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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이해한 공(空)>
---악취공(惡取空)ㆍ단멸공(斷滅空)ㆍ무기공(無記空)ㆍ완공(頑空)ㆍ편공(偏空)---
공(空)’의 산스크리트어 원어 ‘sunya’는 형용사로서 속이 텅 빈, 부풀어 오른, 공허한 등의 뜻을 가졌고,
명사 ‘sunyata’라는 공한 것, 공성(空性), 영(零)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공이란 텅 비어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절대적 무존재의 상태가 아니라 존재는 있으되, 그것이 결정되거나 특별한 형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말을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하자니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당나라시대
현장(玄奘, 602~664) 법사가 처음으로 빌 공(空)자로 번역했다.
그래서 이 ‘공(空)’이라는 글자가 산스크리트 원어 ‘sunya, sunyata’의 참뜻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따라서 ‘空(공)’이라는 한자에 너무 집착하면 원래 의미를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
불교에 있어서 ‘공(空)’의 개념은 특수하다.
공사상(空思想)은 초기불교의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연기설(緣起說)의 일차적 변신이요,
재해석으로서 붓다의 기본입장을 보다 명확하게 밝힌 대승불교 핵심사상이다.
따라서 공사상은 대승불교를 사상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철학사상이라 단언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러한 ‘공(空)’을 이해하고 체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수행승들도 공을 완벽하게 체득한 사람이 드물다. 그래서 수행승들이 일생을 몸 바쳐 공부했으나 끝내 공을 체득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처럼 공을 체득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부처님 당시에도 공의 바탕인 무아(無我)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허무주의에 빠져 자살하는 비구들이
더러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무아도 터득하기 힘든데, 하물며 공을 체득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적어도 아라한(阿羅漢) 수준에 도달해야 겨우 아공(我空)을 체득하게 된다고 한다.
‘아공(我空)’이라는 것은 아(我)가 공한 것, 즉 주관이 공한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수행자의 수행이 제8 멸진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바르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수행자가 만약 여기를 과지(果地)로 여겨 머물면 그것이 소승 아라한이다. 즉, 이러한 아공의 이치를 깨친 단계에 이른 분을 아라한(나한)이라 칭한다. ‘아공(我空)’을 체득하기도 이렇게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법공(法空)을 깨친 단계에 이른 분을 보살이라 하고, 구공(俱空)의 경지에 이르면 부처님 수준이 된다.
구공(俱空)은 진리의 궁극처, 궁극의 진리, 아집(我執)ㆍ법집(法執)ㆍ무집착(無執着)까지 놓아버린
궁극의 공(空)을 말한다.
혜명 수보리 존자는 구공의 경지인 실상반야(實相般若)를 가장 잘 체득한 분이기에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불렀다. 이러한 구공의 경지에 이른 분이 부처님 수준이다.
공하다는 상(相)마저 온전히 떠나는 것은 수행이 부처님께서 보리수 하에서처럼
여래지(如來地)의 숙면일여(熟眠一如)인 구경선정(究竟禪定)을 성취해야만 가능하다.
여래지의 숙면일여인 구경선정을 성취하면 바야흐로 일체 대상인 객관의 세계, 즉 일체법의 공함인 법공(法空)을 바르게 보게 된다. 이렇게 되면 주관과 객관이 원융무애한 중도(中道)를 정등각 해 성품을 바르게 보아[見性] 불안(佛眼)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자성의 작용으로 외부경계가 공한 것을 알고 그 작용하는 자성이 공한 것을 체득하면 법공과 아공이 둘이 아닌 것을 체달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 공부를 하면서 제법(諸法)이 공하다는 것은 알면서도 내(我)가 공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공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공을 체험해 법공과 아공이 둘이 아닌 것을 알게 돼 실생활에서
이에 부합해 살아가는 것이 해탈한 이의 삶이다.
따라서 초기 중국불교에서는 <조론(肇論)>의 저자 승조(僧肇, 384~414) 법사 정도 돼야 공을 이해했다고 한 것이다. 그는 철저히 공을 체득해 남다른 경지를 체험한 인물이다. 승조는 위진남북조시대(220~589) 후진(後秦)의
승려로서, 유명한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의 제자였다. 특히 그는 반야학(般若學)에 뛰어나 구마라습의
문하에서 ‘공(空)’의 이해에는 제일이라 해서,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수보리처럼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칭송받았다. 그처럼 영민한 천재였으나 후진(後秦)의 황제 요흥(姚興)이 재상의 지위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끝내 거절해 31세 젊은 나이에 처형됨으로써 요절했다.
이와 같이 공을 체득함이 어려운 일이므로 오늘날 방 안에 앉아서 PC로 온 세상의 정보를 검색할 수 있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공(空)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지 못해, 공에 대해 오해하는 벽은 여전히 두텁고 완강하다. 그래서 다음은 예로부터 공(空)에 대한 오해를 지적한 대표적인 예이다.
