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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 찬양대 귀한 찬양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을까요? 그것은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45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오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섬김이라는 말은 참 듣기에 아름다운 말입니다. 좋은 말이죠. 그러나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내가 실천하기에는 매우 힘들고 부담스러운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섬김이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섬기러 오셨고 또 우리를 섬기셨고 섬기시되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섬기셨습니다.
섬김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이며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섬김이라는 원리를 통해서 돌아갑니다. 세상의 원리는 다스리고 지배하고 그리고 섬김을 받는 원리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했다. 세상의 가치에 의하면 성공했다고 하는 것은 섬김을 받는 거예요. 다른 사람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가서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반대입니다. 섬기는 자가 큰 자가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얼마나 진지한 상황입니까? 34절에
그들은 능욕하고 침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제 3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이제 올라가서 내가 잡혀서 채찍질 당하고 능욕당하고 죽었다가 3일 만에 살아날 것이다. 제자들에게 주님이 진지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게 들리지 않는 거예요. 얼마나 지금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주님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그 말씀이 들려야 됩니다.
그런데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귀는 막혀 있습니다. 그들 안에 다른 생각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예루살렘 올라가면 내가 3년을 투자했는데 모든 생업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왔는데 주님이 가셔서 성공하면 나 그때 한 자리 차지할 거야.
그 목표를 가지고 왔고 그 생각을 붙들고 왔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주님의 메시지가 들리지 않는 거예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나라가 임하면 주의 영광 중에 우리를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내 아들 출세시켜주세요
하면서 지금 어머니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주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2천년 전에도 유대 땅에서는 치맛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한국에만 부는 게 아니었어요. 이미 그때 어머니들이 자기 아들 출세시키려고 이렇게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은 또 열받았어요. 왜 열 받아요? 자기들도 표현은 안 했지만 내심 그 생각이 있었어요. 3년 여기에 투자한 이유가 뭐냐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그래도 한 자리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달려온 거예요. 그들의 마음은 바로 세속적 가치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요한 야고보가 한 자리씩 하면 우리는 남는 게 뭐냐 막 계산을 때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열받는 거예요.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배우고 싶은 것만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 경향이 있어요. 스승이신 예수님은 정말 중요한 걸 주고 싶으셨는데 그건 안 받아들이고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3년 동안 주님을 따라다녔지만 주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 원리 본질,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인 이 섬김에 대해서는 도대체가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 나라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나라로 살기를 원한다. 그러면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꿔야 돼요. 섬김입니다. 섬기는 순간부터 우리 안에 그리고 공동체 안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이 돼요. 섬김을 받으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우리에게는 세상 나라 그리고 지옥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이 섬김의 원리를 깨닫고 그것을 몸에 익히고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답답한 일이에요. 3년 동안 그렇게 보여주시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보잘 것 없는 제자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섬겨주셨는데 이 제자들은 도무지 그 생각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에 실물 교육까지 시킵니다. 식사를 하시다가 갑자기 일어나셔서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런저런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결론은 이거예요.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를 섬겼으니까 이후로는 너희도 서로 섬기는 삶이 되라.
도대체가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 삶의 방식을 바꾸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지금 실물 교육을 통해서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게 그렇게 쉽지를 않아요. 크리스찬의 삶 교회 공동체의 원리 그리스도인의 가정의 원리는 여러분 섬김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섬김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포기하고 그냥 교회도 나오고 뭐 묵상도 하고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지만 삶의 방식이 섬김이 아니라 섬김을 받으려는 세상의 가치로 살아가면 결국 우리는 실패하게 돼요. 천국이 되어야 될 공동체가 지옥으로 변하고 맙니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습니다. 저 사람들 열심히 교회 나가고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보고 전도는 하는데 가만히 보니까 원리가 똑같아 우리가 추구하는 원리와 세상이 추구하는 원리가 똑같은 거예요. 그럴 바에야 뭐 하러 교회에 나가느냐 전도가 안 되는 거예요.
