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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30~31일 안양역사탐방 모습
광복-분단 70년 체험
안양역사탐방
1. 취지
가족, 친지, 친구, 동료, 지인과 함께 안양의 한국 근현대사 유적지를 탐방하면서 광복-분단 70년의 교훈을 찾고 살기 좋은 우리고장, 통일된 우리나라를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자 함.
2. 주최
광복-분단 70주년 기념사업 안양시민추진위원회
3. 주관
소통과혁신연구소
4. 일시 및 장소
원하는 날 오전 또는 오후(안양역 광장 집결)
1차 : 2015년 5월 30일(토요일) 10시~15시(09시50분까지 안양역 광장 집결) : 11명 참가
2차 : 2015년 5월 31일(일요일) 10시~15시((09시50분까지 안양역 광장 집결) : 10명 참가
5. 코스
안양역 광장 집결, 참가자 소개 및 인사
<안양역> <안양의 독립운동가 : 원태우 의사 등> - 안양1번가 <일제 조선총독부 서의면 사무소> - 안양4동 <장내동성당 = 현 중앙성당> <60~90년대 근로자회관> - 안양시내 중앙시장 앞 <87년 6월 항쟁 시발지> <안양의 영화관 : 삼원극장 등) - 안양3동 <일제하 조선직물 = 해방후~60년대 금성방직 = 70년대 대농 자리> <삼덕제지 = 삼덕공원> - 안양9동 <채석장 = 현 병목안 시민공원> <최경환 성지> - 석수2동 관악역 근처 정조대왕 능행길 <만안교>- 석수1동 50~60년대 <미군부대 자리>, 50~60년대 동양 최대의 <영화촬영소 자리> - 석수1동 <안양사 절터 = 유유산업 = 김중업 박물관> <안양유원지>
6. 참가 신청
- 참가비용 : 1인당 1만원(자료집 값 등)
- 신청기간 : 2주 전 5인 이상 확보 신청
- 신청내용 : 성명, 연락처, 주소, 이메일
- 신청접수 : 010-9898-6150, 21sotong@hanmail.net, 국민은행209701-04-220307정성희(소통과혁신)
안양 지도
안양 연혁
475년(고구려 장수왕 6년) 율목군에 속함(박달동, 석수동은 잉벌노현에 속함)
757년(신라 경덕왕16년) 잉벌노현 → 곡양현
940년(고려 태조 23년) 과주(곡양현 → 금주현)
1413년(조선 태종) 과천현(금주현 → 금천현)
1895년(조선 고종 32년) 과천군(시흥군)
1914년 4월 1일 시흥군으로 통합, 시흥군 서이면에 속함
1941년 10월 1일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칭
1949년 8월 14일 안양면이 읍으로 승격
1973년 7월 1일 안양읍이 안양시로 승격
1989년 5월 1일 출장소(만안, 동안)를 설치
1992년 10월 1일 만안과 동안 구청 설치
1994년 7월 1일 행정동 분동(31개 동 현재)
안양(安養)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安養寺)에서 유래되었다. 신라 효공왕 4년(900)에 궁예의 후예인 왕건이 금주(시흥)와 과주(과천)등의 지역을 징벌하기 위해 삼성산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산꼭대기의 구름이 5가지 빛으로 채색을 이룬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살피게 했다. 구름밑에서 능정(能正)이란 노스님을 만났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왕건의 뜻과 같으므로 이곳 (만안구 석수1동 산 27,28번지 일대)에 안양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즉 안양사로 인해 안양이란 명칭이 탄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양이란 불교에서 마음을 편하게 하고 몸을 쉬게하는 극락정토의 세계로 모든 일이 원만구복하여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은 없는 자유롭고 아늑한 이상향의 세계이다.
