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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년 시절
1926년 1월 7일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의 면장이던 부친 김상배와 어머니 이정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김상배와 이정훈은 생전에 아들만 7명을 낳았는데 김종필이 5번째 아들이다. 부여보통학교 6학년 때 키쿠치 칸(菊池寛)의 연애소설 <두 번째 키스>를 읽다 하루종일 두들겨 맞기도 했고 공주중학교에 진학했을 때는 동맹 휴학을 주도했다가 공주경찰서 사상계에까지 넘겨졌는데 면장이던 아버지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공주중학교 졸업 후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 1944년 주오대학 예과 독법학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조선인은 왜 전역(戰役, 병역 의무)에 참여하지 않나"라는 소리를 하던 일본인 선배를 때려눕히고 후환이 무서워 자퇴 원서를 내고 도망치듯 귀국했다. 귀국한 뒤 대전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했는데 교생 실습 중 일본인 교감과 말다툼 끝에 때려눕혀 일본 제국 육군 헌병대 영창까지 구경했다. 역시 면장이던 부친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퇴교는 간신히 면했지만 산간 오지 학교로 발령이 나버렸으며 결국 버티지 못하고 3달 만에 사표를 내버렸을 때 8.15 광복을 맞았다.
1946년 경성사범학교 사회교육과에 진학했다가 그만두고 군대에 입대하는데, 김종필 본인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좌익 단체인 충청남도교육연맹위원장이던 둘째형을 잡으려고 서북청년단이 그의 친가를 습격해 연로한 김종필의 부친을 폭행했다. 충격을 받은 부친은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재산은 모리배들의 손에 넘어가버렸다. 집안이 풍비박산난 후 스스로 벌어먹고 살기 위해 서울에서 택시 몇 대를 구입해 운수업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내버려 막막하던 차에, 정신을 차려볼 셈으로 입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 외교관 그레고리 헨더슨이 미국에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김종필은 '국대안 파동' 과정에서 퇴학 처분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 좌익 활동을 했으며,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군에 입대했다고 한다.
"1946년에 미군정은 서울대 사범 대학을 비롯해 몇 개의 대학을 통합하려고 했다. 그 결과 일부 대학, 특히 좌익 교수단과 학생들 사이에서 격렬한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미군정의 명령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독립 지위를 상실하면 미국의 감시가 강화될 것을 우려했다. 사범 대학은 적극적으로 투쟁했다. 이 싸움에서 좌익의 입장을 견지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김종필과 중앙정보부에 있는 그의 측근 김용태, Korean Republic의 발행인인 김동성, 동양 통신(Orient Press)의 김규환, 전 공보부 장관 이원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 개입된 사람들을 철저히 조사해 보면, 분명히 공화당 총무인 김동환을 비롯해 더 많은 사람들이 드러날 것이다. 박정희가 사관학교에서 조직을 형성했던 것과 거의 같은 때에 그의 조직과 비슷한 또 다른 조직이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질 수 있다. 일부 소식통에 따르면, 김종필과 김용태는 불온한 사건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사범 대학에서 퇴학 처분을 받고 대전 근처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 남로당으로 지역 청년들을 전향시키는 일을 했다고 한다.
김용태는 1948년에서 1950년까지 장항여자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김종필과 김용태는 그 지역의 좌익분자들과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 지역에서 강한 세력을 누리고 있던 이범석의 우익단체와 충돌을 일으켰다. 이 사실은 쿠데타의 지도부들이 처음부터 이범석 장군과 그를 따르는 청년단에 강한 적개심을 보였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좌익분자들에 대한 단속이 진행되자, 일부 좌익분자들은 체포되는 것이 두려워 당시 조직 확대를 위해 청년들을 필요로 하던 장교 양성소와 군방첩대(CIC)에 들어가는 길을 모색했다.
김종필은 여수·순천 10.19 사건을 계기로 장교 후보 선발에 보다 엄격한 안보 규정을 적용하기 직전인 1948년 8월에 장교 양성소의 예비학교인 지도자 양성소에 입학했다. 그는 동기생들에게 지도력을 발휘해 자신의 조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그곳을 졸업하였고, 곧 G-2에 들어가서 박정희를 만나고 알게 되었다. 그는 절친한 친구인 김용태를 G-2의 문관으로 데리고 오기도 했다.