한국교회는 놀라운 부응을 했어요. 그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헌신했고 순교했고 이런 원리를 따라 살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교회도 세속화되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는 교회를 다니지만 삶의 원리가 세상 사람들하고 다르지 않아요.
그리고 그보다 더한 경우도 있어요. 그게 문제입니다. 미래학자들은 한국교회가 앞으로 10년, 20년 후에 200만 300만까지 떨어질 수 있대요. 인구학적으로 어린이들이 적어요. 걔네들이 또 크리스찬이 적어요. 갑자기 어느 날 기독교가 인구가 떨어진다고 그래요. 그게 위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더 큰 위기는 뭐냐 이미 교회 다니고 주님의 제자라고 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이 삶의 원리를 바꾸지 않고 있다는 거예요. 모양은 크리스찬인데 사는 것은 우리가 세상 사람보다 더해 예수를 믿어도 섬기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에서 잘 되기 위해서 섬김을 받는 지배하는 위치에 서기 위해서 신앙과 주님을 이용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기도하면 할수록 자기의 그 욕심 탐욕을 더 강화시킵니다.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해도 기도 내용이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낮추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 자기 욕심을 이루고자 기도하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더 욕심스러워지는 거예요.
여러분 기독교 무신론이 어떻게 시작된 줄 아세요? 포이에르바하라고 하는 신학자가 기독교 본질이라는 책을 썼어요. 유럽의 기독교를 보니까 유럽의 당시에 기독교인들을 보니까 교회는 열심히 나가는데 신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믿는다고 하는데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없더라 이거예요. 이 학자가 본 바로는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욕망을 하늘에 투영해 놓고 그게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섬긴다는 거예요.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내 욕망을 투영해 놓고 그것을 이루어주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거예요.
그 학자의 눈에는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 여러분 무신론을 누가 만들어내느냐? 우리가 만들어내는 거예요. 저 사람들 보니까 하나님이 없네. 섬김의 원리를 따라가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에서 이런 손가락질을 받게 돼 있어요. 이 사순절 기간에 주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그토록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셨던 이 섬김의 원리를 깨닫고 이것을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정착시키고 실현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가 없어요. 서로 섬기는 가정, 서로 먼저 섬기는 교회, 섬기는 직장이 되면 거기서부터 천국이 시작이 됩니다.
섬기되 말 없이 행동으로 섬기면 더 좋습니다. 물론 말로 섬기는 것도 있어요. 행동으로 못하면 말이라도 잘해야 돼요.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지지하고 격려하고 자꾸 찌르고 비판하고 정제하고 아프게 하면 안 되고, 우리가 입을 열어서 누군가를 향해서 말을 할 때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하는 거 그것도 섬김이에요.
더 중요한 섬김은 말과 혀로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주면 더 좋습니다. 사실 말을 잘하면 좋은데 저를 비롯해서 우리 모두가 말에 실수가 많잖아요. 말을 잘하려면 자기 내면 세계를 잘 가꿔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처음에는 잘하다가 어느 순간에 툭 튀어나오는 게 자기 속에 있는 것이 튀어나오기 때문에 늘 문제가 됩니다. 그게 말이 적으면 말이 적으면 허물이 적은 법이에요.
가능하면 우리 입을 닫고 묵묵히 섬기는 자리에 간다면 그건 진정한 섬김이 됩니다. 또 섬기되 먼저 서로 섬기는 게 좋아요. 먼저 저 사람이 섬기면 내가 섬길게 이렇게 말하면 거기는 아마 주님 오실 때까지 섬기면 안 됩니다. 서로 내가 먼저 하지. 그러나 서로 해야 돼요. 서로 한 사람만 죽도록 하면 나중에 지쳐 교회는 섬기는 곳이니까 너희들 섬겨라. 당연히 해야 될 거 하는 거니까 나는 섬김 받을게 이러면 안 된다 이거예요.
