시켰지만 대체로 조계종과 천태종에 비하여 침체하였다. 전기에 비해 이론적 발전도 없었고, 당시의 念佛과 異蹟을 중요시한 일반 사조에서 벗어나려는 사상적 노력도 없었다. 이상에서 원 지배라는 현실 속에서 불교계의 핵심적인 교단세력은 귀족적·보수적인 경향으로 일관하였고, 단지 이에 대응하여 당시 사회와 불교계의 제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일각에서 시도되었으나, 지나치게 신앙적 측면만을 강조한 결과, 사회사상으로서의 본질적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불교계 내부에서 13세기 전후의 신앙결사 단계에 이룩하였던 사상적 기반까지도 계승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사원이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고리대금업에까지 손을 대는 등의 사회경제적 모순까지 내포하고 있어 불교계가 당시의 사회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축소되어감에 따라 신앙결사 단계에서 구축한 사회적 기반, 즉 소수의 문벌귀족으로부터 지방사회의 향리층·독서층이 획득한 사상계의 주도권을 성리학이 대신하게 되었다. 따라서 고려말기의 불교가 시대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단계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성리학을 기치로 내세운 신진사대부의 등장으로 마침내 불교는 사상계의 주도적인 위치에서 완전히 밀려나고 말았다. 이로써 여말선초에는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한 儒彿交替의 사상적 전환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4. 性理學의 전래와 斥佛運動 고려후기 儒學은 삼국 이래의 전통을 이어 고려초기에 와서 정치이념으로 정립되면서 국교적 위치에 있던 불교와 병존해 왔다. 불교와 유학(유교)은 성리학이 전해지기 이전까지는 서로 조화와 융합의 양상을 띠고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이 같은 상호 병행의 儒·彿관계는 성리학의 전래와 함께 점차 변하기 시작하여 여말에 이르면 심각한 대립과 갈등을 나타내 보였다. 이는 곧 성리학으로 인한 유·불간의 관계변화를 말해주는 것으로 양자의 대립 갈등이 근본적으로는 그 사상적·윤리적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성리학 전래 이전의 불교와 유학의 서로 다른 위치 및 상호대응 등의 역사과정이 또한 반영되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리학 전래 이전의 고려 불교계에는 유학지식을 갖춘 승려들이 의외로 많았다. 그것은 고려 불교의 유학에 대한 이해증진과 함께 유·불 상호병행의 공감대를 더욱 넓히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최씨 무신집권기에 유학자 출신 승려들과 유학자들 사이에 사상적 교류가 더욱 긴밀해지고, 여기에 유불일치와 융합의 새로운 경향까지 일어나 장차 성리학의 전래 및 그 수용의 기반이 마련되고 있었다. 무신집권 이후 불교계에는 새로운 사상과 신앙운동으로서 선종의 지눌에 의한 定慧結社(修禪社)와 천태종의 了世에 의한 白蓮結社가 조직되어 불교계를 주도하였거니와 이 새로운 결사운동이 유학자 출신의 승려들에 계승되고 있었다. 사상적인 면에서도 지눌에 의한 頓悟漸修의 논리는 성리학의 理氣說과 思惟구조에 있어 매우 근접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佛性을 지니고 있다는 돈오와 그 점수를 통하여 성불할 수 있다고 하여, 마치 이기설에서 인간의 본성은 理이므로 기질의 性을 맑게 하면 누구나 본성을 회복하고 聖人이 될 수 있다는 것과 대비될 수 있을 만큼 근접되어 있다. 지눌을 계승한 慧諶은 유학자 출신으로 불문에 귀의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한 후 출가하여 최씨정권의 두터운 후원아래 수선사의 지위를 확고하게 다져놓았다. 그는 座主와 門生의 사이인 參政 崔洪胤에게 보내는 글에서 "그 이름만 불교와 유교가 아주 다르지만 실지를 알면 유교와 불교는 서로 다름이 없다"고 하여 유불일치와 융합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요세에 이어서 백련사를 계승해 간 天因과 天 역시 손꼽히는 유학자 출신 승려이다 천인은 일찍이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한 바 있으며, 천책 또한 예부시에 합격하기도 인물이다. 이들 역시 백련사를 확장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던 천태종 결사운동의 주축들로서 혜심만큼 직접적으로 유불일치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유불융합의 입장을 보이고 있는 점에서는 이들 역시 혜심과 다르지 않았다. 