김종필의 6형제 가운데 전부는 아니지만 몇 명은 1950년에 북한이 남침했을 때 공산주의자들에게 협력한 것으로 보인다. 6형제 가운데 김종식은 그의 걸출한 형제 김종락이 인정하듯이 살아 있다면(그럴 가능성이 있다) 북한에 있을 것이다. 김종필의 또 한 형제는 충청남도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협력한 죄로 동네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고 현재 고향 마을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한 형제는 남로당원으로 한국 전쟁에 참여했지만 그 후 김종필이 그의 체포를 막았다고 한다. 김종필 형제가 남로당에 협력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살던 동네에서는 매우 잘 알려져 있으며, 그것은 모든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온 원인중 하나였다."
김형욱도 문명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김종필은 과거에 좌익 운동을 했으며 경찰이 잡으러 다니니까 군대로 도망을 갔다고 하면서 크레믈린처럼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는 자라고 했다.
2. 군인 시절
김종필은 충청남도 온양(지금의 아산시)의 대한민국 육군 제13연대에 사병으로 배속되었다. 그러나 해방 정국의 혼란 때문에 당시 군대는 악폐습, 똥군기라는 설명으로는 가히 표현이 부족할 만큼 개판이었고 결국 가혹 행위를 못 이겨 불침번을 서던 와중에 탈영해 버렸다. 그렇게 서울로 올라와 서울대학교 동기생인 김용태의 자취방에 얹혀 살게 됐다. 한심한 처지의 울분을 억누르며 지내던 중 해방 이후 국도극장(國都劇場)으로 이름을 바꾼 옛 황금좌 극장으로 바람을 쐬러 갔다가 육군사관학교 교도대와 마주쳤다. 김종필은 무슨 용기가 났는지 극장 매점에 있던 교도대 중대장을 찾아가 사정을 털어놓고 재입대하겠다고 하자 탈영이 흔하던 전쟁 이전 시절이라 중대장은 흔쾌히 김종필을 받아들였다. 결국 육군사관학교 교도대에서 다시 사병으로 복무하던 중 김종필을 눈여겨 보던 중대장이 그에게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권유했고 그렇게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하게 된다. 이후 8기생 졸업식에서 우등상장을 받을 정도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보병 소위로 임관하게 된다. 이때 1,300여명의 8기 졸업생들 중 32명만이 대한민국 육군본부로 배속됐는데 김종필 역시 그 중 1명이었다. 김종필은 정보 장교로 배정되어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북한반장으로 근무하게 되는데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상황실장 박정희와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박정희는 육군사관학교 2기로 임관하여 현역 소령으로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과장으로 재직 중 남조선로동당 입당 전력이 들통나서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 작업으로 파면당한 후 장도영과 전임 정보국장 백선엽의 도움을 받아 문관 신분으로 직제에도 없던 정보국 상황실장 직을 맡고 있었다. 정보국으로 배치된 육군사관학교 8기생들에게 전투정보과장 이후락이 상황실장에게도 인사를 하라고 했는데 박정희는 현역 장교가 아니라는 자괴감이 들었는지 "나한테는 인사할 필요없다"라며 자리를 피해버렸지만 이후 박정희와 육군사관학교 8기생들은 죽이 맞아서 어울려 다녔고 결국 이들은 5.16 군사정변의 주역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박정희의 중매로 박정희의 셋째형인 박상희의 큰딸 박영옥과 결혼하게 되었다. 김종필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6.25 전쟁 전 서울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박영옥은 서울에 있는 유일한 친척이자 작은아버지인 박정희를 자주 찾아오며 의지했는데 전쟁 중 대구로 피난왔다가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앓던 중 김종필이 와서 의사를 부르고 간호하면서 서로 눈이 맞게 되었다. 박영옥의 작은아버지 박정희는 처음에는 김종필이 박영옥과 사귀는 것을 싫어했지만 김종필의 동료인 이영근, 석정선 등이 김종필과 박영옥은 어울린다고 박정희를 설득하면서 마음이 바뀌었고 결국 어느 날 "자네, 내 조카딸 어떤가?"하고 박정희가 말을 던지게 되었다. 당시로서도 미인이던 박영옥을 김종필이 싫다고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김종필은 박정희와 처삼촌-조카사위라는 인척 관계로 묶이게 되었고 이후 박정희는 김종필을 조카사위 입장에서 이름을 부르기보다는 거의 '임자'라고 불러댔다.
