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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The Gift of Jesus
포기하지 않는 열정
교회 직원회를 하고 있는데, 다급한 편지 한 통이 전달되었다. 우리교회에 다니면서도 재림교회가 바벨론이라고 마음속으로 확신하는 어떤 교인이 보낸 편지였다. 자기의 이름을 교회의 녹명책에서 빼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 편지를 읽어 내려가자, 모두는 할 말을 잃었다. 어떤 사람은 울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 모두는 그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말이 없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비록 얼굴에는 슬픈 기색이 역력했으나 다정한 마음씨를 가진 신실한 신자였다. 우리는 그의 아내가 떠나 버리고 혼자가 된 이후로 어떤 소그룹에 매주 혹은 격주로 참석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 모임은 교회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영향력을 미치는 어떤 사람이 주관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모임이 영적으로 해가 되지나 않을까 심히 우려했었다. 조금 더 알아보니 그로 인한 폐해가 꽤나 심각했다. 결국 우리 교회의 그 교우는 첫 번째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선교회장인 마이크가 그 사람을 방문해 보겠다고 말했다. 놀랍게도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마치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기라도 하는 듯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선교회장은 매일 그 사람을 방문했다. 정말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것도 6주 동안이나 말이다. 매일오후나 저녁에 많게는 3시간, 짧게는 30분을 그와 함께 보냈다. 선교회장은 좌절한 그 형제에게 이 새로운 '진리'를 함께 나누고 싶다는 요청을 했다. 그는 경청했고, 확실하지 않은 부분은 질문을 던졌다. 선교회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매우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남은 교회의정체성과 특징에 관한 가르침이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 후에 그 형제와 함께 기도했다.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할수 있도록, 그가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되도록 또한 그가 건강과 영생을 얻도록 기도했다. 둘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어느 안식일 아침이었다. 나는 그날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우리는 관례적으로 교회의 어느 방에서 '7시 기도' 시간을 갖고 있었다. 선교회장인 마이크가 재림교회를 부정했던 그 교우와 나란히 걸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마이크는 환한 미소를 띤 채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새로 개심한 그 형제가 "예수님을 찬양합니다!"라고 화답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아마도 독자는 이런 생각을 할 지 모르겠다. '와, 대단한데, 6주 동안, 그것도 매일 방문하다니! 그런 헌신과 열성이 교회에 이런 변화를 가져 올 수 있었던 거지. 정말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옳은 판단임에 틀림없다. 선교회장에게 있어서 그런 친절은 일시적이거나 특별한 행동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그의 마음 한 가운데 계신 후로 그는 늘 그랬다.
한번은 여러 가정에 결혼 관계가 깨질 위기가 있었다. 남편들이 그들의 아내들과 헤어지려고 하자, 선교회장은 이혼 조정기간 동안 그들을 자기 집에 데리고 왔다. 한 남자, 두 남자 들어오더니 마침내 방이 네 개인 그의 집이 손님들로 가득 찼다. 그러자 선교회장은 자기 집에서 나가 단기간 아파트를 임대했다. 물론 모든 비용을 자신이 부담했다. 그는 자기 집에 머무는 사람들과 함께 성경 말씀을 공부했고 함께 기도했다. 특별히 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를 드렸다. 그는 남편들이 상처를 받았고 분노하고 있었으며 미래에 대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그들 중 한 명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의 아내는 상담을 원했었고, 여러 가지를 내게 말해 주었다. 차라리 그 사람에 대하여 모르는 편이 나았을 그런 것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몇 개월이 흐른 후, 한 가정씩 결국에는 모두가 결혼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보았다. 만약 그들이 당면한 문제들이 어떠했는지 알고 있었다면, 그건 정말 놀라운 기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선교회장인 마이크는 남편들이 아내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작정하고 기도를 했던 것이다.
나는 마이크에 관하여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나중에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 달라고 내게 부탁을 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성령님이 이 사람의 삶에 임하셨다고 생각하는가? 무엇이 그러한 삶을 살도록 이끌었다고 생각하는가? 바울은 우리에게 답을 준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 1:27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
바울이 말한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말 이것이 가능한가? 이 진술을 깊이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마음에 영접한 하나님의 성령이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 된다." 소망, 388
이 구절을 읽었는가? 성령님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신다. 거하신다는 것은 영주권자로서 살거나 머문다는 것이다. 당신안에 예수님이 사신다는 뜻을 가늠할 수 있겠는가? 다른 진술을 살펴보자.