누군가가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을 받고 빨리 자신도 그 대결에 들어가야 돼요. 그러면 거기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천국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 먼저 또 이 섬기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섬겼다가 괜히 호구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 때문에 내가 섬기면 멈출 수 없어요. 계속 저 사람은 원래 그러는 사람이야. 그렇게 생각할까 봐 지리에 겁먹고 먼저 섬김을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사실 또 그러면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보고 계시는데 그래도 하면 돼요. 그러나 그게 너무 억울하면 조금 하다가 같이 하자고 또 제안을 해도 돼요. 그렇게 해서 우리 공동체가 천국을 이루어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섬기셨어요. 섬기시대 자기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내어주시기까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여러분 이보다 더 큰 섬김이 어디 있어요? 목숨을 내어주셔서 우리를 영원히 죽을 목숨에서 영원한 삶으로 옮겨주셨습니다. 최고의 섬김입니다. 이사야서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주님이 왜 찔리셨고 왜 상하셨고 왜 징계를 받으셨고, 왜 채찍에 맞으셨습니까? 주님이 무슨 죄가 있으셔서 병이 있으셔서 그런 게 아니잖아요.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그러신 거예요. 우리는 이 주님의 거룩한 섬김이 있었기 때문에 영생을 얻었고, 죄 용서받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거룩한 섬김으로 태어난 존재예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이 보여주신 대로 살아야 돼요. 섬김의 삶 하나님을 섬기고 내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그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이에요. 이렇게만 하면 천국 된다니까요. 근데 이거 안 하면 아무리 좋은 공동체도 금방 깨지고 거기는 지옥으로 변해버립니다.
쉽지 않습니다. 섬김보다 섬김 받는 일이 쉽습니다. 그게 우리는 익숙해져 있어요. 섬김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가치 있는 일이에요. 그래서 그 가치 있는 일을 하고 나면 행복해집니다.
서로가.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희는 너희 중에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게 천국의 원리입니다. 세상의 문제도 사실은 이 부분에서 발생해요. 믿는 사람이든지 믿지 않는 사람이든지 섬김이 없는 곳에서는 서로 섬김만 받으려고 하는 곳에서는 불평과 불만, 원망, 미움, 경쟁, 갈등, 전쟁이 일어납니다. 행복, 평화, 기쁨, 감사라는 단어가 사라져요.
그러나 누군가가 섬김을 시작하면 이 모든 것들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리더십 이론 중에 서번트 리더십 21세기 들어서면서 굉장히 유행했던 리더십 개념 중의 하나입니다.
섬김의 리더십 또는 종의 리더십 사실 성경에서 온 건데 이게 경영학 리더십에 들어갔어요. 그래서 일반 기업에서도 이 섬김의 리더십, 서번트 리더십을 적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원리예요. 이 개념은 그린리프라고 하는 학자가 헤르만헤스의 동방순례라는 책을 읽다가 발견한 거라고 합니다. 동방 순례에 의하면 동방 순례단원이 있었어요. 이 팀이 있었어요. 이 팀원 중에 레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그 팀원 중에서 허드렛일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아주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가장 밑바닥 일을 하는 사람이었어요.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어요. 저 사람은 허들한 일이나 하는 별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지체 높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지체 높은 성직자들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이 팀을 이끄는 줄 알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레오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가 사라지자 갑자기 혼란이 오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이 순례가 중단되고 말았어요. 형편없고 아무 큰 의미가 없어 보이는 그 사람이 하던 그 허들의 일 그것이 돌아가지 않으니까 이 팀이 중단돼 버린 겁니다. 평소에는 몰랐던 네오의 역할을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그들은 위기 상황에서 깨달았어요.
그제야 사람들이 레오를 찾기 시작했어요.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한 사람이 이 네오를 찾았습니다. 놀라운 일은 그가 형편없는 사람이 아니라 그 교단에서 교단의 책임자 그러니까 최고 장이었던 거예요.
