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연작 해양시「어부사시사」를 다시 읽으며]
해남은 먼 곳이다. 해남엔 내가 우러러마지 않는 고산 윤선도 선생의 유적들이 있는 곳이고, 한국문학사상 빼어난 작품인 『어부사시사』가 쓰여진 곳이며, 노년의 시인이 진심을 다해 이뤄놓은 인공정원 보길도 부용동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나는 지금까지 6차례 해남엘 갔었고 주로 고산의 흔적이 남아 있을만한 곳들을 찾아다녔다. 1978년, 버스를 바꿔 타면서 강진 영랑생가엘 갔었고, 다산초당, 백련사 등을 찾아다녔다. 해남 녹우당, 대흥사를 찾아다니며 시인 삶의 체취를 체감하려 했었다.
1982년, 새로 산 스텔라 승용차를 운전해 먼 길을 달려가기도 했었다. 언젠가는 오세영 시인 내외와 우리 부부 동행, 보길도 여기저기를 찾아다니기도 했었다. 2010년엔 해남군이 윤고산의 업적을 기려 제정한 [고산문학상]의 시 부문 수상자가 되어 해남엘 가기도 했었다. 작년 박병두 시인을 따라 보길도엘 가며 보니 이제는 땅끝 마을도 개발이 진행되어 되어 있었다. 보길도까지 다리가 놓여 찻길이 이어져 있었다.
해남은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다. 해남 녹우당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가슴 속을 밀물처럼 떠받치며 다가온 신비한 힘을 잊을 수 없다. 녹우당을 둘러싼 산세며 넓직한 들판이 내 온 몸을 밀어내는 것 같은 힘을 느꼈었다. 나는 그 힘을 예술창조 욕구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산 윤선도 선생처럼 탁월한 시인을 키워낸 그런 힘 말이다. 미황사 앞에 섰을 때도, 보길도 세연정 앞에 섰을 때도 무언가 가슴에 밀려드는 강한 감동의 파장을 만날 수 있었다.
『어부사시사』는 조선조의 빼어난 시인 윤선도가 ‘어부’라는 시적 화자를 통해 해남 바다의 4계절을 노래한 명편 시이다. 윤고산 선생이 쓴 『어부사시사』는 한글 표기로 쓴 작품으로 이미지 묘사는 단연 독보적이다. 리듬의 반복도 그렇고, 노 젓는 소리의 의성 표기 ‘지국총 지국총’도 작품의 사실감을 높여준다. 단언컨대 『어부사시사』같은 명시가 400여 년 전 써졌다는 것은 한국시문학사의 축복이다.
고산 윤선도(1587~1671)는 간난의 시대를 살고 간 시인이다. 윤선도가 벼슬길에 나아가 그가 품은 신념을 두루 펴고자 하였지만 그가 품은 웅지는 번번이 좌절되었고, 수도 없이 탄핵 상소를 받아 귀양길에 오르곤 하였다. 조선조 선비들은 ‘治國 平天下(치국 평천하)’의 대의를 펼치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고 나름대로의 수신(修身)을 거치며 정진하였지만 그들의 소망을 펼쳐볼 입신의 자리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제각기 다른 학벌이 서고, 문벌이 만들어지면서 조선조 사회는 혼란이 심해지고 있었다. 더구나, 고산이 대의를 세우고자했던 시기는 특히 조선 역사상 가장 극심한 국난을 겪던 시대였다.
1592년 임진왜란, 1636년 병자호란이 그랬고, 병자호란의 참화를 겪은 직후인 1659년과 1674년 두 차례에 걸치는 예송논쟁을 벌이고 있었다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왕의 죽음을 당하여 상복(喪服)을 몇 년 동안 입느냐의 문제가 논란의 핵심이었다 한다. 노론의 거두 우암 송시열에 맞선 남인의 대표가 고산 윤선도였고, 강직한 선비 품성의 고산은 이전투구, 속에서 거듭되는 좌절을 감내해야했었다. 두 차례에 걸치는 예송논쟁은 왕권의 적통을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었고, 왕권의 적통을 차지하는 집단은 출세의 길이 트이게 되는 일이었다. 선비 집단의 대결은 상호 대척적인 집단 간의 골육상쟁으로 이어졌고, 죽고 죽이는 일이었고 입신출세의 길이 열리거나 닫히는 일이었다.