"품성의 변화는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세계를 보여 주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성령은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생각과 욕망을 불러일으키심으로 영혼 안에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신다. 그리하여 속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된다" 선지, 233
예수님이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약속하셨고, 또한 모든 사람이. 갈망하는 풍성한 삶은 오직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불가능하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약속하셨을 때, 그분은 보혜사를 통하여 자신을 그들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떠나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이 되는 이유이다. 요 16:7 예수님은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요 16:13~14 라고 성령님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바울도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 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영은・・・살아 있는 것이니라" 롬 8:10 라고 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임할 은혜" 벧전 1:11 를 예언하게 인도한 것은 바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었다. 벧전 1:10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영"은 그리스도로부터 발현된 '정신'인가 아니면 성령님인가?
이사야는 삼위일체의 제 3위이신 "여호와의 영"께서 메시아 위에 임하실 것을 예언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사 11:2 이 구절에서 '영'이 일곱 번 언급된다.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영은 죽임을 당한 어린양과 관련하여 언급된다. 계 5:6 성경에서 숫자 7은 '완성', '완전', '완벽'을 뜻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령이 충만한 분이셨고, 전적으로 하나님과 함께하신 궁극적인 모본을 삶에서 보여 주신 분이시며, 매일 성령의 침례를 받으셨던 분이시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울과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다. 그야말로 그리스도는 성령이 충만하셨기에, 그리스도와 성령님은 다른 위격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이셨고 일치하셨다.
하나님의 선물
신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표현을 깊이 숙고할 때에, 우리는 이 아름다운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선물인가 아니면 예수님 안의 구원인가?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첫째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 4:10 여기에 어떤 선물이 있는가? 문맥에서 그것은 구원의 선물을 가리킨다.
다음은 베드로가 돈으로 성령의 선물을 수중에 넣으려는 시몬을 꾸짖는 장면이다.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행 8:20
세 번째 사례는 저 유명한 사도 바울의 증언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네 번째 사례는 고린도교회에서 독신의 영적 은사를 옹호하는 바울에게서 찾을 수 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고전 7:7
다음은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얻는지에 대한 명쾌한 진술 중 하나에서 찾을 수 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8~9
마지막 사례는 소심한 디모데를 위한 충고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딤후 1:6~7
무슨 차이점을 발견하였는가? "하나님의 은사는 세 번은 그리스도가 주시는 구원의 선물, 세 번은 성령의 은사 혹은 은사들과 관련이 있다. 요점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성령님과 함께 온다는 것이다. 구원과 그분을 영접하는 것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오직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지도와 은혜를 기다리는 자들에게만 성령이 임하신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들이 요구하고 영접하기를 기다린다. 믿음으로 요청하는 이 약속된 축복은 그에 따르는 다른 모든 축복들을 가져온다. 이 축복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하심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며 또한 그분은 각 영혼의 수용 역량에 따라 공급하려고 준비하고 계신다" 소망, 672
이것이 바로 성령님을 받았을 때 구원을 받는 것임을 알려 주는 이유이다. 성령의 선물은 구원의 선물이다. "어, 그런데요!" 아마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님을 받았을 때에는 이미 구원을 받지 않았나요?" 이에 대한 답변은 "그렇다"와 "아니다" 둘 다이다.
한 번인가? 매일인가?
구원은 인생에서 오직 단 한 번 경험하고 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또한 절대로 취소될 수 없는 그런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나는 바로 그날 구원받았다."라고 말할 때에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의식적으로 처음 그들의 마음에 영접했음을 뜻한다. 불행하게도 일부 교인들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으로 널리 알려진 이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도 한 번의 경험이면 충분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매일 자아가 죽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롬 6:11; 고전 15:31 우리가 죄에 대해서 매일 죽어야 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새로운 생명으로 매일 부활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롬 6:5 몇 해전, 모리스 벤덴 Morris Venden 목사가 개인의 구원을 올바르게 표현하려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는 것을 들었다. "나는 과거에 구원을 받았다. 나는 현재 구원을 받고 있다. 그리고 나는 미래에 구원을 받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2천 년 전에 구원을 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의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면 나는 매일 구원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이구름을 타고 오실 때에, 나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나의 죄된 본성은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될 것이다. 고전 15:51~54
구원을 받는 것은 성령님을 받는 것과 동일하다. 우리는 살면서 딱한 번만 성령님을 영접하지 않는다. 시시때때로 성령님을 받기 위하여마음을 열지 않는가. 성전인 우리의 몸에 성령님이 계신지 알기 위하여 초자연적인 어떤 것, 이를테면 전기적 충격이나 몸속이 따뜻해지는 느낌, 혹은 물리적인 기적을 체험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성령님은 믿음으로 오신다. 바울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는가. 갈 3:2, 14믿음은 우리가 볼 수 있거나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렇다고 믿기로 선택하는 그런 것이다.