정조대왕 능행 길 <만안교>
만안교는 조선22대 임금인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긴 후 화성행궁으로 가기위해 정조19년에 3개월의 공사 끝에 완공환 홍예석교다. 안양천 위에 놓여진 안양교(구도로)를 지나 안양예술공원 지하차도 앞 교차로에서 서울방향으로 약 20미터 지점(현 영화아파트)에 위치하고 있었다. 구한말에 이르러 경부선 철도를 부설하면서 교량의 구실을 상실하였고 만안교 주위에 민가와 공장이 들어서고 국도1호선을 포장하면서 만안교가 도로밑에 파묻혔다가 1980년 8월 약 200미터 북쪽의 안양시 석수동 260번지 석수교회 앞 삼막천 위로 옮겨 다시 축조했다. 이때 다리의 방향도 동서로 길을 건너게 90도 돌려 놓고, 또 주변 난간, 바닥 석에 다른 곳의 가공된 돌이 깔려 원형대로 옮기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자리에 있는 만안교 기록 사진에서 당시 교각의 대부분이 땅속에 묻혀있고 다리 위에 난간이 추가 설치되어 있어 변형됐음을 보여주는데, 현재보다 더 길었다.
천주교 최경환 성지
수리산 뒷마을 '뒤띠미(뒷듬이)‘ 교우촌
최경환 성인 고택
최경환 성인 묘소
기해박해(1839년), 최경환 성인 등 교우들의 신앙공동체, 교우촌, 조선시대 수리산 뒤 마을이라 '뒤띠미(뒷듬이)‘ 불림.
최경환(프란치스코, 1805-1839)성인의 유해가 모셔진 곳, 한때 담배를 경작하며 교인들이 살던 곳, 박해 피해 살던 은신처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 한국인 두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고향 충남 청양군 화성면에서 부인 이성례(마리아 1800~1840)와 담배촌에 정착.
기해박해 시기 한양을 오가며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교우들을 위로 격려하며 돌보던 중,
그 해 7월 31일 압송되어 고문과 회유에도 신앙을 고수하며 1839년 9월 12일 포청옥에서 순교.
부인 이성례도 이듬해 1월 31일 용산 당고개에서 참수.
최경환의 시신은 담배촌에 묻혔다가 명동성당, 다시 양화진성당으로 옮겨짐.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한국 천주교 200주년 맞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2세에 의해 1984년 5월 6일에 성인의 반열에 오름
2000년 천주교 순례성지로 지정, 현재 순례자성당, 최경환 생가, 이성례 마리아의 집 등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며,
성당 앞 하천을 건너 산기슭에 최경환 성인의 묘소가 있음
안양 병목안 <채석장>=현 시민공원
* 위의 채석장 그림은 안양 홍사영 화백의 80년도 작품임
현재 병목안 시민공원 안의 인공폭포
60년대 병목안 채석장으로 향하는 안양3동 철로변
현재 병목안 시민공원 안의 당시 철로 재현 모습
안양 병목안 채석장은 일제 식민지 초기에 경부선 철도 부설에 필요한 자갈을 채취하기 위해 개발되기 시작, 30년대부터 45년 8.15 해방 때까지 조선인 강제 징용으로 채석해 경부선-부산항을 거쳐 일본으로 가졌으며, 이후 1989년까지 운영되었던 곳. 채석장~안양역의 철로는 아직도 그 흔적이 있으며, 그 철길 위를 서행하는 화물열차로 채취한 자갈을 운반해감. 원주민들은 당시 폭약 터지는 소리, 쇄석기 소리, 자갈을 실어 나르던 화차의 굉음, 화차 꽁무니에 올라타는 아이들, 수암천의 물소리를 기억하고 있음. 흉물로 방치된 폐 채석장이 현재 친환경적 산림복구를 병행한 병목안 시민공원으로 조성, 주민 휴식공간과 교육의 장으로 이용되고 있음.
안양역
1906년 9월 안양역 모습
주일본 독일대사관 무관으로 1906년, 1907년 두 차례 조선을 찾은 헤르만 구스타프 테오도르 산더(1868~1945)가 남긴 사진. 러일전쟁의 주요 격전지 조사를 위해 1906년 조선ㆍ러시아 사할린ㆍ중국의 뤼순 등을 찾았으며, 1907년 다시 조선을 방문해 서울ㆍ수원, 원산ㆍ성진ㆍ길주 등지를 여행하며 사진을 찍고 유물을 수집했다.