• 악취공(惡取空)---공(空)을 잘못 파악해, 공(空)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말한다.
대승불교에서 공은 여러 가지 뜻으로 설명되는데, 특히 허무적인 뜻으로 이해하는 것을 강력하게 배척하고 있다.
그런데 공(空)이라는 글자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허무하다, 허망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공(空)의 이치에만 너무 지나치게 집착하다가 빠져드는 그릇된 견해이다. 그리하여 공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 혹은 공무(空無)하다는 뜻이나, 허무주의로 잘못 해석해 불교의 본뜻에 맞지 않는 것을 악취공(惡取空)이라 한다. 악취공은 공(空)사상 중에서 사악한 부분인 허무주의를 취해서 생긴 일종의 자기도취적인 병이다.
불교에서 가장 금기시하고 가장 꺼려하는 것이 바로 이 악취공이다.
• 단멸공(斷滅空)---단멸공이란 이 세상은 단 한번 뿐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견해를 말한다. 단견(斷見)으로 말미암아 공(空)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을 단멸공 또는 악취공(惡取空)이라 한다. 이와 같이 단멸공과 악취공을 딱 부러지게 구분할 수가 없다.
그리고 더러 단멸공을 무기공(無記空)과 비슷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생(生)이 한번 뿐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한번 깨달으면 됐지 더 이상 깨달을 것도 닦을 것도 없어서 이대로가 영원한 낙이 될 것이라 굳게 믿는 경지의 사람들을 말한다. 견성(見性)하면 성불자라고 떠들면서 보림(保任)하지 않는 덜 된 수행의 무리들이 바로 단멸 공견(空見)에 떨어진 사람들이다.
• 무기공(無記空)----무기에 빠진다는 것은, 공(空)에 집착한 나머지, 공에만 머무르려는 것이다. 공(空)사상에 집착해서 생각이 일어남을 지나치게 경계한 나머지,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빈 마음으로 앉아 있음을 무기공이라 한다.
즉, 무기공이란 공에만 집착한 나머지 무념(無念)의 지혜가 아닌 아무 것도 없는 깜깜한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주의해야 할 것은 공에 집착하면 단멸공이라는 삿된 소견에 떨어져서 어둡고 명료하지 못한 무기에
빠져 미혹한 어둠[無明]에 싸이게 될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이러한 무기공(無記空)은 참선 중에 화두를 망각한 상태, 화두를 놓친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참선을 할 때 상성성(常惺惺)해서 상적적(常寂寂)한 가운데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화두를 분명하게 들고 있어야 하는데, 고요함에 매료돼 화두를 망각하고 몽롱한 상태가 된 것을 무기공이라 하고, 무기에 빠졌다고도 한다.
무기공은 옳지 않게 보고 멸진정(滅盡定)은 좋게 보는데, 둘 다 무의식 상태이다. 무의식 상태인데 깨어있음이
분명하느냐, 약하고 희미하냐에 따라 달라진다.
무기공은 무의식 상태로, 멸진정하고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깨어있음이 약한 것, 깨어있지 못한 것이다.
무의식이 너무 강하면 마치 잠을 자는 것과 비슷해진다. 그래서 무기공은 선정으로 보지 않는다.
이와 같이 무기공은 참선 할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 누구에게나 다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고, 가끔 무기공 현상에 빠지는 사람이 있다. 요는 공부하는 방법에 달렸다. 무기공은 술에 취한 듯 혼미한 상태를 말한다. 멍청이 앉아있는 상태이다. 본인은 굉장히 편안하다. 낮은 잠이 든 상태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앉아 있는 것이다. 화두도 없고. 의식도 없는 혼미한 상태에 빠져있는 것이다. 흐리멍텅한 상태이다. 그러나 본인은 편안
하니까, 그냥 그에 빠져서 앉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기공에 빠진 것을 악취공에 빠졌다고도 한다.
무기(無記)는 일체의 판단이 불가능한 혼절의 심리상태이다. 그리고 무기공(無記空)이라고 하는 것은 글자대로는 기록 할 수 없는 공이란 말이다. 기록이 안 되는 공이라는 그런 말인데, 이것은 말하자면 마음속에서 선도 악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아니하는 목석같이 되어버린 그런 정신 상태를 무기공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기도를 하거나, 참선을 한다고 한참 매달려 있다 보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멍해서, 생각도 떠오르지도 않고, 그러면서 또 편안하고, 그런 상태, 화두도 아니요 염불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면서 뭔가 텅 빈 듯한 그런 느낌, 그리하여 내가 텅 비어 내가 완전히 없다고 하는 것을 느낀, 그래서 텅 빈 공간과 일체가 되는 상태이다. 내가 공간이 돼버리는 것이다.
혜능(慧能) 대사는 좌선을 한답시고 목석처럼 앉아 혼수상태에 빠져드는 형식적인 참선 수행과 입으로만 나불거리나 마음을 ‘공’에만 붙들어 매놓고 어떤 생각도 하지 않는 공심불사(空心不思)를 가차 없이 비판했다.