많은 이들이 직면하는 문제는 성령님을 원하기에 앞서 그분의 선물을 먼저 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성령님이 나타나시는 증거들, 곧 능력,기적, 하나님을 경험하는 감동을 갈망한다. 하지만 종을 치거나 휘파람을 부는 소리를 내며 오시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성령님을 진정으로 바라고 있는지조차 확신이 없다. 그들은 선물들을 원하지만 주시는 분은 원하지 않는다.
몇 년 전, 나는 영적 선물들에 관한 주제를 공부하던 중, 흥미로운점을 발견하였다. 로마서 12장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사들을 "분수대로"롬 12:6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4장 10절은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말한다. 이 구절들의 공통분모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성경의 "은혜"라는 단어는 헬라어 "카리스인데 영어 흠정역 성경은 단순히 "charity" 자비, 자선 로 번역했다. 이것은 성령의 선물들이 곧 은혜 혹은 “카리스마타의 선물들이란 뜻이다. 다시 말해 선물들이란 구주의 사랑에서 비롯된 성령님의 나타나심이다. 왜냐하면 은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호의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8~9
그러므로 타당한 결론은 이러한 영적 선물들은 예수님의 선물들이며, 주님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이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영적 선물들은 우주의 어떤 창고나 하늘의 어떤 무생물적 자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또한 그분의 은혜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한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선물들을 받는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계시면 영적 선물들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제 마음속에 예수님이 거하시도록 우리의 삶에서 성령님을 구하자.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하라. 그러면 성령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의미
다음은 성령님에 관한 엘렌 화잇의 증언 중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다."성령의 강력한 힘이 소생시키고 회복시키고 변화시키는 능력을 모두 동반하여 마비된 심령에 마치 전기 충격과 같이 임하여 모든 신경이 새 생명으로 전율하고, 세속적이요 정욕적인 죽은 상태에서 영적건강을 되찾아 온전한 사람으로 회복되기를 기도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들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정욕으로 인하여 세상에 존재하게 된 썩어질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다. 또한 그대들의 심령에는 그대들을 고치기 위하여 채찍에 맞으신 분의 형상이 반영될 것이다." 5 증언, 267
이 얼마나 짜릿하고 흥분되는 진술인가 "강력한 힘", "전기 충격과같이", "모든 신경이 전율하고." 우리는 명백한 사실을 놓쳐서는 안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들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그대들의 심령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반영될 것이다."
"그 부활의 권능"에 거한다는 사상은 전적으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 빌 3:10 받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죄의 용서뿐 아니라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할 능력이라는 점을 간과한다. 물론 내가 알고 있는 재림교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이 능력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살아나심으로부터 온다.
이 부분을 설명해 보겠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것은 우리 영혼을 위한 속전이다. 그분은 우리의 대속물이셨다. 우리는 영원한 죽음을 당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고, 우리를 위하여 둘째 사망을 당하셨다. 고후 5:21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죗값을 치르셨고 또한 우리가 주님께 고백하기만 하면 확실하게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권세를 받으셨다. 요일 1:9
그러나 죄의 용서가 죄의 승리는 아니다. 용서는 과거와 관련이 있는 것이지 현재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계속적으로 용서만 받아야 한다면 우리는 신의 성품을 반영하는 상태에 절대로 이를 수 없다. 하나님은 반복해서 용서할 필요가 없으시다. 진실로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우리가 그와 같을 줄' 기대하고 있다. 요일 3:2
대부분 사람은 현재에 대하여 불안해한다. 그들은 이 구절이 주님과 같아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완전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착각한다. 죄의 기록은 끊임없이 넘쳐 나고 압도적이어서 필연적으로 절망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승리의 지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할 필요가 없다.
