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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 중앙 인물의 수염이 풍성하다.
수염을 길렀던 조선시대엔 지나치게 많은 수염은 놀림꺼리가 됐다. 사진 허버트 G. 폰팅.
오늘날 얼굴을 뒤덮은 풍성한 수염은 남성미의 상징으로 부러움을 산다. 조선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때 남자들은 모두 수염을 길렀다. 그래서인지 지나치게 많은 수염은 부러움은 커녕 오히려 비웃음의 대상이 됐다.
조선 성종 때 문신 이륙(1438~1498)의 <청파극담>은 목은 이색의 증손자인 좌찬성 이파(1434~1486)가 수염이 너무 많아 놀림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다음은 <청파극담>의 내용이다.
"이파는 스스로 풍채로 봐서는 당세에 제일이라 하였으나 얼굴 위에 수염이 있으므로 공을 희롱하는 자가 '윤길생과 비슷하다' 하였다. 이파는 이 말을 매우 싫어하였으니 윤길생이 험상궂은 얼굴에 수염이 많아서였다."
윤길생은 세조실록에 여러차례 등장하는데, 첨지중추원사(정3품 당상관), 동지중추원사(종2품), 중추원 부사(종2품) 등의 벼슬을 지내고 성절사, 사은사 등으로 중국을 다녀온 것으로 서술돼 있다.
고전에 담긴 조선의 역사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한국인은 뒷통수가 넙적한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다. 송나라 사람으로 1123년(고려 인종 1) 고려에 사신을 왔던 서긍도 이를 신기하게 여겼다.
그가 쓴 <고려도경>은 "고려인은 대개 머리에 침골(뒤통수 뼈)이 없다. 승려는 머리를 깎아서 그 두상이 드러나는데 매우 괴이하게 느꼈다"고 소개한뒤 "진사(晉史)에서는 삼한 사람들은 아이를 낳자 마자 돌로 머리를 눌러 넙적하게 만든다고 했으나 (지금은 돌로 누르지 않는데도 넙적한 사람이 많으니) 이는 사실과 다르다. 체질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기술했다.
활쏘는 여자들. 일제강점기.
조선시대엔 여성을 포함해 일반인들도 활쏘기를 취미로 즐겼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풍속도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많이 다르다. 활은 무인들의 전유물로 인식되지만 일반인들도 활쏘기를 취미로 즐겼다. 조선말 궁중에 쓰는 그릇을 납품하는 공인 지규식의 <하재일기>는 저변화된 활쏘기 풍습을 언급한다.
"한 소사, 박광천, 홍옥포를 불러 함께 삼관정 옛터에 올라가 시를 지었다. … (중략) … 쓰기를 마치고 아이들에게 비빔밥과 막걸리를 소나무 그늘 아래로 가져오게 하여 함께 먹었다. 나는 우천(경기도 광주)에 나가서 활쏘기 연습을 10여순 하고 들어왔다."
과거 비단은 고급 옷감이었고 고가였다. 양잠은 돈 되는 부업으로 부상했다. 그러자 서울의 사대부 집에서도 양잠을 했다.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는 양잠이 인기를 끌면서 농촌은 물론 서울의 양반가에서도 경쟁적으로 누에를 집안에서 키웠다고 전한다.
"예전에는 서울의 대가(大家) 중에서 서너 집에서만 양잠을 했는데 지금은 모두 양잠을 하며 뽕나무를 심어 이득을 얻는 사람이 많다."
조선중기 이전까지만 해도 시골 출신도 학문이 높으면 과거에 합격하고 고관도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조 이후 인재 등용이 불평등해졌다. 인조 때부터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백사 이항복의 문하가 정국을 독차지하면서부터 대대로 서울에 살아온 집안의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등용했다.
특별히 퇴계 이황,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 일두 정여창을 배출했던 경상도가 차별받았다고 이중환(1690~1756)의 <택리지>는 주장한다.
"경상도에서 최근 백 년 동안 정2품의 정경(正卿)이 된 자가 둘, 종2품의 아경(亞卿)이 네댓이고 정승이 된 사람은 없다."
