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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기본 진리 (11)
성령님은 어떤 일을 행하시는가?
요 16:7~15
I. 서론
요한복음 14장부터 시작되는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고별 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고별설교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성령”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7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제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가시는 것이 유익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사람을 먹여 주셨고, 병든 사람을 치료해 주셨고, 죽은 사람을 살려 주셨습니다. 풍랑을 만나면, 잠잠케 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전부였습니다. 예수님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당연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임하시자,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이와 비슷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삶을 살아가다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건이나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사건이나 상황을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뜻보다 더 좋은 것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혼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을 위해서도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가시고, 성령님께서 오시는 것이 왜 제자들에게 유익할까요? 1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요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님께서 유익한 이유는 “성령님께서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신약성경을 기록하도록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본문과 같은 단락에 있는 말씀을 보면,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제자들이 신약성경을 기록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오셔서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진리 가운데서 살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삶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하나 던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는 한 마디로 예수님입니다. 좁은 의미로는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넓은 의미로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성경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의미는 우리를 예수님을 믿도록 인도하시며, 예수님을 닮도록 인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의미는 우리가 성경을 깨달아 말씀대로 살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씩 살펴 보겠습니다.
II. 본론
1. 첫째, 성령님의 사역은 예수님을 믿고 닮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1) 먼저,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는 성령님의 사역을 통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고 있다면, 성령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어령교수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호텔 복도를 지나다보면, 문틈으로 사이로 잔치가 벌어지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시간이 불과 1초라고 할지라도 그 장면을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천지차이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세계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계시로 1초라도 천국을 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천지차이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이와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잠깐 천국을 맛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마치 문틈으로 사이로 잔치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그 잔치에 참석할 수가 없습니다. 문을 활짝 열어서 그 장면을 오랫동안 볼 수도 없습니다. 문을 활짝 열고 잔치에 참석하는 것은 우리가 죽은 후에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문틈으로 천국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의 결단을 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한 점 부족함없이 완전히 이해할 때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진리를 깨닫도록 하시어 잠깐이지만 천국을 잔치를 맛보게 해 주실 때입니다.
2) 그 다음은,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열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종합해 보면, 누구의 형상이 떠오르십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그림이 아니라, 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규정해 주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무슨 말입니까? 성경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한 기록이기 보다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성령의 열매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세 가지 열매씩 차례대로 묶어서 주제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이냐면, 첫 번째 묶음 (사랑, 희락, 화평)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맺게 되는 열매이고, 두 번째 묶음 (오래 참음, 자비, 영선)은 이웃과 관계 속에서 맺게 되는 열매이고, 세 번째 묶음 (충성, 온유 절제)는 자기 자신 안에서 열매라는 것입니다.
A. 먼저, 사랑, 희락, 화평입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사람의 첫 번째 열매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맺는 열매이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은 결코 맺을 수 없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의 두 번째 열매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락이고, 세 번째 열매는 화평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락과 화평은 상황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초월한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 있을지라도 항상 기뻐하는 것이고,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실 때,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B. 두 번째 묶음입니다.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이 세 가지 열매는 이웃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은 나를 화나게 하거나 나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사람에 대해서 오래 참는 것입니다. 자비는 그런 사람에 대해서 자비한 마음을 가지는 소극적인 태도입니다. 양선은 그런 사람에 대해서 선하게 대하는 적극적인 행동입니다.
C. 마지막 묶음 입니다. 충성, 온유, 절제.
이 세 가지 열매는 나 자신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충성이라는 것은 헬라어 원문 상, 믿음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내가 하나님이나 이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믿어 주는 것입니다. 즉,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온유라는 것은 연약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것을 말합니다. 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한 것입니다.
페더러라는 테니스 선수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선수가 공을 칠 때 보면, 굉장히 부드럽습니다. 그런데, 공이 약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묵직합니다. 야구도 잘하는 선수를 보면, 스윙이 굉장히 부드럽게 합니다. 하지만, 타구가 맞으면, 홈런이 됩니다. 골프 스윙도 비슷할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연약한 사람이 아니라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돌과 같은 딱딱한 마음이 아니라, 스펀지와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돌은 물을 부어도 물을 흡수할 수 없지만, 스펀지는 물을 그대로 흡수합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사람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때, 돌과 같은 사람은 그 진리에 대해서 마음을 닫지만, 부드러운 스펀지와 같은 사람은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씨앗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절제라는 것은 단순히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스릴 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언급된 모든 성령의 열매들을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이루게 잘 다스리는 것입니다. 가끔 이런 사람을 만나곤 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집안 일을 내팽개치고, 시간만 나면,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고, 교회에 와서 성도들과만 시간을 보냅니다. 이런 사람은 절제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사람이라고 보기 힘든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사람은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이웃을 섬기고, 자신의 삶도 돌보는 사람입니다.