그는 ‘무기공’에 빠져드는 좌선수행을 단호히 배격하면서 반야 지혜가 관통하는 일상생활을 강조했다.
• 완공(頑空)---생명력이 없는 공(空)을 말한다. 일체는 모두 공한 것[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 하며 공견(空見)에만 집착하는 것이다. 허무주의적 견해로는 공을 생명력이 없는 완공(頑空)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각성 없는 고요를 완공(頑空)이라 한다.
진공묘유(眞空妙有), 또는 공적영지(空寂靈知)가 진리임을 모르고 공(空)에 집착하면 완공(頑空)이 되고,
영지(靈知)가 없는 공적(空寂)에 집착하면 허무적멸이 된다.
‘공(空)’이라는 그 언표에서 존재의 세계를 부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비어있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동양화의 여백이 아름다운 것은 결정돼있지 않고, 무엇에도 점유돼있지 않아서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공(空)은 '이미 되어 있는 유(有)'가 아니라 아직 되지 않은, 그래서 텅 비어 있는 열린 가능성이다. ‘됨’이 아니라 ‘되어감’의 사상인 공은 그래서 공하지 않다. 공의 이치에서 보면 지금 현재의 상태에서 더욱 발전할 수도 있지만 그 반대로 잘못하면 더욱 나빠질 수도 있다. 만약 지혜를 닦아도 열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완공(頑空)이라고 해서 죽은 공이 되는 것이다.
• 편공(偏空)---치우친 공(空), 공 자체에 치우친 공, 공(空)에 집착하는 것을 편공(偏空)이라 한다. 공(空)이나 유(有)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 중도(中道)인데, 이 세상(有)을 버리고 공에 치우치면 그릇된 공[악취공(惡取空)], 치우친 공[편공(偏空)]이 돼 허무주의로 전락한다. 대부분의 상식인들과 같이 공을 보지 못하고 세제(世諦)인 유(有)에 치우치는 편유(偏有)는 말할 나위도 없다. 이에 비해, 원공(圓空)은 공마저 또 공으로서 다시 집착하는 것이 없는 것을 뜻하는데, 이를 제1의공(第一義空)이라고도 한다.
소승에서는 무상(無相)과 무아(無我)를 너무 강조하기 때문에 중생과 함께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일체중생은 원래부터 무상(無相)이고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치우치고 모자라는 인식은 편공(偏空)에 빠졌기 때문이다. 공에 집착하다가 허무에 빠지거나 치우치게 된 것을 말한다. 이 외에도 석공(析空)도 있다.
• 석공(析空)---쪼개어서 비었다고 하는 것, 이 몸을 분석하고 또 분석하고 계속 분석해서 파고 들어가면, 이 몸이 살이나 뼈였다가 단백질이었다가 어느 세포였다가 핵이었다가 소립자였다가 쿼크(Quark)나 렙톤(lepton-중성 미자)이었다가 그것마저 또 쪼개지면 더 작은 존재, 또 더 작은 존재로 그래서 힉스입자(Higgs boson)로까지 나누어놓고 이런 미립자,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공이라고 하는 것을 석공이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쪼개어
놓은 것이 공의 참뜻이 아니다.
'즉공(卽空)'은 분석해서 이루어진 '석공'이 아니라 바로 '즉공'이다. 보이는 모든 것들, 내 몸이 바로 '즉공'이다.
이 몸으로 보고 있는 모든 것들이 바로 '즉공'이다. 이 몸 그대로, 그리고 만유 그대로가 당체즉공(當體卽空)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위에서 몇 가지 공견(空見)의 병폐를 살펴봤는데, 사람들은 살면서 한 가지 이상의 공견을 가지고 있다. 중생의 병이면서 또한 수행자의 병이기도 한 것이다. 부처님은 이러한 견고한 중생의 병을 치유해주기 위해서 팔만사천의 약방문을 설해 주신 것이다.
형상 있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나고 형상 없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나야 비로소 중도의 이치,
곧 참 진리를 깨칠 수가 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무(無)는 죽은 것이 아니다. 항상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다. ‘무(無)’라는 부정 속에는 강한 긍정이 숨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무의 철학 속에는 인생을 비관적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활기차게 살아가라는 가르침이 들어있다. 불교에서 무(無)라는 표현을 잘 쓰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것은 연기의 법칙과 연결돼있다.
세상의 모든 현상은 똑같은 이치로 모두 설명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공의 이치이며, 연기의 법칙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공부가 자꾸 쌓이고, 공덕을 지으면 지을수록 복덕을 누리는 이유가
바로 공과 연기의 법칙 때문이다. 그래서 공은 연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아무것도 없다가도 있게 되며, 있다가도 없어지게 되는 이유도 존재의 실상이 공이며 그래서 연기의 법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현상은 연기의 측면에서 생성, 변화, 발전,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 연기와 공에 대한
이해는 현상과 본질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이해할 때 비로소 완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