1930년대 안양역 모습
1968년 7월 1일 안양역 모습
현재 안양역 모습
1905년 1월 경부선 부설, 안양역 개통으로 지역 경제와 행정의 중심 이동(시흥군 서이면 사무소, 군포장이 있는 호계동 사거리에서),안양천 이용, 섬유 제지 공장 설립, 일본인 대규모 농장(오끼농장), 포도농사 시작
1938년 8월 공사비 4만원으로 건평 88평, 목조콘크리트 스레트 식으로 착공, 10월 21일 정오 낙성식
1951년 1월 26일 1.4후퇴 때 완전 소실, 56년 6월 17일 공사비 1천3백여만 환으로 건평 95평 준공, 74년 8월 15일 전철개통과 동시에 역사 증설
1960-70년대 안양역에서 안양유원지까지 미니합승버스 숫자의 한계로 피서객들 안양풀장까지 걸어가(나중에 유원지 입구에 임시역 개설, 수많은 인파 걸어가)
2001년 12월 13일 민자역사 개통식, ㈜안양민자역사와 철도청이 1천100억 원 투자, 2만8천47㎡ 부지, 95년 착공해 지하3층 지상9층 규모의 현대식 복합건축물, 역무시설은 지하 3층 지상 4층 연면적 8천693㎡ 규모
2004년 바로 옆에 롯데백화점. 골프연습장. 문화센터와 769대 수용 규모의 주차장 등 지하 1층, 지상 9층, 연면적 7만8천14㎡ 규모의 부대건물 완공
항일투쟁 원태우 의사
안양의 독립운동가
원태우 元泰祐(1882∼1950)
을사늑약 체결 5일 후인 1905년 11월 22일 오전 9시 이토히로부미가 하야시 곤스케 공사를 대동하고 서울역에서 특별 열차를 타고 수원에서 하차, 팔달산 등 경치를 구경하고 사냥을 하며 안양역에 도착, 오후 6시 15분 서울행 열차를 탔다. 이토 히로부미가 수원지방을 구경한다는 소식을 접한 원태우 의사는 동료 이만려 김장성 남통봉 등과 함께 거사할 것을 맹세하고 현재 전철1호선 관악역에서 서울방면으로 약 400m지점인 안양육교 아래 철로 변에 바위를 깔고 열차가 전복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두려움에 떨던 이만려가 돌을 치우자 곧이어 열차가 다가왔는데, 원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가 앉은 자리를 향해 사방 세치 크기의 돌맹이 수개를 던졌다. 유리창이 박살나며 파편이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 여덟 군데에 박혔다. 이 사건으로 오후 7시에 도착할 예정이던 열차가 1시간이나 지체해 8시에 도착했다. 사건 발생 2일 후인 11월 24일 대한매일신보, 오사카 대한매일신문 11월23일자, 도쿄 동경매일신문 11월29일자에 보도되었다. 원 의사를 포함한 4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 중 이만려 김장성, 남통봉은 곧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원 지사는 철도 방해죄로 감금되어 징역 2개월에 곤장 1백대를 맞고 이듬 해 1월 24일에 석방되었다.
한흥이 韓興履(1897∼1979)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 2학년 때인 1919년 3·5학생독립운동에 적극 가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만세를 부르고 통학생의 임무로 시흥·안양·군포역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3월 5일 학생들이 경성역에서 고종의 인산(因山)을 마치고 귀가하는 사람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朝鮮獨立萬歲) 깃발을 들고 만세 시위를 전개하자 군중들은 그 뒤를 따라 남대문에 이르렀다. 한흥이 지사는 이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왜경에게 육모방망이로 정강이를 맞고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 구금,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게 되었다.