6.25 전쟁 무렵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 유양수는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강하게 주장하다 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던 정보국장 장도영에게 찍히는 바람에 6사단 정보참모로 밀려났고 전투정보과 북한반장 백 모 대위는 북한과의 무역 거래 과정에서 부당 이득을 취한 것이 들통나면서 처벌받기 직전 권총으로 자살하는 등 전쟁을 앞두고 김종필이 소속된 전투정보과는 분위기가 어수선하기 그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반의 선임 장교가 된 김종필은 이미 전선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북으로 정찰요원을 급파했지만 전원 연락이 두절되고 말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육군본부의 당직 장교로 근무하던 김종필은 북한군이 삼팔선을 침범했다는 소식에 전면전임을 직감하고 육군본부의 각 국장들을 호출했으며 채병덕 총참모장 및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상황을 전파하는 등 당직 장교의 임무를 수행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당시 상황은 일개 중위였던 김종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이후 1951년 대위로 진급했으며 미국 유학 장교단에 뽑혀 조지아 주의 포트 베닝(미 육군 보병학교)에서 연수를 수료했다. 이때 딸 예리를 얻는다. 부인 및 가족들은 한국에 그대로 있었다. 6.25 전쟁 후반부인 1952년 8월부터 1953년 5월까지 6사단 19연대의 수색중대장으로 참전한 것을 제외하면 계속 정보 장교로 복무했다.
3. 정치인 시절
3.1. 제3공화국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들어선 제2공화국 장면 내각 시절 부패한 장성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이른바 '정군 운동'을 벌이다 '항명 파동'으로 강제 전역되었다. 그리고 예비역 중령의 신분으로 5.16 군사정변의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훗날 인터뷰에 따르면 쿠데타 실행을 자신이 먼저 박정희한테 주장했다고 한다. 쿠데타 성공 이후 현역으로 복귀하여 육군 준장으로 진급한 후 다시 예편했다.
박정희의 오른팔이자 실세로 군림했으며 강력한 정보기관의 설립을 주장하여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당시 김종필은 중앙정보부를 대외 정보 수집을 주임무로 하는 CIA를 본따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국내 방첩 위주였던 FBI 모델에 가까웠고 현실은 철저한 정권 호위 조직이었다. 표어인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또한 김종필의 작품. 이 시기에 북에서 파견한 밀사 혹은 간첩 황태성을 직접 만난 적이 있다는 의혹이 있다. 일명 '황태성 간첩 사건'인데 김종필 본인은 중앙정보부장으로 황태성 간첩 사건 수사를 지휘했지만 황태성을 직접 만난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초대 중앙정보부장 시절 모든 민간 정치인들을 정치 규제로 묶어놓은 상태에서 비밀리에 민주공화당을 사전 조직했다. 그 과정에서 창당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는 4대 의혹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면서 중앙정보부장 직에서 물러난다. 그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특명전권순회대사'라는 직명으로 외교관 여권을 발급받고 1963년 2월 25일부터 1963년 10월 23일까지 약 8개월 동안 이른바 '1차 외유'를 떠났다. 잠시 일본으로 외유를 떠났다가 일본 도쿄에서 민주공화당이 무사히 창당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선을 지켜봤다. 민정 이양이 결정되자 귀국해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남 5선거구에 출마, 처음으로 당선된다.
민주공화당 내에서 JP계라 불리는 독자적인 세력(양순직, 예춘호, 박종태, 이진용, 오학진 등)을 형성하여 암암리에 박정희의 후계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 친위 세력의 견제로 여러 차례 장기간 외유를 떠나기도 했으며 1963년 이른바 '1차 외유'를 떠날 때 '자의 반 타의 반'이라고 한 발언이 유명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중앙청 기자실에서 기자들이 "왜 외유를 떠나느냐"고 질문하자 "이번 여행은 나의 희망 반, 외부의 권유 반으로 떠나게 되는 것이오."라고 웃으면서 대답했는데 동아일보 이만섭 기자가 '자의 반 타의 반'이라고 기사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1964년 일본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과의 막후 교섭으로 한일협정 성립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당시 작성한 일명 '오히라-김종필 메모'는 한일협정의 초안이 된다. 다만 일본 입장에서는 "지나간 일이니 사과할 필요가 없으며 배상금까지 치렀다"고 주장하는 단초가 되며 일본 측의 명확한 사과를 받아내지 못한 점은 지금도 비판받고 있다.