"죄는 신성의 제삼위이신 강력한 분을 통해서만 물리칠 수 있고 극복할 수 있다. 그분은 한정된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충만한 능력으로 오실 것이다. 세상의 구주께서 이루신 사역을 효력 있게 만드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마음을 순결하게 만드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성령을 통하여 신자는 거룩한 품성을 나누어 가지는 자가 된다. 그리스도는 죄로 향하는 모든 성향, 곧 유전적이거나 잘못 계발된 모든 성향을 이기게 하시고, 또한 그분의 교회에 그분의 품성을 새기실 거룩한 능력으로 성령을 주셨다." 소망, 671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 비결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두 번째 사역인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생명에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받아들임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는 것처럼, 우리가 그분의 생명을 마음에 받아들임으로 우리의 죄가 극복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바울은 이것을 아주 놀랍게 요약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 5:10
바울은 무엇이 우리를 실제로 구원한다고 말하는가? 단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아니라 그의 "살아나심"이라고 했다. 왜 그런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첫 번째 일은 루시퍼가 목적했던 바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우주에 증명하는 것이었다. 마귀는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율법을 이행할 수 없고, 완전한 삶을 살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 자신이 가장 좋은 예가 되지 않았는가? 처음부터 완전하게 창조되었고, 놀랄 만한 은사들과 능력들이 주어졌는데도 겔 28:12~15,173 올바른 삶을 살 수 없었단 말인가. 그다음 작품인 아담과 하와는 어떤가. 그렇다면 우리 모두에게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사탄은 "실패작이라고 외쳤다. "만약 말씀하신 대로 당신이 공의의 하나님이라면, 저를 멸하시려는 것처럼 이 사람들도 모두 진멸하셔야 합니다!"
그렇다. 모든 것은 "실패작인 것처럼 보인다. 특히 아담과 하와가 완전한 상태에서, 완벽한 환경에서 살았으면서도 죄에 굴복한 이후부터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죄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둘째 아담이 되셨다. 고전 15:45 사실 하나님의 아들은 사탄의 예상보다 더 멀리 가셨다. 그분은 수천 년간 죄로 얼룩진 세상에 오셨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 잘 버티셨다. 베들레헴의 구유는 에덴과 너무 달랐다. 그러나 33년 동안 예수님은 죽음에 이르는 죄에 저항하셨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매일 침례를 받으셨다. 매일 그분은 죄로 비탈져있고 타락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이 세상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해 주는 하늘의 공기를 호흡하기 위해 아버지와 오랜 시간 교통하였다. 치료, 51~58 참고 이것이 주님의 승리이다! 십자가만 승리가 아니다. 지속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이루어 내신 그분의 죄 없는 삶이 승리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마귀는 그에게 "관계할 것" 요 14:30 이 없었다. 어느 누구도 그분의 생명을 취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스스로 생명을 내어 주셨다.' 요 10:17~18; 19:30 주께서 그렇게 하신이유는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함이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대속적 희생제물이었다. 우리를 위한 그분의 죽으심으로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완전한 삶을 주실 수 있는 권세를 얻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의 "죽으심"과 "살아나심" 둘 다이다!
반복하자면,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안에 내재하는 주님의 생명은 죄의 승리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 진리는 성경의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골 3:2
왜 바울은 이렇게 말했을까?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 3:3~4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 1:21
"내[예수님]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내가 온 것은 양[인류]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9~10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확실히 우리의 삶에서 죄를 이기도록 할 것이다.
“유전되고 잘못 계발된 성향들, 상태로써의 죄이든, 습관으로써의 죄이든 모두 극복될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라. 이것은 완전주의가 아니다. 완전주의는 이런 일들을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내 힘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나의 생명은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성령을 통하여 내 안에서 사시는 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그런데 그리스도가 성령님을 통하여 내 안에서만 사시는 것은 아니다. 죄가 가득한 세상을 위하여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은 나도그분의 희생에 포함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내가 거기에, 이를테면 "그 안에 있었던 것이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 모티브라고 부르는데, 바울의 글에서 자주 언급된다. 이해하기 쉬운 구절을 하나 들자면 바울이 우상을 숭배하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알지 못하는 신에 관하여 말한 대목이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 행 17:28, 공동번역 개역개정은 "그를 힘입어"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니 우리도 살아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생명은 그분께 달려있다. 이런 개념의 기초를 놓으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다. 제자들에게 성령을 소개하시던 그날 밤,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없음이라.” 요 15:5
에베소서 1장에는 이 개념이 가득하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우리를 택하사" 4"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7절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1절 “그 안에서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13절 이런 예는 어디에나 있다. 마침내 바울은 골로새 사람들에게 "그 안에서 충만" 골 2:10 해졌다고 말할 정도였다.
사도 요한은 이런 개념을 기초로 삼았다.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일2:56 요한은 이제 결론을 짓는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요일 3:6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요일 2:28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4:13..