충렬왕대에 安珦에 의해 처음 소개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원대의 성리학은 종래의 유학과는 차이점이 있는 만큼 유불관계의 변화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성리학은 安珦(1243∼1306)이 원으로부터 도입하여 白 正·權溥·禹倬 등의 연구와 보급에 의해 李齊賢→李穀→李穡 등으로 이어지면서 점차 수용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리학의 전래 초기에도 불교의 현실적 폐해에 대한 유학자들의 지적이 있기는 했지만, 불교를 위주로 한 유불일치와 융합의 경향을 띠고 있었다. 성리학의 이론을 갖춘 신진관료들이 불교의 폐해와 그에 대한 대책을 공식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한 것은 공민왕대부터였다. 이색은 그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다. 공민왕 원년(1351)에 원에서 돌아온 이색은 상소를 올려 5교양종의 무수한 사찰과 승도가 이익을 추구하는 비루한 집단이 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그러한 폐해의 시정을 위해 度牒制의 확립과 양민의 감소방지 및 사찰 남발의 억제 등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비록 이색이 불교의 폐해와 시정책을 말하고는 있지만, 그 논조는 매우 온건한 편이었다. 더욱이 부처를 큰 성인으로 인정하고 불교에 대해서도 깊은 조예를 보여주고 있다. 이색은 주자학의 理·氣·太極·天의 개념을 寂·滅·空과 같은 불교의 주된 개념으로 설명하고, 유교의 太極을 寂의 本이라 하였고, 《대학》의 "格物 - 平天下"를 불교의 戒·定·慧 등으로 설명하는 등 성리학의 주요개념을 불교의 개념과 연결시켰다. 그는 성리학을 현실윤리의 기본으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종교적 측면에서는 여전히 불교를 수용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러나 여말로 갈수록 성리학이 점차 발전하고 이를 수용한 신진관료층이 정치세력화 함에 따라 불교에 대한 비판과 배격의 양상은 크게 바뀌고 있었다. 불교비판은 곧 척불론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과격한 불교배척운동으로 전개되어 갔다. 이색의 제자인 정몽주가 특히 윤리·사상적 입장에서 확고한 척불론을 제기하고, 다시 鄭道傳을 필두로한 趙仁沃·尹紹宗·趙浚 등 당시 조정의 신진세력 거의 대부분이 불교에 대한 강경한 비판과 배격에 나섰다. 이들은 단지 불교의 폐해만을 문제로 삼았던 것과는 달리, 불교윤리 및 사상의 비판을 통해 배불의 입장을 확고히 하고 있다. 여말의 척불운동은 단순히 사회 윤리적 차원이나 불교의 현실폐해 그 자체가 아니라 정치적 상황과 결부되어 더욱 과격해졌다. 새로운 성리학 집단의 신진관료들이 수구적인 권문세족들과 대립하는 가운데 불교의 현실 폐해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되어 척불운동이 더욱 과열될 수밖에 없었다. 정도전은 학자적 입장에서 불교를 비판하기보다는 급격하게 부상된 신진관료층에 앞장서서 사회 정치혁명의 한 수단으로 불교를 비판하고 있다. 그는 불교가 지닌 철학·윤리상의 긍정적인 면을 인정하면서도, 불교의 단점을 과장하고 불교의 교리를 지나치게 자기 주관대로 비판하여 전적으로 이를 거부·배격하는 방향으로 나갔던 것이다. 공양왕 3년(1391)에 朴礎를 비롯한 성균관 생원 15인이 올인 상소는 척불운동의 절정을 이룰 만큼 극렬한 내용을 서슴없이 개진하고, 이론적으로 불교의 존재 그 자체를 완전히 배격하는 철저한 破佛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정도전과 이색은 같은 성리학을 수용하였지만, 여말에 대한 상이한 현실인식과 그 대응책으로 서로 다른 성리학 사상을 전개하고 정치적 대응을 달리하였다. 한 사람은 고려왕조를 지키는 충신으로, 한 사람은 신왕조를 세우는 건국 주체세력으로 각각 분기하였다. 斥佛論은 고려왕조에서 마무리되지 못하고 조선조로 이어졌다 그간에 排佛論을 주도해 온 정도전이 그것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心氣理篇과 佛氏雜辨의 저술을 내놓은 것도 새 왕조가 개창된지 몇년 뒤의 일이었다. 이러한 정도전의 노력과 그 뒤를 이은 權近 등에 힙입어 성리학은 마침내 불교를 제치고 조선왕조의 정치 사상적 지도이념으로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Ⅴ.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 본 바를 요약 정리하여 맺음말에 대신하고져 한다. 신라 하대는 한국 고대사회의 종말기로 새로운 고려사회의 출범을 위한 진통기였다. 진골왕족의 자기항쟁으로 골품제의 권위를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결국 고대적 신분제도인 골품제도가 무너지면서 6두품 계열의 성장을 가져왔다. 중앙정계의 혼란과 골품제도의 동요에 따른 지방세력의 등장은 낙향귀족 촌주계열을 비롯하여 해상 군진세력 등 이른바 豪族勢力의 할거로 나타났다. 