이후 1965년 12월 민주공화당 의장으로 선출되고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선된다. 같은 해 박정희 대통령도 재선되었고, 제3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의 3선을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차기 대통령으로 가장 유력한 사람은 바로 김종필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추진하면서 박정희와의 사이에 알력이 생기기 시작한 가운데 '국민복지연구회 사건'이 일어나자, 1968년 5월 30일 당 의장직과 국회의원직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하고 이후 미국으로 외유를 나가게 된다. 1969년 국내로 복귀해서 3선 개헌을 지지했는데, 청와대에 직접 불려가서 박정희 대통령 부부를 만나고 무언의 압박을 받았다고 한다.
3.2. 제4공화국
1971년 3월 민주공화당 부총재로 취임하고 1971년 5월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의원 1번으로 출마, 당선된 데 이어 1971년 6월에는 국무총리로 지명된다. 박정희가 3선 임기를 마치면 이번에야말로 김종필의 차례가 돌아올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을 일으켜 종신 집권을 기정사실화한다. 김종필은 박정희 정부의 충실한 2인자이자 현직 국무총리로서, 속마음은 어땠을지 모르나 유신을 지지했다.
1975년 12월 건강상의 문제를 이유로 국무총리직을 사퇴한다. 사실 이때 김종필은 박정희와 불화가 있었다. 10월 유신 이후 김종필은 지병으로 건강이 안 좋았는데, 오히려 박정희가 김종필의 속내를 의심하면서 정신적으로 압박했다고 한다.
참다 못해 박정희에게 직접 "제가 나세르입니까? 제가 각하의 조카딸과 혼인을 했으니 한 식구 아닙니까? 왜 자꾸 저를 의심하십니까?"라고 들이받으니 박정희가 '내가 의심도 좀 한다'고 머쓱해하면서 사임을 받아줬다고 한다. 김종필 본인의 말에 의하면 저 당시 끝까지 박정희 곁에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죽을 것 같다고 호소하며 물러났다고 한다.
이후에는 해외로 돌다가 1978년 민주공화당으로 복귀하여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충남 5 지역구에 출마, 당선되었다. 그리고 1979년 10.26 사태를 맞게 된다.
3.3. 제5공화국
이후 김종필은 최규하 대행으로부터 임시 대통령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민주 헌법에 따라 직선 대통령이 되겠다는 이유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거에 불출마했다. 이 시기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이른바 '3김'의 한 축으로서 서울의 봄을 구가했으나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으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에 의해서 정치 활동을 금지당했다.
당시 부정 축재자로 발표되며 강제로 일부 재산을 헌납하고 정계 은퇴 선언을 한 뒤 미국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당시 신군부에 의해 고문당했다는 설이 있는데, 김종필 본인은 이에 대해 부인했지만 일생 동안 김종필은 신군부에 대해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군의 대선배이자 중앙정보부를 만들고, 초대 부장을 지내며 국무총리와 당시 5선 국회의원겸 집권여당의 총재까지 지낸 초거물인 김종필에게 고문을 가했다간, 당시 군 내부와 기득권층을 겨우 장악한 신군부가 역으로 원성을 크게 살 가능성이 높기에 고문을 하지는 않았다. 일찍 석방후 재산만 강탈한 정도. 조사 때에도 간부들이 총재님, 총리님, 선배님등의 호칭을 사용했다고. 여담으로 노태우에게는 불만이 없었고 오히려 2인자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충고해주었다고 한다. 김종필 본인이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으니 노태우와는 공통분모가 있었던 셈이다.
삼김 중 유일하게 제5공화국 시절에 은둔하면서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은 인물이다. 김영삼은 정계에서 강제 퇴출되자 가택 연금 속에서도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을 감행했으며 민주산악회, 민주화추진협의회, 신한민주당을 연달아 조직해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선두에 섰다. 김대중은 신군부의 내란음모 조작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수감 생활을 하다가 미국의 개입으로 해외 망명을 떠나서 재외 동포들과 함께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으며 1985년 2.12 총선 직전 미국 정치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격적으로 귀국한 뒤에는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다. 반면 김종필은 이 시기에 미국에서 골프나 치면서 유유자적 살았는데 이 시기에 김영삼이 김종필한테 사람을 보내서 같이 전두환 정권과 싸우자고 손을 내밀었지만 김종필은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국면이 도래했을 때 김종필이 전격 귀국해서 정계 복귀와 신민주공화당 창당을 선언하자 "남들이 피흘리며 싸울 때는 어디 있다가 이제 와서 무임승차하느냐"는 비판도 상당했다.
