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고난인 이유
봄은 희망과 새로운 시작의 계절이지만, 봄이 희망이 아니라 고난인 것은 겨울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기나긴 겨울은 끝날 생각이 없는듯하다. 봄날의 햇살같은 희망을 꿈꾸지만 이 봄은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오니 자유와 정의의 봄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하지만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 용기가 필요하다. 고난의 자리에서 고난을 넘어 회복과 치유의 자리로 나가려면 고난을 피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세상을 올바르게 보려는 시야가 전제되어야 한다.
매일 우울한 정치이야기만 듣다보니 사람들의 마음도 병드는듯 하다. 서민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성직자도 거리로 나가고, 국회의원들이 국회를 포기하고 광장정치에 매몰되었다. 누가 지키나 세례요한을 자처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의미야 있겠지만, 거칠어지는 연사들의 메시지는 지나친 극단적 선동일 뿐이다. 아무 생각없이 쏟아놓는 말폭탄에 열광하지만 그것이 나라의 미래와 국민을 위한 진정한 애국인가는 다시 생각해볼 문제다. 향후 이 갈등은 누가 치유할 것인가. 상대를 악마화하는 자기진영의 논리에 빠진 패거리 싸움으로는 미래를 열 수 없다. 일부가 편먹고 싸우는데 전체는 설 자리는 없다. 경계의 선을 이미 넘나들고 있다. 양극단으로 가고 있다. 인간의 노력들이 역사의 진보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퇴보와 결핍을 만들기도 한다.
봄이다. 하지만 봄이 봄이 아닌 것은 춘곤증으로 피로도가 급상승하기 때문이다. 봄이 옴에도 꽃샘추위보다 더 매서운 갈등과 분쟁은 우리를 움추려들게 한다. 아름다운 거짓과 가슴아픈 진실이 혼재되어,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 것인지 알 수 없는 혼돈의 상태다. 페이스북은 날마다 나에게 묻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우리는 이 고난의 봄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지금의 고난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봄이 오지만 멀찍이 있고, 험난한 파도처럼 몰아치는 시련 앞에서 때로 좌절하고 절망한다. 하지만 잠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진정한 자아와 마주하게 된다. 오롯이 나 자신의 내면의 힘에 의지해야 하는 순간,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마주하고 하게 된다. 그 역경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하느냐에 따라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역경을 이겨내는 궁극의 지혜, 즉 ‘고통의 연금술’이다.
고난의 봄을 이겨내고 통과하려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치유와 회복의 첫걸음이다.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피할 것이 아니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다 보면 상식과 균형이 깨진다. 가짜뉴스에 흥분하고, 가짜뉴스를 퍼나르면서 피폐해지고 있는 자신을 깨달아야 한다. 신체적, 정서적, 정신적으로 자신을 돌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고난을 이겨내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면, 봄의 꽃들처럼 다시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봄이 때로는 고난과 어려움의 계절이기도 하다.
고난의 봄은 성숙과 변화의 기회를 제공한다.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이다. 수난의 과정을 통해 성숙하고, 십자가를 짐으로써 부활의 역사를 가져왔다. 우리도 고난의 봄을 이겨내고 더 깊어지고 성숙 할수 있는 기회다. 대나무가 마디 마디를 견디며 매듭짓고 성장하듯 말이다. 자신과 고난에 주저앉은 이들을 돌아보고, 그들을 긍정적 에너지로 치유하면서 고난을 이겨내고 부활의 아침을 맞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의 마음에도 따뜻한 봄이 왔으면 좋겠다.
글쓴이: 미목 이효상 다산문화예술진흥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