한양의 명문가들이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있었지만 인구는 오늘날처럼 많지 않았다. 한 나라의 수도였는데도 한양의 인구는 10만을 겨우 넘는 수준이었다.
실학의 선구자인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에 의하면, 조선을 개국하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을 때는 겨우 8000호가 살았고 한양이 가장 번성했을 때도 8만 호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임진왜란 이후 수만 호로 크게 줄어들어 20만 명에 훨씬 못미치는 인구가 한양에 모여 살았다. 고려의 수도 개성의 민가가 13만 호나 됐던 것과 비교하면 그 규모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현대에는 교통의 요지나 상업이 발달한 지역에 사람들이 집중되지만, 농업이 중심이었던 과거에는 땅이 기름진 곳에 사람이 몰려들었다. 생업이었던 농사를 지을 수 없는 한양에 인구가 붐비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 인구가 많았던 곳은 어디었을까. <택리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름진 땅으로 전라도의 남원, 구례와 경상도의 성주, 진주를 꼽았다. 조선시대에는 기름진 땅이 고을 발전의 척도였다.
청담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
이들 지역 논에 볍씨를 한 말 뿌리면 최상의 논에서는 140말을 거두고 그 다음은 100말을 거두며 최하는 80말을 거둔다고 <택리지>는 소개한다. 기름진 땅에는 인걸이 많기 마련이다.
참외로 유명한 경북 성주를 언급하면서 "영남에서 땅이 가장 기름져 적게 뿌리고도 많이 거둔다. 그러므로 토박이들은 모두 부유해서 떠돌아다니는 자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오늘날 이들 지역은 주요 교통로에서 비켜나 있어 상대적으로 발전이 더딘 곳들이다.
한국의 명산 금강산의 이름은 오래전부터 외국까지 널리 알려져 멀리 인도에서도 보러왔다.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는 "금강산은 다른 나라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었다"고 소개한다.
<임하필기>에 따르면, 조선초 문신 권근은 "천하 사람들이 모두들 이 산을 한 번 찾아와서 구경하고 싶어한다. 더러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함을 한탄하면서 그림으로 그려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자까지 있다"고 했으며,
고려 말의 학자 이곡(1298~1351)도 "금강산은 천하에서 그 명성이 자자해 인도 사람들까지도 찾아와서 구경한다"고 했다.
구례 화엄사 승려들. 일제강점기.
중국인들은 우리나라 승려들의 뒷통수가 넙적하다며 괴이하게 생각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지봉유설>도 임진왜란 때 구원병으로 온 명나라 장수들까지 금강산의 멀고 가까움을 물으면서 관심을 표시했다고 언급한다.
명절과 기념일의 모습은 어땠을까. 설이면 가족이 한데 모여 차례를 지내고 음식을 나눠먹는 풍경이 연상된다. 그러나 <하재일기>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차례를 지내고 마을 어른들께 새해 인사만 드린 뒤 평시처럼 일터로 출근을 했다.
"차례를 마치고 곧바로 관성제군(관우의 영)을 배알한 뒤 추첨하여 19번을 뽑으니 상길(대길)이다. 돌아오는 길에 윤생원 분서 선생을 찾아뵙고 모시고 이야기하였다. 잠시 머물다가 인사하고 물러나와 이웃 마을의 연세 많은 어른들을 두루 찾아뵈었다.
공방(직장)에 들르니 자리에 시축(시를 적은 두루마리) 하나가 보였다. 바로 유초사의 설날 시였다. 곧바로 차운하여 가볍게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하재일기>의 저자 지규식은 천주교도였다. 따라서 그에게는 성탄절이 최대 명절이었다. 그 시절 성탄절의 풍경도 엿볼 수 있다. "예수 탄신일이다. 남녀 교우가 다 같이 모여 온종일 찬송가(성가)를 부르고 성경을 외웠다. 밤에 또 찬송가를 부르며 성경을 외우고 국밥을 장만하여 함께 먹고 밤이 깊은 뒤 집회를 마쳤다."
역시 명절이래야 특별한 게 있을리 없고 그냥 작은 세리머니가 더해진 정도였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37. 풍성한 수염, 남성미 상징? 옛날엔 놀림꺼리 [낯선조선2] /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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