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편 1절-6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악인의 꾀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세상은 ‘악인이라. 악이라’ 할 때 보통 보면 인명과 재산에 피해를 입히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말을 한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를 악인이라고 하는가 하니 자기와 다른 사람의 이룰구원을 망치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한다. 이룰구원이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어가는 것. 이것을 성경에서는 구원이라고 한다. ‘지옥에서 천당’ 이런 구원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가는 이것을 성경에서는 이룰구원이라고 한다. 구원이라고 말한다. 나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못 입게 방해를 하는 이것을 성경에서는 악인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성품을 못 입게 하는 수단 방법이 있는 건데 이건 마귀의 수단 방법이다. 사단 마귀가 거짓 종들을 붙잡고, 거짓 교인을 붙잡고 역사를 한다. 한 마디로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인격적 결합으로 살지 않으면 이건 자동적으로 악인이 되는 거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이 길은 적극적으로 나가야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입지 못하게 하는 사단 마귀의 수단 방법이 마찰과 충돌과 대립으로 오는 방법이 있고, 이건 주먹질로, 몽둥이로, 무기로, 힘으로, 노골적인 표현으로 막 온다. 이런 방법이 있는데 이건 누구든지 안다. ‘나를 해롭게 하는구나’ 하고 누구든지 안다. 그런데 악에게 더 쉽게 넘어가는 방법 중에 하나가 호응으로 다가오면 그만 넘어가 버린다. ‘내가 널 도와줄게. 널 사랑한다. 너를 위한다’ 하면서 들어오면 그만 넘어간다. 교회 같으면 ‘복을 받아라. 네가 원하는 게 뭐냐? 부르짖어라’ 이런 식으로 온다. 그러니 누가 그걸 악이라고 보겠느냐?
이런 것을 보는 것이 영의 눈이다. 영의 눈을 가지려면 일반적인 이치보다도 마음의 이치, 정신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 마음과 정신이 돌아가는 것을 이치적으로 모르면 모르는 거다. 그러니 바로 배워야 한다.
그런데 악인이 호응적으로 들어올 때 단순히 ‘아이고, 저 자가 날 꾀인다’ 그렇게만 생각을 하지 말고 상대방의 꾀임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성분이 자기 속에 들어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거기에 붙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 믿는 자기 속에 현재 하나님과, 즉 주님과 이질적인 소원이나 목적이나 취미나 추구성이나 지향성이 들어있다면 사단 마귀가 얼마든지 파고 들어올 수 있는 요소가 된다.
내가 거룩하면, 말하자면 내가 주님을 완벽하게 닮는다면 마귀가 아무리 천사처럼 변장을 하고 사람을 붙잡고 다가와도 절대로 넘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완벽이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모든 면에서 미달되고 꼬부라지고 비뚤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 예수님만이 완벽한 분이시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 그리고 항상 다른 사람을 보고, 자식을 보고, 남편을 보고, 아내를 보고 어쨌든 깨달아야 한다. 내 눈에 다른 사람의 안 좋은 것이 보이면 ‘내 속에는 저런 요소가 없나’ 하며 철두철미하게 자기를 살피고, 살핀 연후에는 깨달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권고를 하고 권면을 하고 깨닫도록 하는 게 참 훌륭한 사람이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그 다음에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 복 있는 사람이라. ‘복이 있다’ 그게 아니라 사람 자체가 복 있는 사람이다. 복된 사람이다. 다른 말로 하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쉽게 알아본다. 복 있는 사람은 영의 눈이 밝다. 영특한 사람이다 그 말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한다.’ 그러니까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을 아는 것이고, 죄인이 어떤 길로 다닌다고 하는 것을 안다 그 말이다.
