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정대구
(一)글을 시작하며-
가) 이응수와 박영국
오늘날 김삿갓을 있게 한 두 인물이 있다. 한 분은 최초의 김립시집을 펴낸 이응수 선생이고 다른 한 분은 김립묘를 찾아내 오늘날 많은 사람이 찾는 관광지 김삿갓공원을 있게 만든 영월의 향토사학자 박영국 옹이다.
김삿갓은 생전에 시집을 낸 바 없다.
최초의 김립시집은 김삿갓 사후 76년 뒤인 1939년 이응수 선생에 의해 학예사에서 펴낸 포켓판 『김립시집』이 처음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응수 선생은 자료를 보충하여 그 2년 뒤인 1941년에 『大增補 김립시집』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펴낸다. 이로써 김삿갓이 오늘날 존재하는 사유가 된다. 만일에 이응수 선생이 1920~30년대에 김삿갓 시를 수집 정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김삿갓 자료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산일되어 그 누구도 손도 못 대고 오늘날 김삿갓은 거의 잊혀졌을 것이다.
김삿갓은 30여 년간 팔도강산을 떠돌면서 수많은 시와 일화를 남겼으나 죽을 때까지 시집을 낸 바도 없고 뚜렷한 자필시고 한 쪽 서명하여 남기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어디서든 자신의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에 관한 확실한 자취를 찾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원래 김삿갓의 시는 그의 발길이 닿았던 곳이면 어디든지 남아 있다. 촌로들이나 학동들의 붓으로 전해지고 입으로 읊어졌기 때문에 타인에 의해 김삿갓의 시가 들어 있는 한시초집은 보잘것없는 초라한 필사본이나 달랑 종잇장 한 쪽이다. 더구나 당시는 많은 떠돌이 지식인이 삿갓을 쓰고 다니며 가짜 김삿갓 행세를 하며 횡행하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설사 김삿갓의 행적이나 김삿갓의 시를 찾았다 하더라도 그것의 진부를 가려내기도 어려운일이다. 간혹 김삿갓 아닌 본명 ‘김병연’이라는 기명이 있는 간찰이 고서가나 고미술상에 나도는 일이 있으나 대부분 위작이다. 진짜라 하더라도 그것은 시고가 아닌 편지글일 뿐이다. 김삿갓의 시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방법은 서찰의 필적과는 무관한 시의 내용과 소재 그리고 작품성 등을 고려하여 김삿갓 시를 가려낼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러한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 김삿갓 연구의 선구자 이응수 선생은 김삿갓의 방랑행적을 더듬어 자신이 직접 전국을 돌면서 김삿갓의 시와 일화를 수집하기도 하고 조선일보에 광고를 내어 김삿갓 시고를 갖고 있는 자는 자기집(홍제동 47번지)으로 보내달라고 해서 자료를 모았고 (나중에 김립시집을 낼 때에 시 말미에 일일이 제공자와 그 출처를 밝혔다) 나름대로 검토를 해서 1930년부터 간간이 신문 잡지 등에 단편적으로 그 결과를 발표해 왔다.
♣ 이응수 선생
1909년 함경남도 고원군에서 태어나 경성제대 조선어과를 졸업한 이응수 선생은 당시 전국 280군에 산재한 수천 서당을 한 번씩은 들렀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김립 시 183편(일반한시133편+과체시50편)을 묶어서 최초의 『김립시집』을 1939년에 학예사에서 출간해 낸다. 그리고 그 뒤 자료들을 더 모으고 보충하여 1941년에 343편(일반한시217편+과체시126편)으로 『대증보 김립시집』을 간행했다.(『대증보 김립시집』은 이후 1944년에 재판을 냄) 그 뒤 이응수 선생은 월북하여 1956년에 김립 저, 리응수 역 『풍자시인 김삿갓』을 국립출판사(평양)에서 출간했고 이 시집은 1997년 실천문학사에 의해 서울에서도 그대로 복제출판 된 바 있다. 어쨌든 이응수 선생의 『김립시집』과 『대증보 김립시집』을 필두로 오늘날까지 수십여 종의 김립시집이 시중에 나돌긴 하지만 모두가 이응수의 것을 근거로 하여 영리를 위한 목적으로 약간의 가감을 주었을 뿐 새롭다 하지만 새로운 것이 별로 없다.