정신적 지도자 또 훌륭한 리더였습니다. 그 사람이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그 자리에서 이 섬김의 도를 다했기 때문에 이 팀이 움직일 수가 있었던 거예요. 여기서 서번트 리더십이라는 개념이 들어오게 됐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서번트 리더십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주님의 스피릿이 흐르는 곳이기 때문에 이 종의 리더십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좋은 교회가 어떤 교회냐 영향력 있는 교회가 어떤 교회냐 서로 섬기는 이들이 많은 교회 남들이 알아주든 몰라주든 자기 자리에서 섬기는 것입니다.
또 섬기다 보면 또 열받기도 하죠. 나만 이렇게 하는 거냐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주님이 보고 계시고 정말 당신은 중요한 자리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일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움직이는 거예요.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 가장 많이 섬기는 자가 가장 권위 있는 자입니다. 누구도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세속화 세속화라는 건 뭐냐 하면 세상의 가치가 들어오는 거예요. 세상의 가치 중에 가장 깊이 침투하는 게 뭐냐 하면 섬김을 받으려는 가치가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순식간에 교회는 아수라장이 됩니다. 싸움터가 되고 지옥이 될 수밖에 없어요.
가정도 섬김으로 세워지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처음 결혼할 때 누구나 천국 같은 가정을 꿈꾸지 그렇지 않고 결혼한 사람 있나요? 어쨌든 우리는 정말 사랑이 넘치는 천국을 이러면서 가정생활을 할 거예요.
그런데 막상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지고 벗고 싸우고 그러다가 뭐 갈라서기도 하고 어려운 거예요. 가정생활이 그래서 로맨스를 오래 하려면 결혼하지 말고 연애만 해라 그렇게 그런 말도 있어요.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기가 어려운 거예요. 왜냐하면 서로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연애할 때는 섬기죠. 목표를 이룬 다음에는 내가 그동안 이렇게 투자를 했으니 내가 좀 이제 이제는 남편 대우받고 와이프 대우받고 이런 생각이 지배하는 거예요. 창세기에서도 그랬잖아요.
너는 남편을 사모하지만 남편은 너를 지배할 것이다.
소악이 사모한다는 게 뭐냐면 그 그리워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하와에게 하신 말씀이 남편을 지배하려고 한다는 거예요. 남편의 자리를 넘본다. 그러나 남편은 너를 지배할 것이다. 둘이 싸우게 돼 있다 이거예요.
인간관계가 그런 겁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겁니다. 부부 간에도 근데 이게 처음에 잘 안 돼요. 그래서 오랜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 비로소 철이 들어 저도 결혼생활 해보니까 그렇더라고 우리도 한 15년은 겁나게 싸웠던 것 같아요. 이게 잘 안 맞아요. 이런 얘기하지 말라고 자꾸 그러는데 이게 현실이에요. 현실. 우리는 한 2년 반 동안 아주 극심한 그 반대를 극복하고 결혼을 했지만 막상 살아보니까 안 맞는 게 너무 많더라고요. 그냥 싸우는 거예요. 요즘은 거의 안 싸운다. 거의 서로 포기한 것도 있고 또 이제 저 나름대로 도를 닦은 것도 있는 거예요.
이제 원리를 깨달은 거죠. 그중에 제일 중요한 원리가 뭐냐 하면 섬긴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예요. 부부가 서로 섬기고 형제 간에 서로 섬기고 부모 자식 간에 서로 섬기면 그때부터 천국이 시작이 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 가정에는 그런 천국이 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모든 걸 갖췄어도 거기가 지옥이 되는 거예요. 부인은 그저 남편 식사를 차리면서 너무 행복하게 차려야 돼요. 내가 이걸 하러 시집을 왔지 이렇게 생각을 하고 아주 그걸 기쁨으로 알고 차려야 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내가 겨우 이거 하려고 내가 시집 온 줄 아냐 말이야.
남편은 말 없이 먹어야 돼요. 저는 못한 게 많지만 아주 잘한 거 하나는 음식에 타박을 안 한다. 딱 한 가지 짠 것만 싫어해. 짠 것은 뭐 아니면 내가 물 타서 먹으면 되니까 그래도 해주는 대로 먹어요. 그것도 하나의 섬김이 열심히 만들어서 줬는데 이러쿵 저러쿵 말하면 그다음부터 정말 해주기 싫어요.
