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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시라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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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장길산, 홍길동 같은 의적집단의 두목들이 힘이 천하장사이고,
도술과 주먹에도 무척 강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들은 조선시대에 이름을 날렸던
최강의 협객이자 주먹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에, 우리나라 경성의 암흑가에서
여러 파벌의 주먹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주먹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주먹들이 모여들었던 곳으로 서울 종로의 뒷골목을 들 수가 있다.
가장 큰 경제적 이권이 보장되는 곳인 종로 뒷골목은
내노라하는 주먹들이 모여들어서 자기만의 주먹세계를 만들어나가고 있었는데,
그들은 구마적과 신마적, 김기환, 김후옥, 제비, 뭉치 그리고 김두한 같은
진짜 주먹과 배짱이 강했던 당대의 걸출한 주먹들이었다.
이렇게 한반도의 주먹의 모태가 되었던 서울 종로의
뒷골목에서는 그 노른자위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여러 강자들간에 피비린내는 결투가 벌어졌고,
결국 김두한이 구마적과 신마적 등의 걸출한 오야붕들을 물리치고,
종로의 최고의 오야붕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1936년 고작 19세에 불과했던 청소년주먹 김두한이
전설의 주먹 구마적과 신마적, 뭉치 등의 강자들을
모두 물리치고는 종로 최고의 오야붕으로 등극하였고,
이어서 그는 서울의 전지역의 주먹들을 공략해서,
서울을 대표하는 최고의 주먹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또한 김두한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전국의 각지역마다
자신의 부하들을 진출시켜서 자신의 나와바리를
확대해나갔는데, 부산부터 평양까지의 한반도
거의 대부분의 대도시들을 자신의 나와바리로
편입시키기까지 했다.
김두한이 나이 20세가 되었을 무렵에는 이미 한반도의
대부분의 지역들을 자기세력권으로 편입시켜 놓았는데,
바야흐로 김두한의 주먹천하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반도에서 최고의 주먹으로 호령했던
김두한도 복속시키지 못한 유일한 지역이 한 곳 있었는데,
바로 한반도 북쪽 끝에 있는 신의주였다.
한반도 대도시 중에서 유일하게 신의주만이 김두한의
우미관조직에 복속하지 않았고 끝까지 대항하고 있었다.
그 당시 평양의 이화룡조직도 김두한의 우미관에
복속당했지만, 신의주가 끝까지 김두한의 조직에
복속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신의주에
북한 최고의 주먹이라고 불리우는 걸출한
싸움꾼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시라소니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이성순이었다.
1936년도 당시의 한반도의 주먹판도를 좀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남한지역의 최고의 주먹은
단연 김두한이었고,
실제로 김두한은 자신과 부하들이 직접 남한의
대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그곳의 토박이 주먹들을
물리치고는, 대부분의 남한지역의 주먹들을
자기휘하에 복속시켰다.
반면 같은 시기에 북한에서는 시라소니라는 대단한
싸움꾼이 출현해서 신의주의 뒷골목의 막강한 주먹들을 모두 제압하고,
신의주 최고의 싸움꾼으로 등극했고,
그 후 시라소니는 북한의 여러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내노라하는 강자들을 모두 쓰러뜨리면서,
북한의 최고의 주먹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시라소니가 북한지역의 최고의 싸움꾼으로 불리우게된 계기는,
당시 북한 최강의 주먹이라고 불리웠던 박두성을 일대일 대결에서 KO시켰기 때문이다.
1936년 고작 나이가 21세에 불과했던 시라소니
이성순은 신의주의 한 술집에서 안주에 북한 최고의
주먹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자존심이 확 상한 나머지,
그 최강의 주먹에게 도전하기 위해서 혈혈단신 혼자서
평안도 안주로 그를 찾아갔다.
씨름대회에 출전해서 황소 10마리를 타냈을 정도로
당시 북한지역에서 최고의 씨름꾼으로 명성이 높았던
박두성은 기골이 장대했고 힘과 완력이 쎄기로
당해낼 장사가 없었으며,
뒷골목에서 수많은 강자들을 쓰러뜨리고 최고의
주먹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던 주먹계의 대단한 강자였다.
씨름계에서나, 싸움꾼으로서의 관록으로나 명실공히
최강의 실력자였던 박두성에게 신의주에서 찾아온
신출내기 싸움꾼 시라소니는 상대가 될 것 같지 않았다.
느닷없이 안주로 찾아와서 ‘안주에서 가장 쎄다는
박두성이 어디 있소?’라고 말하는 시라소니를 보고는
천하의 주먹 박두성이는 기가 찼고, 어이가 없었다.
몸무게 90kg에다 키가 육척장신이며 기골이 장대한
박두성과 65kg의 삐쩍마른 몸을 가진 시라소니의
싸움은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상대가 되지않는
싸움으로 보였던 것이다.
참고로 젊었을 시절의 시라소니는 몸무게가 65kg이고
키는 175cm의 보통 체구를 지녔었다.
그렇지만 시라소니는 박두성에게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두 주먹간에 피말리는 치열한 혈전을
벌인 끝에 시라소니는 자신의 공중걸이 박치기로
박두성을 기절시키면서 싸움의 승리를 거두었고,
북한 최강의 주먹을 쓰러뜨렸다는
커다란 수훈을 세우고야 말았다.
자신이 질 것이라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냉소적인
진술과 불리한 상황속에서도,
시라소니는 특유의 담력과 날렵하게 빠른 몸놀림과 신출귀몰한 싸움기술을 발휘해서,
천하제일의 주먹 박두성을 보기좋게
길바닥에 쓰러뜨렸던 것이다.
시라소니가 북한최고의 주먹 박두성을 꺾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북한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비야흐로 시라소니의 주먹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남한지역에서는 김두한이 신마적을 꺾고 경성 최고의
오야붕으로 등극했을 당시에, 북한지역에서는
시라소니가 천하의 박두성을 제압하고 함경도 최고의
싸움꾼으로 등극했던 것이다.
이렇게 같은 시기에, 남과 북의 두명의 뛰어난 싸움꾼이
남한과 북한의 각지역에서 거의 동시에 최고의
주먹짱으로 올라섰던 것인데, 이처럼 같은 시기에
이렇게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매우 신기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두사람이 각기 남한과 북한의 최강의 주먹으로
올라섰던 1936년도이기에, 시라소니는 나이가
21살로서, 19살이었던 김두한보다 2살이 더 많았다.
그리고 시라소니는 박두성을 꺾고 북한 최고의 주먹으로 올라서고 난 후,
신의주를 떠나서 중국과 만주일대를
전전하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 이유는 시라소니가 조선인들을 못살게 굴던 일본형사를 두들겨팬 것이 이유가 되어,
신의주에서 시라소니 체포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ㅡ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해방과 제1공화국 시기까지
활동한 조직폭력배로, 흔히 시라소니 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평안북도 신의주 오일동 출신으로 말년에는
조폭세계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퇴출되고 개신교에
귀의해서 평범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이성순의 생애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고,
그마저도 대부분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나
그가 조폭으로서 날렸던 악명에 기반한 뜬소문 따위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정황적인 부분 정도만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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