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톤에 물들다.
장영은
하늘이 시나브로 바다와 몸을 섞는다. 립스틱 붉은 색조가 푸른 도화지 위에 가만히 눕는다. 노을이 소나무 숲에서 수평선까지 가득 번지면서 천천히 파스텔 톤의 담채화가 된다. 한적한 시골 바닷가에 혼자 앉아 하루의 색깔들이 어떻게 서로에게 스며드는지 바라본다.
사진이나 영상매체에서 특별히 한 가지 색깔만을 부각시켜 보이게 하는 것이 모노톤이다. 때론 갈색으로, 혹은 흑백으로, 어떨 땐 보라색으로 연출해 심리적인 효과를 창출하는 기법이다. 색채나 문체의 단조로움이나 악기를 연주할 때의 단조로운 선율을 의미하기도 한다.
마음은 언제나 여러 갈래였다. 요즘 들어 부쩍 그랬다. 다 자란 아이들을 객지로 보내고 남편과 둘이 있으면 부산했던 마음이 안정될 줄 알았다. 하지만 뭔가 불안한 것들이 내 안에 파리를 틀었다. 날마다 반복되는 회사의 업무는 갑자기 지루해졌고 남편과는 사소한 일로 의견 충돌이 잦았다. 여럿이 있을 땐 혼자 있고 싶다가도 혼자 있으면 뭔가 떠들썩한 곳에 섞여들고 싶었다.
중학생 때 아버지가 가져온 달력엔 유럽 여러 나라의 멋진 풍경이 담겨져 있었다. 그중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는 장면은 주황빛 지붕이 가득한 한적한 마을의 사진이었다.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그 색감들은 진한 것과 연한 것들이 적당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곳 지방에서 생산되는 흙으로 구우면 그러한 색이 나온다는 설명이 조그맣게 곁들여졌다.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면 왠지 마음이 차분해져 내 안의 경계가 허물어지곤 했다. 언젠가 여행을 간다면 저곳에 한 번 들르리라 마음먹었다.
노을은 파도를 적시고 갈매기 날개를 물들이다 구름을 채색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저녁의 색채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어느새 모여든 사람들은 서로 팔짱을 끼고 걷거나 사진을 찍는다. 웃음소리가 모래알처럼 백사장에 흩어진다. 밀려오는 파도가 종종거리는 물새 발자국을 지운다. 조금씩 엷어지는 그림자를 옆에 낀 채 사람들은 조금씩 순해지기도 하겠다.
여유가 생기자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성악이며 미술, 시낭송 등 강좌를 욕심내서 신청했다. 퇴근 후 저녁 시간은 요일별로 배우는 종목이 달랐다. 일주일에 한 번 가거나 여러 번 하는 것도 있었다. 매일 동동거리며 여기저기 쫓아다니다 보니 어느 결엔가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결국 얼마 못 가 다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다 걷기 운동도 해보았지만 그것도 종내는 힘이 들었다. 결국 나는 뭔가 제대로 하지 못하고 번잡하게 펼쳐놓기만 하다 포기하고 만 셈이었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영화 <얼라이드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스파이 부부의 이야기다. 불안감은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고 자동차 유리 밖으로 모래 폭풍이 휘몰아친다. 헛되고 헛된 것,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사막의 신기루 같은 삶이었다. 다른 장면은 대부분 잊혔지만 화면을 가득 채운 모래는 오래 내 뇌리에 남았다. 아득하고 뭔가 가슴이 저려오는 그 창백한 알갱이들은 가끔씩 환영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어떤 날은 꿈에서 죽은 친구가 나타났다. 분명 내 앞에 있는데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흰색인 듯 흰색 아닌 듯한 색이 아득하게 펼쳐졌다. Off white라고 해야 할까. 지병으로 서른에 운명을 달리한 그 친구는 자꾸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했다. 안개처럼 자욱한 그것은 입이 되었다가 귀가 되었다 하며 허공을 떠다녔다. 꿈을 꾸다 깨어나면 산다는 것이 허무해졌다.
문태준의 시 <어두워지려는 순간>에는 어두워지는 것은 하늘에 누군가 있어 버무린다는 느낌이라고 했다. '오래오래 전의 시간과 방금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버무린다는 느낌', '사람과 돌과 풀과 흙덩이와 꽃을 한 사발에 넣어 부드럽게 때로 억세게 버무린다는 느낌'. 버무린다는 것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바쁘기만 했던 낮의 소요들을 커다란 그릇에 넣어 어스름과 함께 섞으면 이윽고 날이 저문다.
먼 산에 어느새 시월이 도착했다. 꽃과 신록의 계절을 지난하게 건너온 여정들이 단풍으로 버무려진다. 그것들은 어느 한 지점을 향하는 것 같다. 은행은 노랑으로, 감나무는 주홍으로, 상수리나무는 갈색으로, 각양각색의 나뭇잎들은 퀼트처럼 제 몸을 섞으면서 가을의 무늬를 직조해낸다.
앙리 마티스는 야수파 화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화법은 색채를 단순하게 표현하면서 대상을 잘 드러낸다. 〈초록색 찬장이 있는 정물이나 붉은색 실내>라는 작품을 보면 입체적이지 않고 평면적이면서 화려한 원색이 두드러져 보이게 했다. 뾰족한 모서리들은 둥글게 처리되어 어린아이의 눈으로 보듯 단순화되어 있다.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들으면 신비롭고 몽환적이어서 복잡한 생각들이 다 없어진다. 연주는 플루트로 시작해서 오보에와 클라리넷, 하프 등과 합주로 구성되어 있으나 중간 중간 삽입되는 개개의 독립적인 음은 전체를 단순화시킨 듯한 느낌이 든다. 오후의 창가에 앉으면 시인 말라르메가 생각나고 양 떼를 몰고 피리를 불며 춤을 추는 목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제까지 살면서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던 여러 가지 일이 떠오른다. 타인의 책임으로만 돌렸던 모든 것은 기실 내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남편에 대한 서운함, 친구와의 갈등,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 등. 서로에게 부드럽게 스며드는 저 저녁의 화소들처럼 나도 내 안의 불화들과 이제 화해를 하리라.
어스름이 발목을 적신다. 서늘한 바람에도 오히려 몸은 따뜻해진다. 이제 수평선과 구름과 바다가 하나의 색으로 변해간다. 새와 바위와 사람들도 모두 어스름 속으로 섞인다. 부드럽고 은은한 회색의 모노톤 속으로 멀리 등대가 불을 켠다.
-에세이문학 2020겨울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