군대에서도요. 군대 얘기하면 좀 여성들한테는 그런데 군대에서도 고참들 훈련 나가서 고참들 밥해 줄 때 아주 까다로운 고참들이 있어요. 그러면 밥 딱 해가지고 거기다 침 한 번 뱉고 갖다 주는 거예요. 까다로우면 뭐 이렇게 했냐 저렇게 했냐 하면 거기에 침 뱉는 거예요. 침 먹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정에서도 서로 그런 좋은 마음으로 맛있게 먹어주는 것도 섬김입니다. 맛없는 걸 맛있게 먹어주는 거 그 놀라운 섬김이에요. 이거 정말 맛있다고 하면서 먹으면 천국이 되는 거예요. 이걸 음식이라고 만들었냐 그러면 저쪽에서 월급이라고 쥐꼬리만큼 받아가지고 오면서 뭔 지랄이야 그런다고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이만큼 벌기 위해서 그 직장에서 더러운 꼴을 내가 이것 벌려고 당장 집어치우고 나오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그래도 처자식 생각해서 버티고 있는 거예요. 남자들 정말 고생 많습니다. 아멘 도무지 아멘이 없으니까 우리 남자들만 아멘 남자들 고생 많은 거예요.
그 밖에 나가서 직장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버티고 돌아오는 것도 섬김이에요. 그걸 고맙게 여겨야 돼요. 자식도 그런 부모님들이 해주는 나는 왜 이렇게 흙수저로 태어났지 이렇게 불평하면 안 돼요. 그것도 고맙게 여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서 천국이 되고 하나님은 그런 가정을 축복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섬김은 감동을 주고 감동은 변화를 일으킵니다. 현대인의 질병은 마음에서 온다고 하잖아요. 마음의 병은 왜 우느냐 삶의 보람이었기 때문에 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 보람이 어디서부터 오느냐 섬김에서 온다는 거예요. 누군가가 남을 누군가를 섬기기 시작하면 마음이 기뻐지고 보람이 와 그러면 마음의 병도 치유가 되고 육체의 병도 치유가 돼요.
특히 마음에 병이 있는 분들을 고치기 위해서 그런 양로원이나 이런 데 보내가지고 봉사하게 하잖아요. 마음의 병이 되게 어려워서도 오지만 너무 편해서도 오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해 그냥 남을 위해서 하는 일이 없어. 그래서 마음의 병이 오는 거예요.
누군가를 섬기려는 마음을 가지고 가서 섬기기 시작하면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테레사 수녀가 미국에서 어떤 도시에서 간증 말씀 전하는데 한 여인이 찾아왔어요. 수녀님 저는 더 살 희망도 없고 마음도 없어서 오늘 수녀님 간증 한 번 듣고 자살하려고 결심하고 왔어요. 수녀님이 그 사람을 달랬어요. 그러지 말고 한 달만 우리 캘커타에 와서 우리 사역지에 와서 한 달만 봉사하고 죽어라 그랬더니 이 사람이 뭐 한 달 못할 게 뭐 있어요 그래서 한 달을 가서 봉사를 하다가 그 그 가난하고 힘들고 병든 사람들을 섬기다가 마음에 희망이 들어오고 보람이 들어오고 치유가 일어났어. 그 마음의 병이 깨끗하게 나음을 얻었어. 그리고 거기서 평생을 사역하는 사역자로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섬김이 주는 축복이에요. 나는 남을 섬긴다고 생각하지만 섬기는 사람에게 먼저 축복이 와요. 우리가 지난 달에 2주간 아프리카를 다녀왔잖아요. 딱 보면 갔다 온 사람은 딱 보여. 얼굴이 달라졌어. 여러분보다 더 낫다고는 말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옛날하고는 달라졌어. 얼굴이 훤합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사실 힘든 곳이에요. 가려고 자비량 해야 되니까 아르바이트 하고 잘 먹을 거 줄여가면서 준 비하고 40도의 무더위에서 싸워야 되고 10마리 중에 한 마리가 뭐예요? 말라리아래요? 말라리아 말라리아 걸리면 거의 죽다 삽니다. 막 그 긴장해야 되고 에어컨이 없어 본부에는 있는데 우리 사역하는 현장에는 없어요. 거기서 더위와 싸우면서 2주를 살아야 되는 겁니다. 음식을 아프리카 치고는 굉장히 잘해주시고 이제 본부에 돌아가면 잘해주셔서 잘 먹고 정말 아프리카까지 와서 이렇게 잘 먹나 하지만 빌라주 나가서는 그렇게 먹을 수가 없어요.