하영홍 河永泓(1879∼1915)
시흥현 군내면 안양리 263(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삼막골에서 출생하여 21세 때(1900년)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고 전답을 판 돈 180원으로 초가 3간 규모의 삼막골교회를 세워 봉헌예배를 올렸다. 25세가 되던 1904년 9월 14일 하오 3시 시흥읍 내의 한천교(현 광명시 입구의 안양천)에서 시흥농민들이 봉기했는데, 시흥군수 박우량이 역부들의 노임을 한푼도 주지 않고 착복하는가 하면 역부 모집에 있어 온갖 불법행위를 자행하자 시흥의 6개면 농민 수 천명이 항쟁을 한 것이다. 성우경(광명시 가학동 출신)과 함께 주동자로 지목되어 순검에게 체포되어 15년의 징역형을 언도 받았다가 그후 1등급 감하여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영래 李永來(1873∼1949)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113 출생, 1919년 3월 27일 광목 행상 도중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 백기화(白基和) 집에 들러 그 집에 모여 있던 이종교(李種敎)외 수명에게 "다른 마을에서는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불러 기세를 올리고 있는데 당신들은 짚신만 삼고 있어 되겠는가"라고 말한 후 주민 약 5명과 함께 그 날 밤 8시경 관양동 서쪽 언덕 위에서 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침으로써 독립운동의 기운을 일으켰다. 이 일로 경성지방법원 재판부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일제하 조선총독부 서이면 사무소
1914년 과천군 서이면의 면사무소로 세워졌다가 1917년 현 위치로 옮겨졌다. 현존 건물은 안양시 상업중심지구에 있으며 앞쪽은 도로와 가깝고, 오른쪽 및 맞은편에는 상업시설, 왼쪽에는 안양1동사무소가 있음
1949년까지 사용한 건물로 건축 당시 건물 상량문에 ‘조선국을 합하여 병풍을 삼았다. 새로 관청을 서이면에 지음에 마침 천장절(일본 왕의 생일)을 만나 들보를 올린다’라고 적혀 있어 한일합방을 정당화하고 상량식을 일본 왕의 생일날로 정해 거행한 것으로 서이년 사무소가 일제수탈기관이었음을 보여주었음
안양3동 <일제하 조선직물=해방후~60년대 금성방직=70년대 대농 자리>
60년대 금성방직
60년대 안양3동
60년대 안양시내
1932년 일본인 조선직물㈜ 설립(석수동에는 '조선견직주식회사‘)설립, 박흥식이 44년 8월 초대형 조선비행기주식회사 설립
1945년 5월 제1호기의 주익(主翼)·동체 등 작업을 마치고 8월 시험비행을 하였으며, 제2·3호기도 부분품 제작 중, 9월말 작업 완료 계획
일제 패망 이후 과거사 청산을 하지 못한 채 박흥식이 조선비행기㈜에 투자한 금액과 격려금까지 받으면서 운영되다가 이후 김성곤의 금성방식으로 변모
해방직후 안양역전에 방적기 2천추 방치, 김성곤이 미 군정청과 교섭, 조선직물(조선비행기) 일부 3천 평 임차, 인견사 생산공장 시작
1948년 10월 금성방직이 인수하고 1967년 대한농산(대농)에 매도된 뒤, 1977년 한국토지금고에 의해 일반에 매각되어 안양에서 첫번째 대규모 주택단지로 바뀌게 됨.
