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관청
첨의부(僉議府)
백관의 서무(庶務)를 관장하였다. 1275년(충렬왕 1)에 원나라의 간섭으로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병합하여 첨의부를 설치하였다.관원으로는 좌첨의중찬(左僉議中贊)과 우첨의중찬을 두고 그 아래에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郎贊成事)·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첨의참리(僉議參理)·참문학사(參文學事)·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 각 1인을 두었다.1293년에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로 고쳤고, 1356년(공민왕 5)에 '반원개혁'의 일환으로 문종대의 관제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다시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으로 복구되었다.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고려시대 최고 중앙정치기구.
고려에는 2성 6부의 중앙통치기구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최고 정무기관으로 기능한 것은 2성 가운데 중서문하성이었다. 중서문하성은 982년(성종 원년)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이때 관원 등이 모두 갖추어진 것은 아니고 다음 해에 이르러서야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서의 2차례 설치기록은 그와 관련한 것이라 생각된다.
중서문하성은 상하 이중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백규(百揆) 서무(庶務)를 관장한 상층조직인 재부(宰府)와 간쟁과 봉박을 맡은 하층조직인 낭사(郎舍)로 분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층의 재부는 종2품 이상이 구성하였던 데 비해 정3품이하는 하층의 낭사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중 상층 재부의 성재(省宰)·재상(宰相)들의 비중은 매우 컸다. 중서문하성의 장관인 문하시중을 중심으로 그 밑의 평장사(平章事)들과 참지정사·정당문학·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구성된 재오(宰五), 즉 재상들은 군왕과 더불어 정사를 의논 처리했을 뿐 아니라 그 집행기관인 상서6부의 판사(判事)까지 겸임하여 국정 전반을 관장하는 지위에 있었던 것이다.
한편 하층부인 낭사는 정3품인 좌·우산기상시(左·右散騎常侍)이하 종6품의 좌·우습유(左·右拾遺)까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군주의 불가한 처사나 과오에 대하여 힘써 간언하는 간쟁과 부당한 조칙을 봉환하여 박정하는 봉박을 주로 담당해 보통 간관(諫官)이라고 불렸으며 문무관의 임명에 있어서나 상중에 있는 인원을 기복(起復)시키는데 있어서 서명을 하는 권한인 서경의 권한도 함께 부여받았다. 또한 낭사는 어사대(御史臺)와 함께 대간(臺諫)을 구성하였는데, 비록 규정된 임무가 조금 차이가 있긴 하지만 흔히 같이 상소를 올려 군주의 과실과 백관의 비위를 논하는 상호 보조적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재부와 낭사는 그 구성이나 기능이 상이해 별개의 관부처럼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한 관서의 직관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특히 백관의 비위를 논하는 기능을 가져 겉으로는 재부를 견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낭사가 재부의 하위에 놓여있었으며 이들의 장(長)을 재부가 맡고 있었다는 점은 고려왕조가 귀족사회였음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상서성(尙書省) 고려시대의 정무집행기관.
상서도성과 6부로 구성되었다. 982년(성종 1)에 당나라제도를 채용하여 어사도성(御事都省)을 두고 아래에 선관(選官)·병관(兵官)·민관(民官)·형관(刑官)·예관(禮官)·공관(工官) 등의 어사6관(御事六官)을 설치했다가 995년에 상서도성과 상서6부로 고치면서 이부·병부·호부·형부·예부·공부를 두었고, 그 아래에 고공사(考功司)·고부(庫部)·탁지(度支)·금부(金部)·창부(倉部)·도관(都官)·사부(祠部)·우부(虞部)·수부(水部) 등 9개의 속사(屬司)를 설치함으로써 직제를 확립시켰다.