나) 문제제기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이응수 선생이 자료를 모으는 과정에서 가짜 김립시가 상당수 채록 되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당시 천태산인 김태준(위조된 김삿갓의 시고, <신세계> 1939 9월호), 퇴경 권상로 교수 같은 저명 한문학자 분께 자문과 고증을 거쳤다고는 하나 친필시고도 아무 근거도 없는 상태에서 진위를 밝히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많은 오류가 속속 드러나고 있고 그중 가장 뚜렷한 오류는 김병연보다 앞 세대 문인들의 문집에 있는 글이 버젓이 김립시집에 끼어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김립시집에 「안변 등표연정」이란 시가 있는데 이는 율곡전서에 「화석정」시와 글자 하나 다르지 않고 내용이 똑 같다. 제목만 「화석정」이 「안변 등표연정」으로 둔갑했을 뿐, 이로 보건데 검증을 철저히 거치지 않고 수집된 글 대부분이 김립시집에 수용되었을 의문이 제기된다. 실제로 그 당시 세간에 굴러다니는 유명무명시구들이나 시화들이 약간의 변형된 모습으로 김립시집에 정착된 사례들을 많이 발견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오류를 필자도 필자의 『김삿갓 시 연구』에서 몇 개 지적한 바 있거니와 요즘도 젊은 한문학 전공자에 의해서 오류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민교수는 「김삿갓은 없다」에서 ‘김삿갓의 시 또한 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오던 불특정 다수의 희작시들이 모두 그의 이름 아래 모인 것일 뿐이다’『한시미학산책』1999년 7월, p.346)
花石亭(화석정) 이이(栗谷 李珥1536~1584; 조선 명종)
林亭秋已晩 騷客意無窮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
朱熹(1130-1200 북송~남송)
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김삿갓(1807~1863)
四脚松盤鬻一器 天光雲影共徘徊
是非吟(시비음)
是是非非非是是 是非非是非非是 / 是非非是是非非 是是非非是是非
*홍만종(洪萬宗1643-1725 인조 때)의 『小華詩評소화시평』에 김시습 작으로.
竹詩(죽시;대나무 시)
此竹彼竹化去竹 風打之竹浪打竹 飯飯粥粥生此竹 是是非非付彼竹
*조선후기 시화집 『夢遊野談』엔 모정승의 일화로 전함.
또한 세간에서 김삿갓의 시로 인구에 회자되는 여러 해학시나 파격시들이 김삿갓의 독보적인 것이 아니요. 앞선 세대에 선배시인들이 장난삼아 지었던 희작시의 전승이라는 점이다.
항간에서 흔히 회자되는 김삿갓의 욕설모서당이나 과붓집 제사에 가서 읽었다는 축문 같은 시를 숙종 영조 연간의 석북 신광수의 희작시와 비교해보라. 音(고딕부분)으로 소리 내어 읽기에는 민망하여 차마 읽을 수 없는 부분이 꼭 닮지 않았나.
이년 십구령(爾年十九齡) 네 나이 이제 열아홉인데
내조지 슬슬(乃操持瑟瑟) 벌써 비파를 갖고 다루네.
속속 허고저(速速許高低) 빠를 땐 빠르고 높고도 낮게
물난 보지음(勿難報知音) 知音에게 알리기 어렵지 않네.
-석복 신광수(1712숙종~1775영조)의 희작시
서당 내조지(書堂 乃早知) 서당을 일찍부터 알고 와보니
방중 개존물(房中 皆尊物) 방 안엔 모두 귀한 분들일세.
생도 제미십(生徒 諸未十) 생도는 모두 열 명도 못 되고
선생 내불알(先生 來不謁) 선생은 와서 뵙지도 않네.
