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모차보다 못한 놈
기억과 추억 사이/수필·산문·에세이
2006-05-25 23:09:29
시골에 한 번씩 들를 때마다 동네 할머니들이 텅 빈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것도 백발이 성성하고 허리가 바싹 구부러진 노인들이었다.
갓난아이가 타고 있어야 할 유모차를 할머니들이 밀고 다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유모차를 지팡이 대용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지팡이는 짚으면 몸이 한쪽으로 쏠려 손바닥도 아프고 넘어지기 쉽지만 유모차는 네 바퀴가 땅을 받쳐주어 그만큼 안전하다는 것.
자꾸만 허리가 굽어지고 뱃심이 없어져 혼자서는 외출을 할 수 없는 노인들이 주로 유모차를 이용하였다. 갓난아기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유모차를 할머니들이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는 웃음이 터졌으나 곧바로 냉정함을 되찾았다. 생전의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머니 역시 유모차를 필수품으로 여기셨다. 어쩌면 동네에서 맨 먼저 유모차 바람을 일으킨 분이었다. 그때만 해도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할머니들이 눈을 씻고 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한두 사람 보이는가 싶더니 몇 달이 지나자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할머니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그 당시 어머니의 연세는 70 정도였는데, 이상하게 허리가 많이 굽어 있었다. 매일 뙤약볕이 쏟아지는 밭에 쪼그려 앉아 풀을 뽑고 일을 하느라 생긴 후유증 같았다. 같은 또래 분보다 얼굴은 팽팽해 보였지만, 허리만큼은 안쓰러울 정도로 부실했다.
늘 땅만 보고 걸어야 할 정도로 어머니의 허리는 땅을 향해 굽어 있었다. 제대로 허리를 편 것을 보지 못했다. 뱃심이 없으니 한 번씩 허리를 펼 때마다 "아구구구"하고는 다시 고꾸라지곤 했다.
나는 어머니의 그런 모습이 몹시 안쓰러웠다. 지팡이라도 집기를 바랐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맨손으로 다니셨다. 동네 할머니들처럼 지팡이가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그전에 몇 번 지팡이를 짚고 다다는 것을 본 적은 있었지만 그 이후로 한 번도 지팡이를 짚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웃집에 마실을 가셨던 어머니가 유모차 한 대를 밀면서 들어오신 후로 어머니의 생활은 달라졌다. 이웃집 아기 엄마한테 얻었다는 거였다. 이제 얘기가 걸어다닐 정도가 되어 유모차가 필요 없다는 말을 듣고 얻어왔노라고 했다. 요새 사람들이 자동차를 필수품으로 끌고 다니듯 유모차가 어머니의 필수품이 되었다.
몇 발짝 떨어지지 않는 마을회관에 놀러 가실 때도, 동네 건너편 큰 누나 집에 가실 때에도 어머니는 늘 유모차를 밀고 다녔다. 그리고는 유모차에 먹을 것들을 가득 싣고 오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도 참 안성맞춤이었다. 핸들만 잡고 있어도 불편한 허리를 받쳐 주어 좋고 조금만 밀어도 잘 굴러가기 때문에 여러모로 편리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부천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에도 유모차는 늘 어머니 곁에 있었다. 그런데 명절날 한 번씩 집에 오면 이웃 어른들의 성화가 되레 나를 못살게 굴었다.
"엄마를 시골에 그냥 놔둘 참이냐." "고생을 말도 못한다." “빨리 엄마를 모시고 가야 하지 않겠나"는 등 이웃 어른들의 잔소리를 듣다 보면 괜히 시골에 내려왔구나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
솔직히 그 말은 무진장 감정적으로 들렸다. 오랫동안 나에게 묵혀 놓은 감정을 한꺼번에 내쏟는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만 시골에 앉혀 놓고 너만 도시에서 배 두드리며 잘 살면 되냐는 투였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 한 번도 같이 살아본 적이 없는 동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나에게 그런 속사정을 전해주지 않아도 자식인 내가 더 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이웃 어른들은 나만 보면 성화를 해대니 오히려 실망하는 쪽은 나였다.
어른들은 아마 나의 겉모습만 보고 그러는 듯싶었다. 한 번씩 시골에 내려올 때마다 슬쩍 곁눈질로 보았던 번지르르한 옷맵시를 보고 그런 것이라면 몰라도 한참을 몰랐다. 외형은 그럴듯해 보여도 이미 속마음은 삶의 주름살로 지쳐가고 있을 때였다.
더구나 어머니의 고집도 한몫을 했다. 몇 번이나 성질을 내며 살살 달래도 시골이 좋다며 그 자리에 눌러앉기 때문이었다. 몇 년 후 내가 부천에서 대전으로 보금자리를 옮기고 시골에 쌓아놓은 어머니의 짐들을 짐차에 싣고 와 집 마당에 풀어놓을 때였다. 갑자기 어머니가 오만 인상을 찌푸렸다.
"아이구 어째, 유모차 안 싣고 왔네. 시골 누나한테 전화해봐라. 아직도 유모차가 거기 있는지."
어머니가 그토록 애지중지하셨던 유모차를 그만 깜박했던 것이다. 그만큼 유모차에 관심이 없다는 증거였다. 유모차가 없으면 한시라도 바깥에 나갈 수 없을 만큼 정이 잔뜩 든 것을 몰랐던 것이다.
유모차가 어머니를 받쳐주고 안전하게 길을 인도해 주는데도 나라는 놈은 다른 일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으니, 세상에 이런 불효자는 없었다. 아무리 따져 봐도 나는 유모차만큼 어머니의 허리를 일으켜 세운 적이 없었다.
불과 몇 번 정도는 있었다. 그것도 어머니가 임종하시기 며칠 전이었다. 어머니가 갓난아기처럼 엉금엉금 기어 화장실에 가실 때 몇 번 허리를 일으켜 세워 드린 적은 있었다.
나는 그때 알았다. 어머니의 허리를 부여잡고 손을 잡았을 때, 이미 어머니의 육신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울퉁불퉁 튀어나온 뼈마디며 미라처럼 말라붙은 손과 발, 영양분이나 물기조차 자식에게 다 빼앗겨 이제 바람만 슬쩍 불어도 넘어질 정도로 어머니의 육신은 앙상했다.
어머니가 임종하실 무렵, 자주 갈증을 호소하시던 애타는 얼굴을 보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주름투성이 입으로 오물오물 물을 삼키는 약하디 약한 한 인간의 본성을 보았다.
그러나 내가 해드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컵을 어머니의 입에 가져다 대주는 일뿐. 더 는 아무것도 없었다. 온몸으로 퍼져 오르는 열기를 참지 못해 자꾸만 훌훌 옷을 벗어 던지려는 어머니의 손끝에는 딱딱한 옹이가 박혀있었다. 한평생 밭에서 호미를 잡고 질긴 풀들을 뽑던 손이었다. 마실을 다니시며 유모차를 밀던 손이었다.
나는 그때야 깨달았다. 부모가 눈을 감고 나서야 자식이 철이 든다는 것처럼, 나는 내 나이 50이 돼서야 철이 조금 든 것을 깨달았다. 유모차가 어머니의 허리를 일으켜 세우고 발 노릇을 톡톡히 할 때도, 나는 도회의 한쪽 구석에서 내 앞길만 닦고 있었으니….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유모차보다 못한 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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