죄인은 죄를 지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무슨 죄를 지은 사람이냐?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우리가 죄인이 다니는 그 길에 서지 않아야 하겠는데, ‘죄인’이라 할 때 ‘국가법을 어긴 죄인, 사회법을 어긴 죄인’ 이런 걸 생각하기 쉬운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인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과를 따먹어라’ 했는데 생명과는 안 따먹고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어서 그의 후손으로 나온 모든 인간은 다 선악과를 따먹은 죄인이다. 현재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은 다 이 죄인이다. 국가에서 사회에서 감사패를 주고 훌륭하다고 상을 받았어도 다 죄인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나 국가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아, 이 사람은 성자다’ 그래도 예수를 믿어서 영이 중생이 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는 다 죄인이다. 이 선악과 따먹은 죄인은 일반적인 눈을 가지고는 못 본다. 성경이 말하는 걸 우리가 알아듣고 볼 때 이 죄인을 아는 거다. 일반적으로는 이 죄인을 볼 눈도 없고, 아는 지식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세상 사람들은 다 똑같이 선악과 따먹은 사람인데도 자기들끼리 ‘누구는 나쁜 놈이다. 누구는 좋은 사람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쉬운 예를 든다면 도둑들의 세계에서 사람을 두들겨 패고 죽이고 훔쳐오고 하면서 자기들끼리 도와주면 그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국가법적으로는 그도 죄인이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선악과 따먹은 자들의 속에서 남에게 생명과 재산상의 피해를 입힌 죄인이 있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고등적인 죄인이 있고, 그 다음에 일반적인 윤리와 사회적으로 보는 차원의 죄인이 있다.
그러면 이 두 종류의 죄인 중에 어느 죄가 더 크냐? 선악과 따먹은 죄인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따먹은 그 죄를 묻는다. 왜 그러냐? 일반적인 윤리 도덕적인 죄는 그에 앞서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 죄를 짓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거짓말을 하거나 사람을 죽였거나 하는 것보다 선악과 따먹은 그 차원의 죄를 더 크게 보신다.
그런데 세상에서 일반적인 죄를 짓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그런 사람을 세상적으로 잘 되게 두지를 않는 걸 흔히 본다. 그게 표준이 아니라 성경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와서 보여준다 그 말이다.
세 번째는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영적 신앙사상 면에서 보는 죄인이 있는데, 성도가 이룰구원을 이뤄가지 않고 세상을 따라가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 예수님을 믿고 영이 중생된 사람은 중생된 그 영을 성장을 시키고, 믿음의 뿌리를 받고 깨달음에 충만하고 그래야 되겠는데 이걸 하지 않고 여전히 세상으로 따라가면 이건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은 차원에서 놀고 있는 거다. 그 생각 그 소원 목적을 가지고 놀고 있는 이것도 죄인이라.
죄인이 세 가지가 나왔는데 그 차원을 잘 생각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선악과 따먹은 죄인이다. 이건 믿지 않는 세계에서의 죄인이다. 그리고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일반 사회 윤리 도덕적인 죄가 있다. 또 예수 믿는 사람이 소원 목적적으로 세상을 따라가고 있으면 이건 이룰구원 면에서 죄인인데,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러고 있으면서 안 믿는 사람들이 사람을 죽이고 빼앗고 하는 걸 보고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죄인에 대해 구별도 해야 하고, 또한 현재의 자기를 볼 줄도 알아야 한다. 현재 내가 생명과를 따먹고 있느냐, 선악과를 따먹고 있느냐? 지식만 알아서 남만 판단하고 있느냐? 인격적인 면에서 내가 주님과의 관계성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이런 면에서의 죄를 빨리 깨달아서 바로 놓아야 한다. 내가 지금 어느 죄에 속해 있느냐를 빨리 알아야 한다. 이걸 분리를 못하면 예수 믿고도 죄를 짓고 가게 된다. 열심히 예수를 믿으면서도 죄를 짓고 가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 기독자들의 생각은 투철하고 날렵해야 되고 민감해야 한다. 흐리멍텅하면 안 된다.
우리가 성경을 잘 깨달으면 교육도 잘 나온다. 종교계 대학교의 교수들 이상으로 능가할 수 있다. 신학교도 보면 거의가 성경을 일반개념으로 이용을 한다. 이건 성경을 모르는 거다. 그러니까 이런 건 일반사상에서 자기들끼리 ‘학사니 박사니’ 하고 있는 거지 하나님 앞에는 해당이 안 된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우리는 죄인의 길에 서면 안 된다.
‘죄인의 길’이 나왔는데, ‘길’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길이다. ‘길’ 하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길로 많이 다니느냐? 뭐가 급해서 다니는 거냐? 사느라고 다니는 거다.