윤선도는 물고 물리는 이전투구 속에서 남인집단의 선봉장이었다. 그리고, 그의 맞수는 조선조 거유의 맹장 송시열이었다. 윤선도 자신의 벼슬길은 이런 난세 속에서 심한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고산은 가복(家僕) 수백 명을 배에 태워 왕자와 왕족들이 피란해 있는 강화도를 향해 떠났다. 그러나 강화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청에 함락된 뒤였다. 윤고산은 임금이 남한산성에서 청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을 등질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제주도를 향해 가다가 잠시 들렀던 보길도의 경치를 보고 반해 그곳을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 짓고 이곳을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이때를 겪으며 그는 현실 정치에의 미련을 떨쳐버리게 되었으며, 보길도에서 그가 꿈꾸던 이상낙원을 꾸미고 스스로 자족한 여생을 살게 되었다. 현실 세계에서 펼치려던 이상세계 대신 보길도 부용동에 이상낙원을 만들었으며 유유자적한 노후의 시간을 영위하기로 한 것이다. 이때 쓴 시 『어부사시사』는 한국문학사상 불후의 명작이다.
윤선도는 흠결 많은 현실 속에서 쉼 없이 좌절을 감내하면서도 ‘현실 지향’을 버릴 수 없었다.
조선조 시가의 대부분은 현실 좌절 속에서 자연에 의탁하며 자신의 심회를 담으려 하였으나, 전면에 내세운 자연이 문제가 아니라 자연에 의탁해서 표현한 ‘현실지향’이 핵심이었다. 자연에 귀의한 상태가 아니라 현실 복귀의 염원을 담아내는 방편으로서의 자연의탁이며 자연상찬이었다. 그러나,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전혀 다른 모습을 담아낸다. 좌절과 숱한 귀양으로 점철된 ‘사회적 자아’를 버리고 배를 타고 즐기는 ‘서정적 자아’가 시를 견인해 내게 된 것이다.
‘사회적 자아’ ‘정치적 자아’를 버리지 못해 번민하던 윤고산이 그가 그렇게도 이뤄내고 싶었던 이상적 공간을 보길도에 이루게 된 것이다. 보길도 부용동은 자연풍광 속에 이뤄낸 윤고산의 독자공간이다. 그는 그가 이뤄내고 싶은 공간을 그의 뜻대로 이뤄낼 수 있었다. 그의 고아한 품격과 선비 교양에서 우러나오는 심미적 정원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고아한 품격의 정원공사에 들어갈 상당한 자산이 있었고, 지금 우리는 4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극미(極美)의 정원 하나를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우는 것이 뻐꾸기인가 푸른 것이 버들 숲인가?
노 저어라 노 저어라
어촌 두어 집이 안개 속에 들락날락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맑고도 깊은 소(연못)에 온갖 고기 뛰어논다
-춘사 4
기러기 떠 있는 밖에 못 보던 산 보이누나
노 저어라 노 저어라
낚시질도 하려니와 취한 것이 이 흥(興)이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두어라! 석양이 비치니 모든 산이 비단이로다
-추사 4
당시 한문투의 시가들이 회자되던 시기에 이런 한글표기 시가 창작되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어부사시사』는 윤고산 60대에 접어들어 쓴 40편 단시 모음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 계절별 각 10 편씩으로 되어 있다. ‘어부’라는 시적화자에 자신을 의탁하고 있다. 티끌 많은 현실세계의 모든 애증으로부터 벗어난 자의 호방한 뱃놀이 모습이 눈에 잡힐 듯 떠오른다. 현대어 표기로 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빠른 호흡이 느껴진다. 아마도 이 시는 노래로 불리어졌을 것이다. 북이나 뱃전을 두드려 박자도 맞추며 배를 저어나갔을 것이다. 조선조에 쓰인 수많은 시가 중에서, 나 개인의 취향으로는 『어부사시사』가 단연 압권이다. 송강의 시편보다 윤고산의 『어부사시사』가 월등 윗질이다. 같은 윤고산의 『오우가』 보다 『어부사시사』가 좋다. 이미지의 참신성이 두드러진다. 한국시가사를 일별하면서 『어부사시사』같은 명시가 400여 년 전에 쓰였다는 것, 경이롭게 우러러보게 된다.
<ifsPOST. '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