만일 김종필이 박정희가 암살될 때까지 국무총리를 계속했거나 박정희가 암살된 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10대 대통령이 되어 12.12 군사반란 당시 최규하의 위치에 있었더라면 전두환의 제5공화국은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김종필은 5.16 군사정변 주요 인물, 중앙정보부 창설 멤버 및 초대 중앙정보부장, 제4공화국 실세 국무총리, 박정희의 친인척 등 정계와 군부에서 모두 무시하지 못할 정치적 위상을 갖추었다. 신군부의 반역 시도에 취약했던 최규하와는 대조적이었다.
3.4. 제6공화국
1987년 민주화 이후 현실 정치에 복귀하여 민주공화당의 계승을 표방한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였다.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182만 표를 얻으면서 4위에 올랐다. 당시 구 한국국민당 지지층의 상당수가 KAL 사건의 여파로 노태우로 쏠려서 손해를 봤다는 평가도 있는데, 이는 민주정의당과 신민주공화당의 노선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것이 그가 대통령 선거에 직접 출마한 유일한 기회가 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주공화당이 충청권을 중심으로 수도권에서도 상당한 선전을 보이며 35석을 획득하면서 제4당 총재가 되었다.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125석을 획득했고 야당 스탠스였던 평화민주당과 민주당을 합쳐도 130석 안팎이었기 때문에 캐스팅보트를 쥐면서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정치 노선의 선명성 부족이라는 한계로 지지율이 지지부진했고, 이에 김종필은 1989년 말 노태우, 김영삼과 비밀리에 의원내각제 개헌을 합의하고 3당 합당에 참여하였다.
1992년의 14대 대선에서는 김영삼이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을 지지했고, 김영삼 정권 초기에 민주자유당 대표를 지냈다. 그러나 이후 민주계와의 갈등 끝에 1995년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자유민주연합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대전광역시, 충청남도, 충청북도, 강원도 4곳의 광역지방자치단체장을 당선시키며 선전하고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50석의 역대 최다 의석 3당으로 올라선다.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2년 후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김대중과 연합했으며 이를 두 사람의 약칭인 DJ와 JP에서 따와 DJP연합이라 부른다. DJP연합의 성공으로 김대중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김종필 총재는 김대중 정부의 국무총리직에 오르며 공동 정부의 한 축을 맡았다. 국무총리직을 수행하면서 경제비상대책회의를 주재하고 초기 김대중 정부의 재무부 장관을 비롯해서 경제팀을 김종필이 꾸려서 외환 위기 조기 극복에 기여했으며 당시 DJP연합에 따라서 경제 부처를 포함해 내각의 절반은 자유민주연합의 몫이었다. 그러나 집권 후 2년 이내 내각제 개헌을 약속하며 시작했던 DJP연합은 1999년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내각제 개헌 이행 유무와 햇볕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로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는 새천년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의 후보 연합 공천이 무산되고 전국 대부분의 지역구에 두 정당이 동시에 후보를 내보낸다.