그러면 길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길만 있느냐? 그 길을 다니는 사람들의 생각이 있는 건데,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다니고 있는 거다. 그러니까 이건 정신면으로 보는 길이다. 사람이 다니는 길이 있고, 또 하나는 정신면으로 보는 길이 있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먹고 마시기 위해서 가는 길이 있고, 이 삶의 길을 가는 사람마다 각자 자기의 소원 목적이 있으니 자기의 그 소원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가는 길이 또 있는 거다.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들은 세상 소원 목적적으로 산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 길을 넓은 길이라고 한다. 이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이 길은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가니까 넓다. 넓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가는 거고. 그런가 하면 ‘나는 한 인생을 살면서 참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되겠다’ 하는 소원 목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숫자적으로 참 드물다. 극히 드물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했다. 그래서 이 길은 좁은 길, 생명 길이다. 복 있는 사람은 생명 길을 찾고 가는 사람이다.
성경을 기준해서, 우리 주님을 기준해서 보면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었어도 깨달은 사람이 많지를 않다. 일반 세상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많이 깨닫는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깨달음은 전혀 없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나이가 좀 어려도, 젊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나간다면 그 길은 좁은 길이다. 생명길이다. 이 사람은 일반사람들이 사는 목적과 같지를 않다.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들의 소원 목적은 전부가 세상으로 되어있는데 이 길은 넓다. 이 세상 길, 넓은 길을 사망 길이라고 한다. ‘죄인의 길에 선다’고 하는 것은 넓은 길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길로 많이 가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길을 옳은 길, 진짜 길로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니까 이 길이 옳은 길인 줄 알고 그 쪽 길로 선택을 해서 간다. 세상 소원 목적으로 간다 그 말이다.
그러면 안 믿는 사람만 그러냐? 세상 속회된 교회는 예수이름을 가지고 세상 넓은 길로 간다. 그러니까 간판과 명칭 호칭 이름만 달랐다 뿐이지 속에 들어있는 정신 사상은 안 믿는 사람들과 같은 넓은 길로 여전히 가고 있는 거다. 그러니 이 사람은 복이 없는 사람이다. 왜? 죄인의 길에 서서 가고 있으니까. 사람 자체가 복이 없다. 사람 자체가 복이 없다는 말은 ‘그렇게 가다가는 하나님의 은혜를 못 받는다.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걸 하나도 못 받고 간다’ 그 말이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넓은 길로, 죄인의 길로 가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부피가 크고, 덩어리가 크고, 껍데기가 크고, 많은 사람들이 가고 하는 등의 눈에 보이는 것이 증거가 되니까 그걸 진짜로 본다. 많은 사람들이 안 가면 가짜로 보이고, 많은 사람들이 가면 진짜로 보인다. 그리고 큰 것은 크고 잘 되니까 진짜로 보이고, 작고 안 되는 것은 가짜로 보인다. 그러니까 이들이 말하는 넓은 길, 사망 길을 생각하는 개념은 교회 밖의 사람들의 생각과 똑같다. 그러니 이건 예수 믿는 이치가 완전히 거꾸로 된 거다.
눈에 안 보이는 것은 정신 사상 면인데,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이 면을 알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귀중히 여기고 나가니 성경으로 볼 때는 이건 이단이고 거짓인데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 길로 많은 사람들이 가니 그것이 진짜로 보이고, 눈에 보이는 것이 안 되는 것은 가짜로 보인다. 몰라서 그렇게 되는 거다. 그러니까 이건 화인을 맞았구나. 마지막 시대의 교인들이 그렇게 된다. 이치고 뭐고 없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넓은 길 사망 길로 가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고 있으니까 이것을 생명 길, 좁은 길로 생각을 하고 예수 잘 믿는 의인의 길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정신 사상적으로 자기들과 같은 길로 가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면이 안 커지면 안 커진 그것을 죄인의 길로 생각을 한다. 그러니 아무리 성경대로 예수를 잘 믿어도 그 사람이 자기들처럼 안 커지면 이건 죄인의 길이고 축복이 없는 저주의 길이라고 생각을 한다. 정신 사상 면의 이치를 못 깨달으니 이렇게 돌아가 버린다.
오늘날 교회들을 겉으로 보면 사람이 멀쩡하다. 그런데 속으로 들어다보면 귀신이 들렸거나 미친 사람이 참 많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정신적으로 미친 거나 신앙 면에서 미친 거나 절대 정확한 하나님이라야 고치는 거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런데 정신병원에서 사람을 고치는 것은 진리로 고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수단 방법으로 약을 쓰면서 고치는 거다.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해서 고쳤다고 해도 이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를 못하는 거다.