-김삿갓의 辱說某書堂(욕설모서당)
연년납월 십오야(年年臘月 十五夜) 해마다 돌아오는 섣달 보름밤은
가군제사 내자지(家君祭祀 乃自知) 그대 남편 제사인 줄 내 아노니
제전존물 용도질(祭奠尊物 用刀疾) 제사에 귀한 음식 칼솜씨 빨라서
헌관집사 개고알(獻官執事 皆告謁) 헌관 집사는 다 잘 됬다 아뢰네
-김삿갓이 과붓집 제사에 가서 읽었다는 축문 시
다른 한편 김삿갓의 소위 언문시와 강산 이서구의 언문시 역시 발상과 표현수법이 비슷하지 않던가. 비교해 살펴보자.
諺文詩) / 薑山 李書九(1754~1825 조선영조시대)
我看世시옷(아간세人) 禍福由미음(화복유口)
歸家修리을(귀가수己) 不然點디귿(불연점ㄷ)
諺文詩/金炳淵(金笠1807~1863순조철종연간)
我看世上ㅅ(아간세상人) 但知有其ㅁ(단지유기口)
若不修身ㄹ(약불수신己) 不然點被ㄷ(불연점피ㄷ)
諺文詩/金炳淵(金笠1807~1863순조철종연간)
腰下佩기역(요하패ㄱ) 牛鼻穿이응(우비천ㅇ)
歸家修리을(귀가수ㄹ) 不然點디귿(불연점ㄷ)
다)시대상황
김삿갓 당시 시대 상황은 오랜 전통의 유교적 윤리와 가치기준이 흔들리던 일대 전환기였다. 과거제도는 극도로 문란하여 실력보다 권력과 금력으로 당락이 좌우되는 판이었다. 이렇게 가치기준이 혼동되는 사회에서 양반 지식인들은 객관적인 판단 기준이 흐려졌다. 관료나 지주로서의 기반을 상실한 실세한 양반층 중에서는 계속 과거에 응시하기는 하지만 그러는 동안 가세는 더욱 기울어지고 마침내 현실 대응의 기능을 잃은 이들 몰락 양반들은 결국 전국을 유랑하면서 고담이나 해학풍자 등을 생활의 방편으로 삼으면서 겨우 삶을 지속해 나간다. 이때 의식과 현실과의 괴리에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나름대로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비판의식에서 우러난 야유와 풍자 유머는 서민들과의 친화를 이루게 되고 따라서 그들의 해학풍자시는 당대에도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였는데 김삿갓은 다름 아닌 바로 이러한 유랑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부각된 시인이었다.
*김삿갓은 사실 고유명사가 아니다.(삿갓을 쓰고 다니면 누구나 김삿갓도 되고 박삿갓도 되는 수사법상 대유법(제유법)의 하나다) 김삿갓의 본명은 병연(炳淵)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다. {1920년대 초 전적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김병연의 시는 몇 되지 않는다.-『증보해동시선』에 3편(입금강산, 산사희작, 촉석루) 『대동시선』에 2편(촉석루, 영립) 『조야시선』에 1편(촉석루) 『대동기문』에 1편(구월산) 중복등재를 제하면 5편뿐이다.} 그는 당시 세력을 떨쳤던 안동 김씨 가문에 아버지 김안근(金安根)과 어머니 함평이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경기도 양주시 화천읍 회암리(254-1번지)에서 1807년 3월 13일 태어났다.(漢北知吾生長鄕-난고평생시) 김립(김삿갓)은 그의 별호다. 그런데 문제는 김병연 김삿갓과 동시대(18~19세기)에 삿갓을 쓴 김삿갓류의 방랑해학시인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당시 김삿갓류의 시인들
ㄱ)金炳淵(1807~1863) 鄭壽銅(1808~1858) 鄭萬瑞(1836~1895) 김병 현(炳玄 秉玄 秉鉉); 본명이 밝혀진 부류
ㄴ)金籉笠(신석우1805~1865 海藏集)-金鑾(名) 而鳴(子), 芷裳(號). 金笠(장지연大東詩選1918, 이규용海東詩選1920, 강효석大東奇聞 1926) 金莎笠(황오綠此集1932) 金草帽(여규형1848~1922 荷亭 集); 김씨 성을 가진 삿갓류의 시인들인데, 이들 기록 중에서 가 장 먼저이고 가장 상세하게 김삿갓의 행적을 적은 글은 신석우의 해장집에 수록된 김대립전이다. (이 전기의 주인공 김란은 김병연 의 가명으로 추측된다)
ㄷ)莎笠翁이정우(閑中奇聞) 平涼이정해(破睡錄 文庵集) 篛笠이생원 (玉匣野話) 송생원(趙秀三 秋齋記異) 김씨 성은 아니지만 김삿갓 처럼 삿갓을 쓰고 다니며 기행과 풍자를 일삼았던 사람들.