자유민주연합은 비충청권 지역에서는 보수표를 모조리 한나라당에 뺏기면서 사실상 군소 정당으로 전락했고 충청권에서도 민주당, 한나라당과 박빙의 승부를 보이면서 기존 50석에서 1/3 수준으로 줄어든 17석 확보에 그쳐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하였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 DJP연합의 복원을 희망하는 김대중 대통령이 자당 의원을 자유민주연합으로 보내는 '의원 꿔주기'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자유민주연합 소속 이한동 의원을 국무총리로 임명해서 연립 정부는 간신히 이어졌다. 하지만 새천년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을 합쳐도 원내 과반수에 미달하자 2석을 차지한 민주국민당에까지 손을 내밀어 민주국민당 한승수 의원을 외교부 장관으로 임명하면서 3당 연합으로 간신히 원내 과반수를 채웠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133석 획득으로 인해 연립 정부의 내각제 개헌은 무산되었고 햇볕정책으로 대변되는 대북 유화책과 관련해 시각차를 보이면서 자유민주연합이 2001년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에 가담해 DJP연합은 최종적으로 무너졌다. 따라서 자민련에 임대되었던 의원들은 새천년민주당으로 당연히 복당했으며 자민련 소속 장관들은 사퇴해야 했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3개월 뒤인 2000년 7월 22일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명예총재가 경기도 용인의 은화삼 컨트리 클럽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만났다. 이날 폭우로 골프가 취소된 뒤 회동에서 이회창 총재에게 원내교섭단체 정족수를 20명에서 17명으로 완화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회창 총재는 대변인을 통해 “단 둘이 앉은 시간은 30초에 불과하며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고 부인해 논란이 됐다. 매번 대선 때마다 킹메이커로 영향력을 과시하던 김종필이었지만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이미 고령의 나이에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참패 등 세력이 크게 위축된 상태였기 때문에 출마는커녕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지지 기반이던 충청권이 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내세운 노무현 후보와 선영이 충청남도 예산에 있다는 지역 연고를 내세운 이회창 후보로 양분되는 상황을 구경만 해야 했다. 선거를 앞두고 같은 보수 성향의 이회창을 지지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기도 했지만 결국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은채 사실상 중립을 선언해버렸다.
이 때문에 이회창에 대한 감정이 안 좋았으며 이회창은 정계 입문 후부터 줄곧 '3김 정치'의 청산을 외쳐왔기 때문에 그런 이회창이 김종필과 손을 잡는다는 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러한 이회창의 경직된 정치적 행보 때문에 그의 발목을 잡기도 했으며 이래저래 김종필이 공개적으로 이회창을 지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노무현 정부 탄생 이후 노무현계는 열린우리당이라는 신당을 창당해 독립해 나온 상태였고 노무현 대통령도 민주당을 탈당한 상태였다. 그 와중에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이 힘을 합쳐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를 일으키는 최악의 선택을 저지르게 된다. 그러나 '니들이 뭔데 우리가 뽑은 대통령을 니들 맘대로 자르려고 하냐?'는 심리가 국민들에게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탄핵에 앞장섰던 3개 정당은 엄청난 역풍을 맞고 말았다.
사실 김종필은 탄핵에 반대했는데 처음부터 탄핵 반대를 자유민주연합 당론으로 내걸었지만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의 강력한 주장에 밀려서 결국 자유민주연합 의원들의 탄핵 찬성 투표를 막지는 않았으며 김종필 본인은 탄핵안 표결에 불참하였다. 이후 총선에서 탄핵 역풍이 불자 김종필은 탄핵의 책임은 대통령과 여야 모두에게 있다며 자신은 탄핵안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며 책임론을 비켜갔다. 그러나 이미 2000년 총선으로 비충청권 지역에서는 모든 지지 기반을 상실한 상태였고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거치면서 인물이나 정책 그 무엇도 새로 내보일 힘을 잃은 김종필은 이제 믿을건 충청권 지역 감정뿐이라는 판단이었는지 연일 대전과 충남권을 순회하면서 지지를 호소하였고 본인은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하였다. 그러나 탄핵 역풍 속에서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국회 전체 의석 299석 중 152석을 얻어 원내 제1당으로 껑충 뛰어올랐고 한나라당은 천막 당사를 치고 지지를 호소하면서 간신히 121석을 얻어 나름 선방했지만 자유민주연합의 선거 결과는 비참했다. 지역구는 충남에서만 간신히 4명 당선, 정당 득표 2.8%에 지역구 4석으로 정당 득표 3% 혹은 지역구 5석이라는 비례대표 의석 배분 기준에 불과 0.2%p차로 아슬아슬하게 미달해서 비례대표 전원이 낙선하면서(아이러니하게도 덕분에 당시 민주노동당에 비례대표 의석 1석이 돌아갔고 민주노동당 비례 8번이었던 노회찬이 국회에 입성할 수 있었다. 옛 세력의 몰락과 신 세력의 등장이 함께 나타난 셈.) 사상 첫 10선을 노리던 김종필의 꿈도 물거품이 되었다. 김종필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40년이 넘는 현실 정치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다.
