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때문에 이웃을 더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그 앎은 내적인 지식이 됩니다
지금까지 갈릴래아 호숫가 주변에서 말씀과 이적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오시어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2-3)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말하는 그들은 바로 말씀이 끝난 그 순간에는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던 사람들입니다.(루카 4,22 참조) 그러나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하면서 분위기는 이내 싸늘해집니다. 이렇게 싸늘해진 분위기의 중심에는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편견과 선입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입견과 편견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가족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평범한 가정사를 안다는 사실이 선입견과 편견으로 이어지면서,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기적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러한 현상이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내 삶의 한가운데서 일어나지는 않는가?’ 뒤돌아보니 그렇지 않다고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저는 가끔 제가 잘 안다고 여기는 친구나 어떤 신자를 보며 화를 벌컥 내는 경우가 있는데, 화를 내는 내 속마음을 살펴보면 많은 부분이 이렇습니다. ‘또 그런 식으로 하는구나!’,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그런 식으로!’라는 생각 이 앞서며 화가 치미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내 기도하던 중 어느 순간 깨닫게 됩니다. 상대방에 대해 나의 선입견과 편견이 얼마나 깊이 나를 점령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편견과 선입견은 내가 그를 잘 안다는 데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 깊이 반성하였습니다. 내가 상대를 안다는 것이 상대와 긍정적인 관계를 맺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이 앎은 나에게 결코 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를 앎으로써 그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또 사랑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그 앎은 나에게 소중한 것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예수님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그만큼 자신과 이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그 앎은 나의 내적 지식으로서 내가 살아가는데 참된 구원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를 알고도 실천을 하지 못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상 속에서 선입견이나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상대를 알기 때문에, 더 배려하며 받아들이는 어느 신자의 표양을 보면서, 나 자신을 뒤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통해서 주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립니다.
- 홍성만 미카엘 신부 / 지속적인 성체조배회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