현재 안양1동 진흥아파트 자리의 태평방직, 전신은 삼흥방직, 1953년 설립, 54년 10월부터 생산, 56년 금성방직에 인수되었다가 67년 10월 대농에 매각돼 아파트단지로 바뀜
50~60년대 석수1동(현 대림E편한세상1차아파트 자리) 미군부대
68년 3월부터 69년 4월까지 안양석수동 소재 옛 미군부대 83보급대대에서 복무하였던 미국인 닐 미샬로프씨가 당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미군부대 주변에는 ‘시흥군 제1 성병 진료소’, ‘게이트웨이 클럽’이라는 미군 상대 유흥업소나 ‘국제결혼 하우스’ 등이 있었다. 석수 미군기지 안에는 전술 핵무기가 있었다고 미샬로프 씨는 증언했다. 아래의 사진 내용이 그의 증언록이다.(자료 : 김성균 외 지음 <만안의 기억>)
50~70년대 석수1동 안양영화촬영소(현재 삼성초 뒤 관악산현대홈타운아파트 자리)
수도영화사- 영화촬영소-신필림
석수동에 1954년 수도영화사 주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종합촬영시설
3만평 대지, 각각 500평, 350평의 스튜디오, 촬영, 현상, 편집, 녹음 등 영화작업 동양 최대 시설
수도영화사가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자 신상옥 감독이 1963년 안양촬영소 인수, 66년 '신필림'
70년대 중반까지 150여 편의 영화 제작,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배우 66년 안양영화예술학교 설립
1970년 회사 규모 축소, 안양영화주식회사, 1973년 주식회사 신 프로덕션으로 개명
1978년 배우 최은희, 이어 신 감독이 북으로 가면서 81년 문을 닫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짐
안양 영화관 <화단극장><읍민관=안양극장><삼원극장=현 CGV>
안양 영화관의 역사
화단극장, 1953년 3월 개관, 안양지역 최초의 극장(안양역에서 서울 방향 구도로변), 읍민관(1968년부터 안양극장, 현 2001아울렛 사거리), 삼원극장(현 CGV자리)
1950년대 동양 최대의 영화촬영소(수도영화사 - 안양영화촬영소 -신필름)
서울 변방의 자그마한 읍내 안양에 이례적으로 대형극장 3개
1970년까지 서울 개봉관과 동시 상영, 관람비 저렴, 원정 관람
1965년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영화, 시흥군 관내 초등학생 전체 걸어서 단체관람, 울음바다
수도권 피서지, <안양유원지>=현 안양예술공원
당시 안양유원지에 무료 제1, 제2풀이 계곡 입구(현 주차장 위쪽)에 있었고, 상류 쪽에 유료 대형 풀, 맘모스 수영장, 만안각수영장, 안양관광호텔 수영장 등이 있었음
주말 하루 10만 인파가 몰려들 정도로 서울시민들의 여름철 피서지로 안양유원지 입구 현 지하도 위 철길에 임시역사까지 운영
당시 유원지 계곡에 물이 많았는데 지금은 물이 말랐음. 아마 70년대 관악산 지하에 전시용 벙커를 만들면서 수맥이 끊겨 그렇다는 추측
안양사 절터=유유산업=김중업 박물관
안양 유원지 입구
중초사(통일신라), 안양사(고려), 59~07년 유유산업 안양공장, 원기소 등 의약품 생산
안양4동 <장내동성당>=현 중앙성당
1959년경 장내동성당
1937년 서울교구가 밤나무밭 6,657평 교회부지로 매입, 1954년 9월 7일 초대 주임신부 구천우(具天祐)신부가 안양읍 처음으로 24평 목조건물 성당 지어 노기남 주교의 주례로 축성식
1956년 5월4일 안양 최초의 안양유치원 개원, 1958년 명동성당과 같은 고딕형 성당 신축, 1959년 봉헌식, 1991년 현대식 새 성당 신축.
장내동 성당이 주변은 당시 밤나무, 뽕나무 등이 많았던 곳, 밤나무 울타리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장내동 또는 담안이라 불림.
1961년 11월 6일 안양1동 소재 구 안양시장 이전, 상권 형성, 중앙로 개통, 인구 중가하면서 안양시 중심부로 변모
안양4동 <근로자회관>=전진상복지관=현 카톨릭복지회관
근로자복지회관은 1969년 설립된 이래 90년대 안양전진상복지회관으로 명칭을 바꾸며
노동, 여성, 소외계층, 이주민 복지에 대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해오다가
천주교 수원교구의 방침 변경으로 2007년 12월 31일 폐관되었다.
안양시내 중앙시장 앞 87년 6월항쟁 시발지
안양에서는 87년 6월항쟁기간 6월 19일 노동운동그룹이, 6월23일 수원지역대학생들이, 6월26일 노동운동그룹과 수원지역 대학생들이 함께 주도하여 모두 세 차례의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