기독교 안에서도 기도원 비슷한 데서 정신병자를 고친다고 하면서 정신병자와 같이 예배를 올리는데 이게 진리를 바로 알고 하는 거냐? 그게 아니다. 가만 보면 순 일반이다. 그러니 사람이 어찌 고쳐지겠느냐? 하나님 앞에 고쳐놓는 것이 바로 고치는 거다. 안 그러면 일반적으로 고친다고 해도 가령 어떤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 오면 그 병이 또 나온다.
일반세계에서 말하는 성자들이라도 우리가 성경의 눈으로 그들의 속을 들여다보면 이건 비뚤어져도 한참 비뚤어져 있는 거다. 그걸 고치려면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끄집어 올려야 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올라간 것을 최고로 올라간 것으로 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영적 세계로 보면 이건 지옥하고도 제일 밑바닥에 있는 거다. 세상에서 제일 높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교만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사람이 맨 밑바닥에 떨어진 상태를 모른다.
우리가 이걸 알아야 한다. 본질로 알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알아놓으면 이건 본질과 비슷한 것 같으나 이 비슷한 것이 사람을 죽이는 거다. 아예 비뚤어졌다면 비뚤어진 것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고칠 가능성이 있는 건데 어중간하게 비뚤어진 것은 비뚤어졌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고칠 생각을 한 하게 되니 결과적으로 보면 엄청나게 비뚤어진 거다.
수양버들은 흔들흔들 하니까 태풍에 잘 안 꺾인다. 그런데 꼿꼿한 나무는 어느 정도 바람이 볼 때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탁 부러진다. 그런 것처럼 수양버들처럼 능글능글한 사람은 어떻게 보면 예수를 잘 믿을 것 같으나 아니다. 참 힘들다. ‘교회 나갑시다 하면 ’조금 있다가 시간이 나면 봅시다‘ 한다. 나갈 듯 나갈 듯 하면서 안 나간다. 그런데 ’난 지옥 가도 좋다‘ 하는 사람은 그러다가 탁 부러지면 하나님 앞에 나올 가능성이 많다. 이런 사람은 속에 있는 걸 그대로 드러내는데 능글능글 하는 사람은 사람을 애를 먹인다.
교회 안에서 생명 길 좁은 길, 사망 길 넓은 길을 알고 사망 길의 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들의 입장에도 서지 않는 이게 복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스승목사님 살아계실 때 내 입장에서 보면 스승목사님의 교훈이 참 깊고 정신 사상적으로 산 고기처럼 팔팔 뛰고 솟구치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분은 그 교훈이 좋다고는 하면서 멀리서 말로만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조금 더 가까이 와서 ‘아, 참 좋다’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지식적으로만 보고 같이 다니면서 ‘아, 좋다’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인격적인 결합성을 띤 그 면을 염두에 두고 ‘아, 참 좋다’ 그러는 사람도 있다. 스승목사님께서 살아계실 때 그런 게 보였다. ‘아, 저렇게 가다가 떨어지겠구나.’ 그러니까 좋다고는 하는데 가만 보면 여러 군데 가서 물을 먹고 있다. 잡탱이 물을 먹고 있다.
우리는 그래야 한다. 예수 믿고 ‘아, 이게 본질이다’ 하면 그 길로만 달려가라. 이런 저런 구정물을 먹으면 안 된다. 자기가 정립이 된 상태에서 ‘아, 이건 구정물이다’ 하면 먹을 필요가 없다. 그런 설교 백 날 들어봐야, 그런 거 알아봐야 아무 짝도 쓸모가 없다. 기독교 서적은 일반적 교양적으로 볼 필요도 있겠으나 성경만 깨닫고 그 면으로만 나가려고 해도 죽을 때까지 다 못 하는 것이니 그런 것에 시간을 쓸 필요가 있느냐?
자기가 어느 곳에 속하면 그 치리를 받아야 한다. 이걸 무시하고 아무 데나 들어가면 안 된다. 그럼에도 그런 곳에 들어간다면 왜 그런 곳에 굳이 들어가려고 하는 건지 그 사람의 속이 들여다보이는 거다. 그런 자세로 그들에게 들어간다고 해도 잘 사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사람이 더 이상해진다. 진리에는 주님과 자기뿐이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진리로만 나가면 못 살고 못 먹느냐?
세상에서는 눈으로 보이는 면이 안 커지면 자기들의 세계에서 안 알아준다. 그런 걸 따라가면 사람이 못 써진다. 그런데 이치를 모르면 할 수 없다.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면 할 수 없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이제 죄인이 뭔지 알았느냐? 어떤 게 죄인이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