이 모든 모습이 예수님의 삶 속에서 완벽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삶에 순종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2. 둘째, 성령님의 사역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깨닫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진리는 넓은 의미로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성경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령께서 쓰신 책입니다.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만약 성경이 사람이 쓴 책에 불과하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권위를 갖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성령께서 사람을 통하여 지으신 책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원저자는 성령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디모데후서 3장에서 언급한 “모든 성경”은 “구약성경”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신약 성경이 기록되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런데, 신성 성경 역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요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한 구절 더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문맥에 있는 예수님의 고별설교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 성경의 모든 저자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성경을 기록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한국 대학 정문에 가보면, 수많은 강의에 대한 광고가 현수막으로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인기 있는 강의는 베스트셀러 저자가 직접 강의하는 특강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성경의 저자이고, 우리에게 그 말씀을 깨닫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으실 때, 그 읽는 것을 잘 깨달으십니까? 아니면, 성경이 수면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지금 교회당 안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눈으로 교회당 안에 있는 물건들을 보고 있습니다. 설교단, 의자, 창문, 휘장.. 그런데 이것 아십니까? 아무리 우리의 시력이 좋아도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합니다. 만약, 태양이 완전히 사라지고, 모든 전기가 다 꺼져서 온 세상에 빛이 하나도 없이 깜깜하다면, 우리는 전혀 앞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시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 빛을 비추어 주셔야지만, 비로소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어도 영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인간의 저작물로만 믿는 이유는 성령의 조명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책이나 광고를 통하여 성령 집회라는 이름으로 많은 집회나 세미나가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역사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기준도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성경을 기록하셨기 때문에 성경의 내용과 반대되는 역사를 일으키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박영돈 교수님의 책을 보면, 이런 주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두 가지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시한부 종말론입니다.
1992년 10월 28일, 다미 선교회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날 재림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이 계시를 주셨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1992년 10월 28일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성령께서 성령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말씀하신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 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자신들에게 계시를 주셨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2) 천국 방문 이야기입니다.
Thomas Choo라는 사람이 쓴 <Heaven is so real>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책입니다. 이 책은 자신이 7년 동안 열일곱 번 천국을 다녀온 경험을 쓴 책입니다. 이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자신의 어머니와 친구들이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고통받는 장면을 보고 있을 때에,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고 합니다. “딸아, 나는 네가 그들을 보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 알고 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위해 쓰는 책에 이 체험을 반드시 기록해야 한다. 이것이 네 부모와 친구들을 보여 준 이유이다. 너는 세상 사람들에게 지옥의 실상을 경고해야만 한다. 내가 나의 교회를 내게로 거두어들이기 위해 재림하기 전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이 내용은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와 상반됩니다. 눅 16:30~31,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자신의 가족에게 보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가 살아나더라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말합니다.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큰 의미에서 성경을 의미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성경 말씀을 듣지 않는 자는 죽은 자가 살아나더라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고, 성령님께서 누가를 감동시키셔서 이것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천국을 다녀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천국 체험을 하고 세상에 다시 온 이유가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인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하시지 않으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이 하신 말씀과 상반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성령의 역사를 성경 말씀을 기준으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 드린 내용이 사실은 우리의 신앙 생활의 전부입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성경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는 것.
온누리교회를 담임하셨던 하용조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습니다. “15세기 미술가,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시스 2세의 부탁을 받고,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에 그린 그림 중에 ‘천지창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손을 내밀고 있고, 아담이 하나님께 응답하기 위해 손가락을 뻗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손가락은 결코 닿지 못합니다. 성령님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이 부분을 담당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간극을 메우시며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 되게 만드십니다.”
참 좋은 예화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다리가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직접 들어 오셔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그리고, 진리를 깨닫도록 인도해 주셔서 우리가 진리 가운데 거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모두 진리를 알고, 그 진리 가운데 거하기를 소망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