이 개념을 좀 더 생각해 보자.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장사되었고, 함께 부활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으로 둘러싸여 있음을 뜻한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안팎으로 가려졌다. 이 사실이 우리의 삶에 과연 변화를 가져올까? 그렇다. 분명히 우리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이다.
목사이자 선교사인 프랭크 필립스 Frank Phillips 의 가르침은 그가 죽은 지 한 세대가 지난 오늘날 부각되고 있다. 그는 장막부흥회에서 아이를 둔 젊은 여성으로부터 예전에 들은 경험을 말하곤 했다. 그녀가 상담을 받으러 필립스 목사에게 왔는데, 결혼 생활이 삐그덕 거리는 상태였다고 한다. 남편은 불신자였고 무책임했으며 술을 너무 많이 마셨고 가족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어린 딸과 5개월 된 아들이 있었다. 상담도 받아봤으나 도움이 되지 않았다. 너무 지쳐서 포기 직전이었다.
"결혼 생활의 회복을 위하여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나요?" 필립스 목사가 물었다. 그녀는 다 해 봤다는 생각에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럼요. 그럴 각오는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말씀이 적힌 이 카드를 받으십시오. 이것을 읽고, 이것을 생각하세요. 또한 이것을 놓고 기도하세요. 그 말씀대로 하기로 선택한다면 하나님께서 결혼 생활을 회복시켜 주실 겁니다."
필립스 목사는 그녀와 함께 기도했고, 그녀는 돌아갔다. 그 카드에는 <산상보훈>이라는 작은 책에서 따온 구절이 적혀 있었다.
“아버지의 임재가 그리스도를 두르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무한한 사랑으로 세상을 축복하기 위해 허락하신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그분께 닥치지 않았다. 여기에 그분의 위로의 원천이 있었으며, 이것은 또한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감동받은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된다. 그를 겨냥한 공격은 그분의 임재로 그를 두르고 계시는 구주에게로 향하게 된다. 그에게 이르러 오는 것은 무엇이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방벽이되시므로 그는 악을 대항할 필요가 없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것 외에는 아무도 그를 건드릴 수 없다. 그리고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모든것이 합력하여 선'(롬 8:28)을 이루게 된다" 산상 71
독자 여러분도 이 구절을 다시 읽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적으로 아버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두르셨다는 점을 주목하라. 이 동일한 개념은 우리의 삶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가시화 된다. 그는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그 안에 거한다. 달리 말해서 우리는 완전히 예수님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의 축복을 위해 허락하신 것 외에는 그 어떤 일도 그리스도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이주님께서 위로받으신 근원이었고, 우리에게도 위로의 근원이 되어야한다. 또한 이것이 왜 우리가 악을 저항할 필요가 없는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우리 주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우리를 건들 수 없다. 우리에게 어떤 악이 이르러올지라도 모든 것이 함께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렇다. 말이 실천보다 쉬운 법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여인은 정말 이 문장을 읽었고, 이것을 놓고 기도했다. 또한 이 구절이 말한 대로 살기로 결심했다. 만약 비참한 가정생활이 그녀의 운명이라면 그것을 수락하기로 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녀를 위하여 막아 주셨음을 알기에 기꺼이 그런 삶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과연 그녀는 잘 해내었을까?
전에는 당연히 경멸하던 결혼 생활, 벗어나기를 바랐던 그 삶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기 시작한지 3개월이 흘렀으나 결혼생활은 좋아지지 않았다. 남편은 나아질 기미는커녕 더 나빠지는 것처럼 보였다.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그녀는 매일매일 자주 긴 시간 동안 무릎을 꿇었다. 확실히 사탄이 장악한 듯 보일지라도 예수님이 역사하고 계심을 인정하는 편을 택했다. 그녀는 계속 견뎌 냈다. 예수님이 자신을 두르고 계시며 어떤 것이 자신의 삶으로 들어오더라도 주님이 여과시킬 능력이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남편이 술을 끊었다. 한 직장을 계속 다녔다. 가족에게 관심을 갖고 아이들의 양육을 도왔다. 전에 손도까딱하지 않던 것들을 아내를 위해 하기 시작했다. 매일 저녁을 아내와 함께 보냈다. 산책을 하고 자전거를 탔다. 아이스크림 가게도 같이 갔다.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오, 남편이 얼마나 많이 변화되었는가!