이들은 자신의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신라를 분해하였으며, 전통적인 族的紐帶를 타파함으로써 농민규합의 길을 열게 하였다. 특히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성장한 호족들은 자신의 지위를 정당화시킨 풍수사상과 선종불교 및 유교적 소양을 통해 지방문화를 한 차원 높혀 주었고 나말의 정치적 혼란을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6두품 계열의 탈골품적 풍조는 유교 정치이념의 조류와 함께 社會改革의 방향을 제시하여 고려왕조 건설에 기여할 수 있었다. 후삼국의 흥망 과정에 궁예와 견훤은 신라의 권위와 전통을 해체하는 선구적 역할을 함으로써 왕건 등장의 배경을 이루었다. 왕건은 다양한 방법으로 호족세력을 포섭하고, 유교 정치이념의 추구, 선종의 유행, 유·불·선 3교의 융합 등 사상계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여 나말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고려왕조를 건설하여 고대적 체제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사회의 출발은 단순한 왕조의 교체를 넘어 고대에서 중세로의 커다란 사회적 변화를 초래한 변혁기였다. 새로이 성장한 호족세력 위에 성립한 고려사회는 고려왕조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따라 점차 변하여 갔다. 지방의 호족들이 중앙정치에 참여하여 관료화되는 동시에 점차 門閥貴族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이들 귀족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주인공이 됨으로써 고려사회는 문벌귀족사회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 중기에 일어난 무신란은 고려사의 흐름에 있어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무신란의 발생과 무신정권의 성립은 문벌귀족정치를 붕괴시키고 정치권력을 무신들이 독점하여 지배층의 구성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100여년간 지속된 무인정권은 무신집권 내부의 분열과 몽고의 침략으로 붕괴되고, 이어서 몽고 간섭기에는 새로이 權門世族이 사회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고려후기에는 이들 '권문'과 '세족'에 대한 새로운 세력이 대두하였으니 그것은 新興士大夫 新進士類 新進官僚 新興官人 新興士族 新興儒臣 등으로 지칭되는 계층이었다. 이들은 보수적인 권문세족에 대립하여 개혁정치를 주장하고, 이성계와 결탁하여 마침내 威化島 回軍을 계기로 정권을 잡고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이 되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전환은 단순한 왕조의 교체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사상 등 여러면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조선의 성립은 우선 정치사회의 일대 변화를 가져와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를 붕괴시키고 조선의 양반관료사회로 변천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는 무신란에 의하여 붕괴되고 고려후기에는 권문세족이 지배층으로 되었는데, 새로이 신진사대부(新興儒臣)가 대두하여 이들이 마침내 조선을 건국하여 조선양반사회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 이들 양반은 종래의 문벌귀족 및 권문세족에 비하여 관료적 성격이 강하여 흔히 양반관료사회라 불리어지고 있다. 또한 조선의 성립은 사상면에서도 큰 변화를 수반하였다. 고려후기에 전래된 성리학은 조선에 들어와 정치이념으로 채용되었을 뿐 아니라 학문적 사상적으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일반민의 일상생활의 규범이 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訓 學的인 유교와 불교신앙이 병립해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현상으로 사상계에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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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능이나 한국사 능력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에게 아주 유용한 자료군요.
역사공부 잘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