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장 1절, 그리고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6장 37절은 영어성경에서는 “Do not judge” 라는 말로 시작을 합니다. NIV, KJV, NASB, GNB, AMPC, CEV 등등 다수의 영어성경이 Judge 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반해, 한국어 성경은 다양한 단어를 씁니다. 개역성경은 비판이라는 단어를 쓰고, 새번역 성경은 심판, 그리고 현대인의 성경은 판단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를 통해 비판, 심판, 판단이란 단어는 서로 다르지만, 성경에서는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비판이란 단어는 어떤 대상에 대한 분석과 평가, 그리고 장단점을 논리적으로 검토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따라서, 비판은 단순한 비난이나 부정적인 평가와는 다른, 좋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리고 심판이란 단어는 경기의 심판을 뜻하기도 하고,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최후의 심판을 뜻하기도 합니다. 판단이란 단어는 우리 삶의 매순간 이루어지는 선택을 말하며, 유치원생조차도 나름대로의 판단을 합니다.
한편, 성경에서 비슷한 의미로서 사용된 비판, 심판, 판단은 겸손히 다른 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자기의 주장을 필요 이상으로 내세우며 대화를 거부하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독불장군처럼 자기 혼자 결론을 내리고 말 때, 모든 대화는 불가능해지고 덕이 안 되며, 소자를 실족시키거나 할 수도 있게 됩니다.
주님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이것은 진짜로 금하기보다는 다소 강조의 의미로 보는 것이 다수의 신학자들의 견해입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볼 때 맹세라는 단어가 여기저기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심판이나 판단하지 말라는 것도 의견표명을 아예 금하기보다는, 강조의 의미로 보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나의 주장을 좀 더 양보하고, 다른 이의 의견을 좀 더 청취하라는 교훈으로 보면 좋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 1절과 누가복음 6장 37절의 이 구절들은 어찌보면 성경의 난해구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일 경우, 책을 읽은 후 서평도 할 수 없고, 토론수업에 참여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축구심판 없이 경기해야 할 수도 있고, 로스쿨을 없애야 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교차로에서 좌회전해야 할지 우회전해야 할지, 짜장면을 시켜야 할지 짬뽕을 시켜야 할지, 아무것도 못하고만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는 데 있어서 좀 더 겸손하게, 유연하게 하자는 제 주장에 부족한 부분들이 있겠습니다. 하지만, 문자주의적으로만 해석하는 건 곤란하다는 내용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7장 1절에서 사용된 Judge 에는 재판의 의미도 있습니다. 판사가 영어로 judge 이죠. 한편, 야고보서 4장 12절에는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라고 나오기도 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볼 때, 종교재판의 99%가 악인들이 의인에게 적반하장으로 피해를 주는 역사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헤롯과 공회가 자신들의 기득권이 빼앗기는 것을 막기 위해 메시야이신 예수님께 그렇게 재판을 했고, 중세에 민중을 착취하던 자신들에게 겨냥되는 저항의 화살을 돌리기 위해 여성에게 마녀재판을 해서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부패한 카톨릭 종교지도자들이 기독교의 개혁을 요구하는 인물들을 잡아서 종교재판 후 화형을 시키기도 했고, 결국은 종교개혁을 막아내지 못하자 신구교간 전쟁까지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종교재판의 역사를 보면 제대로 된 재판은 눈을 씻고 봐도 없습니다.
현대의 종교재판도 그렇습니다. 신학교 교수의 학문적 소신을 문제 삼아서 면직하기도 하고, 축복한 대상이 마음에 안 든다고 목회자를 출교하기도 합니다. 말이 재판이지, 재판관들은 사법고시 근처에도 못 가본 무자격자가 대부분입니다. 종교재판은 없어져야 할 범죄행위들입니다.
마태복음 7장 1절과 누가복음 6장 37절은 정죄하지 말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심판은 오직 주님의 몫이니,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에 대해서 우리가 함부로 얘기하지 말아야 하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동성애를 왜 죄라고 얘기하지 못하느냐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수많은 죄들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동성애 하나에만 집착하는 것은 편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죄들에 대해서 별로 얘기하지 않듯이, 동성애를 정죄하지 않고 주님께 그냥 맡겨도 됩니다. 결국은 주님께서 다 해결하실 것입니다. 타인의 성적지향에 대해서 간섭하지 말고, 자신의 성적인 순결과 영적인 순결에만 전념하기도 벅차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은 로보트가 아닌 이상, 정치적 견해에 완전한 좌나 우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일정 정도의 좌성향과 우성향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좌파와 우파로 나누는 것은, 아볼로파와 바울파를 나누는 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신이 좌파인가 우파인가를 내세우는 것도 적절치 못하지만, 타인을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심판해서 좌우를 규정짓는 것은 더 큰 잘못입니다.
주님은 모세를 통해서 혹은 잠언의 말씀을 통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누군가를 좌파로 규정짓는 것은 오히려 자신이 우파로 치우쳐 있음을 자인하는 행위밖에 안 되며, 하나님의 창조물을 차별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사회 제도에 대해서 맹목적인 수용보다는 비판적인 시각이 발전을 낳듯이, 교회운영에 대해서도 건전한 비판은 부흥을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비판하는 분들을 섬기는 자세로 잘 경청하고 수용하고, 또한 수많은 판단과 선택에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내가 결론 내리기에 앞서 다른 이의 의견과 비판을 성실히 참조하고, 또한 재판하거나 정죄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 7장 1절과 누가복음 6장 37절에 나오는 주님의 가르침을 좀 더 잘 따르는 길이 될 것 같습니다.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26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