그뒤 1061년(문종 15)에 관제를 정비하고 상서도성에는 상서령(尙書令:종1품) 1명, 좌·우복야(僕射:정2품) 각 1명, 지성사(知省事:종2품) 1명, 좌·우승(丞:종3품) 각 1명, 좌·우사낭중(郎中:정5품) 각 1명, 좌·우사원외랑(員外郞:정6품) 각 1명, 도사(都事:종7품) 2명을 두고, 6부에는 판사(判事:재신 겸직) 각 1명, 상서(尙書:정3품) 각 1명, 지부사(知部事:종3품) 각 1명, 시랑(侍郞:정4품) 각 1·2명, 낭중(郎中:정5품) 각 1·2명, 원외랑(員外郞:정6품)을 두었으며, 속사(屬司)는 현종 때 대부분 폐지되고 고공사와 도관만 남아 낭중 각 2명, 원외랑 각 2명씩 두었다.
상서성의 조직은 크게 상서도성, 상서6부, 속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고려의 상서성은 당나라의 제도를 채용한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먼저, 당나라의 상서도성은 도당(都堂)이라 불렀지만 고려는 도성(都省)으로만 표현하였다. 둘째, 당나라의 6부는 좌·우사로 명확히 분리되어 좌사(左司)에는 이부·호부·예부, 우사(右司)에는 병부·형부·공부가 속했으나 고려는 좌·우사로 분리되거나 병립되지 않았다. 셋째, 당나라의 6부와 고려의 6부의 순서가 서로 달랐다. 또한 6부의 순서는 서열을 의미하여 재신(宰臣)의 경우 수상은 이부, 아상(亞相)은 병부, 3재(三宰)는 호부 등의 순서로 역임하였다. 넷째, 당나라의 속사는 6부에 각기 4사(司)씩 딸려 있어 모두 24사가 있었지만, 고려는 단사제(單司制)를 원칙으로 하되 이부와 형부에만 각기 고공사와 도관을 두었다.
한편 상서도성은 장관인 상서령이 종1품으로서 같은 품계의 문하시중을 장관으로 한 중서문하성과 동격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실제적인 지위는 그렇지 못했다. 그것은 상서령이 실직이 아니라 주로 종친에게 수여하는 작직(爵職)으로 운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야와 지성사도 종2품 이상이지만 실제로는 재상의 반열에 들지 못했고, 6부도 장관인 상서가 정3품으로 재상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상서성은 중서문하성과 같은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그 아래 종속되어 있었다. 또한 상서도성은 6부를 직접 장악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단지 중앙 관청이 지방 관청에 발송하는 공문을 관장하거나 외교 문서를 발송하는 일을 하였으며, 청사(廳舍)를 이용하여 조서(詔書)를 받들거나 비를 기원하며 과거를 관장하고 형벌을 의논하는 등의 기능만을 담당하였다.
반면에 6부는 실질적인 기능을 담당하여 6전(典)체제에 따라 국가 행정을 관장하였다. 그래서 고려의 행정 체계는 상서도성보다는 오히려 6부가 중심이 되어 위로는 장관인 상서가 국왕에게 직접 업무를 보고하였고 아래는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직접 첩(牒)을 내렸는데, 특히 주·현(州縣)과 직결되어 있었다. 1275년(충렬왕 1)에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자 상서도성은 중서문하성에 병합되어 첨의부(僉議府)로 개편되었고, 6부는 전리사(典理司:이·예부)·군부사(軍簿司:병부)·판도사(版圖司:호부)·전법사(典法司:형부) 등 4사(四司)로 축소되었다. 그 뒤에 여러 차례 개편이 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반원적(反元的) 개혁정치가 실시되면서 고려 전기 관제를 복구하였고, 계속해서 개편이 이루어졌으나 결국 고려 전기의 모습을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다.
또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가 고려 후기의 최고 정무기관으로 등장하면서 상서성의 지위는 더욱 약화되었다. 종래에 중서문하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정치 운영이 고려 후기에 도평의사사 중심으로 전환되면서 도평의사사는 6색장(色掌)을 통해 6전의 업무를 관장하였고, 창왕 때는 이를 6방녹사(六房錄事)로 고쳤으며, 공양왕 때는 이를 통괄하는 경력사(經歷司)까지 설치하여 행정 업무를 주관함으로써 기존의 6부가 유명무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고려 후기에는 상서도성뿐만 아니라 6부도 약화되어 상서성은 무력한 기구로 전락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