(이상에 보인 대립, 초모, 립, 사립, 약립, 평량 등은 모두 삿갓 의 한자식 다른 표기이다.)
라)결어
다)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봉건말기의 시대상황과 역적 김익순의 손자라는 김삿갓 개인의 특수한 운명 때문에 특별한 관심으로 김삿갓의 시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구전되어 당대에도 상당한 공감층을 확보하고 있던 김삿갓 시는 오늘날까지 전승되는 과정에서 유사 김삿갓 시는 물론 김삿갓 이름을 빌린 가짜 김삿갓 시까지 끼어들어 그 시세계는 개인적인 범위를 넘어서서 유명 무명의 유랑시인들의 작품들이 흡수되어 김삿갓 시는 복수적 집단적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유명해진 김삿갓은 그의 일화와 함께 수많은 소설로도 엮어져 소설의 주인공이나 마치 전설적인 인물로까지 여겨지게 되었다.
작가 이문열은 비록 소설이지만 『시인』(1991년)에서 해당 공령시에 대해서는 설화에 불과하다고 썼으며 죽은 곳이나 무덤에 대해서는 한 줄도 쓰지 않고 있다. 특히 이문열은 5세 때 사건이 일어났고, 20세에 응시를 했는데 그동안 자기 가문에 대해 몰랐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까닭을 고려하여 서울대학의 김윤식 김현교수는 김삿갓 시를 한 개인의 시로 보지 않고 적층적 다자의 시로 읽어야 한다(『한국근대문학의 이해』일지사, 1982) 했고 필자 역시 이에 동의한다.
그렇다고 해서 김립시집을 평가절하 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수많은 여러 지류가 한강으로 흘러들어 대한강수(大漢江水)가 되듯이 여러 희작시와 파격시 풍자시들이 집결된 『김립시집』을 통해서 우리는 한국인의 뛰어난 유머감각과 해학성과 풍자성을 읽어 낼 수 있다고 본다.
♣ 박영국옹
지금 영월에 있는 김삿갓묘가 진짜일까? 사실여부를 떠나서 이미 움직일 수 없는 기정사실로 자리매김했다. 지금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김삿갓묘를 찾아 영월로 모여들고 있다. 그 공은 오로지 고 박영국옹의 진념과 영월군 관계당국과 영월군민의 성원으로 역사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봐야 한다.
고 박영국옹은 영월의 향토사학자로 김립의 묘가 양백지간(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있다는 기록 하나를 가지고 김삿갓묘 찾기에 수십 년간 노력 끝에 마침내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하동면) 와석리 옥동천 노루목에 잠들어 있는 김립묘를 발견하는(발견 당시엔 무성한 잡초 속에 소주병이 나뒹구는 버려진 고분이었다) 성과를 냈다.(어둔리엔 그의 가족이 몸을 피해 살던 주거지가 있음) 그 과정에서 박옹은 서울 갈현동에 사는 아들집에 왔다 들렀다면서 당시 홍은동 필자의 누옥을 자주 찾아 여러 가지 상항을 놓고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자료를 요청하는 열과 성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박옹의 열의는 조선일보 등 언론매체에도 기사화 되어 차후 김삿갓묘를 홍보하는 데에도 크게 성공을 거두어 오늘날 김삿갓묘를 찾는 수많은 전국의 관광객이 심심산골 김삿갓공원을 성역화하게 된다. 참으로 박영국 옹은 이응수 선생에 이어 오늘날 감삿갓을 있게 한 집념불굴의 인물이다. 인도의 간디같이 깡마른 작은 체구에 가무잡잡한 그분의 안면이 지금도 내 눈앞에 생생하다.