3김의 하나인 김종필의 이름값을 생각하면 마지막은 비참했는데 이미 모든 정당이 여성표를 노리고 비례후보 1번에 여성을 배정하는 상황에서 거물인 김종필이 여성 몫인 1번으로 등록한 것 자체가 자신의 처지와 당의 불안정성, 개인의 의원직에 대한 노욕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무리수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며 지역구 출마를 했으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일단 김종필 자체가 이름값만으로도 막대한 집표력을 기대할 수 있는 정치적 거물인데다 당시 자유민주연합이 충남에서 4석의 지역구 당선자는 배출했음을 생각한다면 자유민주연합 세가 강한 지역구 하나를 골라서 여차하면 그 지역구 후보를 뽑아내고 출마하기라도 했다면 당선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는 것. 물론 모양새가 몹시 빠지는 모습이기는 하지만 다른 당들은 비례대표 상위 순번을 여성이나 장애인 등에게 배려 차원에서 배분하는 상황에서 비례대표 1번을 직접 타고 앉는 것에 비하면 별로 추할 것도 없다.
정계 은퇴를 선언한 이후 자유민주연합을 탈당해 무소속이 되며 정계와는 거리를 두었는데 여러 보수 정치인들이 김종필의 청구동 자택을 찾아왔고 김종필은 정치인들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면서 한나라당에 입당 후 명예 상임고문 자리에 올랐는데 한나라당에 입당한 후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비례대표로 출마해 10선에 도전할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으나 실제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2008년 연말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와병하던 시절에는 잠시 정치인들의 방문을 받지 않았다가 건강을 회복한 이후에는 다시 방문객들을 맞았다. 이후에도 한나라당 명예 고문직을 유지하다가 박근혜가 당권을 잡은 뒤 새누리당으로 개명한 2012년 초 다시 탈당했다.
2016년 들어서 대권을 준비 중인 반기문이 외교 행낭을 통해 편지를 보냈고 김종필은 “내가 비록 힘은 없지만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돕겠다”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4. 삼김시대의 종식
나이 90세에 생각해보니 89세까지가 헛된 인생이었구나.
김종필 본인이 직접 쓴 묘비명이다.
2018년 6월 23일 오전 8시 15분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학교병원 이송 중 향년 92세로 사망했다. 이날 아침 신당동 자택에서 호흡 곤란으로 순천향대학교병원으로 이송 중 심정지했으며 응급실 도착 후에도 심폐소생술을 지속했으나 사망했다. 마지막 1개월 동안 소화를 못해 곡기를 못하고 링거로 연명하는 상태였다. 나폴레옹에 대한 존경이나 동경을 젊은 시절부터 종종 입에 올렸는데 죽기 1달 전 최후를 예감한 듯 나폴레옹의 유언을 되뇌었다고 한다. 청와대는 한국 현대 정치사에 남긴 고인의 손때와 족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면서 애도를 표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명의로 조화를 보냈으며 이낙연 국무총리가 직접 조문왔는데 여야 모두 애도의 뜻을 표했다. 장례는 고인의 뜻대로 가족장으로 치러지며 유해는 2018년 6월 27일 발인해서 화장 절차를 거쳐 김종필의 고향인 충남 부여에 있는 김해 김씨 선산에 안장되었다. 사실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자격이 있었으나 아내와 함께 김해 김씨 선산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장례식에는 사회의 각계에서 참석했는데 구속 재판 중인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명의로 조화를 보냈으나 정작 사촌처제인 박근혜 전 대통령은 보내지 않았고 박지만, 서향희 내외와 박근령은 직접 조문했으며 박근혜의 이복언니인 박재옥은 참석하지 않았다.
이렇게 2009년 김대중, 2015년 김영삼에 이어서 2018년 가장 오래 생존하였던 김종필까지도 사망하면서 3김(金) 시대는 종언을 고하며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되었다. 3김 시대는 1961년 5.16 군사정변부터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까지 40년 넘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고, 김종필까지 사망한 2018년 시점에서도 기성 정치인들은 '3김'에게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았다.
2024년 현재 기준으로 YS 직계인 상도동계 중에서는 막내 그룹으로서 아직 현역으로 뛰고 있는 정치인이 일부 남아 있으며, DJ의 동교동계 역시 DJ의 막내인 김홍걸을 비롯해 현역인 설훈, 김한정 의원과 이낙연 前 국무총리가 2024년 총선에서 불출마하거나 낙선하면서 윤호중 의원 정도만 남았다. JP 직계는 정진석 전 국회부의장 역시 24년 총선에서 낙선하면서 대부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