이제는 이렇게 나아진 삶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는 일이 이전보다 훨씬 쉬워졌다. 그녀는 더 이상 좋아질 수 없을 정도라고 느꼈다. 그러던 어느 저녁, 시어머니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부부는 함께 자전거를 타러 나갔다. 할머니는 이제 11개월 된 아기를 재우고 앉아 있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 마침 손자가 잠에서 깨었고 아기 침대에서 기어나왔다. 할머니는 약을 상 위에 두었는데, 뚜껑이 열려 있었다. 아기는 약이 있는 곳에 다가가 그만 약을 모조리 다 삼키고 말았다. 몇 분이 지났을까, 아이는 마루에 쓰러져 죽어 가고 있었다. 잠에서 깬 할머니는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벌어진 장면을 보고는 의자에 앉은 채 문자 그대로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충격에 빠져서 도와 달라는 소리조차지를 수 없었다.
부부가 집에 돌아오자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아이는 한 시간 후에 숨을 멈췄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한시간 만에 행복이 완전한 비극으로 바뀌었다. 남편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시댁 식구들 역시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이 엄마는 홀로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하나님, 제가 어찌 이것이 당신으로부터 왔다고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 시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일이 아주 잘 풀릴 때에도 사탄이 역사했네요." 그녀는 그만 하나님이 인생을 주관하신다.” 는 확신을 잃어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니 상황이 더 나빠졌음을 알아차렸다. 3주가 지나간 후에 그녀는 우울증에 빠졌다. 여전히 혼자였다.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았다.
어느 날 오후에 누군가 차고 앞에 주차하는 것을 보았다. 교회에서 방문을 온 것이었다. 매번 방문을 왔지만 다를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상심한 그녀를 동정했다. 그러나 초점은 늘 비극에 맞춰져 있었다.
그녀가 현관으로 향했을 때, 성령님이 그녀를 감동시키셨다.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기로 내게 약속하지 않았느냐?"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고 눈물을 흘렸다. "그래요, 주님, 제가 그렇게 약속했었죠. 용서해 주세요. 저는 이해할 수 없어요. 이 상처가 너무 큽니다. 하지만 우리 아들의 죽은 일도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일이 벌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거기 계셨고, 무한한 지혜로 이것도 허락하셨음을 믿기로 선택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만난 시간은 불과 몇 초밖에 되지 않았다.
문을 연 그녀는 손을 들고 말했다. "부탁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나는 지금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나와 함께 무릎 꿇고 기도해 주시겠습니까?”
아이가 죽은 지 3주가 지난 후 남편이 돌아왔다. 그는 거의 나락까지 떨어졌다가 돌아오게 되었다. 남편은 아내에게 가장 필요한 시간에 가족을 떠나게 되어 미안하다고 말했다. 남편은 아내가 믿는 하나님을 꼭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의 인생이 끝난 것 같았지만 그리스도께 모두 맡기고 싶더라는 말을 들려주었다. 며칠이 지나고 시부모님이 그들을 찾아왔다. 그분들은 오래전에 재림교인이었지만 교회를 떠났었다고 고백했고, 그녀의 남편인 아들을 믿음 안에서 키우지 못했노라고 말했다. 그런데 시부모가 보니 며느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 같았다고 했다. 며느리야말로 지금까지 알고 지내온 사람들 중에 가장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시댁 식구들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데 그녀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이 젊은 여인은 왜 그녀의 아기가 죽었는지, 왜 그런 끔찍한 상황이 발생했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자신의 아이를 보게 될 것을 안다. 또한 남편과 모든 가족이 거기에 있을 것도 안다.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 1:27 이것이 성령님이 우리의 삶에서 이루시는 사역이다. 이것이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내 안에 거하시는 것, 이것이 온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 적용과 소그룹 연구를 위한 질문들
1. 선교회장 마이크의 열정에서 어떤 감동을 받았는가?
2.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은 무엇인가? 이 표현은 무슨 뜻인가?
3. 언제 영생이 시작되는가? 왜 그 시점인가?
4. 왜 성경은 자주 "그리스도의 영"라는 표현을 사용하는가?
5. 어떤 방법으로 “성령의 선물"이 "구원의 선물"이 되는가?
6.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고, 지금 받고 있으며, 받게 될 것인가?
7. "누구나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 예수님의 선물을 받는다." 이 구절을 읽고 어떻게 반응하는가?
8.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들을 덮어 주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무엇이 우리의 삶에서 죄에 대한 승리를 가져오는가?
9. 실제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인가 살아나심인가? 설명해 보라.
10. 모든 죄에서 승리하는 것과 완전주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11. 아들을 잃은 젊은 엄마의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여과되었음을 실제로 믿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12. 이번 장을 읽은 후 마음속에서 가장 큰 소망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