(8)
김삿갓묘(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에 필자의 학위논문 헌정(198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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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더 넓은 이해를 위하여
가)17~8세기의 유랑지식인들
김삿갓 시의 특성은 민중성, 파격성, 해학성, 그리고 복수성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김삿갓의 이 네 가지 속성은 하나하나 개별적인 의미를 지니면서 서로 불가분의 유기적 관계로 연계되어 있어 그중 한 가지에 대하여 언급하자면 자연히 다른 네 가지와도 연관을 맺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먼저 김삿갓의 복수성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자.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 어지러운 시대상황에서 김삿갓과 진배없는 유랑지식인들이 양산되어 김삿갓과 구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김삿갓의 복수성은 자연발생적 현상이라 하겠다.
이때 유랑지식인들은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에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나름대로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비판의식에서 우러난 야유와 풍자 유머는 일반 기층민들과의 친화를 이루게 되고 따라서 그들의 해학풍자시는 당대에도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전승된다.
이와 같은 시대상황과 맞물려 반역자 김익순의 손자라는 김삿갓 개인의 특수한 운명 때문에 김삿갓의 시는 인구에 더 많이 회자되어 넓게 퍼져나갔다. 당대에도 상당한 공감층을 확보하고 있던 김삿갓 시가 오늘날까지 전승되는 과정에서 기록자의 취향에 의해 많이 변형되고 유사 김삿갓 시는 물론 비김립시까지 끼어들어 그 시세계는 개인적인 범위를 넘어서서 복수적 집단적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김삿갓이 후세에까지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한시 형식의 다양한 해체작업이었다. 파자 파운 동자중출 이중자의 동음이어 새김시 등 파격의 양상이 다양하고 매우 체계적이었다. 심지어 한시 형식 속에 한글을 끼워 넣기도 하고 한시 형식을 빌려 순 한글 7자시를 시도하기도 해서 한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우리말의 뉘앙스와 의성어 의태어 등을 한시에 그대로 도입함으로써 뛰어난 생동감을 획득했다. 피상적으로는 장난삼아 즉홍적으로 희작적으로 불러제낀 것 같지만 사실은 당시 철칙과도 같은 한시 권위에 이와 같은 파격을 가한 것은 충격적일 뿐 아니라 문화사적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나)김삿갓 시의 특성
형식의 파격은 곧 새로운 내용을 담기 위해서다. 낡은 형식으로는 수용할 수 없는 파격적인 내용의 표현을 위하여 형식의 파격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겠다. 김삿갓에게 맨 먼저 민중시인(통속시인)이란 칭호를 붙인 사람은 앞서 말한 1930년대 김삿갓 연구가인 이응수였다. 그는 김삿갓 시의 열 가지 특성을 말하는 논평에서 민중성을 맨 앞에 놓았다. 그리고 그의 이와 같은 지적은 매우 적절하고 정곡을 찌른 것이기에 필자 역시 이 논평을 토대로 김삿갓의 민중성을 정립해 보았다.
문화의 향상, 문화의 보급은 곧 문화의 민중화(통속화)를 말하는 것으로 문학예술 또한 많은 민중에게 침투 보급되기를 희망한다. 문학의 민중화(통속화)란 저급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문학내용의 해방과 다양성을 의미한다. 한시의 민중화 경향은 18세기를 전후한 무렵부터 조금씩 싹터 왔는데 김삿갓은 이를 계승하여 더 적극적으로 심화 발전시켜 놓았다.