근데 이번에는 빌라주 사역이 많았어. 가면 현지 음식을 먹어야 돼요 .현지 음식 쉽지 않습니다. 근데 거기 계신 분들은 이거 굉장히 좋은 음식이라고 아프리카 최고 음식이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셔요.
근데 이게 우리 선교사 된 마음으로 이게 잘 안 받아들여 이게 이게 좀 거시기하다고 이것도 못 먹겠으면 이럴 수는 없잖아요. 아주 맛있다고 먹지만 제가 표정을 보니까 다 맛있는 건 아니야 힘들어요. 그리고 이 바게트만 해도 파리에서 먹는 바게트는 어디서 사도 정말 맛있어요.
근데 여기서는 이렇게 식당에 잘라놔도 잘 안 먹잖아 거기 맛있는 바게트라고 해서 가져왔는데 속은 텅텅 비고 맛이 없어요. 솔직히 그런데 맛있게 먹어야 돼요. 우리 선교사님들이 그렇게 그 현장을 살았어요. 그리고 이제 이 빌라주에 가면 우리가 그 음식만 먹을 수 없으니까 본부에서 이렇게 멸치조림 멸치조림이 아니었나 뭐 하여튼 뭐 콩조림 기타 등등 몇 가지를 딱 이렇게 가져와서 먹는데 그건 진짜 아껴 먹어야 됩니다.
그거 떨어지면 끝나는 거예요. 돌아갈 수도 없고 그런데 이제 우리 이렇게 거기 목사님하고 저하고 우리 교육자들하고 이렇게 이제 선교사님들이 먹는데 이게 반찬을 그걸 섞어서 먹어야 되니까 먹다가 우리 기억 k 모 목사님이 아니 그걸 콩자반을 숟갈로 먹어버렸어요. 먹는데 교회 목사님이 보셨어요 그리고 굉장히 진지하게 말씀하셨어요.
아프리카에서는 콩자반을 숟갈로 먹으면 안 됩니다. 젓가락으로 하나씩 먹어야 돼요.
나 농담 줄 알았는데 진짜 진지하게 말씀하세요. 그러다가 그 우리 교회 케이 부목사님이 먹다가 나도 눈치를 보고 야 큰일 났네 안 먹을 수도 없고 알겠습니다. 그래가지고 이제 저도 이렇게 한 알씩 먹고 우리 케이 목사님도 하나 또 케이 전도사님도 지 전도사님도 하나씩 먹다가 그 목사님이 딴 데 보는 순간 또 숟갈로 먹고 그러더라고 하여튼 그런 에피소드가 나올 만큼 열악한 환경이에요.
뭐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갔다 온 사람들은 다 행복해 왜 그런 어려운 환경이지만 그곳에서 섬김의 도를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마음에 행복이라는 보람이라고 하는 기쁨이라고 하는 축복을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섬김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섬김이 주는 축복은 더욱 놀랍습니다. 주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섬기시고 또 죽기까지 섬기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 제자가 된다는 것은 주님처럼 사는 거예요. 우리 보고 십자가 지라고까지는 안 하셨어요. 십자가에 매달리라고까지는 안 하셨다. 그러나 섬김, 섬김의 도를 따라 살아가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짊어져야 될 사명이고 십자가입니다.
이번 사순절에 저와 여러분,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 교회가 이 섬김의 도를 통해서 천국되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