김삿갓은 종래 한시에 있어서 일부 독선적 고답적 양반기질의 형식적 예절이나 가면적 허식화를 일축하고 적나라한 인간성의 고백을 주저함이 없이 대담 솔직하게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시는 양반적 고고한 생활감정이 아니고 대다수 민중의 생활감정을 대변하고 있다. 소재선택에 있어서도 종래의 관례적으로 읊는 음풍농월
이나 효제충신 같은 상징적 교양물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치밀하게 묘사되는 일상적 사물들 예컨대 이, 벼룩 돈과 같이 누구나 알아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신변적 비근한 것들을 즐겨 시의 대상으로 선택하였다. 김삿갓의 민중성은 그의 정신의 근대적인 자각을 보여 주는 한 단면으로서 그만큼 그의 의식은 깨어 있었다.
錢(전)- 돈
주유천하개환영(周遊天下皆歡迎) 천하를 돌고 도는 돈 누구나 다 환영
흥국흥가세불경(興國興家勢不輕) 한 나라 한 가정을 일으키는 힘 크기도 하네.
거부환래래부거(去復還來來復去) 갔다가는 되돌아오고 왔다가도 다시 가며
생능사사사능생(生能死捨死能生) 사람 죽이기도 하고 죽을 사람을 살리기도 하네.
어둡고 괴로운 시대, 불우한 개인일수록 보다 해학과 풍자가 더 심하게 나타난다. 해학과 풍자를 명확히 구별할 수도 구별할 필요도 없겠지만 연민이 강한 쪽이 해학이다. 김삿갓이 양반을 비웃고 권문세가를 조롱하고 아니꼬운 훈장을 욕하고 오만한 부자를 매도하는 근저에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정까지 들어 있었다. 시대를 잘못 만난 불우한 시인 김삿갓은 한(恨)의 시인이었다. 이상과 현실의 격차가 심할수록 한의 폭은 넓어지고 깊어진다. 시대 상황에 대처하는 시인의 취향에 따라 한의 모습은 방랑 도피 괴기 혁신 요설(饒舌) 선도(仙道) 등 다양하게 그 반응을 보이는데 김삿갓은 이 모든 속성을 수용하는 폭넓은 해학시인이었다.
한(恨)도 그 극에 다다르면 망연자실, 다시 더 심하면 가가대소로 웃어넘기게 되는데 김삿갓의 시에서도 이 파탄적 비감, 망연자실적 비관을 엿볼 수 있는 동시에 가가대소의 경지의 눈물겨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이 때 이 가가대소의 눈물겨운 웃음이 바로 김삿갓다운 해학시의 속성이다. 김삿갓은 시적 대상을 선택하는 시각 자체가 벌써 해학적이고 골계적이다. 찬양이나 숭배의 대상으로서의 인물이 아니고 인격적인 결손을 지닌 인물을 즐겨 시의 대상으로 삼 는다. 설사 숭고한 자연의 일부를 시의 제재로 선택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김삿갓의 시각으로 포착된 자연은 「설중한매」에서 보듯이 자연의 숭고미가 파괴되어 해학성으로 표출된다.
雪中寒梅(설중한매)- 매화꽃
설중한매주상기(雪中寒梅酒傷妓) 눈 속에 핀 매화는 술에 상해 지친 기생 같고
풍전고류송경승(風前槁柳誦經僧) 바람 앞에 마른 버들가지는 경을 외는 중 같구나.
율화이락방미단(栗花已落狵尾短) 이미 떨어진 밤꽃은 삽살개의 짧은 꼬리 같고
유화초생서이철(榴花初生鼠耳凸) 갓 피어나는 석류꽃은 뾰쪽한 쥐 귀 같네
김삿갓의 파격시에는 파격만을 위한 단순한 파격도 있겠지마는 그의 많은 파격시에는 가가대소의 눈물겨운 해학성이 들어 있고 힘없는 백성의 작은 저항의 민중성까지 획득하고 있어서 김삿갓의 해학시는 더 많은 독자가 참가하여 전파되고 인구에 회자되는 요인이 된다. 그러는 동안 김삿갓 시가 그들의 기호에 맞게 조금씩 변개되어 구전됨으로써 그의 시에서 복수성까지 읽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렇게 종합해 볼 때에 김삿갓 시의 특성으로 검출된 파격성 민중성 해학성 복수성은 다름 아닌 하나의 뿌리 즉 한(恨)을 응어리로 해서 표출된 속성이다.
다)김삿갓 시의 위상
김삿갓이 한국시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당대의 시대적 사회적 특성과 관련하여 좌표가 설정되어야 한다.
18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19세기에 걸쳐서 봉건말기에 속하는 우리나라는 사회적 변동이 다양하게 일어났던 격동기였다. 지배층이
었던 양반계급이 경제적 정치적 실권이 약화되면서 그들의 허구성 이 평민들 앞에 폭로되었고 농업과 공업 등 산업경제면에서 비교적 실권을 비축했던 평민들이 정치, 경제 문화면에서 눈을 뜨는 시기이기도 했다. 시대와 사회의 이와 같은 변화는 문학이나 사상면에서 이미 싹튼 새 기운과의 상보작용에 의해서 더욱 발전해 나갔다. 박지원 정약용 등 실학파 시인들과 조수삼 같은 여항시인들은 고고한 주제보다는 실질을 존중하고 현실적으로 생활과 직결되는 문제들을 택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들을 소중하게 시화(詩化) 함으로써 시대와 사회를 반영하였다.
이런 선배 시인들의 뒤를 이은 김삿갓의 시정신 또한 평민사상에 뿌리를 두고 이를 질과 양 양면으로 더욱 심화 확대해 나간다. 그의 많은 영인시와 영속시 그리고 영물시에서 보이는 인정세태의 반영 해학적인 인물풍자 신변적인 사물의 구체적인 묘사를 통한 미의식의 구현 등이 바로 민중성의 다양한 발로라 하겠다.
그러나 김삿갓의 문학사적인 평가는 내용면에서 보다 형식면에서 보인 그의 파격적인 여러 가지 작업에 더 높은 가치가 부여되어야 한다. 김삿갓의 문학사적인 가치는 다양한 형태의 파격과 거의 혁명적인 표기의 변혁에 두어야 한다.
㉠
主人呼韻太環銅
我不以音以鳥態
濁酒一盆速速來
今番來期尺四蚣
㉡
靑松듬성듬성立
人間여기저기有
所謂엇뚝삣뚝客
平生쓰나다나酒
㉢
사면기둥붉엇타
석양행객시잡타
네절인심고약타
(지옥가기십상타)
70여 편에 달하는 김삿갓의 희작시는 견고한 한시형식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은 김삿갓 한 개인의 역할이 아니다. 김삿갓을 전후한 시기에 일부 희작시가 나돌았던 것으로 보이고 한자를 차용한 우리말의 표기(예시 ㉠의 고딕부분)는 먼 향가시대부터 그 기원을 두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한자차용의 불편함과 불완전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한글 도입이 시문학에서 이루어졌음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귀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 당위적 사실을 시간적으로 앞당겨 촉진시킨 김삿갓의 문학적인 업적을 평가하는데 우리는 인색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이와 같은 김삿갓의 다양한 파격시를 계기로 한문 문화기에서 한글 문화기로 옮아가는 중대한 전기가 마련된 셈이다. 예컨대 예시된 ㉡의 한글혼용시는 곧 개화기에 국한잡조시로 이어지고 ㉢의 7자 제언(齊言) 한글시가 개화기 문단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언문풍월’(주로 7언절구의 형식을 빌어서 순 한글로 표기했던 국문7자시)로 전수되었다. 이 점이 적어도 시조가 그러하듯 한글 표기로 한국시를 짓는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의 단초를 열어 준 셈이다. 그리고 이 점이 바로 김삿갓 시가 한국시사에 획을 긋는 기념비적인 위상(位相)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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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의 과체시(공령시) 연구
필자의 학위논문 『김삿갓 시 연구』(책명을 『김삿갓연구』로 바꾸어 문학아카데미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함. 1989)는 김삿갓의 파격시에서 현대시와의 접맥을 짚어 그 연결고리를 찾자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러기에 연구주제와 상관없는 부분은 후학을 위해 일부 자료만 제시하고 미처 다루지는 못한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김삿갓의 과체시(공령시)다. 김삿갓의 과체시는 당시 과거 공부하는 수험생들이 전범으로 삼을 정도로 뛰어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과체시는 과거시험을 목적으로 한 규범적이고 공식적인 것이
어서 시인의 세계인식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미 주어진 기다란 제목은 시의 내용과 방향을 미리 제시해 놓고 있기 때문에 시인의 자유로운 정서가 개입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김삿갓의 과체시는 이러한 엄격한 규정을 깨고 간혹 현실에 대한 비분강개한 시인의 심정이 들어 있어서 비판적인 그의 현실인식을 추출해 낼 수 있는 좋은 연구 대상이 될 만하다. 하지만 본격적인 과체시 연구는 중국고사 등 상당한 어려움이 별도의 연구를 필요로 한다.
현재 과체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분이 있다. 바로 경기대학 영문학과 신겸수 교수다. 교수직도 내려놓고 필자의 누거인 시골집에도 수차 내방한 적이 있는 그는 김립시집에 수록된 김삿갓의 방대한 과체시에 대하여 다년간 연구에 몰두해서 지금 진행 중인데 불원간 그 결과물이 나올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엔 또 한 번 김삿갓은 새롭게 주목을 받을 것이다. 학계의 기대가 크다.
부연;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논정가산충절사탄금익순죄통우천)
이응수 선생은 이 과체시의 작자에 대하여 조모설(曺某說)과 김립자신의 익명설(匿名說)이 있긴 하다고 얼버무린 바 있다. 하여 세간에서 김립 시로 널리 알려진 상기 긴 제목의 공령시는 노진(盧禛)의 작이다. 어떻게 과거시험에 응시할 정도로 성숙하고 영민한 김병연이 자기 할아버지 김익순을 “一死猶輕萬死宜(일사유경만사의) 한 번 죽음은 오히려 가볍고 만 번 죽어야 마땅하다.”라고 성토할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과거에 응시하자면 사조단자(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를 적어야 하는데 김병연이 응시할 자격이나 있었을까? 문제의 시는 필사본으로 전하는 공령시 모음 『東詩』에 수록되어 있고(해당 시 말미에 확실치는 않지만 흐릿하게 필자의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위에 누군가 김립이라고 덧붙여 놓은 흔적이 있음) 강효석의 『대동기문』(1926)에도 공령시에 능한 노진이란 자가 김립을 관서지방에서 쫓아내려고 이 시를 지어, 김립이 이를 보고 참 잘 지었다하고 찬탄하면서 피를 토하고 관서 땅을 다시는 밟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자료들을 근거로 필자의 학위논문 『김삿갓 시 연구』(pp.42~43)에서 해당 시의 작자가 노진이라고 밝혔다. 보다 앞서 우리 한문학의 대가이신 고 연민 이가원선생도 역저 『한국한문학사』(1966, pp.348~249)에서 이 시의 전문을 적고 이를 노진 작으로 분명히 밝혀놓았다.
작가 이문열은 비록 소설이지만 『시인』(1991년)에서 해당 공령시에 대해서는 설화에 불과하다고 썼으며 죽은 곳이나 무덤에 대해서는 한 줄도 쓰지 않고 있다. 특히 이문열은 5세 때 사건이 일어났고, 20세에 응시를 했는데 그동안 자기 가문에 대해 몰랐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본시를 김립 시로 전하는 까닭은 김병연 김삿갓을 극적 인물로 믿고 싶어 하는 대중적 심리의 영향일 것이다. 사실 필자 역시 그렇게 믿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학문연구는 엄연한 사실에 근거해야 하기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